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그녀.
2018.10.17.
수술 후 4일이 지났다.
다행히 수술 결과는 무척 좋았으나 걸어 다닐 때 통증을 느낀 빛나는 오늘도 여지없이 휠체어 신세였다.
“회복 속도엔 개인차가 있다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휠체어를 끌던 승현이 다정하게 어깨를 다독였지만 크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회복 속도에 있다는 그 개인차가 눈앞에서 완연하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걱정 안 하고 싶은데…… 쟬 보면 없던 걱정거리도 다시 생겨.”
빛나의 시선은 자판기 앞에서 기웃거리는 복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같이 수술을 했지만 복실의 회복 속도는 주치의가 기함을 할 정도였다.
수술 하루 만에 일어나 지금은 거의 정상인처럼 걸어 다니다 못해 곧 뛸 기세다.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밤에 야식 먹으러 날아다닌다는 소문도 있었다.
무통주사에 의지해 잠을 자야 하는 빛나와는 달리 복실은 통증도 거의 없다고 했다.
게다가 못 먹는 것이 없으니, 수술 후 3일 만에 자판기 음료까지 탐을 내는 객기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쟤랑 널 비교하면 안 돼. 못 들었어? 쟨 수술실에서 나올 때부터 눈 뜨고 나온 애야. 사람이 아니라고.”
두 사람의 진한 시선을 느낀 복실이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를 환자복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그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두 사람이 무척이나 이상하다는 듯.
그러자 빛나는 복실을 힘없이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넌 안 아파? 어떻게 그렇게 잘 걷고 잘 먹어?”
“아니, 언니. 원래 사람은 직립 보행이 원칙이야. 몰랐어?”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문제는 네가 사람이 아닌데 직립 보행을 한다는 데 있지.
병실로 다시 들어가는 복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승현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쟨…… 전생에 진짜 짐승이었을 거야.”
그러자 그 말을 받아내듯 빛나도 중얼거렸다.
“내 눈엔…… 지금 짐승으로 보여.”
그들의 눈에 짐승 개복실이 병실 창밖을 내려다보며 자판기에서 뽑은 오렌지 주스를 까먹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살려준 하해와 같은 은혜는 칭찬받아 마땅했다.
하루아침에 멀쩡한 간을 떼어 빛나에게 줘야 했으니 복실도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도 착하잖아. 쟤만큼 착한 애가 어딨어?”
“맞아. 내가 참 복도 많지. 저런 걸 동생으로 두고.”
“근데 우리, 앞으로 복실이한테 까불지는 말자.”
그랬다. 복실의 놀랍도록 빠른 회복 속도는 감탄이 나오는 게 아니라 앞으로 복실에게 까불면 절대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먼저 주었다.
특히 평소 원수같은 승현이 정말 가슴 깊이 새겨야 하는 깨달음이었다.
그때 창가에서 음료를 먹던 복실이 대번에 음료를 원샷하더니 재빨리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어찌나 빠른지, 침대로 뛰어든 게 아니라 날아드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런데 그 좋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복실은 긴 머리를 예쁘게 넘기더니 곧바로 얌전히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아픈 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저러기에 쟨…… 혈색이 너무 좋지 않아?”
“아까 주스를 두병이나 마셔서 비타민 C 과다 보충이야. 하얗다 못해 뽀얗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며 승주가 내려선 것이다.
그의 손엔 책 두 권이 들려 있었다.
“왔어?”
“응. 제수씨 몸은 괜찮으세요.”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
“식사는요? 복실이는 지금 속이 안 좋아 아무것도 못 먹는다던데.”
“큽…… 복……실이가요?”
세상천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사레가 다 걸렸다.
“근데 그건 뭐야? 웬 책?”
“응. 복실이가 읽고 싶다고 해서.”
개뿔. 읽고 싶은 게 아니라 베고 자려는 거겠지.
밤새 베개가 낮다 중얼거리더니.
승현은 눈썹을 곤두세우며 승주 너머로 누워 있는 복실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승주가 한국에 있어도 얼굴 한번 제대로 보기 힘들었던 복실은 요 며칠 계 탔다.
하루에 한 번씩, 많게는 서너 시간가량 붙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원 없이 머슴마냥 부려먹고 있으니.
승주 또한 빛나를 살려준 고마움 때문인지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었다.
“오빠-아. 책 가져왔어?”
“응. 여기.”
“고마워. 그리고 나 산책 좀 시켜주면 안 돼? 승현이는 언니만 신경 쓴단 말이야.”
“걸을 수 있어?”
“아니, 휠체어.”
무슨 소리야! 너 방금 침대로 날아 들어 갔잖아!
목구멍까지 치닫는 그 말을 겨우 겨우 집어 삼킨 두 사람은 승주가 복실을 안아 휠체어에 태우는 그 순간까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정말 분노 없이는 볼 수 없는, 대 사기극이었다.
***
수술 후 3개월이 지났다.
복실의 놀라운 회복 속도에 비하면 빛나는 비약한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게다가 술을 너무 좋아해 걱정이 태산이었던 복실의 간은 그동안의 이력이 무색하리만큼 너무 건강한 데다 빛나와 딱 맞아 거부 반응 한번 없었다.
행복했다.
심지어 그 사건으로 인한 흔한 트라우마조차도 겪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안정적이고 마음이 편안했다.
그녀의 인생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싶을 만큼.
[전복 주문해놨다. 복실이 집에도 한 박스 보내놨고. 아줌마한테 손질 잘해달래서 너 혼자 먹어라. 날고 기는 승현이 주지 말고.]
“네. 알겠어요, 아버님. 저 혼자 다- 먹을게요.”
웃음이 났다.
요즘 들어 승현이보다 시아버지인 위태준과 더 통화를 많이 하는 듯싶다.
며느리가 아니라 진짜 딸 마냥 어찌나 살갑게 대해주시는지 눈물이 다 날 정도였다.
그랬다.
어쩌면 그녀가 그 모든 사건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퇴원한 다음 날,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맞이한 것은 반가움과 염려에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 허겁지겁 뛰어나온 위태준이었다.
세상에,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이에 비해 좋은 풍채만큼이나 완벽했던 위태준이 실내용 슬리퍼 차림으로 헐레벌떡 뛰어나온 모습을.
그렇게, 그녀에게 가족이 생겼다.
전화를 끊은 후 TV를 보는데 때 마침 강민식 재판에 관한 뉴스가 나왔다.
그러자 곁에 있던 승현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려 했다.
“놔둬. 보게.”
“괜찮아?”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강민식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도 빛나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그에 관한 뉴스를 태연스럽게 바라보았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나오는 강민식이 화면에 비쳐지자 그녀가 중얼거렸다.
“저거 강민식 맞아? 살 엄청 빠졌네? 얼굴이 말이 아니야.”
“그럼, 저렇게 시달리는데 멀쩡하면 사람이 아니지.”
“아냐. 아냐. 예전이랑은 확실히 달라. 얼굴색도 다르고…… 저거 봐. 심지어 카메라도 제대로 못 쳐다보잖아?”
빛나의 말에 승현은 TV 화면을 보며 은근 슬쩍 미소 지었다.
그러곤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교도소 생활이 편치 않나 보지, 뭐.”
그래. 좀 힘들 것이다.
그곳은 교도소가 아니라 강민식이 깔맞춤 지옥일 테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겠지.
덕분에 강민식은 3개월 만에 거의 산송장이 되어 있었다.
“아이고, 고소해라. 그럼 그렇지. 저도 사람이지. 그런 죄를 저질러놓고 멀쩡할 수 있겠어?”
속 모르는 빛나는 아직도 강민식이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다.
하긴, 짐승 개복실도 마냥 사랑스러워 보인다니 세상에 뭣인들 안 예뻐 보이랴.
승현은 빛나의 그런 순수함이 좋았다.
날을 세우며 파르르 떨다가도 모든 사람을 바르게 보려는 그 시선이 예뻤다.
이젠 평생 울지 말고, 아프지 말고 이렇게 예쁘기만 했으면 좋겠다.
“우리 이번 주에 여행 갈래? 준수랑 셋이서.”
“셋이? 주말에?”
“응. 가까운 펜션으로. 어때?”
“나야 좋지! 꺄악! 좋아라!”
빛나는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곁에 앉아 있는 승현의 무릎 위로 타고 올랐다.
그러자 하늘거리는 그녀의 롱스커트가 말려 올라가며 늘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뭐야, 대낮부터 유혹이야?”
“내 남자 유혹하는데 밤낮이 어딨어?”
“그렇게 대 놓고 말하면…… 젠장…… 내가 못 참잖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현의 나쁜 손이 그녀의 드러난 맨다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그러곤 자유로운 나머지 한쪽 손을 이용해 제 무릎에 올라탄 그녀의 얼굴을 한 번에 감싸 쥐었다.
“나도 놀고 싶다. 너랑 맨날 이러고 있게.”
“그럼 되나. 돈은 누가 벌고? 이제부터 난 돈 까먹는 기계가 될 텐데.”
“뭐야, 벌써부터 겁주는 거야?”
“경고하는 거야. 이래도 나 좋냐고. 나 사랑하냐고.”
좋냐니, 사랑하냐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 여자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랑했고, 죽는 그 순간까지 사랑할 여자였다.
승현은 빛나의 그런 질문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말랑한 숨결이 부드럽게 그녀의 입안을 침범했다.
그리고 다리에 머물렀던 그의 손은 그녀의 엉덩이로 옮겨가 옴짝달싹못하도록 더 바짝 끌어당겨 제 몸과 밀착시켰다.
두 사람의 몸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들어간 순간이었다.
진한 키스로 한껏 열을 올린 승현이 그녀의 티셔츠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그의 입에서 섹시한 신음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너 진짜…… 왜 이렇게 예쁘니.”
그러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꽉 잠긴 목소리로 대답한다.
“뭘, 당연한 소릴.”
결국 그는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을 저 멀리 날려 보내며 빛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침대로 가 잔뜩 달아 오른 그녀를 내려다보며 승현은 허겁지겁 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가 옷을 벗어던지자 넓은 어깨와 보기 좋은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셔츠를 벗으며 살짝 흩어진 베이비 펌은 심장 떨리게 섹시하기까지 했고.
하지만 승현은 무섭게 제 옷을 벗어던졌던 조금 전 기세와는 달리 그녀를 한없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몸에 남겨진 수술 흉터에 머물렀을 때 조용히 입을 연다.
“아프면 말해.”
그 말에 빛나는 이번에도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와 함께 하는 사랑이 아플 리가 없지만 말이다.
잔뜩 달아 오른 몸으로 그녀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며 빛나는 싱긋 웃었다.
누가 그랬나.
이런 위승현 보고 인내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라고.
알고 봤더니, 위승현은 인내심계의 부처였다.
“왜 웃어?”
“그냥…… 조금 전 아버님 말씀이 떠올라서.”
“아버지가 뭐랬는데?”
“응. 전복 주문하셨는데, 날고 기는 너 주지 말고 나 혼자 먹으래.”
그 말에 승현도 빵 터졌다.
하지만 그는 말 대신 그녀의 탐스러운 몸으로 입술을 내리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머무는 곳마다 열꽃이 피었고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리고 드디어 두 사람이 뜨겁게 하나가 되었을 때 빛나는 생각했다.
위태준의 경고는 무척이나 현명했다고.
이렇게 날고 기는 승현에게 그 좋은 전복까지 먹였다간, 정말 이 방에서 못 나갈 수도 있을 테니까.
***
전화벨이 울렸다. 빛나와 침대에 누워 있던 승현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형?”
승준이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고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승준의 목소리를 한참 들은 승현의 눈빛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침대에서 일어난 빛나가 의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전화를 끊은 승현은 눈을 찡긋하며 기분 좋게 한마디 했다.
“우리 빛나, 조금 일찍 컴백해야겠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진 빛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욕실로 그를 쫓아 들어가며 물었다.
“뭐야? 무슨 소리야? 컴백이라니?”
***
철컹.
문이 열리자 죄수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전에는 선인지 악인지 구분하지 못했던 눈동자.
그리고 이제는 그 눈이 선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 절대 놓을 수 없는 눈동자였다.
“왔어? 찾아오지 말라니까.”
“어떻게 안 찾아와, 이 자식아! 나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 객기 부린 거 아냐?”
형주였다.
명실상부 강민식을 잡아넣는 데 일조했던 1등 공신.
하지만 죗값을 피할 수 없는지라 형주도 여지없이 교도소 신세였다.
문제는 그런 그가 오늘부로 제 국선 변호사의 변호를 거부했다는 것.
조금 전 빛나와 함께 침대에 있을 때 승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바로 이것이었다.
“미친 거 아냐? 저쪽은 지금 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재판을 포기하겠다는 게 말이 돼?”
“왜 말이 안 돼. 죗값 달게 받겠다는데.”
“누가 죗값 떼어먹으래? 그래, 나쁜 자식아. 너 죗값 받아야 마땅해. 근데…… 새로운 삶을 살 기회도 얻어야지. 너…… 자격 충분해.”
“잔머리 굴리지 마. 저쪽에서 때려주는 대로 형 살다가 나갈 거야.”
“때려주는 대로? 저쪽에서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간 너 최소 20년형이야.”
승현이 콧방귀를 뀌자 형주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 좀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데, 친구란 놈이 이렇게 안 도와주나.”
“사실대로 이야기해. 왜 재판을 포기하겠다는 건지.”
“사람들이 나를 사람으로 안 봐. 심지어…… 나를 믿고 내 편에서 싸워야 할 변호사조차도.”
“…….”
“강민식이 또 일 저질렀잖아. 빛나 누나…… 많이 힘들었잖아.”
잊었다. 강민식의 죗값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죗값도 커진다는 것을.
“재판…… 내가 포기한 게 아니야. 내 변호사가 포기한 거지.”
그랬다. 강민식에 대한 시선이 험악해질수록, 형주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럴 것이다.
더불어 그의 편을 들어야 하는 변호사조차도 등을 돌릴 만큼.
화가 났다. 승현은 주먹을 꼭 틀어쥐며 형주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미친놈, 제 남은 평생을 여기서 보내겠다고 선언한 놈이 웃기는.
“웃음이 나오냐?”
“그럼 울어?”
“너 진짜 나쁜 놈이야. 빌어먹을 짓 하려면 그 눈 좀 어떻게 하던가 하지. 그런 눈으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내가 너를 놓을 수가 없잖아.”
그는 형주의 까만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세상은 믿지 않아도 그만은 믿을 수 있는 눈이었기에.
“이건 한 사람이 움직인다고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모든 걸 포기한 순간에도 여전히 놓을 수 없는 그 눈.
그래서 승현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누가 그래. 나…… 혼자 움직인다고?”
흔들리는 저 진실한 눈동자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
“뭐…… 라고?”
“변호사가 널 믿지 못한다면 널 믿는 변호사를 구하면 되는 거야. 사람들이 널 바른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 시선을 꺾어서라도 내가 바로 고쳐놓을게.”
“승현아…….”
“내가 해. 너 거기에 혼자 안 둬.”
“하지만…… 변호사가…….”
“말했잖아. 널 믿는 변호사를 구하면 그만이라고. 그런 변호사가 하나 있어. 뚝심 있어서 그 어떤 비바람에도 꼼짝없이 네 자리를 지켜줄…… 그런 변호사.”
승현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밖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나 변호사라구요. 오늘 변호인 자격으로 여기 온 거라구욧! 그러니까 저리 비켜주실래요?”
설마. 설마…….
그 목소리를 들은 형주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아직까지도 그녀는 형주에게 마냥 어려운 사람이었다.
때문에 형주는 그 자리에서 엉덩이를 반쯤 뜬 채 무척이나 곤란한 얼굴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승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을 연다.
“뚝심에 성깔도 좀 있긴 한데, 적어도 그 국선 변호사처럼 제풀에 지쳐 널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야. 저 여자가…… 지옥에서도 살아 돌아온 여자라, 너 하나 그 지옥에서 꺼내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빛나가 들어섰다.
편안한 청바지 차림에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눈이 부실 만큼 예뻤다.
“저 수갑 좀 풀어주실래요?”
“흉악범이라……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 재판은 치러지지도 않았는데 흉악범이라뇨. 굉장히 부적절하고 듣기 거북한 표현이네요. 제 고객한테 그런 말은 삼가주실래요?”
그리고 목소리만큼이나 날이 선 대단한 성질머리는 잘 웃지 않는 교도관들조차 쩔쩔매게 만들었다.
차가운 수갑이 풀리고 교도관들이 나가자 빛나는 자리에 앉아 승현에게 말했다.
“자기도, 자리 좀 피해줄래?”
“그래.”
승현이 대번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흔들리는 형주의 까만 눈동자가 그 뒤를 좇았다.
그렇게 단둘이 남겨진 비좁은 공간.
형주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승현이한테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요. 그리고 형주 씨가 어떤 상황인지도.”
“네.”
“길고 지치는 싸움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나는 포기 안 해. 형주 씨 그만한 자격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말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뿐만 아니라 빛나의 당당한 모습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마냥 든든하기도 했다.
“누나, 불편하면 안 하셔도…….”
“불편하다니, 저번엔 형주 씨가 우릴 살렸으니…… 이번엔 내가 형주 씨 살려줄게요.”
빛나가 진지한 눈동자를 들어 형주를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서류를 내밀며 그에게 볼펜을 쥐여주었다.
“그럼 이제 내가 형주 씨 변호하게 해줄 거죠? 여기에 사인해요.”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며 형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게 옳은 일일까.
괜히 빛나를 끌어들여 그녀의 이력까지 망치는 길이 아닐까.
많은 번민이 순식간에 왔다 갔다.
“제가 많이 불리하다는 거 압니다. 계획은 있으세요?”
“계획? 있다마다.”
그녀의 자신 있는 목소리에 형주는 느린 동작으로 서류에 사인을 했다.
그 사인이 이제 막 끝났을 때, 귓가를 울려오는 조용한 목소리.
“미인계. 내가 법정에선 좀 섹시하거든.”
세상에나.
순간 형주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서류에 사인을 하기 바로 전으로 넘어가고픈 심정이었다.
믿을 수 없는 발언에 형주는 넋이 나간 채 그 말을 반복했다.
“미…… 인계…….”
과연, 형주는 그 기나긴 싸움에서 이길 수는 있는 것일까.
어쩌면 방금 전 했던 사인 하나가 그의 인생을 골로 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
하지만 빛나는 형주가 그러거나 말거나.
오랜만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희열을 느끼며 입술을 말라 올렸다.
“실적에 환장하는 상대 검사. 내가 아주 잘 아는 검사거든. 조현성 검사라고…….”
그렇게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그녀 인생의 제2막이,
아주 화려하게 올랐다.
처절한 희생양, 조현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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