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라슈발렌? 라슈발렌에서 보냈어?”
깜짝 놀란 탓에 저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온 아리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걷고 있던 것도 까먹고 우뚝 멈춰 서자 미레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리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아리스의 반응은 신경 쓰지도 않고 방긋 웃으며 과장되게 말했다.
“네, 라슈발렌! 나름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고 모인 사람들인데 위험에 빠진 이웃이 있다면 당연히 달려가야죠! 지금쯤이면 이 마을뿐만이 아니라 이 지역 주변으로는 구호물자가 다 도착했을 거예요. 이 일대는 마수에 대한 피해가 크다 보니 일괄적으로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일단 구호물자만 배급하고 마을 주민 구출은 이번 임무에 포함되지 않아서…….”
미레아가 조금 어색하게 말꼬리를 흐렸지만, 아리스는 아직도 석연치 않다는 얼굴이었다. 이번에는 미레아가 앞장서서 걸었다. 뒤에 누가 있든 앞만 보고 걷던 아리스와는 다르게 미레아는 아리스를 자주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저는 라슈발렌 소속이긴 하지만 오늘 구호물자가 라슈발렌에서만 온 것도 아니에요. 저는 운이 좋게 시기가 맞아 묻어 갔을 뿐이니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깜짝 선물이 두 배란 소리지요.”
“그러니까 설명을…….”
아리스가 부족한 설명에 툴툴거리며 불평불만을 쏟아 내려는데 저 멀리서 마수의 울음소리가 또 들려왔다. 아까보단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빠른 속도로 달렸다.
서로에게 맞추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둘 다 상대방에게 뒤처지지 않고 마을 어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아리스는 조금 가빠져 오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옆에 바싹 붙어서 쫓아왔는데도 힘든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미레아를 조금 놀란 눈으로 봤다.
안전한 곳에 도착하자 아리스가 다 하지 못한 말을 하려고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사제복을 입은 금발의 여자가 아리스와 미레아를 보고 달려 나왔다.
“어서 오세요. 두 분 다 무사하셨군요!”
“리젤 신녀님.”
“마수가 나왔는데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했잖아요. 괜찮아요?”
“보시는 대로요.”
정말로 털끝 하나 다친 곳이 없는지 아리스를 꼼꼼히 살핀 리젤은 그에게서 한발 물러나 서 있던 미레아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을 데리고 돌아와 줘서 감사해요.”
하지만 아리스는 미레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작게 한숨 쉬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었어요.”
“당신의 실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분께 감사 인사는 하세요. 혹시나 하는 게 있었잖아요.”
“감사 인사는 아까 했어요. 그리고 그렇다고 여자 혼자 보내요?”
“당신도 혼자였거든요?”
미레아는 둘의 대화에 끼어들 타이밍을 놓쳐 팔짱이나 끼고 그들을 관조했다.
“사냥은 어느 정도 소득이 있었나요?”
아리스는 빈손을 내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리젤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 그래도 다행히 구호물자가 때맞춰 와서 당분간 한숨 돌릴 것 같아요.”
“그보다 이 사람이 라슈발렌에서 나왔다고 그러던데, 구호물자를 그쪽에서…….”
“덧붙여 말하자면 라슈발렌에서만 온 것이 아니에요. 서리 교단도 같이 보냈거든요.”
미레아의 대답에 아리스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서리 교단과 라슈발렌 협회가 협력이라도 했어요?”
“그냥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가는 길이 겹쳐 중간에 동행했을 뿐이에요. 그쪽 신녀님 덕분이에요. 대신전에 보급과 구조 요청을 하셨죠? 구조는 아직 본격적으로 하기 어렵지만, 식량의 보급 정도라면 지원할 수 있었나 보더라고요. 그 정보를 라슈발렌 쪽에서도 들어서 이 지역을 지원하기로 한 시기를 조금 앞으로 당겼어요. 마수에 대항하려면 인원이 많은 쪽이 좋잖아요. 그래서 제가 왔죠. 거기에 신성력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 제 쪽에서는 감사하죠.”
그래서인지 커다란 트럭이 두 대였다. 미레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였지만 아리스의 의문은 커질 뿐이다. 라슈발렌과 서리 교단에서 각자 구호물자를 보낸 것도 이상한데 우연히 같은 시기에 보낸 것도 이상했다.
자연스럽게 경계심을 품고 낯선 사람들을 관찰하던 아리스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서리 교단 사람들은 교단의 상징인 순환을 뜻하는 원 모양을 딴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다.
그와 반면 미레아의 차림은 평범했다. 군청색의 튼튼한 반코트와 짧은 바지, 그리고 워커를 신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 위에 무릎 보호대를 찬 차림이었다. 외지인 중 그렇게 입은 사람은 미레아뿐이었다.
아리스는 서리 교단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은 사람들 틈바구니를 관찰하고는 미레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다른 라슈발렌 사람들은 어디 있나요?”
“저 혼자예요.”
아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혼자 저 구호품들을 가지고 여기까지 넘어왔어요?”
“굳이 따지자면 교단 분들이 계셨으니 혼자는 아니었지만요.”
“아니, 하지만 라슈발렌 쪽은 그쪽 혼자잖아요. 다른 책임자 없이 혼자 왔어요?”
“사실은 저도 원래 일행이 있었는데, 내부 사정으로 혼자 올 수밖에 없었거든요. 어차피 교단 사람들이 있으니까 크게 문제 될 일도 없었는걸요.”
“혼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랬는데요?”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죠.”
대책 없다……. 미레아의 대답에 아리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서리 교단이랑 라슈발렌이 최근에 사이가 좋나요?”
“아뇨? 전이랑 비교했을 때 특별히 좋아지진 않았는데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서리 교단이랑 움직이면서 동료 하나 없이 혼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태도로 여기까지 왔다고요?”
미레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다 성직자분들인데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 해도 무슨 짓을 하겠어요?”
오히려 미레아는 그러면 안 되냐는 표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무사히 왔잖아요.”
“결과가 좋으면 뭐 해요? 저렇게 마수가 득실거리는 숲을 의지할 동료 없이 통과하다 재수 없었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고요.”
그 질문에도 미레아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마는 거고요.”
정말 대책 없다! 하지만 미레아는 정말로 근심 걱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얼굴이었다. 원래부터 해맑은 성격인지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재잘거리듯 떠들었다.
“그런 거 하나하나 걱정하면 살기 팍팍해져요. 어차피 미리 생각해 봤자 답도 안 나오는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죠. 그리고 어쩔 수 없었단 말이에요. 괜히 따로 움직여서 경비 인력이 두 배로 늘 바에 이쪽으로 빠르게 합류하는 쪽이 더 효율적인걸요.”
틀린 말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은 드물다. 최소한의 계획은 세워 둬야 하는 법 아니던가. 서리 교단이라는 길동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엄연히 소속이 달라 서로에게 개입하는 데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게 아니라 해도 미레아는 다른 동료 없이 홀로 중책을 맡기엔 어려 보였다. 경험이 부족해 보인단 뜻이다. 거기에 이렇게 막무가내라니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미레아에게 이런 일을 떠넘긴 상관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히도 안일하게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허황한 소리로 치부하기엔 아리스는 아까 미레아의 검술을 봤다. 검을 쓰는 것을 보니 범인은 아니다. 보조 도구 없이 그렇게 단칼에 마수를 제압하는 사람은 아리스 자신을 제외하고는 정말 오랜만에 봤다. 마수 무리 한복판에 혼자 떨어져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미레아가 주장한다면 아리스는 그것을 쉽게 부정 못 할 것이다.
그것을 봤을 때 믿을 구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 해도 그게 자기 자신 하나뿐이라는 것은 역시 대책이 없었다.
“그보다 마을 책임자를 만났으면 좋겠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촌장님이라면 저기 계셔요.”
미레아는 리젤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리 교단 사람 중 그쪽 책임자로 보이는 자와 얘기를 하는 노인을 찾고는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리스는 미레아에게 꽂힌 시선을 거두지 않고 무심코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대체 혼자서 어쩌겠다는 건지. 겁이 없는 건지, 목숨이 열 개쯤 되는지, 하여간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리스가 미레아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 있든 말든 리젤은 신이 난 것 같았다.
“어쨌든 덕분에 당분간 마을은 풍요롭겠네요. 이제 곧 겨울이 오는 데다 최근엔 사냥감도 줄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사냥 실력이 형편없어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리스가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 혹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리젤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외지 출신이었다. 붉은 머리에 연록 빛 눈동자를 가진 미레아처럼 말이다.
마을 중앙에 있는 서리 여신의 작은 신전은 이 마을을 지켜 주고 있는 보호 결계를 형성한다. 그곳을 관리하는 것은 리젤이였다. 사실 이 마을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지만 숲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라 외지와 왕래가 그렇게 잦은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숲을 터전 삼아 마을은 제법 번창했다.
그러다 1년 전, 숲이 오염되어 순식간에 마수의 숲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피난할 새도 없이 그대로 마을에 고립되어 버렸다. 말 그대로 오도 가도 못 하는 섬과 같았다. 마을을 나가거나 들어오려면 마수의 숲을 지나야 했다.
그 바람에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대부분을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숲을 터전으로 삼던 마을은 마수에게 숲을 빼앗겼고, 숲이 없는 한 자급자족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을은 점점 더 가난해졌고 식량은 늘 부족하기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