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화 (1/257)

1화.

하늘에서 불꽃이 일었다 생각했다.

아리스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바람에 일렁이는 붉은 불꽃.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람에 나부끼는 여자의 선명한 붉은 머리 때문이었다. 숱이 많은 곱슬머리를 하나로 높이 틀어 묶은 여자는 그것만으로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바람을 타고 나풀나풀 떨어지더니 이번엔 거세게 몰아쳤다. 그리고는 아리스의 뒤를 쫓던 마수의 다리를 검으로 절단했다. 반투명한 형광 녹색 빛의 피가 튀었다. 달려오던 마수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다.

마수가 다시 일어나기도 전에 커다란 두개골 정중앙에 한 쌍의 검이 내리박혔다. 두개골이 쪼개지면서 빛을 내뿜는 핵이 나왔다. 검들의 주인은 검을 지렛대처럼 이용해 뇌척수액으로 범벅이 된 핵을 뽑았다.

핵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주변 땅을 오염시켰지만, 마수는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재와 함께 붉은 머리카락이 일렁이니 정말로 불꽃같았다.

여자는 굴러가는 마수의 핵을 눈으로 좇으며 아리스가 있는 방향으로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바람에 붉은 머리가 가볍게 붕 떴다 가라앉았다. 아리스는 그것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붉은 곱슬머리 사이로 보이는 감람석을 박아 놓은 것 같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쓰고 있는 고글 렌즈 너머로 비친 그 모습에 아리스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쿵 하고 울렸다. 불꽃이라 생각했던 여자의 눈은 뜻밖에도 봄 햇살이 위에서 투영된 싱그러운 초목 같았다. 앳된 얼굴의 예쁘장한 사람이었다. 나이는 자신 또래일까. 많이 잡아 봤자 20대 초반을 넘어 보이진 않았다.

아리스는 훗날 이날을 회상하며 분명히 그 순간 첫눈에 반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이야 저건 뭔가 싶은 생각이 더 컸지만 말이다.

“괜찮아요?”

조금 어눌한 발음의 마이련어로 묻는 여자의 말에 아리스는 뒤늦게 제정신을 차렸다.

“혹시 다친 곳은…….”

언제 멍청한 표정을 지었었냐는 듯 아리스의 경계 가득한 얼굴에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조금 주춤했다. 다리가 세 쌍 달린 늑대 같은 마수에게 쫓기고 있어서 기껏 구해 주었더니 이런 반응이다.

아리스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한 걸음 앞에 떨어진 핵을 검에 검기를 실어 쪼갰다. 유리에 금이 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었다. 그것을 본 여자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검기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어째서 덤벼드는 마수에게서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고 있었던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의 생각대로 아리스는 비록 마수에 쫓기고 있긴 했지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단지 상대하는 쪽보다 도망가는 쪽이 덜 귀찮았을 뿐이다. 아리스는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지 뭡니까.”

그것이 반어법으로 들려 여자는 자신의 쌍검을 갈무리해 허리춤에 찬 검집에 넣었다.

“오다가 마수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쫓아왔는데 다행입니다.”

여자는 아리스가 둘로 쪼갠 마수의 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처하게 웃었다.

“혹시 제가 괜한 짓을 한 건가요?”

검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 마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잡았을 텐데 여자는 괜히 나섰나 싶어졌다.

“아니요. 상대하는 게 귀찮아서 도망가고 있던 것이었는데, 대신 처리해 준 셈이니 저야 감사하죠.”

이 말 역시 반어법으로 들렸다. 여자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리스는 다소 무례할 정도로 상대방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런데 외지인이 이런 곳에는 무슨 일로 들어왔어요? 그보다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어요?”

거의 반년 만에 보는 외지인이었던지라 경계가 서린 말에 여자는 잠시 눈을 굴리다 말했다.

“그게, 저는 마을에 구호물자를 배달하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이동하는 도중에 마수들이 이쪽을 노리고 달라붙은 것 같아요. 마을에 도착한 후 마수 경보가 울렸는데 밖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있단 소리를 들었고, 우리 때문인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말에 아리스는 표정 관리란 것을 할 생각이 없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지금 구호물자라 그랬어요?”

“네.”

“대체 어디 소속이죠? 그런 소식은 들은 적이 전혀 없는데.”

아리스의 물음에 여자가 대답하려는 그 순간, 저 멀리서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동시에 대화를 중단하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바로 근처는 아니었으나 안심할 정도의 거리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전후 사정을 전부 들어 보려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아리스는 몇 안 되는 자신의 짐을 챙겼다. 그리고 여자에게 로아메나 동부 언어로 말을 걸었다.

“근처에 마수는 이 이상 없는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빨리 돌아가죠.”

갑자기 이곳에서 사용하는 마이련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을 거는 아리스를 여자가 토끼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도 아리스가 사용한 언어를 이용해 답했다.

“제가 로아메나 동부 공통어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억양에서 티가 나요.”

“몇 마디 안 했는데 날카로우시네요.”

여자의 놀란 목소리와는 달리 아리스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쪽 사람 특유의 외형이잖아요.”

“보통 그것만으로 그렇게 자세하게 추론하진 않아요.”

“아리스 클라인셔드입니다.”

아리스는 여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자신을 소개하고는 눈에 쓰고 있던 고글을 벗으며 헝클어진 앞머리를 대충 손으로 매만졌다. 제대로 드러난 아리스의 얼굴에 여자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저보고 외지인이라 그랬으면서 그쪽도 이 지역 사람은 아니군요. 이름도 그렇고, 생긴 것도 그렇고, 게다가 성이…… 클라인셔드……?”

“정확하게는 혼혈입니다. 부모님 중 한 분이 마이련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름도 그렇고 생긴 것도 그렇고 겉도는 수밖에 없지요. 뭐, 이 이상은 깊은 사연이 있지만, 알 필요는 없어요. 이 마을 사람 중 사연 없는 사람은 없거든요.”

“아, 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더는 묻지 말라고 못 박는 모습에 여자는 아리스가 원하는 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아리스는 마이련 나라 사람들과는 이름부터 시작해서 생김새마저 달랐다. 이곳 사람들은 주로 검은색이나 암갈색 머리카락에 검거나 밝은 갈색에서 황색 눈동자 색이 많고 하얀 피부를 가졌으며, 두상이 동그란 편이었다. 쌍꺼풀진 눈보다 홑꺼풀이 더 많았으며 코와 입은 작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은 흔히 볼 수 있는 갈색으로 평범했으나 얼굴은 계란형이었고 눈매가 짙었다. 외형적인 특성은 마이련 사람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지만, 분위기만 놓고 본다면 이질적이었다.

양친 중 하나는 마이련 사람이 아니라는 아리스의 설명이 없어도 필시 다른 나라 사람 사이의 혼혈이리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 독특한 분위기가 그의 준수한 외모를 더 돋보이게 했다. 지금은 길게 기른 갈색 머리를 이곳 풍습대로 건성으로 땋아 내렸고 옷차림도 썩 깔끔하지는 않아 부랑자처럼 보이기는 하나 조금 단정하게 꾸미기만 한다면 미남 소리는 충분히 들을 외모였다.

“미레아 제인스터입니다. 아리스테스를 줄여 아리스인가요?”

미레아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먼저 내민 손에 상대방이 응해 주지 않아 홀로 어색해질 각오를 했지만, 다행히도 아리스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맞잡아 주었다.

“아뇨, 그냥 아리스입니다.”

“아, 실례했네요.”

“다들 그 이름의 애칭으로 착각하긴 하죠.”

아리스는 필요한 대답만 던져 주고 바로 몸을 돌려 길을 따라 산길을 내려갔다. 안 쫓아 오냐는 시선으로 미레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뒤늦게 그의 등을 뒤따랐다.

아리스가 차고 있는 소지품들은 마수가 나오는 숲속을 혼자 돌아다니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단출했다. 어깨에는 소총을 메고 허리에는 보조용인지 이곳에서 주로 쓰는 형태의 검을 차고 있었는데 소총이나 검이나 모두 낡고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검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저런 검을 쓰는 것도 이상했다.

“대체 이런 곳에서 혼자 뭘 하고 있었나요?”

미레아의 물음에 아리스는 짧게 대답했다.

“사냥이요.”

“마수 천지인 이 숲에서요?”

“이 지역은 여기 아니면 달리 사냥할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나마도 마수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구역은 여기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미레아는 아리스의 짐에서 사냥한 동물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아리스는 얼른 덧붙였다.

“오늘처럼 공치는 날이 많지만.”

“그러고 보니 혼자인가요?”

“이 마을에 저 말고 사냥하러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 항상 저 혼자예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건 쉽지만 다른 사람까지 챙기는 건 신경 쓸 게 더 많아서 귀찮아요.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혼자인가요? 구호물자를 가져왔다면 혼자 온 것이 아닐 텐데요. 빨리 더 말해 봐요. 지금 마을에 수상한 사람을 들이지 않기 위해 이 숲에 당신의 시체를 버리고 가야 하나 고민 중이니까.”

“거, 말을 되게 막 하시는데요?”

“여기는 마이련 정부도 포기한 곳인데 어디에서 누가 구호물자를 보냅니까. 지난 1년 동안 이 마을 사람 중 몇이 죽었는지 알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 구호물자? 이상하잖아요. 당신, 대체 어디 소속이에요?”

짐승들도 다니지 않는 험한 숲길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아리스를 따라 미레아 역시 숨 하나 차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니 다행이잖아요. 오면서 봤더니 들은 것보다 훨씬 더 이 마을을 둘러싼 신성력 결계가 너무 약하던데. 이 정도면 위험성을 감수하는 한이 있어도 이주를 해야 하지 않나요?”

“어린아이와 노인까지 있는 마을 전체의 인원을 끌고 마수가 가득한 숲을 통과하라고요? 단체로 몰살당하기 딱 입니다.”

“하지만 굶어 죽나 모험을 하다 죽나, 어차피 죽는 건 똑같잖아요. 오늘 온 구호품들로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죠.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조만간 결론을 내리긴 해야 할 거예요.”

“미레아 제인스터. 내가 조금 전에 당신의 소속이 어디냐고 물었고,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걸음을 늦추며 미레아를 돌아본 아리스의 목소리에는 다소 짜증이 묻어 있었다. 잔뜩 경계심 어린 눈빛에 미레아가 양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적의가 없다는 몸짓을 취했다.

“그렇게 궁금하다 하니 제 신원에 대해 말 못 할 건 없죠. 저는 ‘라슈온 지적 생명체 협회’의 전투부 특수 기동대 소속 미레아 제인스터 요원입니다. 다른 수식어는 필요 없고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 주셔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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