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순수혈통
2018.10.10.
“잡아! 잡아야 돼, 오빠! 여긴 내가 있을 테니 가서 이 새끼 잡아 와! 당장!”
아비규환이 된 예식장에서 복실의 목소리가 그 의지를 담아 분명하게 들려왔다.
승주는 본능적으로 승현을 바라보았다.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은 감당하기 힘든 공포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장 행복해 마지않던 그의 동생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가 되어버렸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순간이라 막을 수도 없었던.
단 한 번도 승현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때문에 세상을 잃은 승현의 표정은 승주에게 더 없는 충격으로 다가섰다.
버텨라, 위승현.
그렇게 빌며 승주는 돌아섰다.
이 엄청난 사태를 벌여 놓은 범인을 응징하기 위해.
출구는 단 하나, 이 아수라장을 벌인 범인은 그 출구를 통해서가 아니면 이 예식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독 안에 든 쥐다.
승주는 핸드폰을 들어 출구 쪽 경호를 맡고 있는 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부터 내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그 어느 누구의 출입도 불허합니다. 구급차 들어올 땐 최대한 빠르게 신분 확인 후 출입 허가하고 나갈 때 또한 그 인원수 체크해 단 한 놈도 빠져나갈 수 없게 철저히 하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철저한 출구 봉쇄만이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타고난 사냥꾼인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범인에게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선사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보내줄 생각 따윈 애초에 없다.
그의 가족을 건드리면, 그게 누가 되었든 가장 잔인하게 부숴줄 테니까.
“사냥을, 시작해볼까.”
***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불타는 듯한 통증이 가슴 아랫부분에서 시작해 복부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나 작은 비명 소리조차 내지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빛나는 가까스로 천근만근이나 되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세상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담긴 세상은, 오직 하나.
그녀의 세상이 울고 있었다.
-울 줄을 몰라.
-가슴에…… 설움을 안고 사는 거야, 그 녀석이.
언젠가 위태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승현은 바로 오늘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극도의 공포감에 그동안 꾹꾹 쌓아놓았던 눈물 마일리지를 폭발시킨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빛나는 고통에 정신이 아련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우리 승현이…… 드디어…… 우네.’
***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너무 놀라 화장실에 몸을 숨긴 채 아직까지 꼭 틀어쥐고 있던 단검을 떨어트렸다.
“내가…… 내가…….”
사람을 죽였다!
아비에게 죽도록 맞아도 죽여버리고 싶단 생각뿐, 단 한 번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던 그가 결국엔 아비가 아닌 다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더럽고 불쾌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덜덜 떨리는 제 손을 잘라내 버리고 싶을 만큼.
“으아…… 흡…….”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악에 받힌 비명도 튀어 나왔다.
하지만 그 비명소리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죄인이라 박중훈은 제 입을 있는 힘껏 틀어막았다.
왜 그랬을까.
왜 단 한번만이라도 강민식에게 반항할 생각 따윈 안 해본 것일까.
이상했다.
마치 그간의 세월이 이 일을 위해 살아온 것처럼 강민식의 말을 듣는 순간 반박의 여지 없이 그대로 직진이었다.
그런데도 왜 강민식보다는 제 자신이 이리도 미운 것인지 모르겠다.
저 단검을 들어 제 심장에 박아 넣어버릴까.
그럼 이 죄악을 씻을 수 있으려나?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자수를 할까.
아니면, 평생 도망을 다녀야 하나?
하지만 그 어떠한 생각도 자신이 지은 죄를 씻을 만큼 합리적이진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박중훈은 그 자리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추세우고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화장실 밖으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이 건물 안에 검은 그림자가 배회하는 모습을 보았던 탓이다.
박중훈은 벽에 기대어 몸을 숨긴 채 방금 전 자신이 보았던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세상에나, 사람이다.
언뜻 보아도 눈에 띄게 훤칠한 인물에 체격 조건 또한 남다른.
경호원 중 한명이 수색을 나왔나 싶었다.
하지만 몸에서 풍겨오는 아우라가 일반 경호원들과는 급이 달랐다.
도대체 누구?
“그…… 놈이구나…….”
그제야 조직원들 사이에 ‘괴물’이라 묘사되어 있던 승현의 작은형을 떠올렸다.
진술 내용엔 그 괴물이 저렇게 생겼다는 이야긴 단 한마디도 없었는데 말이다.
박중훈은 제가 본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그러나 다시 보아도 박중훈의 눈에 비친 승주의 모습은 지옥의 화신 그 자체였다.
게다가 움직임 또한 일반인인 그가 보아도 눈에 띌 만큼 남다르니 어쩌면 조직원들의 입에서 나온 ‘괴물’이라는 단어가 그의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가장 적절한 묘사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중훈은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지금 바로 이순간이,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유일한 기회인 모양이다.
그래서 박중훈은 망설임 없이 조금 전 그 단검을 제 목으로 가져갔다.
덜덜 떨려오는 손에는 쉽사리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이 버러지 같은 삶을 끝내는데도 필요 이상의 용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흐흐흑…… 죽어야…… 죽어야 끝나…….”
그렇게 마지막 한 가닥 남은 용기까지 쥐어짜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섬뜩하게 차가운 손이 그 힘을 가로막았다.
“그렇겐 안 되지. 고통 없이 가려고.”
단 두 마디에 불과했으나, 그것이 남긴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높낮이 없는 독특한 억양과 함께 가까이에서 마주한 승주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완벽했다.
죽음보다 더한 지옥이 예고되는 순간이었다.
“제발…… 내버려둬. 어차피 살아도 난 입 안 열어.”
무엇이 박중훈으로 하여금 그토록 철저한 충성을 요구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좋은 날 그의 가족을 끔찍한 악몽 속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을 이대로 보내줄 승주가 아니었다.
“너한테 뭔가를 얻어낼 거란 기대는 안 해. 누가 시켰는지, 어느 놈이 배후에 있는지 따위도 궁금하지 않아. 일단 방아쇠를 당긴 건 네 의지야.”
그랬다.
지독히도 끔찍한 현실을 승주는 다시 한 번 박중훈에게 되새기고 있었다.
“살아. 네가 만든 지옥 속에서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매일 매일 되새기면서 살아. 그게 바로 네 죗값이니까.”
눈앞의 그는 그야말로 진정한 ‘괴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
한편, 그 시각.
수감실 안에서 조용하게 책을 읽고 있던 강민식은 시선을 넘겨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읽고 있던 책을 덮곤 한창 TV에 빠져 있던 감방 동료들에게 한마디 한다.
“우리 채널 좀 돌려볼까?”
“예에? 지금 한창 재미있는 거 하는데…….”
하지만 그들은 곧 강민식의 눈치를 보며 채널의 주도권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이쯤이면 시간이 되었으려나.
세상이 다시 한 번 그로 인해 떠들썩해질 시간.
강민식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채널을 뉴스로 맞추었다.
너희들, 나를 너무 우습게 봤어.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고!
그는 진심으로 경고를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그들에게 철저히 보여주고 싶었다.
그 결과, 역시나 예상대로 세상은 뒤집혔다.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하는 앵커가 이례적으로 안색까지 변한 채 뉴스 속보를 전했기 때문이다.
“아, 안타까운 속보입니다. KMK컴퍼니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던 유빛나 변호사가…….”
앵커의 말에 수감실 안은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흘렀다.
하지만 그 안의 모든 시선은 강민식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그라는 사실을.
하지만 박중훈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입을 열지 않으리라.
결국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그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물증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후훗…….”
한동안 애 좀 타겠지.
만족스러움에 절로 웃음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러게, 하나는 남겨뒀어야지.
그가, 살아야 할 이유.
그가 지켜야 할 한 가지.
그것만 남겨뒀어도 이렇게까지 막장 드라마를 쓰진 않았으리라.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그는,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천하무적이 되어 있었으니까.
***
하얀 웨딩드레스가 온통 핏빛이었다.
구급차에서 뛰어 내려 수술실까지 향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승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가 수술실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에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핏빛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자꾸만 재생되었다.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꿈처럼, 지독히도 괴로운 현실이었다.
이젠 어쩌면 좋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알 수만 있다면,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그녀와 처음 만나던 그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승현은 지금 이 순간이 지옥이었다.
그녀가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식이 없었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승현은 그녀 없는 제 삶을 상상할 수가 없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꿈이라도 좋다.
악몽이라도 되풀이 하고 싶을 만큼 그녀와의 만남은 지울 수 없는 현실이었다.
놔줄 수가 없다.
그녀가 가겠다고 하면, 붙들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는 빛나를 제 곁에 둘 것이다.
간절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이 위태준의 옷깃을 붙든 그 손길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아부지, 저 빛나…… 저렇게 못 보내요.”
“그래. 안다. 말 안 해도…… 다 알아…….”
위태준이 그의 등을 다독였다.
“강한 아이니…… 이겨낼 거다.”
위태준의 심장도 이렇게 바짝 타들어가는데 승현이야 오죽할까.
그래서 위태준은 다 큰 아들을 보듬어 안았다.
이젠 그의 신체 조건을 훌쩍 넘어 훤칠하게 커버린 아들이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약해 보였다.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잠시 후, 위태준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느껴야 했다.
“흐흐흑…… 빛나 없으면…… 저도 죽어요.”
그가, 울고 있다.
세상에…… 그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그동안 못 울었던 설움을 한꺼번에 터트리듯 그렇게.
그런데,
그렇게 고대하고 기다렸던 눈물인데,
이렇게 가슴 아플 줄이야.
결국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승현의 눈물은 위태준으로 하여금 또 다른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결코, 빛나가 황천길을 건너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빛나를 이 세계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 지금으로써는 승현을 이승에 붙들어 놓는 유일한 길이었으므로.
***
빛나가 수술실로 들어간 후 시간이 꽤 흘렀다.
하지만 수술실 앞, 대기실은 그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대기실을 에워쌌다.
그 와중에도 승현은 제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좀처럼 시선을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보습을 지켜보며 승준은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구급차가 오고, 더불어 그들도 서둘러 그 자리를 뜨긴 했지만 범인이 그 자리를 빠져 나갔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문제는, 이쯤이면 연락이 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승주로부터는 문자 한통 없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승주 실력에 범인을 놓쳤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의문을 가지려던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어!”
[형.]
굳이 발신 번호를 확인해보지 않아도 승주였다.
“잡았어?”
[응.]
“뭐…… 하는 놈이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승현이가 절대 이 일에 흥분해선 안 되니까.]
“알았어.”
[이름이 박중훈이래. 형은 알지? 이놈이 강민식이 변호사니까.]
순간 숨이 훅 멈추었다.
“뭐…… 라고?”
[입을 안 열어. 죽었음 죽었지 절대 입 안 열 놈이야. 일단 경찰에 넘길게. 나머진 형이 알아서 해야 할 것 같아.]
승주 특유 억양 없는 목소리가 승준의 귓가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 자극은 더 없는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알았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해.”
[승현인?]
“간신히…… 버티고 있지.”
[지금 갈게, 병원으로.]
“그래.”
[제수씨…… 무사해야 할 텐데…….]
처음이었다.
승주가 이토록 망설이며 말을 내뱉은 건.
그래서 승준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할 거야. 누구보다 강한 여자니까…….”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하지만 승준은 자신을 향해 의문의 시선을 던지는 가족들을 피할 길이 없어 입을 열었다,
“범인, 잡았단다.”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승현이 아닌 우빈이었다.
“누구래? 뭐 하는 놈이래?”
그 물음에 승준이 대답했다.
“음, 박중훈이라고…… 강민식 변호사야.”
“세상에…….”
놀라움에 우빈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저 기가 막할 따름이다.
어떻게 감방에 있는 그놈이, 이렇게 큰일을 벌일 수가 있었는지.
또는 그 일이 벌어질 때까지 어떻게 그들은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따름이다.
“승현아…….”
우빈이 승현을 불렀지만 그의 꾹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빛나가 수술실에 들어간 상황에서 범인 따윈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당장은 그녀가 무사하길 바랄뿐.
수술실 앞에 앉아 머리를 두 손에 파묻고 있는 승현을 바라보며 승준이 위태준에게 다가섰다.
“제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언론이 제 멋대로 떠들기 전에.”
“아니다.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넌 여기 있어라. 언론도 내가 통제할 테니 걱정 말고.”
“하지만…….”
“나중에. 내가…… 숨이 막혀서…… 여기 더 이상 있을 수가 없구나.”
그랬다. 위태준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핏빛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천천히 숨이 꺼져가는 빛나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현의 울음소리가 자꾸 그의 귓가에 재생되었다.
숨이 턱 막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된 것인지 알 수만 있다면 그의 인생을 팔아서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간절했다.
“그럼 제수씨 수술실에서 나오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래.”
위태준이 돌아섰다.
폭주하는 언론을 막기엔 집에서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위태준이 사라진 후 약 한 시간 후 담당 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나가 수술실에 들어 간지 무려 세 시간 만의 일이었다.
“보호자가 어떻게 되시죠?”
“저…… 접니다.”
승현이 벌떡 일어나 의사에게 다가가자 모든 이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일단 출혈은 멈추었습니다. 수술로 일시적인 위기는 넘겼다지만 문제는 간 손상이에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간 이식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청천벽력이었다.
“간…… 이식이요?”
“다행히도 우리나라에서 간 이식 성공률이 꽤 높은 데다 환자분이 젊어 일단 수술만 하면 살 수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리스트에 올리기엔 환자에게 시간이 너무 없어서 간 이식 공여자가 필요한 상황이에요.”
아, 도대체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못 할 판이다.
일단, 진정하자.
승현은 잔뜩 달아오른 제 감정을 추스르며 이성적으로 되물었다.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일단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혈연관계가 있는 가족이라면 일치 확률이 높습니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혈연관계가 있는 가족이라,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그것이 빛나에겐 없었으므로.
하지만 승현은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혈연관계가 아니라도 조건이 일치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조건만 일치한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승현의 차분한 물음에 의사가 그의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기본적으로 혈액형이 맞아야 합니다. 혈액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AB형이요.”
“환자분은 O형입니다. 혹시 여기 O형은 없으십니까?”
다시 한 번 살벌한 침묵이 찾아왔다.
승현은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승준과 승희까지도 죄다 AB형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간 공여자를 위씨 집안에서 찾기란 글렀다.
결국 시선은 우빈에게 돌아갔다.
그러자 우빈은 더듬더듬 입을 연다.
무척이나 죄스럽다는 듯.
“나……는 B형이라…….”
이 일을 어찌하면 좋나.
빠른 시일 안에 간 공여자를 어떻게 찾으란 말인가.
실로 앞이 까마득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복실이 보다 못해 우빈과 승희의 틈을 비집고 나섰다.
도저히 이 패밀리를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다는 듯, 그렇게.
“아, 진짜. 내가 성질머리 나쁠 때 알아 봤어야 하는데. 사이코 패밀리 같으니.”
그러더니 손을 번쩍 들고 외친다.
“저요, 저요! 우리 엄마 O형, 우리 아빠 O형! 제가 바로 순수혈통 O형입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