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3화 (3/257)

3화.

굶어 죽기 딱 좋은 이곳에 아리스가 찾아온 것은 반년 전이었다. 아리스는 마수가 가득한 숲속을 지나 산책을 하러 나온 것 같은 행색으로 마을에 들어왔다. 물론 요령만 좋다면 마수의 숲을 통과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그가 들고 있던 무기라고는 검 한 자루가 전부였다. 아리스는 외형, 이름, 검술 실력을 포함해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다.

애초에 제정신 박힌 멀쩡한 인간이라면 굳이 아무것도 없는 마을까지 기어들어 왔을 리도 없었다. 그 덕에 처음에 아리스는 현상 수배범이 몸을 숨기기 위해 이 마을에 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그게 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아리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의심 가득한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날 뻔한 아리스가 그나마 눌러앉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을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마수들을 전부 잡아 없앤 덕분이었다. 그렇다 해도 자기 식구들과 먹고살기에도 바쁜 주민들이 아리스를 흔쾌히 받아 주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아리스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 없이 버려진 빈집에 자리를 잡더니 신기할 정도로 혼자서 그럭저럭 살았다. 심지어 마수가 있는 숲에 들어가 사냥한 것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까지 했다. 타국인인 것 같아도 마이련의 풍습을 잘 알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아리스는 지금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이 마을에서 지내고 있었다.

반면, 리젤 신녀는 운이 나빴다. 리젤은 숲이 오염되기 전, 서리 교단의 신전을 관리하러 대신전에서 파견 나왔다가 그대로 발이 묶여 버렸다. 지금 당장 대신전에서 마수를 토벌할 만한 인원을 파견하는 것은 무리였다.

대신전 측에 구조를 요청하면 마을 주민들은 무리라 해도 리젤만이라도 마을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관리 받지 못한 신전은 신성력을 잃는다. 마을을 보호하는 신성력이 없으면 마을 안으로 마수가 침범하게 된다. 그 말은 즉, 리젤이 없으면 이 마을은 마수에게 함락되고 만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아리스와 마찬가지로 외지인인 리젤 신녀가 이 마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러니 이곳에 외지에서 무언가가 들어온 것은 반년만이다.

“계속 외부에 구조 요청을 하긴 했지만, 교단 측에서 정식으로 받아들인 것은 처음이에요.”

“여신께서 양심이 있다면 자신을 희생해서 마을의 신성력을 유지하고 있는 신녀를 내팽개치면 안 되겠지요.”

오랜만에 소란스러워진 마을 사람들 목소리에 아리스의 말이 묻혔다.

“그런데 라슈발렌 측에서 온건 정말 뜻밖이에요. 저런 게 온다는 소리는 사전에 듣지 못했거든요. 오늘 알았어요. 사전에 합의된 일이 아니라 하던데 교단 측 사람들과 같은 날 온 것도 신기하네요.”

“그렇네요.”

“그리고 저 여자분 혼자 왔다니,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솔직히 라슈발렌이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다니까요.”

아리스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리젤은 미레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아까 전의 사근사근하던 태도와는 달랐다.

“원래 라슈발렌은 이런 일에 거의 관여 안 하잖아요.”

라슈온 지적 생명체 협회. 통칭, 라슈발렌.

라슈온이라 부르는 이 세계에는 여러 인종, 여러 종족이 한데 뒤섞여 공존하고 있다. 장장 수십 세기에 걸친 여러 차례의 전쟁과 분란을 겪고 라슈온의 여러 종족은 공존의 길을 모색하여 라슈온 지적 생명체 협회를 세웠다. 문화와 생활 습성이 판이한 그들을 결속하고 묶어 서로의 이견을 조율하는 곳이 바로 라슈발렌이다.

서리 교단은 대외적으로는 라슈발렌에 협력하고 있으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사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서리 여신을 모시는 서리교는 철저히 인간 위주의 종교다. 그렇다 보니 경우에 따라선 다른 종족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종족을 포괄하는 라슈발렌과는 기본적인 견해가 다르다 보니 서로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젤의 태도가 이런 것이다. 아리스의 입장에선 양쪽 다 똑같이 싫지만 말이다. 그런 속내를 숨기고 아리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리스는 미레아가 촌장과 이야기를 마치고 자신이 몰고 온 트럭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구경했다. 그녀는 트럭 적재함의 뒷문 잠금 쇠를 풀어 내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뒷문 끝이 땅에 떨어졌고, 미레아는 가장 바깥쪽에 있던 상자를 끌어다 내렸다. 상자 안에는 마이련의 주식인 쌀과 그 밖의 곡식들, 그리고 감자, 옥수수로 채워져 있었다. 미레아는 도와 달라는 말도 없이 남은 짐들을 혼자 척척 내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혼자 왔다더니 정말 혼자 다 할 생각인가?”

아리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들이켰다. 도와줘야 하나 싶었는데 그러기엔 힘든 기색도 없고 무리 없다는 얼굴이라 괜한 참견인가 싶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아까 미레아 역시 자신에게 괜한 참견질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아리스도 미레아의 일에 참견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아리스는 미레아의 트럭에 다가가 적재된 짐들을 살폈다. 적재함의 지붕이 없는 탓에 짐들은 방수 천으로 덮여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도와줄 생각이라면, 저 짐까지만 내리면 돼요.”

미레아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거기 완충재로 싼 상자들 말이에요. 의약품이거든요.”

아리스는 트럭 위로 뛰어올라 완충재로 둘둘 감긴 상자 세 개를 차례대로 내려 주었다. 미레아가 말한 짐들 뒤로 다른 상자들이 보였다. 아리스가 아직 트럭 위에 남아 있는 짐들을 보고 있는데 미레아가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해 주었다.

“저건 제 개인 물품이니까 그냥 두시고요.”

미레아는 아리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촌장에게 가서 물품들을 인수했다는 확인서에 서명을 받았다. 촌장은 미레아의 손을 잡고 연신 위아래로 흔들었다.

“저는 그냥 배달만 했을 뿐인데요. 사실 서리 교단과 비교하자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없고…….”

“그래도 필요한 건 다 있지 않나.”

여전히 어눌한 발음의 마이련어로 열심히 말하는 미레아의 말에 촌장이 고개를 저었다.

“도움을 받는 처지에선 작은 성의도 단비와 같은 법일세.”

그러면서 고맙다는 말을 길게, 아주 길게 풀어서 줄줄 읊기 시작했다. 촌장은 한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여기저기 곁가지로 빠지는 일도 많고 부연 설명도 쓸데없이 많아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다. 다분히 일방적이지만 말이다.

아리스는 촌장의 지루한 말을 듣고 있는 미레아의 표정을 보고 한 가지를 확신했다. 지금 미레아는 촌장이 하는 말의 절반 정도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아리스의 추측대로 미레아는 촌장의 말을 반쯤은 대충 듣고 있었다. 미레아가 마이련어를 어설프게나마 알고는 있지만, 촌장이 쓰는 마이련어는 사투리 억양이 강했다. 솔직히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맙다는 뜻인 건 알겠다. 대충 고개나 끄덕이며 맞장구치고 있었는데 촌장의 질문에 아무렇게나 긍정적인 대답을 했더니 미레아는 촌장의 손에 끌려갔다.

미레아는 뒤늦게 어라 싶었다. 분위기를 보니 해코지를 하려고 데려가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무언가 해 주겠다는 의미라면 그게 뭔지도 모르고 좋다고 따라가기엔 부담스러웠다. 미레아는 자신의 모국어로 촌장의 말을 통역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아리스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청하였다.

정말 대책 없다. 아리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촌장에게 끌려가고 있는 미레아를 뒤따랐다.

“밥이나 먹고 가래요.”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에 미레아는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 혼자요?”

“교단 사람들이랑 같이요. 마을 회관에서 대접하겠다는데요.”

그 말에 미레아는 난처하게 웃었다.

“저 사람들이랑 그렇게 안 친해서 같이 밥 먹을 정도의 사이는 아닌데…….”

리젤과 마찬가지로 미레아 역시 교단과 어울리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아까 전까지는 속생각이 얼굴에 뻔히 보였지만, 이번엔 미레아의 말이 진심인지 농인지 아리스는 헷갈렸다.

“그쪽이 라슈발렌이라고 따돌리나요?”

그 말에 미레아가 아리스를 돌아보더니 갑자기 웃었다.

“라슈발렌과 서리 교단이 서로를 무조건 싫어할 거란 건 편견이에요.”

그러더니 손을 휘적거렸다.

“저는 오히려 반대인걸요.”

“신자였어요?”

“무교인데요.”

미레아는 짧게 침묵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비슷한 이유로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아요.”

아리스는 미레아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레아와 아리스가 촌장의 손에 이끌려 마을 회관 앞까지 오자 이제 막 음식을 하기 시작했는지 회관에 마련된 부엌 문틈 사이로 밥을 짓는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촌장은 인자하게 웃으며 돗자리가 깔린 빈자리에 미레아를 앉혔다. 실내에는 자리가 부족하여 밖에서 대접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는 말에 미레아가 얼른 손을 저었다. 이쯤 하면 통역사는 필요 없을 것 같아 아리스는 적당히 빠졌다. 귀찮아서 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교단 사람들은 저들끼리 뭉쳐 앉았다. 미레아의 말대로 서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리젤은 그들을 챙기고 있었다. 아리스는 냄비 속의 음식들이 익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완성된 음식들을 차례대로 그릇에 덜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소반에 올려 미레아의 앞에 내려놓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왜 그쪽을 챙겨 주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아리스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굳이 자발적으로 한 일에 혼자 짜증을 내었다. 혼자 태평하게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이유도 없이 원망을 들은 미레아는 눈썹을 산 모양으로 만들었다.

“밥 정도는 혼자서 먹을 수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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