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90화 (90/94)

90. 모든 것이 뒤바뀌는 순간

2018.10.14.

“강민식의 변호사면 답 나왔네. 그 자식이 입 꾹 다물고 단독 범행이라 외쳐도 여기서 그거 믿어줄 사람 몇이나 되겠어?”

우빈이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기가 질린다는 듯.

“아니, 근데……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사람을 부릴 수가 있는 거지?”

“처음 갑작스럽게 무료 변호를 하겠다 나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그러기엔 이력도 경력도 너무 좋은 놈이었거든. 단순히 이슈를 만들어 제 스타성을 높이기엔 이 바닥에서 이미 성공한 놈이었다고. 최악의 변호로 스타성을 높이는 것보다 역효과로 잃을 게 더 많은…….”

승준이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사소하게 놓친 그 한 가지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그의 가족을 덮칠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찜찜함에 뒷조사만 좀 더 확실히 했더라도 미연에 방지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모든게 다 자신의 탓 같았다.

“알고 보니 인연이 깊더라고. 사고사로 아버지가 죽고 고아가 되어버린 그 자식을 재우고 입히고 학교 보낸 게 바로 강민식이니까.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혹독할 때 제 손을 잡아준 인간이니까…… 그 손을…… 놓을 수 없었겠지.”

“그래도 마지막 선택은 온전히 그 자식 몫이었어. 동정 따윈 하지 마. 그럴 가치 없는 인간이야.”

줄 곧 입을 다물고 있던 승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불쑥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기서 그 자식 어떻게 죽일지, 모의 중인 거야? 그런데 이거 어쩌나. 그런 새끼는 죽음조차도 아까운 놈이야.”

줄곧 병실에 붙어 있던 승현이 부쩍 핼쑥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유난히 까맣고 진지한 눈동자만큼은 분노가 가득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분노는 폭발 일보직전이다.

그런 그가 두 주먹을 꼭 틀어 쥔 채 입을 열었다.

“아무도 강민식은 건드리지 마. 그 자식은…… 내 거야.”

또렷하게 흘러나오는 승현의 목소리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그런 새끼는…… 내가 제일 잘 아지.”

죽음조차도 아까운 놈이라 말할 땐 언제고, 도대체 승현의 계획은 뭘까.

“어떻게 하려고?”

궁금함에 던진 우빈의 물음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지.”

진지하면서도, 실로 섬뜩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

철컹.

문이 열리며 교도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가하게 책을 읽고 있던 강민식은 고개를 들어 제 책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산책.”

“산책?”

“누가 널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지.”

면회도 아니고 산책이란 말로 둘러대는걸 보니, 보통 일상적인 면회는 아닌 모양이다.

강민식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는지 자리를 가볍게 뜨며 입가에 웃음을 보였다.

수갑을 차고 남자를 따라 썰렁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서쪽 끝에 위치한 수감실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그의 손목을 결박하고 있던 수갑을 풀어주었다.

면회실이 아닌 수감실에서의 독대라니.

게다가 수갑을 풀어주는 센스까지.

간만에 기분이 좋아진 강민식은 두려움 없이 그 수감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설렁한 독방 중앙에 태산처럼 버티고 선 한 남자가 보였다.

살짝 쳐진 쌍꺼풀 없는 눈꼬리, 까무잡잡한 얼굴, 그리고 입가에 살짝 띤 미소.

누가 봐도 눈이 즐거운 훈남이었지만 그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강민식이었다.

“이런…… 어인 일로 위 검사님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제가 너무 늦었죠? 좀 빨리 왔어야 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수습 좀 하느라.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뭐, 생각보다 늦긴 했지만 기다리는데 지루하진 않았습니다.”

“지루하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교도소 생활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찾으신 모양입니다.”

승준은 두 손을 뒤로한 채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강민식을 내려다보며 여전히 선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몸에서 풍겨 나오는 검은 아우라 만큼은 그야말로 숨통을 조이는 섬뜩한 살기였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얼굴을 가지고 저런 살기를 품을 수 있는지, 강민식는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자세가 건방져 보인다면 죄송합니다. 두 손을 풀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요.”

“아닙니다. 편한 대로 서 계십시오. 전 상관없습니다.”

태연한 강민식의 목소리에 승준은 뒤로 맞잡은 손을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날 때까지 틀어쥐어야만 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을 벌이셨더라구요. 사람을 그렇게 부릴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제…… 실수예요. 미리, 알아봤어야 했는데.”

“뭘 말입니까?”

얄밉게 되묻는 강민식의 목소리에 줄 곧 이 자리에 들어선 이래, 아니 그를 만난이래 단 한 번도 진면목을 드러낸 적이 없는 승준의 입꼬리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말입니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입 꼬리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섬뜩했다.

차갑게 축 쳐진 눈매엔 분노가 가득했으며 봉인 해제된 두 팔은 강민식의 멱살을 곧 움켜쥘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쾅!

순식간에 강민식을 벽으로 밀어 붙여 멱살을 움켜쥔 손아귀 힘은 엄청났다.

밀린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졌다.

“감히…… 내 가족을 건드려?”

가까이서 본 승준의 얼굴은 더욱 살벌했다.

조금 전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그 선한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싶을 만큼.

“너, 실수한 거야.”

“실수? 그래, 실수라 치자. 이미 진행되고 있는 건만으로도 나는 남은 평생을 여기서 살아야 해.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이번 건도 진행시켜 내 형을 더 늘려볼 생각인가?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내가 건강관리 좀 해야겠는걸? 내 나이 반백이 넘는데 그거까지 살려면 장수해야겠어.”

“미친놈.”

“너희들이 여기서 나를 더 벌할 수는 없다, 이 말이야.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삶이거든.”

“벌써부터 자만이네. 누가 그래, 네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왜, 사형제도라도 부활시켜 한번 보내보게?”

그 말이 나오자 승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너 같은 새끼는 죽음도 아까운 놈이라던데.”

“누가?”

“우리 승현이가…….”

“아…….”

“사람을 움직일 줄 알더군. 그 말은 곧…… 사람을 읽을 수 있단 말이겠지. 근데…… 그게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래서…… 나에 대해 좀 얻은 게 있나?”

“있다마다. 네 아버지부터 너까지 평생 남의 심부름이나 하던 거지 같은 삶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 하지만 주제넘었어. 적당히 멈췄어야지. 주제 모르고 아등바등 여기까지 올라오니 이렇게 뒤집어진 거 아냐?”

“니들만 아니었으면, 성공할 수 있는 삶이었어!”

광기 어린 강민식의 눈에서 살기가 발산되었다.

제 삶을 주제넘다 표현하는 승준의 발언에 휘말린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손가락질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하찮다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설령, 눈앞의 승준이라 할지라도.

아니 어쩌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가 자신을 깔아뭉개는 모습에 더 분노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다 가지고 태어난 자가 바닥부터 치고 올라온 그를 어찌 손가락질 할 수 있단 말인가!

출발선부터가 달랐다.

사회의 약자였고, 태어날 때부터 패자였다.

하지만 강민식은 수단과 과정이 어찌 되었건 결국 그들과 같은 지점까지 나란히 달린 것이 아닌가.

비록 결승지점을 눈앞에 두고 넘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것으로 만족했다.

열심히 살았으니까.

그래서 최고라 불리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봤으니까.

사람들도 발아래 둬봤으니까.

이젠 더 이상 미련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결승지점을 눈앞에 두고 발을 걸어 넘어트린 그들만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어차피 넘어진 삶, 그들과 함께 나란히 할 수 없다면 그들을 벌하기로.

그리고 평소 그리 선한 인상이던 승준이 본색을 드러낸 순간, 어느 정도 성공했다 생각했다.

그 잠깐 동안의 희열이 그의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뒤집어 버릴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날 욕하면 안 되지. 알잖아. 우리……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걸.”

승준이 밀어붙이는 어마어마한 힘에 의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이 순간조차도 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명목아래 그와 어깨를 나란히 걸치려 했다.

물론 승준이 그것을 허락할 리 없지만 말이다.

“무슨 소리. 너랑 난 엄연히 달라. 너 같은 새끼는 자기애가 강해서 죽을 용기조차도 없잖아. 그게 너랑 내 차이점이야.”

“…….”

“살아, 이 새끼야. 끝까지 살아서 네가 벌인 죗값만큼 고통 받아야지.”

그 소리에 강민식은 웃었다.

어떻게든 형벌을 벗어나려는 욕심을 버린 그 순간부터 강민식은 교도소도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누군가.

바깥세상에서 날고 긴다는 인간들을 제 발 아래 둬본 그가 아닌가.

덕분에 이 안에 있는 작은 사회에서 최고로 군림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교도소도 하나의 작은 사회였으니까.

그런데 말을 마친 승준이 더 이상의 위협을 가하지 않고 강민식으로부터 물러났다.

분노한 그의 모습은 평소의 젠틀함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섬뜩했으나 물러선 승준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그전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야말로 배우였다면 기가 막힌 열연이 아닐 수 없다.

살짝 삐뚤어진 넥타이를 바로 고친 그는 슈트 단추를 잠그며 돌아섰다.

그의 등 뒤로 의기양양한 강민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게 단가?”

싱거웠다.

강민식이 벌인 일로 인해 빛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 들었는데 고작 경고 정도로 끝내다니.

결국 자신의 승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승준이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진.

“무슨 소리. 네 죗값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승현이가 널 위해 준비했거든.”

“…….”

“기다려.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건가?”

“그건 알아서 뭐하시게. 가보면 알지.”

승준이 다녀간 후 강민식은 이감 조치되었다.

급작스럽게 떨어진 이감 명령이라 교도관들도 우왕좌왕이었다.

준비된 차량에 오르며 강민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왜?

이상했다.

하지만 겁이 나진 않았다.

이미 바닥까지 온 그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도소가 교도소지, 뭐 별게 있겠는가.

귀찮은 재판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물론 승준의 성격으로 보건데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몇 시간 후, 새 교도소에 들어선 강민식은 뜻밖의 인물과 마주해야 했다.

“자네는?”

***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아주 한밤중인 모양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기함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악! 얘 눈 뜨고 있어!

–이렇게 빨리? 말도 안 돼. 세상에…….

–음…… 으…… 배고파…….

목소리가 너무 커 어둠속에 있던 빛나도 깜짝 놀랐지만 잠시 후 그녀는 다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 어둠속으로 돌아왔을 땐 목구멍 안의 따끔거림과 진한 두통이 그녀는 뒤흔들고 있었다.

–뭐가 잘 못 된 거 아닙니까? 쟤는 회복실에서 올라올 때부터 배고프다 사람 귀찮게 하는데 왜 우리 빛나는 아직도 눈 한번 뜨지 못하는 겁니까? 심지어 쟨, 일어난 후로 눈 한번 감은 적이 없습니다!

-환자분이 조금 더딘건 사실이지만 저분도 이례적인 케이스입니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의식이 저렇게 빨리 돌아온 환자는 저도 처음이에요. 천만다행인 게 수술 도중 마취 안 풀린 게 어딥니까. 어쨌든 수술은 잘되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얼추 예측해보건데 늘 예상 밖의 복실이 이번에도 역시 예상 밖의 기록을 세운 모양이다.

강복실답다 생각했다.

그리고 의식이 희미한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아, 개복실…… 넌 전생에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체력이…… 짐승이야, 짐승.

–나…… 수술 전에 관장했잖아. 배…… 고프다고. 물 말고…… 먹을 걸 달라고…….

중간 중간 끊기는 복실의 목소리를 들으며 빛나는 다시 한 번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또 한 번 째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정의 것이었다.

–아아-악! 개복실! 초코파이 먹을라고 그래! 안 돼! 안 돼!

–아, 언니…… 배가 고파서 허리를 못 펴겠다고.

–배가 고파서 허리를 못 펴는 게 아니라 너 방금 수술해서 허리를 못 펴는 거야!

–복실아. 먹을 수 있게 되면 너 사달라는 거 다 사줄 테니 지금은 잠 좀 자주겠니? 너…… 이제 자도 된다더라. 응? 제발.

–야, 이 자식아. 배고파서 잠이 안 온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너,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아픈 거야. 아픈 거랑 배가 고픈 거 착각하지 마. 진통제 놔달라고 할게. 기다려.

–진통제 말고……먹을 걸 달라고……오!

–으아! 승현 씨!

–안 된다고! 이거 안 된다고! 놔, 복실아! 응? 이거 놓으라고!

–아니. 방금 수술한 애가 무슨 팔 힘이 이렇게 쎄!

–내…… 쪼꼬파…… 이!

쌈 났다.

아, 징글징글한 것들.

도대체가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현실로 돌아온 그녀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고통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두통과 더불어 기분 나쁠 만큼 축축 쳐지는 몸이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보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더 나았다.

살아 있다는 거니까.

그 끔찍한 마지막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눈에 담을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죽음보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나았다.

“아, 진짜……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네.”

그렇게 빛나는 결국 검은 어둠 속에서 시끄러운 현실로 강제 소환되고 말았다.

고통스럽지만, 지독히도 행복한 현실 속으로.

***

한편 그 시각.

강민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앞에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곤 감히 생각지도 못했기에 당혹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 기회가 될 수 있는 남자였다.

박주혁.

바로, 강민식의 밑에 있던 박 실장이었다.

“이야…… 이게 누구십니까. 강민식…… 전 시장님 아니십니까.”

강민식이 알기론 박 실장이 모든 것을 실토했다 들었다.

그에게 반기를 들고 제 발로 들어가 자수하기까지.

하지만 막상 박 실장을 눈앞에 마주한 강민식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야 했다.

이거, 이거, 그 똑똑하다는 위씨 형제들이 실수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를, 다름 아닌 박 실장이 있는 곳으로 이감조치를 하다니.

누구보다 박 실장을 잘 알고 있는 강민식이었다.

그의 약점을 잘 알고, 그를 제 수족처럼 부렸던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이곳 분위기로 보아 이미 박 실장은 이 교도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듯 그의 주변으로 힘깨나 쓰는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럴 것이다.

나이에 비해 좋은 체구와 인물에 비해 귀신같은 솜씨를 지니고 있는 박 실장이 아닌가.

박 실장은 그의 세계에서 프로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귀신처럼 부렸던게 바로 다름 아닌 강민식이었다.

한 번 제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두 번인들 못 만들까.

그것이 바로 강민식의 계산이었다.

“박 실장이 아닌가. 오랜만인군. 자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네.”

강민식은 박 실장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자 두 남자가 강민식에게 달려들어 양쪽으로 팔을 포박했다.

“아니, 이놈들이! 내가 누군지 알고! 박 실장! 박 실장!”

하지만 어쩐 일인지 박 실장은 그 자리에 꼼짝 하지 않고 서서 강민식을 내려다볼 뿐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박 실장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꿈을 꾸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뭐…… 라고?”

이놈이 미쳤나 싶었다.

감히, 그의 밑에서 심부름이나 했던 주제에. 때론 눈만 마주쳐도 눈길을 피하던 제깟 놈이!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박 실장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모자라 꿈을 꾸고 있다 멸시까지 하고 있었다.

“한때, 바깥세상에선 당신이 내 하늘이었던 적이 있었지. 그땐 그랬어. 그 어떤 악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당신의 뚝심이 존경스러웠고, 그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추진력이 내겐 두려움이었지.”

박 실장이 서서히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본 박 실장은 예상보다 훨씬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다가서며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두려움이 일만큼.

그렇게 서서히 다가선 박 실장은 두 남자에게 결박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강민식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근데 말이야…… 내가…… 진짜 지옥을 경험하고 나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뭐야.”

“뭐라고? 네놈이 감히…….”

“여기선…… 내가 바로 왕이야.”

살이 덜덜 떨려왔다.

온몸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박 실장에게 맞설 만한 기력이 없었던 탓이다.

그제야 강민식은 승준이 돌아서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죗값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박 실장은 우연이 이곳에 있었던 게 아니다.

또한 그들이 박 실장이 있는 교도소로 그를 이감 조치한 게 실수도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철저히 계획된, 치밀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깨달은 강민식의 눈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참담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강민식 같은 인간에게 있어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공포가 아닌 참담함이었다.

지킬 게 없어, 또는 남은 게 없어, 두려움 따윈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천하무적이 될 수 있다 생각했지만 그게 실수였다.

승현이, 그를 제대로 읽어낸 것이다.

한때 자신이 수족처럼 부렸던 인간에게 개만도 못한 처지가 되어버린 지금, 비참하고 원망스러웠던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발버둥 쳤던 지난날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셈이다.

-승현이가 널 위해 준비했거든.

그렇게 승현은 강민식의 지난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만으로도 이렇게 몸이 떨리는데 박 실장은 입꼬리를 잔인하게 틀어 올리며 보란 듯 명령했다.

“그러니…… 꿇어.”

강민식은 자신을 압박하는 강압적인 힘에 의해 강제로 그 앞에 무릎이 꿇렸다.

쿵 소리가 날만큼 무릎을 내리 찍었지만 그깟 고통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몸이 느끼는 고통보다도 혈관 곳곳으로 퍼지는 모멸감이 강민식을 좀먹어 들어왔으니까.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제야 그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만한 용기도 없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이 상황을 뒤집을 수도 없는 강민식은 살아도 산 인생이 아니었다.

지옥이다.

승현이 선사한 지옥은 그야말로 철저히 강민식만을 위한 그의 맞춤 지옥이었다.

명이 다해 죽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

결국 강민식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흘러 나왔다.

“으아아-악! 안 돼-에!”

누군가에겐 더 없이 감사했던 하루가,

누군가에겐 더 없는 지옥이 되는 순간이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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