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에필로그 (1) – 결혼, 그 이후
2018.10.24.
“아니, 도대체 애 엄마는 언제 오는 거예요! 남의 귀한 아들 얼굴 이렇게 만들어놓고 너무하는 거 아냐?”
“상훈이 어머님, 일단 진정하고 앉아 계시면 오실 거예요. 지금 오시는 중이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구요! 아니, 나보다 더 바빠?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이길래? 아시죠, 선생님도! 나 여기 학부모회장이에요! 그리고 우리 상훈이 아빠도 요 앞 사거리에서 병원 하는 거! 어디 그뿐이에요? 오늘 우리 아파트 단지 부녀회의 있단 말이에요. 학부모회장에 부녀회장에 애 아빠 뒷바라지하랴…… 나도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사람이라구욧!”
몇 번이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여자의 언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치맛바람 세기로 소문난 초등학교인지라 학부모회장까지 겸임하고 있는 여자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그 때문인지 이젠 눈앞에 있는 제 자식 선생도 발 아래로 보이는 모양이다.
강 선생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입을 꼭 다물었다.
그래, 너 오늘 한번 제대로 당해봐라.
“내가 오늘 기어이 사과를 듣고 말 거야. 애가 안 하면 그 부모라도 무릎을 꿇려야지, 안 그래?”
여자는 말없이 앉아 있는 사내아이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아이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그 불굴의 의지에 박수를 안 보내줄 수 가 없을 정도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강 선생은 사내아이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줄 아는 엄마들이 화가 나면 어떻게 변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다.
“도대체 얼마나 후회하시려고…….”
강 선생이 중얼거리자 여자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 붉은 입술을 열어 또 한 번 독을 품은 말을 줄줄이 쏟아내기 시작한다.
“후회? 아니 내가 왜 후회해요?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자식 교육 저렇게 시킨 막돼먹은 부모가 누군지 내 이 두 눈으로 꼭…….”
“아,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좀 늦었습니다.”
“봐…… 야…….”
“아빠!”
“내 새끼! 아침에 그렇게 보고 또 보고 싶어서 이젠 학교로까지 아빠를 불렀어?”
하지만 그녀는 제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활화산 같은 분노에도 끄떡없던 아이가 일어나 제 아빠 품에 안겨 부비부비하는 모습을 넋 놓고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봤다는데, 백만 년 만에 상봉한 부자처럼 어찌나 애틋한지.
아이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아홉 살이나 먹은 사내아이를 번쩍 안아 올린 남자는 그 등을 다정하게 토닥여주며 여자에게로 돌아서고 있었다.
면담실의 창가 햇빛을 등진 채 돌아선 남자는 작은 여자가 고개를 꺾어 올라봐야 할 정도로 키가 크고 훤칠했다.
게다가 그녀는 태어나 TV에서 보는 연예인 빼고 이런 비주얼을 눈앞에서 보긴 처음이다.
그렇게 남자는 아이를 한 손으로 받친 채 나머지 한 손을 내밀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치도록 아이와 꼭 닮은 그 눈으로.
“안녕하세요, 준수 아빠 위승현입니다.”
그제야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여자의 눈이 커졌다.
작년 초, TV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인물을 어찌 잊겠는가.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젠장, 똥 밟았구나…….
“아이들끼리 치고받고 싸웠다면서요?”
“살짝 다퉜습니다. 뭐, 사내아이들이 다 그렇듯…….”
강 선생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 순간 여자는 묘한 자존심이 기를 쓰고 들고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감히…… 감히…….
“살짝 다투다뇨! 우리 상훈이 입술이 저렇게 터졌는데.”
멀쩡한 준수에 비해 입술이 터진 제 아들을 바라보며 여자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아들이 맞았다는 사실에 이렇게 당당해보긴 또 처음이다.
그러나 천하의 위승현을 상대론 어림없는 순간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 아들 때문에 터진 입술이니 잘잘못을 떠나 피해는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크아!
강 선생의 입이 기분 좋게 쩍 벌어졌다.
저 마녀의 넋 나간 얼굴은 교사 인생 3년 만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고소한지, 싸지도 않았는데 사흘 동안 앓았던 변비가 해결되는 느낌이다.
“피해보상은 필요 없어요. 우리가 못사는 사람들도 아니고. 그쪽 애가 먼저 주먹질을 했다고…… 들었어요. 아이가 사과만 하면 없던 일로 넘어가겠습니다. 배운 만큼 교양 있으신 분들이니 아들한테 주먹질하라고 가르치진 않았을 거고, 우발적인 사고로…….”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웃고 있던 승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그 웃음을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마녀 사냥은 이제부터가 진짜였으니.
“제가 가르쳤습니다.”
“네?”
“제가 주먹질하라고 가르쳤어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그의 목소리에 여자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뭐…… 라구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실 수가 있으…….”
“단, 정말 주먹질을 해야 할 경우엔 꼭 그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순간, 승현의 눈을 바라보는 여자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여자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준수의 등을 다독였다.
그러곤 살벌한 표정과는 반대로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준수에게 더 없이 다정하게 물었다.
“아들, 친구 왜 때렸어?”
하지만 아이는 말이 없었다.
승현이 다시 한 번 등을 다독이며 위로 한 다음에야 준수의 입은 겨우 열렸다.
“괜찮아. 말해도. 그런 건 고자질 아니야.”
“쟤가…… 나 입양아라고 놀렸어. 동생 태어나면…… 나…… 다시 버려질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승현은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여자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아우라를 피하기 위해 두서너 발자국 물러서야 했다.
“정녕 아이들끼리 사과를 해야 한다면, 그쪽 아이가 제 아이에게 해야겠습니다.”
“저는…….”
여자는 입술을 꼭 깨물어야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승현은 준수를 내려놓고 여자를 마주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아이들이라지만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저도 준수를 키우니 압니다. 이만한 나이의 아이들은, 부모가 거울이라는 것을. 보면 본대로 흡수하는 대형 스펀지처럼.”
“결단코 저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겠지요. 하지만 아이를 보면 부모의 평소 언행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런 면에서 좀 조심하셔야겠습니다.”
“무슨…… 지금 저희가 교양 없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뇨.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찔리시나 봅니다?”
“찔리다뇨! 저희도 배울 만큼 배우고 있을 만큼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여기 2년 연속 학부모 회장이구요, 애 아빠는 요 앞 사거리 병원 원장이에요!”
“아…… 그 병원.”
승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여자의 어깨가 펴졌다.
하지만 뉘앙스와 달리 그의 다음 말에 그녀의 자존심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 코딱지만 한 소아과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뭐라구요? 코…… 코딱지만 한?”
맙소사. 지금 잘못 들은 것일까!
네 코딱지는 그렇게 크냐! 라고 외쳐주고 싶었지만 말이 목이 콱 걸린 듯 쉽사리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승현은 왜 이리 말을 잘하는지.
“참, 그 학부모회장 임기…… 언제까지입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애 엄마가 반장, 회장, 이런 거 엄청 좋아해서요. 어렸을 때부터 워낙 똑똑하고 예뻤던 사람이라 인기투표까지 1등 안 하면 앓아눕는 스타일이라.”
“네…… 에?”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승현은 친절히 말을 풀어주는 호의까지 베풀었다.
“경고하는 겁니다. 애 엄마 건드리지 말라고. 성질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
“게다가 요즘 임신 때문에 모성애가 한껏 물올라, 제 아들 이런 수모 당했다는 거 알면 어디까지 갈지 모릅니다.”
순간 여자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TV에서 간혹 나오는 빛나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녀에 대한 어마어마한 소문들도.
“저기 그게…….”
“애 엄마한테 이번 일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애들끼리는 따로 사과가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리켰다.
여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자 언제 싸웠냐는 듯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강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가끔은 저희들이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 점도 많은 것 같습니다.”
“…….”
“아이들 아닙니까. 우리…… 아이들…….”
그 마지막 말에 여자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준수야, 집에 가자.”
“아빠, 상훈이도 우리 할아버지랑 같이 낚시 가고 싶대. 토요일 날 같이 가도 돼?”
“그래. 상훈이 어머님만 오케이 한다면?”
준수의 머리를 매만지며 승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훈이 다가와 그녀에게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빛내며 물었다.
“엄마, 나도 가고 싶어, 낚시. 아빤 맨날 바쁘잖아. 엄마도 그렇고…….”
그 물음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승현은 준수를 어깨에 들쳐 매고 면담실을 빠져나갔다.
텅 빈 복도를 타고 아이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핫. 아빠, 근데 동생은 언제 나와?”
“일주일 후에?”
“여자야, 남자야?”
“의사 선생님 말로는 여자아이래.”
“음, 근데 저번에 고모네 예성이도 여자아이랬는데 고추 달고 나왔잖아.”
“아들, 넌 여동생이었으면 좋겠어. 남동생이었으면 좋겠어?”
“여동생. 남동생보다는 여동생이 이쁘더라고. 아빠는?”
“음. 나는 상관없는데 우리 아들은 여기 있으니 딸 하나 더 있음 좋겠다 싶지.”
멀어지는 그 목소리에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강 선생이 상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참, 그 아부지에…… 그 아들 아닙니까?”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창피해지는 순간이었다.
***
“가면 라면만 먹을걸?”.
“아닌데. 할아버지가 매운탕 끓여준댔는데.”
“라면탕이겠지.”
“엄마가 라면 먹지 말랬는데.”
준수는 제 턱을 받치며 고심하는 듯 중얼거렸다.
만약 정말 그의 말대로 고기를 못 잡아 할아버지가 매운탕 대신 라면을 끓여주면 그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인 것이다.
그 모습에 승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때 보면 애늙은이 준수도 아직은 어쩔 수 없는 아이인 모양이다.
“근데, 준수야. 오늘 일은 엄마한테 비밀로 하자.”
“왜? 나 혼날까 봐?”
“아니. 그 아줌마 혼날까 봐.”
“아…….”
아이는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울려왔다.
잠시 신호대기 상태에서 핸드폰에 뜬 이름을 본 그는 준수에게 싱긋 웃어보이고는 전화를 받았다.
“응, 빛나야.”
하지만 저쪽에서는 거의 숨넘어갈 듯 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그를 불러댔다.
[여보야-악!]
흠칫 놀란 승현이 준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왜? 무슨 일이야?”
[엄마야! 나 양수 터졌나 봐!]
“뭐…… 뭐라고?”
승현이 운전석에서 튕겨 오를 듯 놀라 되묻자 빛나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차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니 딸내미 지금 나온다고!]
“하지만 예정일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잖아!”
[근데 양수 터졌어. 나 지금 병원 가는 길이야. 빨리 와. 무섭단 말이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저 빛나가 주는 쇼크의 워밍업에 불과했으니.
가뜩이나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혈압 터질 듯 날카롭게 쏘아대는 그녀의 다음 말에 벌렁거리던 승현의 심장은 너덜너덜 넝마가 되고 말았다.
[아…… 젠장! 야! 비켜! 어디서 깜빡이도 안 넣고 새치기야! 나 지금 애 낳으려 병원 가야 한단 말이야! 비키라고-오!]
세상에나, 곧 애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심지어 그녀는 운전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하얀 햇살이 아직 블라인드조차 달지 못한 창을 통해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개시도 못 한 책상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던 빛나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을 보며 빙그레 웃는다.
이제 곧 출산일이라 몸이 꽤 무거웠지만 사무실 정리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하고 싶었다.
“갈 길은 구만리인데, 기분은 왜 이렇게 좋은 거야.”
그랬다.
그녀는 변두리에 작은 사무실 하나를 얻어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 준비 중이었다.
위태준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인권변호사로서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길을 걸어왔던 위태준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험난한 길이 될 것이다.
위험한 일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빛나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승현이 만들어준 세상에서 그녀가 온전한 주인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그때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그 메시지를 확인한 빛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위태준은 승현보다 그녀에게 더 많은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 중 하나였다.
뭐, 메시지는 딸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오나가나 그녀 걱정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오늘도 예외는 없었다.
[아가, 저녁에 바람이 많이 분단다. 운전하지 말고 저녁에 김 기사 보낼 테니 편안하게 오렴.]
“아버님도 참…….”
바람이 많이 부는 것과 운전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태준은 늘 이렇게 조바심을 냈다.
행여나 그 부는 바람에 빛나가 날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그 과한 걱정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사이비라 생각했던 그 점쟁이가 했던 말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꼭 낳아야지 부모인가? 낳아놓고 나 몰라라 버린 부모는 부모가 아니라 짐승인 거야. 부모란 말이야, 네가 어머니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음 그게 바로 부모인 거라고.
그렇게 하늘은 부모 없어 서러웠던 그녀의 지난 30여 년을 한꺼번에 보상하려는 듯,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울타리를 지어주었다.
위태준, 아버지라는 그 이름.
요즘 들어 승현보다 더욱더 감동으로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아니, 건물이 6층짜린데 왜 엘리베이터가 없어? 이게 말이 돼?”
위태준의 문자를 보며 답을 하려는데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빛나는 멈칫했다.
곧이어, 열린 사무실 문으로 뜻밖에도 은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나 지금이나 새초롬하고 예쁜 그 모습 그대로.
“어머, 어쩐 일이야? 사무실은 아직 오픈도 안 했는데.”
놀란 빛나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은지는 눈썹을 구기며 이야기한다.
“그냥 앉아 있어. 내가 무슨 대단한 손님이라고 그 무거운 몸으로 일어나서까지 맞이해?”
“그래도. 근데 어쩌지? 여기 아직 오픈 전이라 아무것도 없어. 심지어 마실 것도.”
“나 방금 커피 두 잔 마시고 왔어. 그나저나, 여기가 5층인데 너 그 무거운 몸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하니? 이거 건물주한테 항의해야 하는 거 아냐? 왜 엘리베이터가 없어?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은지는 불만을 터트리며 자신의 명품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겨우 5층인데 뭐. 사무실 개업할 때 즈음엔 나도 몸이 가벼워져 있을 테고.”
“근데, 여긴 세가 얼마야? 변두리라 후져서 쓰러질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깔끔한데?”
사무실을 꼼꼼하게 둘려보며 은지가 말했다.
“그치? 나쁘지 않지?”
빛나도 제 사무실을 둘려보며 기분 좋게 대답했다.
곧 출산일이라 산처럼 부풀어 오른 배와, 그에 비해 가는 팔다리가 위태로워 보였지만 햇살에 반사된 빛나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바라보는 은지가 그 눈부심에 눈을 가늘게 떠야 할 만큼.
“행복…… 하니?”
왜 그런 질문이 터져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은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여실했다.
물론,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환한 빛나의 미소가 모든 것을 대신했지마는.
“행복하다니, 잘됐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은지는 빛나의 책상 위에 노란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내던졌다.
“이게…… 뭐야?”
“뭐긴, 내…… 이력서지.”
그랬다. 단정한 은지의 증명사진과 함께 그녀의 화려한 경력이 즐비해 있는 이력서.
그런데 왜 은지의 이력서를 그녀에게 내민 것일까.
“내가 고작 너한테 보여주려고…… 속물이란 욕까지 얻어 먹어가며 왜 그 화려한 이력을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정도면 자격은 충분하다 생각해.”
“너…….”
“참고로, 난 월급쟁이 변호사 안 해. 곧 죽어도 내 자존심에 그럴 순 없고. 우리…… 동업하는 거야. 너랑 나…… 사업파트너라고. 그 정도 이력이면 네 사업파트너로서 넘치는 거 아니니?”
시선은 마주했지만 말을 하는 은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과연, 은지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아니?”
“…….”
“네 그 화려한 생활 끝을 보겠단 이야기야. 그 명품 구두에서…… 이젠, 내려와야 한단 이야기라고.”
씁쓸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충고.
하지만 은지의 두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은지가,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그 KMK컴퍼니 사건 이후, 모든 게 달라졌어. 그 어떤 사건을 맡아도 흥미가 없어져버렸단 말이야.”
“…….”
“그때,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 아무런 사심 없이…… 뭔가를 위해 내 열정을 다 쏟아부었던 그 순간을. 그리고 그 이상의 정의를 실현했단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그 감정.”
“은지야…….”
“화려한 생활 끝이라고? 명품 구두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
“그래야만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말하며 은지는 자신이 명품 구두를 벗어 옆으로 밀어 버렸다.
맨발로 나란히 마주한 은지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해 보였다.
“빛나야, 이젠 나도…… 행복해져보자. 아버지 딸이 아닌, 박은지로.”
은지가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빛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그녀는 할 수 없다 생각한 것일까.
누구보다 닮아버린 두 사람인데.
잠시 후 빛나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맞잡아주었다.
서로 너무 닮아 앙숙일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이, 이젠 그 닮음을 바탕으로 같은 길을 걷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감동적인 순간, 이거 뭔가 이상하다.
맞잡은 빛나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빛나야, 아무리 감동을 해도 그렇지 내 손을 이렇게 세게…….”
“은지야…….”
“잡으면…….”
“……와.”
“응?”
빛나가 한 말을 미처 듣지 못한 은지가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폭발할 것 같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진통이 온다고! 진통이!”
“어머! 무슨 소리야! 진통이라니!”
“아악. 애 나오려나 봐! 진통이…….”
세상에, 말도 안 된다! 예정일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진통이라니!
빛나도 놀랐지만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은지는 그녀를 부축하며 재빨리 자신의 하이힐을 다시 신었다.
어쨌든 여기서 빛나를 병원에 데려가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으므로.
“조금만 참아. 병원 가자. 병원!”
“으아악!”
“여기서 낳으면 안 돼! 자…… 착하지, 빛나야.”
그렇게 빛나를 부축해 사무실을 나선 은지는 또 한 번 충격적인 현실과 부딪치고 만다.
조금 전 다리가 후들거리게 올라왔던 마의 계단이 63빌딩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버티고 있었던 탓이다.
“아악, 어떻게 6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이게 말이 돼? 내가 고소할 거야!”
결국 은지는 조금 전 신었던 그 명품 구두를 다시 벗어 던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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