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에필로그 (2) – 그래도 행복해
2018.10.28.
“비키라고-오!”
불같은 빛나의 목소리가 차 안을 뒤 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탄으로 은지는 자신의 생명 줄인 안전벨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세상에나, 이게 꿈이냐 생시냐.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다.
가뜩이나 임신으로 예민한 빛나가 양수가 터진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다니.
게다가 이 꽉 막힌 교통 체증이라니.
그리고 은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5층이나 되는 그 계단을 우여곡절 끝에 내려온 후 왜 자신이 운전대를 빛나에게 내어주었는지.
아무래도 난리통인 이 상황에 은지의 넋이 무단가출을 감행했던 탓일 것이다.
그만큼 은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운전 도중 양수는 터졌다.
그리고 곤두설 대로 곤두선 빛나는 곁에 있는 은지의 목숨까지 위협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하려 했으나, 감히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황이다.
여기서 은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뭐라도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있는 것과, 눈앞에 닥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내지르는 비명밖엔 달리 길이 없었다.
“으아-악, 빛나야! 주황 불이잖아! 주황 불! 주황 불은 멈추라는 신호라고!”
“내가 더 으아악이다! 나…… 흡…… 하…… 진통이 오는 것 같아. 그렇게 양심 운전 못 한다고!”
“제발, 빛나야. 여기서 죽기엔 너무 억울하잖아!”
조금 전 떨었던 우아 따윈 집어 던져버린 지 오래다.
명품 구두도 집어 던진 마당에 체면은 무슨.
은지는 살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렸다.
“죽긴 누가 죽어! 안 죽어! 애 낳으러 가야 하는데 죽긴 왜 죽어! 비켜요, 비켜! 여기 산모가 타고 있다구요! 제발!”
빛나가 창문을 내리고 다급하게 외치자 가로막고 있던 차들이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운전을 했고, 은지는 그럴 때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서슴없이 발사했다.
그렇지 않고는 이 급박한 지옥 같은 순간을 견뎌낼 수 없었기에.
“아아-악! 사람 살려!”
덕분에 길을 터주던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에고- 내 그 고통 알지. 어쩌나…… 진통이 장난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그나저나 산모 데리고 가는 저 운전자도 고생이네. 무사히 잘 갔으면 좋겠는데…….”
생각보다 침착한 빛나의 모습이, 예상보다 더한 은지의 비명이, 무슨 오해를 낳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시민들이 도움으로 무사히 막힌 교통 체증을 뚫고 갈 수 있었다.
“흡…… 하…….”
“아파? 많이 아파?”
“음악 좀 틀어봐.”
“뭐라고?”
그 와중에도 음악을 틀라니, 은지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빛나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문 채 이야기했다.
“어떻게든 병원까지는 무사히 가야 할 거 아냐. 흡…… 태교 음악이라도 듣고 컴다운하게 음악 좀 틀…….”
“알았어! 알았어!”
은지가 음악을 틀자 평소 태교를 위해 듣던 클래식의 선율이 차 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신호가 바뀌자마자 그 평온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또 한 번 급출발을 하는 아슬아슬한 사태를 낳고 만다.
“으악!”
졸지에 머리를 부딪친 은지가 소리를 질렀고, 그 후로도 차 안에서 흐르는 부드러운 클래식 선율과는 전혀 다른 최악의 악몽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빛나는 병원에 미리 연락하는 엄청난 정신력을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병원.
이식 수술 후 너무 빠른 임신인 데다, 예정일을 일주일 앞두고 나오는 아이라 주치의는 초비상이었다.
대기 된 의료진이 차가 도착하자마자 달려 나왔다.
차 문을 연 의료진이 문에 가려져 있던 날씬한 배가 나타나자 중얼거렸다.
“어라? 애가…… 벌써 나왔나?”
그러자 곁에서 이를 악문 빛나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기요, 임산부는…… 걔가 아니라…… 저거든요, 흐흡!”
그랬다.
멀리서만으로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으로 곧 오바이트를 할 만큼 창백하게 질린 은지 쪽이 100% 임산부였던 것이다.
“에그머니나! 저쪽이네!”
그제야 의료진은 당혹스러운 듯 다시 은지 쪽에서 우르르 빛나 쪽으로 돌아가 차 문을 열고 헉헉대는 그녀를 부축해 내려서게 했다.
“양수 언제 터진 거예요?”
“20분쯤 전에요.”
“진통은요?”
“그것도 좀 전에요.”
“많이 아프세요?”
“네.”
하지만 빛나는 임산부답지 않게 차분하고 정확한 어조로 일일이 다 대답을 했다.
그래서 의료진은 아직은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통증도 그렇게 클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는 바로 병원 입구에 승현이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헐레벌떡 달려와 때마침 부축을 받아 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는 빛나를 보면서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빛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낀 모양이다.
그를 본 순간, 하늘을 찌를 듯한 통증이 왜 이렇게 서럽게 느껴지는지.
“빛나야, 우리 빛나…… 선생님 우리 빛나 괜찮은…… 으아악!”
결국 그녀는 그를 눈앞에서 봤다는 안도감과 함께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자신의 멘탈을 해방시키며 대신 승현의 머리채를 부여잡았다.
“으아악! 빛나야! 아파! 아프다고!”
물오른 모성애로 여기까지는 어떻게 어떻게 운전을 하고 왔으나 승현을 보는 순간 고통으로 인한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빛나는 엄청난 정신력으로 가까스로 틀어막았던 비명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꺄아악! 이 자식아, 책임져! 너 닮아 성질 급한 딸내미…… 책임지라고-옷!”
그랬다.
부드러운 선율의 클래식 태교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부모를 닮아 그깟 예정일 따윈 양심 없이 튕겨내고 말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그야말로 너무도 건강한 ‘아들 같은 딸’이었더랬다.
***
1년 후.
“우리 준희, 한 번만 더 먹자. 자, 아…….”
고집스럽게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아이에게 수저를 내밀며 승현이 대신 입을 벌렸다.
그러면 똥고집으로 똘똘 뭉친 딸이 그를 보고 입을 열까 해서.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입을 꼭 다문 채 딴청이다.
원, 애 밥 먹이기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는 답답함에 아이 앞으로 의자를 더 바짝 끌어당겨 앉아 고개를 내밀었다.
까꿍, 우쭈주하는 온갖 애교를 다 떨어서라도 오늘은 이 남은 이유식을 다 먹이고 말리!
특별한 사명감 아래 단단히 각오를 한 승현이 아이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며 씨익 웃으려던 찰나였다.
천사처럼 웃던 아이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낚아채었다.
“아-아악! 준희야, 놔! 이거 놓으라고!”
젠장, 또 걸렸다.
요즘 들어 눈앞에 보이는 건 죄다 쥐어뜯고 보는 호기심 많은 한 살이라 준희는 이번에도 역시 가장 좋아하는 승현의 숱 많은 곱슬머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고작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이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준희는 또래에 비해 무척이나 건강한 아이였고, 예쁘장하고 천사 같은 외모에 비해 성질은 승현 × 빛나였으니.
“빠!”
“그래. 아빠야, 아빠! 이거 놓고 이야기하자, 딸! 밥 먹으란 이야기 안 할게. 응?”
“빠!”
“그래! 아빠라고! 아빠…….”
하지만 말이 통해야 무슨 대화라도 시도할 게 아닌가.
태어날 때 제 엄마가 그의 머리를 이렇게 쥐어뜯더니, 이젠 애가 나와서 그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래도 어쩌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제 딸인 것을.
“아휴, 우리 준희 예뻐라. 그래. 아빠 머리 놓고 요거 가지고 놀자. 응? 이거.”
승현은 아이의 눈앞에 장난감을 흔들어 보이며 유혹을 했으나, 아이는 제 엄마의 근성을 닮아 그 심지가 굳건했다.
한마디로 장난감 따위엔 곁눈질도 하지 않는단 이야기다.
“준희가 그거 뗀 지가 언젠데, 아빠는…….”
그때 두 사람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준수가 다가왔다.
그러곤 꽉 움켜쥐고 있는 준희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 승현을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부터 무사히 구해준다.
“아, 진짜. 애가 가면 갈수록 삼손이야.”
“귀한 남의 손녀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위태준이 입조심하라는 듯 눈을 흘겼다.
저 멀리 거실에 앉아 있는데도 손녀딸 욕은 귀신처럼 듣는 양반이었다.
승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준수에게 준희 밥 먹이는 것을 넘기고는 천천히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때, 벨소리가 들려온다.
물론 성질 급하게 벨 소리 한번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새로운 벨소리가.
덕분에 벨을 누르는 이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 운동 가신다더니 벌써 오셨어요?”
아주머니가 모니터에 뜬 빛나의 얼굴을 보며 놀라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운동 간다고 나간 지 채 20분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아줌마. 문 좀 열어주세요.]
그 말에 승현은 흠칫하는가 싶더니 주변을 둘레둘레 둘러보며 갈팡질팡했다.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아줌마! 잠깐만요, 잠깐만요! 아직 문 열면 안 돼요! 아직…….”
“에구머니나, 벌써 열어버렸는데…….”
아주머니의 말에 그의 얼굴은 더 다급해졌다.
그러더니 결국 몸을 날려 급한 김에 2층으로 도망 아닌 도망을 갔다.
잠시 후, 빛나가 들어왔다.
하지만 모자를 쓴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신발을 홀딱 벗는 폼으로 보건대, 그 빨간 얼굴이 운동으로 인해 달아오른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빛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위태준을 보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아버님, 예상치 않게 좀 일찍 왔습니다.”
그러곤 재빨리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눈빛을 보내자 아주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조용히 2층 계단을 가리켰다.
“아버님, 제가 지금 당장은 저이랑 볼일이 있어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빛나 또한 번개처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작은 투닥거림과 함께 승현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위태준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쯧쯔. 나이가 몇 살인데 또 장난질인고. 도대체 언제나 철 들려나.”
이젠 포기다.
결혼한 지 어언 2년이 다 되어가는데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매일 싸우고 지지고 볶고.
물론 원인 제공은 모두 승현이다.
그가 가는 곳은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으니, 위태준은 기회가 되었을 때 그들을 내쫓았어야 했다고 때늦은 후회를 했다.
준수는 준희에게 밥을 먹이다 말고 위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안 말려도 될까요?”
“냅둬라. 저러다가도 30분 후면 둘이 또 어깨동무하고 내려올 테니.”
그렇게 승현, 빛나와 함께한 2년의 내공은 천하의 위태준도 무디게 만들었다.
***
“이게 뭐야! 이게! 이걸 입고 어떻게 운동을 해! 어떻게!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 줄 알아?”
“그러니까, 내 말이! 그 코딱지만 한 옷을 입고 왜 운동을 하냐고! 애가 둘씩이나 되는 애 엄마가!”
“그렇다고 옷을 이렇게 만들어놓냐? 도대체 이번엔 뭘 한 거야? 어떻게 하면 옷이 이렇게 돼?”
혈압이 오를 대로 올라 벌겋게 상기된 빛나는 승현의 코앞에 스포츠 브라를 흔들어 보이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한풀 죽은 승현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지나 궁금해서…… 내가 입어봤지.”
“이…… 이…….”
망할 자식!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여자 스포츠 브라를 도대체 왜 입어본단 말인가!
게다가 저 떡 벌어진 어깨에 이 쥐똥만 한 스포츠 브라를 끼워 넣었으니 그것이 빛나에게 맞을 리가 있겠나.
헬스장 탈의실에서 입어보고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와 따지고 드는 그녀에게 천연덕스럽게 웃는 꼴이라니.
빛나는 혈압으로 뒤통수가 뚫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으이그, 이 웬수! 네가 변태냐? 변태야? 이걸 입어보게? 변태냐고!”
퍽퍽퍽!
“아프다고! 아파! 그만 때려! 너 나 때리는 걸로 치면, 운동 안 해도 살 안 찌겠다!”
“그래! 고맙다! 헬스장 대신 운동 시켜줘서!”
“그러니까 왜 그런 걸 입고 운동을 하냐고! 헐렁하고 박시한 티셔츠 입으라고 넣어줬더니, 네가 리폼했잖아!”
“당연하지! 운동은 말이야, 내가 어떤 근육을 쓰는지 보면서 해야 하는 거야! 근데 네가 몰래 바꿔치기해놓은 그 티셔츠는 거의 원피스 수준이었다고!”
“그렇다고 티셔츠를 소매, 목, 할 것 없이 죄다 날려 먹냐?”
“그럼 운동하지 말까? 나도 진짜 애 둘 딸린 아줌마처럼 제대로 한번 퍼져봐?”
그 말에 승현의 목소리가 금세 작아졌다.
“아니.”
아오, 이거 쥐어박을 수도 없고.
빛나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멀찌감치 떨어져 방금 전 육탄전으로 인해 제멋대로 머리가 헝클어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딴청을 피우는 그 모습에 왜 이렇게 웃음이 터지려 하는지.
젠장, 웃으면 지는 건데.
결국 그녀는 웃음이 터져 자신의 화가 물거품이 되기 전에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나가.”
“나? 어디로?”
“몰라 물어? 정원 돌계단에서 너랑 동갑내기 나무 보면서 반성의 시간을 좀 갖도록!”
“얼마나?”
“30분.”
“길어. 나 못 참아. 나무랑은 대화를 할 수 없잖아.”
“그게 포인트야. 30분 동안 침묵의 시간. 실시.”
어쩔 수 없이 승현은 그 자리를 축 처진 어깨로 벗어났다.
그리고 그가 벗어난 자리에서 빛나는 한참을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웃음을 참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늘어진 브라를 보니 그것을 입고 있었을 승현이 생각나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상상만 해도 웃긴 그의 모습.
결국 빛나는 제 웃음이 세어나가지 않도록 늘어진 브라로 입을 틀어막으며 쭈그린 채 미친년처럼 어깨만 들썩여야 했다.
그것도 한참이나.
***
“아, 젠장. 30분 동안 너랑 어떻게 있냐. 지루하게.”
승현은 돌계단에 앉아 애꿎은 잔디를 긁어내며 신경질을 부렸다.
머리는 여전히 헝클어져 있었으나 두 눈만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어쨌든, 이번엔 빛나가 그 브라만 입고 운동을 하진 못했으니까.
충분히 가치가 있었던 거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누군가 나와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아들 준수였다.
얼마 전 펌을 한 아이의 머리가 한껏 하늘로 승천하는 것으로 보아 준희가 제 아빠에 이어 오빠도 한바탕 쥐어뜯은 모양이다.
“아들, 그러게 준희한테는 틈을 보이면 안 된다니까.”
“수저가 떨어져서 줍다가…… 머리를 보였어.”
“준희 걔가 니 엄마 닮아서 완전 매의 눈이야. 그 눈이 그냥 큰 게 아니라 다 제 구실을 하는 눈이라고.”
“준희가 나를 아빠로 착각하는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나…… 파마 풀까?”
진지하게 말하는 준수에게 승현은 더욱 진중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아들. 이 머리는 우리 트레이드마크야.”
그렇게 말하며 준수와 함께 눈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닮았는지 누가 봐도 부자지간이다.
그때, 누군가 대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곤 얼마나 바쁜지 그들을 못 본 척 쌩 스쳐 지나가려 한다.
투명인간 취급은 용서할 수 없던 승현이 그 배은망덕한 그림자를 불러 세웠다.
“왜 또 왔어! 어제도 오고, 그저께도 왔었잖아! 여긴 너네 집이 아니라고!”
“응. 준희 보러. 태교하려고. 자꾸 보면 나도 딸 나을지 모르잖아.”
우빈이었다.
둘째 예성마저도 그림자 때문에 잘못된 성별 판독으로 아들이 되어버린 지금, 승희는 세 번째 임신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또 아들이란다.
아무래도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아 승현이 상기시켜 주었다.
“아들이라며!”
“예성이도 딸이랬는데 아들 나왔잖아. 이번에도 틀릴 수 있어. 아들이라고 했는데 딸일 수 있다고. 이왕이면 예쁜 딸 낳고 싶어, 준희처럼.”
꿈도 크셔라.
“임신을 한 건 승희인데 왜 네가 태교를 하는데?”
헛된 꿈을 꾸는 우빈에게 현실을 직시시켜주고 싶었지만 셋째도 아들일지 모르는 지금, 우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한 긍정 마인드, 김우빈.
그는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 딸일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을 모양이다.
그렇게 우빈은 승현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준희를 보기 위해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승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중얼거린다.
“우리 승희가 사람 하나 바보 만들었어. 쯧쯔.”
“근데 난 이해해. 우리 준희가 좀 이쁘잖아.”
“야, 넌 머리 그렇게 쥐어뜯기고도 준희가 예쁘냐?”
“응. 할아버지가 그러시던데? 여동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오빠가 참아야 한다고. 아빠도 고모한테 많이 당했다고.”
“뭐?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어?”
순간 버럭하다가 과거를 떠올리며 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것도 같네.”
그렇게 턱을 괴고 앉아 있는데, 곁에서 준수가 물어왔다.
“아빠, 아빠는 왜 맨날 그렇게 매를 벌어? 그러니까 엄마한테 맨날 맞지.”
“누가 그래? 매를 번다고?”
“할아버지가.”
“젠장, 세상에 내 편은 없구만? 온 사방이 다 적이야.”
승현이 볼멘소리로 툴툴댔으나 준수의 다음 질문에 그는 웃고 말았다.
“엄마한테 그렇게 맞으면서도…… 아빤, 행복해?”
***
“아버님, 그래서 말이죠. 세상에 저이가 제 옷을 입어서 완전 트리플 엑스 사이즈로 늘려놨지 뭐에요?”
어느새 차분해진 빛나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갑작스레 등장한 우빈에게 준희를 맡기고 승현의 만행을 위태준에게 고자질 중이다.
운동 갔다가 황당해 돌아온 며느리의 사정을 들으며 위태준은 웃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혈압이 왔다 갔다 하는 남자와 살면서 저 정도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한 여자라니, 유빛나가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신의 경지다.
“다음엔 내가 준희 봐줄 테니 운동 같이 다녀라.”
“어머, 아니에요! 아버님! 저이랑 같이 가면 운동 못 해요. 하루 종일 저만 쫓아다닌다구요. 따로 가야 해요. 애 핑계로라도 따로 다닐 테니 아버님은 행여나 준희 봐준단 이야기 하지 마세요. 그 순간 부로 저이는 제 껌딱지가 될 테니.”
승현을 너무 잘 아는 빛나가 딱 잘라 말하자 위태준은 또다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때론 너무 싸워서 원수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이럴 때 보면 천생연분이 틀림없다.
“그렇게 맨날 싸우면 지겹지 않냐?”
“전혀요! 또, 저이가 인물 하나는…… 아시잖아요, 봐도 봐도 안 지겨운 거.”
빛나는 거실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승현과 준수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한 듯 웃음을 보였다.
1분 전까지만 해도 씩씩대며 분노하더니, 아무리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그게 이리도 짧게 갈 줄이야.
그래서 물었다.
“아가, 그래서…… 행복하니?”
그 물음에 빛나는 흠칫 놀라 위태준을 돌아보았다.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라 놀란 듯싶었지만 이내 빛나의 눈동자엔 터질 듯 반짝이는 웃음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위태준이 그 질문을 던진 순간, 밖에서도 준수가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머, 아버님…… 당연히…….”
“아들,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때문에 그들의 입에선 거의 동시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행복해요.”
“행복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