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
2018.10.07.
혼이 쏙 나갈 만큼 질문이 많은 누님들을 앉히고 돌아선 위태준은 또 다른 귀한 손님이 이제 막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전부 다 오진 못했지만 보육원 아이들과 손을 잡고 들어선 이해인 수녀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조카에게 붙들려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승주를 버리고, 승준과 함께 이해인 수녀에게 다가간 위태준은 누구보다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걸음이라니요. 차까지 직접 보내주셔서 정말 편하게 왔습니다.”
“이쪽은 제 큰아들입니다. 인사드려라. 이해인 수녀님이시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슨 말씀을…… 저희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이렇게 직접 초대까지 해주시고…… 스몰웨딩이라 저희 자리까지 있을 거라곤 기대 안 했는데…….”
“당연히 오셔야지요. 우리 새아기한텐 이 아이들이 형제고 수녀님이 친정어머니 아닙니까.”
“아이고…… 무슨 말씀을…….”
이해인 수녀는 위태준의 발언에 눈시울을 붉히며 얼굴을 숙였다.
그러자 위태준은 악수를 하듯 이해인 수녀의 손을 맞잡으며 나머지 한 손으로 그 손을 토닥여주었다.
감히 상상이나 했겠나. 그 카리스마 넘치는 국회의원 위태준이 이토록 따뜻한 사람일 거라고.
맞잡은 손에서 그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와 이해인 수녀의 마음을 적시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경험하고 만나왔지만 이토록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위태준이 인사를 하러 온 그날, 이해인 수녀는 그의 손을 맞잡고 참 다행이라 여겼다.
아픈 손가락 빛나에게 이제야 진정으로 ‘아버지’란 존재가 생겼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그’라서.
“감사합니다. 부모란 존재는 자식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잖아요. 부모 없는 거, 부디…… 흠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 빛나, 많이 예뻐해주세요.”
“흠이라면, 제 자식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새아기한테 부모가 없다니요. 이렇게 훌륭한 어머니가 있는데.”
“저는…….”
“꼭 배 아파 낳아야 자식이랍니까. 감사합니다. 우리 새아기…… 저렇게 예쁘게 키워주셔서…….”
그리고 결국 그 말에 이해인 수녀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제가 주책입니다. 이 좋은 날 눈물이 나오다니.”
“앞으로도 우리 새아기한테 어머니로서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저보다 더 훌륭한 아이라 조언이라 할 것도 없지만, 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그 자리에 있겠습니다.”
위태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해인 수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승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제수씨가 바르게 자란 이유가 여기 있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배울 점이 많은 분이더구나.”
“네.”
“자, 하객들이 거의 다 도착한 모양이다. 리스트 확인해보고 출구 봉쇄해라.”
“알겠습니다.”
스몰웨딩이라 하객들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진 입구에서 경호원들이 철통 경비를 할 만큼 삼엄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경비는 몰려드는 기자들 때문이지 누군가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한 남자는 자신의 변호사 명함을 내밀고 빛나에게 중요한 서류를 전달한다는 명목 아래 쉽게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된 박중훈은 제 얼굴을 알고 있는 승준의 눈을 피해 커다란 화환 옆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이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차라리 나쁜 사람들이었으면 했다.
그가 아는 정치인들이 모두 그러하듯, 철저한 이중인격과 더불어 제 이익만 챙길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었으면 했단 말이다.
그러나 보육원 원장을 대하는 위태준의 태도는 진심이었다.
평소 엄청난 추진력과 빠른 판단력으로 따스함보다는 거역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먼저 떠오르는 위태준에게 감히 기대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때문에 박중훈의 마음은 점점 더 황폐해져만 갔다.
이 좋은 날, 그들의 가슴에 칼을 꽂아야만 하는 자신의 상황이 처음으로 후회가 되었다.
그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구분이 되었다.
그렇게 따지면 그가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게 만들어준 강민식은 그의 사람이었고, 눈앞의 위태준은 아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후회가 된다.
단 한 번도 뒤 돌아보지 않고 뛰었던 그가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그날 강민식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제 아비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제 손으로 깨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
“물 그만 마시지?”
화장실을 갔다 온 이후, 은지가 뱁새눈이 되어 빛나를 감시하며 생수병을 사수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빛나를 화장실까지 데리고 갔다 오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탓이다.
“목이 말라.”
“목이 마른 게 아니라 긴장해서 그런 거야. 네 몸은 지금 충분한 수분을 포함하고 있고, 거기서 더 들어가면 화장실로 직행이야. 그러니까 식 끝날 때까지 참자고.”
여기에 이정도 한번 거들었다.
그리고 복실은 마지막으로 남은 생수 한통을 순식간에 입에 털어 넣는 것으로 더 이상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아주 확실하면서도 빠른 방법이다.
무척이나 강복실다운.
근데 이번엔 아랫배가 살짝 아파오기 시작했다.
“음, 어쩌지? 배가 또 아프네.”
“그것도 긴장해서 그래. 너 오늘도 먹은 게 거의 없잖아.”
이정의 목소리에 빛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먹은 게 없어 아랫배가 아플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극도의 긴장감 때문이리라.
그때 신부대기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훤칠하면서도 눈부신 그 모습에 빛나의 입꼬리가 절로 치켜 올라갔다.
몰려오던 아랫배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질 정도였다.
“여보-옹!”
“우웩!”
“헉!”
“제발!”
물론 다수가 반기를 들긴 했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게다가 그녀의 기분 좋은 애교에 승현은 곧 녹아내릴 기세였고.
“아, 왜들 그래? 듣기만 좋은데.”
“여보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내 말이! 얼른 연애를 하든가 해야지.”
이정과 은지가 투덜댔으나 가장 우웩 할 줄 알았던 복실이 가만히 있자 두 사람의 시선이 몰렸다.
그러자 복실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연다.
“왜 그렇게들 쳐다봐요? 나는 빼줘. 내 여보는 지금 밖에 있거든.”
“헐, 그 여보도 자기가 네 여보라는거 아니?”
“수시로 상기 시키고는 있지. 건망증이 심해 자꾸 까먹어 탈이지만.”
“헐.”
“음, 이제 또 상기시켜줄 때가 된 것 같군. 이 김에 나는 우리 여보한테 가봐야겠다.”
“조심해라. 그 여보 지금 어린 조카한테 시달려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을 테니.”
승현의 경고에도 복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흔들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이정과 은지도 주섬주섬 일어나 자리를 피해주기 시작한다.
“15분 후면 시작이에요. 그 전에 간단하게 이야기만 하도록 해요.”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된 신부 대기실.
화사한 꽃과 조명으로 장식된 그곳엔 오늘 어느 누구보다도 예쁜 빛나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부케를 든 채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승현의 눈엔 꽃이 피었다.
“이렇게 예쁘면 반칙이지. 결혼하다 신랑 심장마비 걸리면 어쩌려고.”
“네가? 안 될 소리. 이렇게 예쁜 날 두고 억울해서 어떻게 가려고?”
그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자 빛나가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하, 유빛나…… 나를 너무 잘 알아.”
“당연하지. 위승현은 내 손바닥 안.”
“그럼…… 나, 너보다 딱 하루만 더 살다 갈게.”
“치, 하루도 많아. 나 혼자 어떻게 가라고? 나 가면 바로 따라와야지.”
“욕심쟁이.”
“그래서 싫나?”
“아니, 좋다고.”
빛나가 소리 없이 웃자 승현이 조심스레 입술을 가져갔다.
물론 그녀가 고개를 돌려 피했지만 말이다.
“왜, 뽀뽀도 안 돼?”
“안 돼. 화장 망가져.”
“뽀뽀만. 응?”
“으읏! 안 된다고-오!”
빛나가 웃으며 고개를 이리 저리 피했지만 승현은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마치 그녀의 입술에 추적 장치라도 붙여놓은 것마냥 정확하게.
“뽀뽀만. 진짜 뽀뽀만이야. 살짝. 알지?”
결국 그 집요함에 포기한 빛나가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짐을 받았지만 승현의 눈매에 웃음이 맺힌 순간 그 다짐이 헛수고라는 것을 알았다.
“응. 뽀뽀. 뽀뽀만.”
승현이 입술을 가져왔다.
이 행복한 날, 이렇게 예쁜 그녀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다.
눈으로 담았으니, 이젠 맛을 봐야겠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맛본 결과는, 늘 그랬듯 기대 이상이었다.
달콤한 입술이 그의 입술에 녹아 들었다.
그 따스한 온도와 맞닿은 순간 승현은 조금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자신에게 밀착시켰다.
“음…….”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기에 빛나는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자신을 열어주었다.
애초부터 그들에게 ‘뽀뽀만’이란 단어는 없었던 듯.
열린 입술 사이로 그의 숨결이 밀려들어왔다.
그러곤 그녀의 단 향을 힘껏 빨아 들였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섹시하고 열정적이었다.
세상에서 ‘행복’이란 단어는 모두 제 것인 것마냥 두 사람은 심장은 설렘으로 인해 폭발 직전이었다.
서로 호흡을 하지 않아 숨이 멎기 직전이 되어서야 승현은 겨우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어낼 수 있었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숨소리조차도 두 사람에겐 행복이었다.
승현은 키스로 인해 더욱 도톰해진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젠장, 책임져. 이젠…… 너 없음, 하루도 못 살 것 같아.”
잔뜩 잠긴 그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섹시하고 달콤했다.
결국 빛나는 그 귀여운 투정에 행복 가득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훗. 까짓 거 책임지지 뭐. 걱정 마. 너 두고 어디 안 가.”
“약속해.”
“약속할게.”
“사랑해.”
“나도.”
쪽.
아쉬움을 가득 담은 뽀뽀를 마지막으로 승현은 겨우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그녀의 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 죽겠다는 듯.
“여기 계속 있을 거야?”
“1분만 더.”
“그만 봐. 나 립스릭 다시 발라야 돼.”
“왜. 안 발라도 이쁜데. 그거 바를 시간에 나 한 번 더 봐.”
그는 그녀의 손을 맞잡은 채 떨어지지 않고 시선을 마주하며 장난을 쳤다.
어쩌면 좋나.
이 가슴 설레는 남자와 남은 평생을 같이 해야 하다니, 행복감에 심장 터져 죽기 않으면 다행이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준수가 들어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쨘! 나 왔지롱.”
“우리 준수, 큰아빠 곁에 딱 붙어 있으라니깐.”
“응. 근데 이상한 누나가 나보다 더 붙어 있어서 큰아빠 되게 피곤해 해.”
그 말에 빛나가 빵 터졌다.
그 이상한 누나,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애쓴다, 강복실.”
승현도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자에 앉아 준수를 끌어당겨 무릎에 앉혔다.
그러더니 이제 막 들어선 사진기사에게 한마디 한다.
“저희 가족사진 하나 찍어주실래요?”
사진 기사는 기꺼이 웃으며 셔터 누를 준비를 했다.
“그림이네. 그림. 제가 본 그림 중에 가장 훌륭한 그림입니다. 자, 그럼 찍겠습니다.”
찰칵. 찰칵.
사진을 찍는 사진기사도 한껏 들떠 있었다.
사진을 다 찍고 나온 사진 기사는 자신의 카메라에 담긴 세 사람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더럽게 닮았네. 부자지간이.”
돌아선 사진기사 등 뒤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신랑 신부의 목소리도.
보기만 해도 행복한 가족.
그래서인지 오늘 이 자리가 그에겐 더 없이 의미 있는 자리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피조물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건, 그에게도 축복이었으므로.
***
“준비되셨죠, 신부님?”
웨딩헬퍼의 물음에 빛나는 긴장감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추세웠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하이힐을 좀 낮은 것으로 선택할 것을.
괜히 승현의 훤칠한 키 맞춘다고 오버했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게 아닌가 싶을 만큼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 어떡하죠? 이러다 넘어지면.”
“긴장하셔서 그래요. 제가 뒤에서 드레스 자락 안 밟히게 잘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감사해요.”
그렇게 빛나는 헬퍼의 도움을 받아 신부대기실을 나섰다.
오늘따라 따사로운 햇살이 그녀의 웨딩드레스 자락에 부딪쳐 잘게 부서지며 더 없는 반짝임을 보였다.
“결혼하기 딱 좋은 날이죠?”
그녀의 긴장감을 완화 시켜주려는 듯 헬퍼가 물어왔다.
이에 빛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맞아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날씨가 흐리더니.”
“다 신부님 복이에요. 행복한 결혼 하시라고…….”
그 말에 빛나가 예쁘게 웃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날이지 않은가.
이 날씨에 저토록 잘난 내 남자라니.
빛나의 시선은 어느새 저만치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승현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멀리서도 그 모습이 어찌나 훤칠하고 가슴 설레는지.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수줍음에 절로 시선이 내리깔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 툭 치며 지나가자 그녀가 휘청거렸다.
놀란 빛나가 그 누군가를 바라볼 새도 없이 웨딩 헬퍼가 그녀를 붙들며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앞 좀 보고 다니시지! 신부잖아요, 신부!”
성을 내는 헬퍼의 목소리를 듣는데, 다시 아랫배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통증은 아랫배를 타고 올라와 전신을 휩쓸었다.
빛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신부님, 웃으세요. 웃어. 행복한 날이잖아요.”
헬퍼의 말에 그녀는 애써 웃음을 보여야 했다.
그래, 행복한 날이다.
웃자.
***
드디어 식이 시작되었다.
이정과 은지의 예상을 뒤엎고 복실의 손에서 흘러나온 피아노 선율은 더 없이 아름다웠다.
따스한 햇살, 산들거리는 바람.
결혼하기 더 없이 좋은 날.
모든 이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쏠렸다.
이제 신랑 신부가 입장을 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승현은 저만치에서 웨딩헬퍼의 도움을 받으며 걸어오는 빛나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보였다.
저 여자가 이제 내 여자라니.
언제쯤 이 행복감에 익숙해지려나.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꿈속을 헤매다 갈지도.
따스한 햇살을 받은 신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
어디 그뿐이랴.
그 눈에 가득 담은 행복 또한 그녀가 이 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그렇게 아름다운 신부에게 승현은 손을 뻗었다.
가볍게 맞닿은 손에서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을 힘 있게 쥐어 제 팔에 끼우려는 순간, 승현은 불연 듯 스치는 섬뜩한 느낌에 온 몸을 떨었다.
제 손끝을 쥐고 있는 빛나의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가볍게 팔짱을 끼워야 하는데 빛나는 그의 손을 사납게 마주 쥐고 놓질 않았다.
도대체, 왜?
“빛나야…….”
놀란 눈을 들어 그녀를 마주한 순간, 승현은 숨이 멎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행복감으로 반짝이던 그녀의 눈이 그 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음…… 승현아…… 나…… 이상해…….”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승현은 너무 놀라 그녀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야 했다.
덜덜 떨리는 그녀의 손으로부터 부케가 떨어지자 붉은색으로 물든 웨딩드레스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붉은 색은 저항할 수 없는 암세포처럼 그녀가 입은 하얀 웨딩드레스를 점점 잠식해 들어갔다.
동떨어진 현실감에 승현은 비명소리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순백의 아름답던 그의 신부는 어느새 핏빛 신부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빛나는 그가 보는 바로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다.
잡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왔지만 승현은 마치 꿈을 꾸듯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니, 이건 꿈일 거야.
꿈이어야 했다.
가장 행복한 그들을 시기하던 악몽의 짓궂은 장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비규환이 된 식장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뭐라 소리치고 있었지만 마치 멈춰버린 시간처럼 승현에겐 더디게 플레이 되었다.
귓가를 울려오는 비명 소리도 마치 딴 세상인 듯 그가 윙윙거림으로 들려올 뿐이다.
“이거…… 꿈이지?”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나, 빛나의 출혈을 틀어막으며 미친 듯이 소리치는 복실의 목소리에 그는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잡아! 잡아야 돼, 오빠! 여긴 내가 있을 테니 가서 이 새끼 잡아와! 당장!”
승주가 돌아섰다.
그리고 승현은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 완벽하게 깨어나고 만다.
그제야 극도의 공포감이 그를 에워쌌다.
사람이 너무 무서우면 비명소리조차도 내지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도 차올랐다.
그러나 승현은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울음소리도 낼 수도 없었다.
-젠장…… 책임져. 이젠…… 너 없음, 하루도 못 살 것 같아.
그런데, 얼굴을 적시는 이 따스한 결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태어나 이토록 두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그는 이토록 완벽한 날,
-걱정 마. 너 두고 어디 안 가.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하…… 안 돼, 빛나야……흐흑.”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