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최종변론 같은 증언
2018.09.23.
빛나는 책상 캘린더에서 유난히 빨갛게 동그라미를 쳐 놓은 날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강석훈의 공판 날짜, 이틀 뒤로 성큼 다가왔다.
과연, 그녀는 잘할 수 있을까.
용기는 냈지만 막상 변호인이 아닌 증인석에 서야 하는 상황이라 그 어떤 것도 보장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정이 들어와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 강희진 씨라고…… 찾아오셨었어요.”
“강희진?”
빛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이름을 되새김질 하자 선정은 곱게 접힌 메모지 하나를 건넸다.
“약속을 잡고 온건 아닌데, 이거 주고 가시더라구요. 변호사님께 꼭 전해달라면서.”
선정이 나간 후 빛나는 메모지를 조심스럽게 펴보았다.
주인의 성격을 드러내듯 정갈한 글씨체가 그녀의 눈가에 아릿하게 박혀온다.
그제야, 빛나는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 숨겨진 강희진이란 이름 석 자를 떠올렸다.
***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쪽에 얌전히 앉아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빛나는 선 듯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메모 한 장에 발걸음을 하긴 했지만 쉽사리 마주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희진.
원준의 아내이자 강민식의 딸, 그리고 강석훈의 여동생.
그중 어떤 것으로도 빛나에겐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서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고개를 든 강희진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예전 스시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눈에 띄게 수척해져버린 얼굴이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아뇨. 조금 전에 마시고 와서요.”
“아, 네…….”
희진은 그녀의 눈을 제대로 마주보지 못한 채 시선을 떨구었다.
빛나는 처음으로 희진의 생김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단정한 이목구비가 시선을 끄는 미인이었다.
따로 만났더라면 강씨 집안의 사람일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생김새.
그래서였을까.
빛나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강희진은 지옥 길을 걷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흔들릴 수는 없었다.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는지 대충 짐작은 갑니다.”
빛나는 단호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희진은 놀란 시선을 들어 잠시 당황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요, 제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증언…… 할 겁니다.”
“저는…… 부탁하러 온 게…… 아닙니다.”
“…….”
“그냥,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꼭,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순간 빛나는 넋을 놓았다.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던 말들이 희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탓이다.
“감사해요. 아빠랑 오빠가 죗값을 치를 수 있게 해주셔서.”
“…….”
“그리고…… 원준 오빠를…… 제 품으로 돌려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말을 하는 희진의 목소리가 꽉 잠긴 탓에 떨려 왔다.
덕분에 앞에 앉아 있는 빛나조차도 그녀의 감정선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마음은 비할 바 없이 고통이나, 그것이 순리.
때문에 희진은 빛나를 만날 용기를 낸 것이다.
“숨이…… 막혔습니다. 그동안 집에서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쳤어요. 원준 오빠라면…… 그 숨 막히는 집안에서 저를 구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든요.”
“…….”
“원준 오빠를 처음 본 순간 알았어요. 이 사람은 나랑 같은 눈을 하고 있구나. 서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니 사랑은 없더라도 서로를 위로하며 살 수는 있겠구나…….”
그제야, 빛나는 그녀 아니면 죽을 것 같던 원준이 파혼 후 단 3개월 만에 이 여자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준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진 천성대로 끝까지 상처 받은 이를 쉬이 지나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제 이기적인 욕심이었습니다. 제가 집으로부터 도망친 게 아니라…… 그 지옥으로 오빠까지 끌고 들어온 셈이니까.”
“…….”
“내가 그랬듯, 오빠도 거기서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생각만 하면 심장이 먹먹해지는 듯 희진은 깊은 심호흡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치 뭔가를 먹다 체한 사람처럼.
그 모습이 안타까워 빛나는 물 한잔을 희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감사…… 해요.”
희진은 물 한 모금을 들이켜더니 호흡을 골랐다.
그러곤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한다.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저희 아빠랑 오빠, 이 방법밖에 없었다는 거 압니다. 그래서…… 저, 원망 안 해요. 이렇게 해서라도 두 사람이 죗값을 치를 수만 있다면…… 저는 그 길이 옳다고 봅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빠랑 오빠를 위해서.”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만 자라온 줄 알았다.
하지만 희진은 강한 여자였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생각해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난 희진 씨가…… 내게 부탁을 하러 온 줄 알았거든요. 저번에 어머니처럼. 그래서 막장 드라마 시나리오 몇 편 들고 이 자리에 온 건데…… 예상 밖이네요.”
“아, 어머니요.”
순간 송 여사의 이야기가 나오자 두 여자는 뭔가가 통한 사람들처럼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좀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죠?”
빛나의 물음에 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저한테 이혼을 종용하시더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지면 안 돼요.”
“당연하죠. 아빠, 오빠도 버틴 저예요. 어머니 정도는…… 참아낼 수 있습니다. 오빠를 위해서라면.”
“그래요.”
송말례 여사, 인생 피곤해지게 생겼다.
얌전한 줄 알았던 며느리가 의외로 복병이 되었으니.
“그렇게 버텨요. 원준 오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 말에 희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원준을 생각하며 떠올린 그 미소만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아릴 만큼 예쁜 웃음이었다.
“하지만 저…… 아빠랑 저희 오빠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어쨌든 가족이니까.”
“당연하죠.”
“그러니까 제 말은…… 어떻게든 그 죗값을 벗어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옥바라지 열심히 하겠다구요.”
그 말에 빛나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강민식에게서 이런 딸이 나왔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눈앞에 있는 강희진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디야?]
[어디야?]
똑같은 메시지를 성질 급하게 두 번씩 보내는, 위승현 되시겠다.
안 그래도 이쯤이면 점심시간이라 찾을 때 되었다 생각했다.
“죄송해요. 답장 안 하면 같은 메시지를 열 번도 보내는 사람이라.”
“네. 저는 괜찮아요.”
양해를 구하고 빛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 앞 카페야. 그리고 메시지 한 번씩만 보내! 제발!]
그러곤 다시 눈앞에 있는 희진을 바라보았다.
“바쁜데 제게 너무 시간을 내주신 거 아닌가 몰라요.”
“아니에요. 희진 씨 만나, 기분이 좋았어요.”
“다행…… 이네요.”
빛나가 일어나자 희진도 덩달아 일어섰다.
빛나보다 다소 작은 키에 훨씬 왜소해 보이는 체구였다.
저런 몸에서 어찌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그래서 빛나도 희진에게 용기를 내었다.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희진은 그녀에게 안겨왔다.
빛나는 그 작고 힘없는 체구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요, 이런 용기 내줘서.”
“…….”
“이제야, 내 과거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바로…… 희진 씨 때문에.”
그랬다.
원준을 사랑했던 과거. 그리고 닥쳐온 파혼.
그저 쓰리고 부끄럽기만 했던 상처였다.
하지만 눈앞에 이 여린 여자가 그런 빛나의 부끄러운 과거까지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녀가 온전히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진심이 희진에게까지 전해졌다.
결국 희진은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으니.
한참을 다독이고 나서야 눈물을 그친 희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 투명한 유리 너머로 헐레벌떡 차에서 내려서는 원준이 보였다.
“우리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인가 봐요. 우리 두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저 남자…… 모르긴 몰라도, 숨도 제대로 못 쉴걸요?”
“흑, 하하. 맞아요.”
희진이 동조한다는 듯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빛나가 돌아서 카페 문으로 다가서자 원준이 들어섰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폼이, 그저 애가 닳은 모양이다.
하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 모르니 서 있는 자리가 가시방석일 수밖에.
그런 원준의 가슴을 툭 치며 빛나는 기분 좋게 한마디 흘렸다.
“여튼…… 여자 보는 눈은 끝내줘요, 진짜.”
“그게…….”
“잘해! 오빠한테 과분한 여자야!”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빛나는 원준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곁으로 희진이 웃으며 다가와 방금 빛나가 쳤던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한마디 했다.
“왜, 내가 사고라도 칠까 봐…… 여기까지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온 거예요?”
“아니, 나는…… 네가 빛나한테 잡아 먹힐까 봐.”
“흠, 오빤 나를 아직도 모르네. 우리 진짜 더 많이 친해져야겠다. 그쵸?”
그렇게 고개를 돌리는 두 사람의 시선으로 이제 막 도착한 승현이 보였다.
차에서 내려선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빛나에게 다가온다.
그러자 그녀가 뭐라고 소리를 쳤다.
멀리서 봐도 팽팽한 긴장감.
날이 선 두 사람.
“저 두 사람…… 만천하가 인정한 공개 커플 아니에요?”
그랬다. 공개 커플.
그래서인지 싸움도 공개적으로 한다.
원준은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는데 또 싸우네. 징그럽다, 정말.”
그렇게 말하면서도 원준은 보았다.
서로를 죽일 듯 바라보는 눈매와는 달리, 그들의 입매는 여전히 웃고 있음을.
***
숨 막히는 긴장감이 법정 안을 가득 메웠다.
검사측에서 내놓은 증거와 증인들은 석훈을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옭아매었다.
때문에 이 재판의 관건은 무죄가 아니다.
감형이었다.
석훈의 변호인은 그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떻게 해서든 석훈이 약물 중독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였다, 우겨보는 것이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
게다가 그들은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저희는 유빛나 씨를 증인으로 모십니다.”
변호사와 눈빛을 주고받은 석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왔다, 마지막 한 수.
빛나가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그녀의 외모는 단정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장내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그녀가 증인석에 앉았다.
그제야 줄곧 감흥 없던 승준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여전히 그 뜻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으나, 빛나의 존재가 새로운 변수가 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검사 측이야, 새로운 피해자를 데려와 그의 추가 범행을 입증하려 하겠지만 어림없는 소리.
오늘 빛나는, 그들의 돌파구가 될 것이다.
석훈은 유난히도 예뻐 보이는 빛나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너 오늘 이 자리에 잘못 나왔어.
숨으려면, 끝까지 숨어 있었어야지.
하지만 석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흔들림이 없었다.
“아, 저희가 아직 정리가 안 돼서 그러는데…… 저쪽에서 먼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양해 부탁드립니다.”
승준이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그런 그를 보며 판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철저하기로 소문난 위승준 검사가 아직 정리가 안 됐다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변호인만 OK 한다면 재판 과정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 아니라 판단하여 판사는 시선을 돌렸다.
“먼저 하겠습니까?”
판사의 물음에 석훈의 변호인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사 측 증인을 피고 측 변호인이 먼저 질문한다는 건 이례적인 케이스였지만 변호인 또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생각했다.
그들에게 당하고 나면 너무 정신이 없는 나머지 검사 측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할 수도 있으니,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거절할 필요가 없단 이야기다.
그래서 변호인은 자리에서 나와 빛나에게 다가갔다.
“먼저 묻겠습니다. 증인은 이 자리에 왜 나왔습니까?”
검사 측의 의도라 의심되는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려는 질문.
예상했던 질문이라 빛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저도 피해자입니다.”
“피해자라구요? 하지만 범행이 있다 주장하는 작년 11월 30일엔 그 어떠한 신고도 접수되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피고가 마약 투여 혐의로 공식적인 기록이 남은 날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단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지요?”
“그때는…… 무섭고 당황스러웠습니다.”
“본인 직업이 변호사 맞지요?”
“네.”
“누구보다 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변호사가 무섭다는 핑계로 성폭력 사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점을 넘겨 신고도 하지 않았다……라. 하지만 추후에라도 사건을 되짚어볼 시간은 얼마든지 있지 않았습니까?”
“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피고가 저질렀다 말하는 성폭행 미수 건에 대해선 그 어떤 증거도 없는 거네요. 본인이 피해자란 것도 증명할 수가 없는.”
“네.”
간사한 변호사의 질문에 빛나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 현장에 증인이 없었다는 건 아니니까. 저희도 그 현장 CCTV를 보았습니다. 증인이 그 파티에 있었단 사실은 명확하더군요. 그럼 여기서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증인은 피고를 보았습니까?”
“네.”
“그럼 그날 피고인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
“피고인의 상태가 어땠냐고 물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이 노리던 한 수가 나왔다.
피해자로서의 빛나 신분을 모호하게 만들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사살 시켜줄 마지막 한 수.
“증인, 대답하세요.”
대답을 망설이는 빛나에게 판사의 엄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제야 꾹 다문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 시작했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제정신이 아니었죠?”
“시선이 흐렸습니다. 저의 신분과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약에 취한 것 같진 않았습니까?”
“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쯤은 분명히 알만큼 의식은 또렷했습니다.”
“의식이 또렷했다는 건, 증인의 주관적인 의견이고. 어쨌든 피고가 약에 취해 있었단 사실은 객관적인 사실이네요. 저희는, 이상입니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한 변호인이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다.
저 멀리, 언제 들어왔는지 좌석에 앉아 있는 승현의 모습이 보였다.
상대측 변호인에게 당하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럽다는 듯 평소 살짝 끝이 모인 그 발랄한 눈매가 오늘따라 유난히 처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빛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스친 석훈의 얼굴에서 승리를 예감한 듯한 비릿한 웃음을 보았다.
하지만 틀렸다.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드디어 승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다 일어나자 유난히 훤칠한 그의 키와 다부진 체격이 장내를 꽉 채우는 것 같았다.
신뢰감이 드는 그의 선한 눈매가 그녀에게 말했다.
잘, 버텼어요.
그래서 그녀는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드릴 질문은 딱 하나입니다.”
“…….”
“저쪽 말대로 증인이 피해자라는 신분은 그 어떤 것으로도 증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
“그렇다면, 증인. 증인은……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왜 서 있는 겁니까.”
그렇게, 그들의 마지막 반격이 시작되었다.
“저 인간이, 얼마나 파렴치한인지……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섰습니다.”
순간 그렇지 않아도 조용한 장내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살인적인 침묵이었다.
그 속에 유일하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도 너무 또렷해서 귓속 달팽이관을 타고 대뇌를 거쳐 모든 이의 심장으로 전달되었다.
“저는, 보육원 출신입니다. 그리고 저는 겁쟁이입니다. 누구보다 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변호사가, 가장 유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상황이 두려워 도망쳐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상황에서 그리 오래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제 보육원에서 자원봉사자라며 찾아온 강석훈과 마주해야 했으니까.”
“아이러니하네요. 피고가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이 말입니까?”
“그런 의미의 사회봉사가 아닙니다. 제가 도망쳤던 그날, 마약 혐의로 구속된 강석훈이 사회봉사 처분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자리니까. 그런데…… 이해가 가십니까? 어떻게 마약 혐의가 있는 전과자가…… 더불어 성폭력 전과자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사회봉사를 나온답니까? 이게…… 말이 되는 처사입니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런 인간이 아이들과 한 공간에 숨 쉬고 있다는 그 사실을.”
여기저기서 숨을 훅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폭력 전과를 인정한 석훈이 아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단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법의 폐해입니다. 죄인을 벌해야 할 법이, 죄 없는 아이들을 위험에 노출시켰습니다. 압니다. 그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는 거. 그만큼 강석훈은 간사한 인간입니다. 법의 약점을 자신의 이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드러난 죄에 대한 죗값을 약물 중독으로 빠져나가려는 바로 지금처럼.”
석훈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죄가 있는데, 약물 중독으로 심신미약 상태에 있다 하여 감형이라니요. 틀렸습니다. 상습적인 약물 중독으로 인해 범행을 저질렀다면, 그것 또한 처벌받아야 할 마땅한 죄라고 생각합니다. 감형의 이유가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한 말투였다.
현명한 눈만큼이나 설득력 있는 그 말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생겨났다.
그렇게, 석훈은 또 한 번 궁지로 몰렸다.
“보육원 아이들, 부모가 없는 아이들? 아닙니다. 그 아이들에게도 엄연히 부모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다름 아닌……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부모가 있는 아이들입니다.”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검은 눈이 석훈을 향했다.
순간 석훈은 온몸에 쭈뼛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말하고 있다.
이번엔 못 빠져나가.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법은 사회 질서를 거스르는 죄인들을 벌하고, 죄 없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빛나는,
“이번에는 국가가…… 그리고 법이, 그 아이들을 지켜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석훈의 도주로를 완벽하게 차단해버렸다.
최종변론 같은, 증언이었다.
승준이, 웃으며 돌아섰다.
“이상입니다.”
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말한다.
잘했어, 빛나야.
우리 빛나…… 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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