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함께 살겠습니다!
2018.09.26.
“승헌이는 내가 픽업할게. 그리고 오늘은 좀 늦어. 새로 살 집 주인과 딜을 하러 갈 거거든.”
빛나가 웃으며 돌아섰지만 멀리 갈 수는 없었다.
승현이 팔을 잡아 다시 제 앞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뭐야, 그냥 가기?”
“주차장이야. 그러니까 제발 좀…….”
자제해, 라고 말을 마무리해야 옳았지만 빛나는 끝끝내 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내려앉은 그의 입술이 그녀의 마지막 말을 아주 달게 집어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짧지만 엑기스만 담은 그의 키스가 순식간에 왔다 갔다.
그녀의 얼굴에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 스킨십이건만, 왜 매번 할 때마다 새롭고 설레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위승현, 혹시 너 나한테…… 약 먹였니?
“맞지? 우리 아파트 산다고 내가 그랬잖아.”
“진짜네!”
속닥이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빛나가 주변을 둘러보자 한 중년 부부가 그들을 보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승현은 애정행각을 버젓이 들키고도 무척이나 당당하다.
“저희 연애해요!”
“어머, 알아요!”
“곧 결혼도 해요!”
“그것도 알아요! 행복하게 사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의 뻔뻔함에 중년 부부는 키득 키득 웃으며 사라졌다.
이에 빛나의 얼굴은 거의 홍당무 수준이다.
“아, 정말 못 말려! 그걸 굳이 그렇게 이야기해야 돼?”
그녀는 그의 가슴팍을 밀치며 벗어나 제 차로 걸어갔다.
물론 그냥 놔줄 생각이 없다는 듯 승현이 그 뒤를 따랐지만 말이다.
“본능이야. 나는 막 자랑하고 싶거든. 못 참겠어.”
“공개 프러포즈로 만족 안 돼?”
“그건 이거랑 다른 문제. 내 꿈이었고.”
“뭐라고? 꿈?”
빛나는 운전석에 오르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승현은 열린 차 문을 붙들고 지긋이 고개를 숙이며 진지하게 입을 연다.
“그래, 꿈. 사실은 말이지…… 너도 알다시피 집이 그러다 보니 남들은 다 하는 평범한 연애, 제대로 못 했어. 감정이 심각해지기 전에 먼저 발을 뺄 준비를 했지. 그래서 결심했었어. 진짜 내 여자를 만나면…… 이 여자, 내 여자다 싶으면…… 그때 떠들썩하게 연애 한번 해보기로. 그것도 공개적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순간, 승현이 처음 일방적인 공개 연애를 선언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나, 공개 연애 할 거야.
빛나를 혈압 터지게 만들었던 그 한마디에 이렇게 감동적이고 심오한 뜻이 있었을 줄이야.
“그 한 번이…… 바로 너였어.”
“…….”
“난 처음부터 끝까지 이 연애 하나에 목숨 걸었다고.”
“…….”
“너랑 여기까지 못 왔으면 나…… 머리 깎고 땡중이 됐을지도.”
“퍽이나, 천하의 위승현이.”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이래봬도 두상이 겁나 이뻐서 머리를 깎아도 봐줄 만했을걸? 스타 땡중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 와중에도 자랑질이다, 정말.
스타 땡중이라니.
위승현다운 발상이라 생각하며 빛나가 웃었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저 화상을 평생 어떻게 감당하누.
절로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감동으로 가슴 한켠이 먹먹해졌다.
그런데 어쩌나. 이젠 정말 시간이 없는데.
“나 정말 가봐야 돼. 그거 알지? 아침에 승헌이보다 너 떼어내고 나가는 게 더 힘든 거.”
“사랑해. 그런 의미에서 뽀뽀 한 번만 더.”
결국 그는 빛나에게 진한 키스 세례를 한 번 더 받고서야 붙들고 있던 차 문을 놔주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차 사이드미러로 아직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승현을 보았다.
행복감에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
“그래서 새 아가는?”
“아, 집 계약 마무리하러 가고 있을 거예요. 그거 끝나면 좀 이따 일곱 시쯤에나 오겠죠?”
“집?”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위태준이 결혼식에 입을 슈트를 챙기기 위해 집에 온 승현의 말에 승준이 먼저 반응했다.
“너네 살던 집 그대로 사는 거 아니었어?”
“응. 그러려고 했는데 거기서 납치될 뻔한 일도 있고 해서 살기 그런가 봐.”
승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소파에 앉아 녹차 한 잔을 마시는 위태준에게 물었다.
“근데 아버지…… 골프채, 새로 사셨나 봐요?”
“푸훕!”
뜨거운 녹차 한 잔이 목에 탁 걸리는 순간이었다.
“있던 거야.”
“아닌데, 새 건데?”
“누가 줬다.”
“뇌물 받으신 거예요?”
“아니다! 물물 교환했다!”
“아버진 뭘 주셨는데요?”
바로 너!
하지만 그 대답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위태준이었다.
되도록 죽는 그 순간까지 묻어둬야 할 비밀.
만일 승현이 안다면, 그래서 자신이 골프채에 팔려 갔다는 걸 안다면, 더 나아가 위태준이 마트에서 파는 1+1 상품도 아니고 아예 프리 선언을 했다는 걸 안다면, 저 지랄 맞은 자존심에 돌지 않고는 못 견디리라.
결국 위태준은 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적당한 주제를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근데…… 애는 언제쯤 볼 수 있는 거냐?”
“아, 승헌이요? 좀 이따 집 계약하고 빛나가 데리고 올 거예요. 왜요, 벌써 보고 싶으세요?”
그가 웃으며 하는 말에 승준은 위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승현이랑 그렇게 닮았다면서요? 어떻게 그래요?”
“말도 마라. 너도 보면 놀랜다. 어렸을 때 승현이랑 어찌나 그렇게 똑같은지, 내가 유전자 검사 한번 해보자고 했다.”
“이거, 은근 기대되네. 아버지 기분은 어떠세요? 처음으로 친손주 생기신 거 아니에요?”
“뭐, 아직 내 품에 안아보기 전까진 실감이 안 나지. 근데…… 이름은 그대로 쓸 거냐? 어디서도 부자지간에 돌림자 쓰는 법은 없다. 애 이름 바꿔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생각 중인데 아버지가 지어주실래요?”
“그래도 되겠냐? 안 그래도 내가 몇 개 생각해놓은 게 있긴 한데…….”
위태준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벨소리가 들려와 세 사람이 대화가 끊겼다.
“누구예요, 아줌마?”
“아, 무슨 배달 왔다는데요?”
“배달? 무슨 배달?”
승준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승현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승준의 성격상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왜, 형?”
“우리 집으로 침대 배달 왔는데?”
“침대? 웬 침대? 아버지 침대 시키셨어요?”
“아니, 난 안 시켰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위태준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 하지만 승준은 종이 한 장을 승현에게 내밀며 말했다.
“제수씨가…… 시켰는데?”
“뭐? 그럴 리가!”
승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송장을 바라보았다.
그 송장에는 침대가 전부가 아니었다.
화장대부터 서랍장에 장식장까지, 웬만한 신혼살림은 전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송장을 읽는 순간, 번뜩 스치는 불길한 생각 하나.
“설…… 마.”
오늘 집주인과 새로 살 집 딜을 한다더니…….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잘못 배달 온 걸 거야.
그러나, 그와 꼭 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 육중한 대문을 넘어서는 빛나를 보며 참담함에 눈을 감아 버렸다.
승현이 그러거나 말거나, 빛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와 천진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들, 할아버지랑 큰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위승헌입니다.”
아이를 보는 순간 승준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승현은 폭탄을 맞은 사람마냥 머릿속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빛나가 웃고 있다.
그런데 저 예쁜 웃음에 왜 이리도 피가 바짝 마르는지.
“저기 빛나야, 나랑 이야기 좀…….”
“잠깐, 나 아버님이랑 먼저 이야기 좀 하고.”
“아니. 그러기 전에 나랑 먼저…….”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새까만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는 그의 심장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선을 위태준에게 돌렸다.
“새집 계약하러 갔다더니?”
“네. ‘그 집’ 계약하러 왔어요.”
“응?”
“아버님…….”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내뱉으면 돌이킬 수 없을지 모르니!
“안-돼-에!”
승현이 빛나의 막아보고자 손을 뻗었지만 그녀가 한발 빨랐다.
“저희, 여기서 함께 살겠습니다!”
설마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리고 소파에 정 자세로 앉아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다시 들었을 땐, 잘못 들은 것도 아니요, 환청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빛나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앉아 처음과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저, 여기서 살겠습니다.”
위태준은 눈을 크게 떴다.
그 곁에 있던 승준도 목이 막힌 듯 다 식어버린 티 한잔을 원샷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건 다름 아닌 승현이다.
그래서 그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왜?”
그러자 위태준도 헛기침과 함께 간신히 입을 떼었다.
“아가야…… 네가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나는 결혼한 자식들까지 줄줄 끼고 살 만큼 고지식한 시아비가 아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제가 고지식해서요.”
뜨아…….
위씨 집안 세 남자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바늘로 찔러도 틈이 생기지 않을 만큼 빛나는 견고했다.
하지만 여기서 밀릴 수가 없는 승현이다.
신혼이 아닌가.
봐도 봐도 또 보고 싶고, 같이 있어도 더 붙어 있고 싶은, 알콩달콩 신혼.
그런 신혼을 이렇게 많은 남자들 틈에서 보내고 싶진 않았다.
물론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이었지만, 그래서 함께 살면 더없이 좋겠지만 적어도 신혼은 아니었다.
“빛나야, 그건 말이지…… 나한테도 상의를 해야 하는 거 아냐? 나도 같이 살 집인데?”
“저번에 했잖아.”
승현이 조심스럽게 든 반기에 빛나의 당돌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어, 언제-에?”
너무 놀란 그가 더듬더듬 되물었을 땐,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한 그의 멘탈을 대변해주듯 목소리마저도 갈라져 나왔다.
“저번에.”
“도대체 언제?”
암묵적으로 집은 빛나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게다가 집은 여자의 꿈이 아니던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빛나에게 그 전권을 넘기는 것이 그녀만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부메랑이 되어 그의 뒤통수를 치리란 생각은 꿈에도 못 한 채.
“저번에, 그때…… 나, 일 그만둔다고 선언한 그날…… 생각 안 나?”
“일 그만둔다고 선언한 그날?”
그날이라면…….
승현이 생각에 잠겼다.
그래.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하다.
그녀가 일을 그만둔다고 선언한 그날, 다른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네가 그랬잖아. 내가 원하면 뭐든지…… 해주겠다고.”
유독 뜨거웠던 그날 밤을 상기시켜주는 그녀의 한마디에 승현은 번개를 맞은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생각났다.
그녀가 미치도록 섹시한 반칙의 여왕으로 거듭난 그날 밤, 그와 동시에 그가 희대의 YES맨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래…… 뭐든지. 네가 원하면 뭐든지…….
그리고 그 뒤는 가물가물하다.
온몸의 모든 신경세포가 그녀가 주는 감각에 폭발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가족이 많은 집에서 살고 싶었어. 북적북적, 사람들이 붐비는 집.
-좋아…….
-그래서 말인데, 본가는 어때? 아버님도 외로우실 것 같고…….
-YES…….
-또…… 그러니까…….
그의 필름은 거기서 끊겼다.
그다음부턴 빛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앵무새 같은 그의 대답만이 메아리처럼 그의 대뇌를 뒤흔들 뿐이다.
-알았어. 네 맘대로, YES.
-콜!
-무조건…… YES!
결국 승현은 제 머리털을 쥐어뜯을 듯 감싸 쥐어야 했다.
“으아악-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러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우아하게 앉아 있는 빛나에게 소리를 내질렀다.
“이건, 반칙이지! 그땐 내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잖아!”
그의 반응에 빛나는 말간 눈으로 되물었다.
“아니, 왜?”
“그러니까, 그게…….”
“머리를 다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취한 것도 아닌데 왜 정상적인 사고를 못 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저런, 발칙한 여자를 봤나!
그날 일을 다시 떠올리는 승현은 귓불까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결국은 말도 못 하고 끙, 하는 앓는 소리를 낸다.
그 반응에 위태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어왔다.
“그럼…… 너도, 이 일에 동의를 했단 말이냐?”
“당연히 저 사람 동의도 얻었죠. 그때 분명, 무조건 YES라고 무려 세 번이나 외치는 걸 제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아버님!”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가 그날 YES맨이 되었던 건 사실이니까.
어떤 의견에 동의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을 뿐.
“젠장!”
“했네. 했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승준이 그 말을 되풀이했다.
답답함에 승현은 빛나의 곁에 앉아 마지막 희망인 위태준을 바라보았다.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라면, 견고한 빛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아버지,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네?”
“그러니까, 승현이도 동의했다고?”
“네, 아버님. 그렇다니까요.”
“아무래도 저 녀석이 단단히 미쳤던가 보구나.”
졸지에 미친놈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좋다.
꿈 같은 신혼을 두 사람이서 보낼 수만 있다면.
“어쨌든, 아가. 네 마음은 이해가 된다. 결혼도 급하게 서둘렀고, 집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겠지. 그렇다면 지금 있는 승현이 집에 살면서,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구해보는 건 어떠냐?”
그렇지, 우리 아부지 잘한다!
승현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제 무릎에 있는 손을 꼭 그러쥐었다.
이쯤에서 그도 한마디 해서 지원사격을 해야만 했다.
유빛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므로.
“그래, 빛나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결혼이 급해서 집까지 그렇게 생각했다면 우리 시간을 좀 가지고 지금 있는 집에 살면서…….”
그러나 줄줄이 흘러나오던 그의 목소리는 빛나의 단호한 말투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녀는 승현이 아닌 위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버님, 저도 그 방법을 생각 안 해본 거 아닌데요. 이젠, 상황이 변해서요.”
“상황? 무슨 상황?”
“저희…… 애가 있잖아요. 우리 승헌이. 저희가 사는 동네가 부촌이긴 하지만 대부분 결혼을 안 한 남녀가 사는 지역이라 학군이 별로예요. 게다가 주변에 유흥업소도 너무 많구요. 애 교육에 안 좋아요.”
“뭐…… 라?”
놀란 승현이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저와 똑 닮은 승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그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아가, 그건…….”
“승헌이, 오늘 집에서 큰길까지 엄마 차 타고 나오면서 뭘 봤지?”
“음…… 스타킹에 속옷만 입은 누나들. 배도 다 내놓고. 담배 피우는 아저씨들. 그리고 문 닫은 가게들?”
아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빛나는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가게들은 문을 닫은 게 아니라 주로 밤에 문을 열기 때문에 닫아놓은 거야. 싱글 남녀가 즐길 수 있는 바나 술집이 대부분이라. 그리고 스타킹에 속옷만 입은 게 아니라 거기에 헬스장이 있어서 운동복을 입은 거야. 요즘 젊은 누나들은 전부 그렇게 입고 운동하거든. 레깅스에 탑브라만 걸친 채.”
위태준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리고 곁에 있던 승준도 할 말을 잃은 듯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보니까 여긴 대부분 가정이 있는 큰 집들이 전부라 동네도 조용하고 애들 위주의 놀이시설도 많고, 공원도 꽤 넓더라구요. 무엇보다 학군도 좋고.”
“그렇긴…… 하…… 지…….”
밀리고 있었다.
천하의 위태준이…… 분명히 밀리고 있었다.
“그리구요,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외롭게 자랐잖아요. 그리고 우리 승헌이도 지금까지 그렇게 자랐고. 저는요, 단 한 번도 부모님이란 존재를 느껴본 적이 없어요. 물론 원장 수녀님이 잘해주긴 하셨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니까.”
“…….”
“사람 많은 집에서 살고 싶었어요. 아니, 사람 냄새 나는 집에서 살고 싶었어요. 저도…… 부모님 밑에서 다른 자식들처럼 사랑받고 살고 싶어요.”
“그 사랑, 내가 줄게! 나 하나로 만족 못 해?”
승현이 버럭 소리를 지르다시피 말했지만 빛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반박했다.
“네가 주는 사랑과 그 사랑은 근본적으로 달라. 알면서! 나도…… 부모님하고 같이 살아보고 싶다고!”
그랬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쳐들어온 건, 승헌 때문이 아닌 순전히 그녀의 욕심이었다.
그녀에겐 이 결혼이 단순히 승현과의 부부 연을 떠나, 태어나 처음으로 진짜 가족이 생기는 순간이었으니까.
“아버님, 제가 잘할게요. 승희 아가씨처럼, 딸처럼…… 정말 잘할게요.”
“아버…….”
아버지,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라고 소리쳐야 했지만 승현은 마지막 말을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위태준의 넋 나간 표정이 빛나의 승리를 암시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승헌이도 좋지? 천하무적 할아버지에, 트랜스포머 같은 큰아버지가 둘씩이나 있어. 겁나 이쁜 고모에 돈 많은 고모부도 있는데 일단 두 사람은 따로 사니까 어쩔 수 없고.”
“그럼 우리 다 같이 살아?”
“당연하지!”
“야호!”
아이의 환호성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
빛나는 웃으며 여전히 넋 나간 위태준에게 물었다.
“아버님, 아저씨들 너무 많이 기다리네요. 짐…… 어디로 옮기면 되죠?”
그러자 위태준은 손가락으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키며 대답한다.
“2층…….”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빛나가 일어나 현관 밖에서 대기 중인 아저씨들에게 가구를 2층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러곤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신이 나 2층으로 올라가버린다.
빛나가 사라지자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승현이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혀서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빛나가 아무리 변호사라지만…… 아버지도 변호사셨잖아요! 형은 현직 검사고! 어떻게…… 어떻게…… 한마디도 못 할 수가 있어?”
그랬다.
빛나가 아무리 언변의 달인이라지만 눈앞에 있는 두 사람도 말이라면 지지 않는 언변의 장인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렇게 밀리다니!
그러나 정작 당한 본인들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순간인 건 마찬가지다.
도대체 뭐가 왔다 갔나 싶을 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승현이 몰아치니 대답을 아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위태준은 아직까지도 가출한 멘탈을 부여잡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내가…… 일을 손에 놓은 지 오래라…….”
그러자 승준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건, 내 분야가 아니라서 말이지…….”
결국 승현은 폭발하고 말았다.
“아악! 진짜!”
참으로 고된 하루가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위승현 수난 시대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으니.
그는 앞으로 닥칠 진짜 하이라이트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빛나를 쫓아 2층으로 올라갔다.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빛나야, 빛나야? 제발…… 내 이야기 좀 들어볼래? 응?”
그렇게 승현이 사라지자 위태준은 참담함에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망했다. 내가…… 쟬…… 어떻게 쫓아냈는데…….”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