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아빠가 한번 안아보자.
2018.09.19.
숨이 목구멍 안까지 들어찼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는지, 빛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철컹.
무거운 철제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죄수복을 입은 남자를 마주하고 나서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빛나는 남자를 보자마자 그동안 잊었던 악몽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빛나…… 누나.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그 목소리가 그녀를 아릿하게 만들었다.
사건이 해결되고 조직 하나를 소탕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지만 그 와중에도 승현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그렇게 알게 된 소식 하나.
그녀를 살렸던 그 남자가, 그도 살렸다는 것.
그리고 완벽하게 들어맞아 완성된 한편의 그림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남자가, 다름 아닌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
학창시절, 얄밉기만 했던 승현의 곁에 늘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한 사내아이.
그때는 승현에게 집중하느라 존재조차도 몰랐던 남자였다.
그렇게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조차도 불분명했던 그 사내아이가 그녀를 살렸고, 또한 그를 살려냈다.
이젠,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남자였다.
때문에 기꺼이 그녀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를 뒤로 하고 남자를 마주할 용기를 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형주와 빛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서로를 진지하게 마주 보았다.
미처 입을 떼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빛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참 선한 인상이네요.”
아직 빛나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형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떤 눈으로 그녀를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말로 그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도.
“죄송…… 합니다.”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덥석 사과부터 던졌다.
하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뭐가요?”
였다.
“그냥…… 모든 게 다…….”
“나를 구해준 게 미안하다는 거예요?”
“…….”
“그도 아님, 승현일 구해준 게 미안하다는 거예요?”
순간 형주의 입이 할 말을 잃고 딱 벌어졌다.
“형주씨 질책하러 온 게 아니에요. 살아온 과거 탓하러 온 것도 아니구요.”
“…….”
“그냥, 형주 씨가 어떤 사람인지 내 눈으로 보고 싶었어요.”
그 말에 형주는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써 눈물은 참고 있지만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설움에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고, 이제야 이야기하네.”
“…….”
“고마워요, 그날. 날…… 구해줘서.”
결국 눈물이 터졌다.
소리 내어 울지는 못했지만 굵직한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빛나는 그 눈물이 지난날에 대한 그의 참회라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눈물에 그녀의 가슴도 물을 머금은 듯 먹먹해진다.
“계획되지 않은 면회라 시간 많이 못냈어요. 하지만 다음엔…… 승현이랑 같이 올게요.”
“…….”
“그때까지 몸조심하고 있어요.”
불연 듯 그의 과오가 스쳐지나갔다.
그녀의 학창시절의 마지막을 더 없는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지난날이.
빛나는 그의 첫사랑.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던 풋풋한 첫사랑이었다.
그런 그녀가 제가 벌인 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형주로서도 지옥이었다.
평생 가슴에 멍울처럼 남았던 그일.
그녀를 다시 마주한 그날, 용기가 없어 사과조차도 못 했던 그때의 기억이 점점 빛을 잃어가는 그녀의 눈을 보며 되새김질 되었다.
꺼져가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형주는 번개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더랬다.
감전 된 듯,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이미 빛나가 정신을 잃은 후였지만, 다행히도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형주는 서둘러 빛나의 집을 도망치듯 뛰어 나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왜 저토록 아름답단 말인가.
그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누나…….”
밝혀야 했다.
그동안은 용기가 없어 미루고 미뤘던 일.
더 이상의 죄악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형주는 10여년 만에 마주설 용기를 내어본다.
“10년 전 그날…… 병원에서 누나를 봤어요.”
그의 목소리에 빛나가 돌아섰다. 놀란 그녀의 눈엔 아직도 물음표가 가득하다.
“누나 보육원 출신이라고 소문 낸 거…… 바로, 저라구요.”
“…….”
“그때는…… 용기가 없어 말 할 수가 없었어요.”
“…….”
“죄송…… 합니다.”
목이 꽉 막혀왔다. 울음소리조차도 낼 수가 없었다.
과연 빛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차라리 욕을 해줬으면 좋겠다.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어떤 결과든 달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각오하고 있던 용기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고마워요. 이제라도…… 밝혀줘서.”
용서였다.
***
달칵.
욕실 문이 열리며 이제 막 샤워를 마친 승현이 보송보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물기에 더욱 곱슬거리는 앞머리가 유독 시선을 끈다.
저렇게 큰 남자가 저런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물 오른 그의 볼이 아이 같아 콱 깨물어주고 싶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오늘 승현은 빛나의 호출을 받고 모처럼 일찍 귀가를 했다.
모처럼 할 말이 있다는 한마디는 지은 죄도 없는 그를 괜히 겸손하게 만들었다.
“혹시…… 오늘도 누가 시기질투로 네 성질 건드렸어?”
“아니.”
아니라지만 믿을 수가 없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빛나의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승현의 숨통을 조여왔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녀가 팔을 들어 올리자 승현이 눈을 찔끔 감았다.
그런데 보드랍고 가냘픈 그녀의 팔이 그의 목을 감으며 엉겨 들어왔다.
게다가 제품으로 쏙 들어오는 빛나의 말랑한 몸까지.
도대체, 왜 이러지?
정말 불안하게 왜 이러는 걸까.
“고마워, 승현아. 나 포기 안 해줘서.”
눈을 뜨자 알아듣지 못할 외계어를 남발하며 빛나가 기다란 속눈썹을 들어 올린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당연하지. 내 사전에 포기란 없어. 안 하면 또 몰라.”
물론 그 와중에도 입은 살아 제멋대로 발사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정말, 어떻게 참았니?”
“뭘?”
“나 말이야.”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참은 게 아니라 사랑한 거라고.”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그 말에 그녀의 입가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눈앞에 있는 그가 너무 사랑스럽고 고마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누나 보육원 출신이라고 소문 낸 거…… 바로, 저라구요.
왜, 승현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동안 오해한 것이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바보야, 이제부턴 당하지만 말고 말을 해. 변명이라도 좋으니 말을 하란 말이야.”
“으, 응?”
“10년 전, 그 소문…… 너, 아니라며.”
그제야 빛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은 승현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형주…… 만난 거야? 어떻게?”
“그게 중요해? 왜, 그 오해를 떠안고도 말을 안 했냐 이 말이야. 너 아니라는 그 말 한마디면 되었을 텐데.”
“형주가 너…… 많이 좋아했거든. 그 녀석, 절대 고의는 아니었어. 그거 때문에 나한테 쥐어 터지기도 했고.”
세상에, 이 남자를 어쩌면 좋나.
말 더럽게 안 듣게 생긴 이 얼굴이 전부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남자는 알면 알수록 감동인 남자다.
그 모든 오해를 떠안고도 입 한번 벙긋 하지 않았으니까.
이제야 위태준이 했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울 줄을 몰라.
울 줄을 모르는 남자.
고통을 떠 안는게 익숙하단 이야기다.
하지만 더 이상 이 남자를 혼자 고통스럽게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이젠, 하나가 아닌 둘이니까.
“앞으론 나한테 다 이야기해야 돼. 말 안 하는 것도 죄야. 네가 오해의 여지를 남겨둔 거니까.”
“알아.”
“그리고 대학교 때 복실이 옆에 붙여준 것도 너라며.”
“아, 개복실…… 입 더럽게 싸.”
“복실이가 입이 싸긴 뭐가 싸. 꾹꾹 참다 얼마 전에 이야기 한 거 신경질 나 죽겠구만.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잖아.”
“뭐, 개복실이 네 옆에 붙여준 게 나라는 거?”
“아니. 네가 내…… 슈퍼맨이라는 거.”
순간 승현이 멈칫했다.
빛나는 그렇게 얼음이 되어버린 승현의 젖은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그러곤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가져갔다.
“그동안 수고 했어. 천방지축 안하무인 유빛나 지키느라. 이젠…… 내가 널 지킬게.”
키스를 해줄 것도 아니면서, 너무 가까이에서 입술을 포개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그의 입술이 갈증으로 인해 살짝 벌어졌다.
“너 진짜…… 여기까지 왔으면 제대로 좀 해주던가.”
“미안. 너 안달난 거…… 너무 귀여워서.”
“왜 자꾸 남자한테 귀엽대? 그거, 욕 아냐?”
뒤로 물러서는 그녀의 입술을 그가 본능적으로 따라갔다.
그러자 빛나의 입에선 가르릉거리는 신음 소리와 함께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욕 아냐, 너한텐. 진짜 너무 귀엽다고. 너무 귀여워서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될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에 승현이 씨익 웃으며 물어왔다.
“진짜로 다 용서해줄 거야?”
“응…… 흡.”
빛나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을 따라잡아버린 그가 그 동안 애태운 그녀를 벌주려는 듯 자신의 갈증을 제대로 해소했다.
대답을 하기 위해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가 부드럽게 침범했다.
그리고 어느새 빛나는 그의 손놀림에 의해 깃털처럼 가볍게 침대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잠시 입술을 떼어낸 그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각오해. 나…… 많이 굶었거든.”
그러더니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제 티셔츠를 급하게 벗어 던져버리고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실로 오랜만이다.
너무 바빠 얼굴 마주할 시간도 없었으니, 이토록 진한 스킨십을 할 기회는 있었겠는가.
그녀는 그가 주는 느낌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며 뜨거운 한숨과 함께 속삭였다.
“고해성사…… 하려는 거 아니었어?”
그 말에 맨살을 파고 들던 승현이 잠시 흠칫했다.
아, 맞다. 그도 할 말이 있었더랬지.
모든 걸 용서해준다고 했으니 지금이 말을 꺼낼 절호의 기회이긴 한데, 눈앞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모든 이성을 깡그리 잡아먹었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단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말은 해야겠고, 머리는 안 돌아가고.
“나…… 준비가 된 것 같아.”
“뭐라고?”
그가 정신없이 그녀의 몸에 흔적을 남기며 중얼거린 말에 빛나가 반문했다.
두서없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자 승현은 이번엔 한 단어를 더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빠가 될 준비가 된 것 같다고.”
“아, 애기 가지자고? 흡, 승현아…….”
묻다가 그가 예민한 곳을 건드리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니, 아니. 그 말이 아니고.
승현은 다시 말을 했다.
승헌이 그 자식,
“……보니까 화를 내는 것도 나를 닮았더라고…….”
그 녀석을 보면 기분이 참 묘해.
눈에 아른거려서 인연이 아닌가 싶어.
지금도 심장 끝이 다 저리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그 녀석을 데려다 키우는 것도…… 아…….”
그는 말을 하다말고 짧은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뒤늦게야 그 찌릿함의 정체가 제 가슴 피부를 파고드는 빛나의 손톱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승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잘못됐다!
지금껏 그의 입술 아래서 달콤한 과일향을 품고 있던 그녀의 피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 이유는 잠시 후 알 수 있었다.
“애가…… 너를 닮았단 말이지.”
오, 세상에! 승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빛나야, 무슨 오해가…… 그러니까 내 말은…….”
젠장, 대화에 집중하지 않았던 탓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빛의 속도로 나타났다.
이미 빛나의 혈압은 위험수치를 웃돌고 있었으니.
“위승현, 이 나쁜 자식! 너 사고 쳤냐-아!”
“아아악!”
***
“날 닮은 아이…… 내 말은 저 말이었다고.”
다음 날 승현은 빛나와 함께 보육원에 찾아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뛰어 노는 승헌을 가리키며 정확히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것도 당당하게.
“미안. 나는 그냥 네가 두서없이 널 닮은 애를 데려와 키우겠다니까…… 그만, 엉뚱한 상상을 했어. 진짜 미안.”
“괜찮아. 대화에 집중 못 한 내 탓이지, 뭐.”
아이들을 바라보며 하는 그 말에 빛나는 또 한 번 할 말을 잃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합당한 처사라 우겨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승현의 얼굴에 남긴 흔적이 너무 컸다.
“진짜 미안해. 많이 아팠어?”
“아니, 별로. 근데 말이야…… 다음부턴,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꼭 그 반지는 빼고 때려줄래?”
그렇게 말하며 마주한 그의 오른쪽 턱 밑엔 밴드가 붙어 있었다.
승현이 오랫동안 고민하고 거금을 들여 산 프러포즈 반지가 그 몫을 톡톡히 한 것이다.
“근데 정말…… 확신해?”
그녀는 애써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다시 한 번 물어왔다.
그러자 그는 다시금 뛰어 노는 승헌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근데, 나 정말 많이 생각했어.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냐고? 사실 자신은 없어. 하지만 친구 같은 아빠는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아. 누가 저 자식 놀리고 구박하면 같이 가서 싸워줄 수 있는…….”
그 말에 빛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아서다.
사고치는 아빠와 아들이라…….
그걸 수습하기 위해선 빛나가 똥줄 좀 타겠지만 곁에 있는 이 남자라면 평생을 그렇게 산다고 해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곁에 선 승현의 손을 가만히 맞잡았다.
“넌…… 진짜 훌륭한, 친구 같은 아빠가 될 거야.”
빛나는 자신의 눈앞에 향후 10년까지의 고생길이 훤히 아른거렸지만 기꺼이 그의 손을 잡아주기로 했다.
“승헌이한텐 네가 이야기해. 원장님한텐 내가 이야기할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이 원수같은 콤비가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으로 빛나의 혈압을 들었다 놨다 할 것이 분명했지만, 기꺼이…….
***
빛나가 원장실로 들어간 후 승현은 저 멀리서 거침없이 뛰어 노는 승헌을 보았다.
많은 사내아이들 틈에서도 유독 저 녀석만 눈에 보이는 것을 보니, 인연은 인연인 모양이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온 선물을 풀기 위해 차 트렁크를 열며 소리쳤다.
“야 이놈들! 이리 와봐. 내가 뭘 가져왔게?”
그 말에 공놀이를 하던 아이들도,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도 모두 모여들었다.
“먼저 건진 놈이 임자! 아무거나 골라가. 대신 한 사람당 하나씩이야, 알았어?”
“우와!”
“야호!”
“야, 그건 내 거야!”
아니나 다를까,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승헌은 모여든 아이들 뒤쪽에 서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줄곧 보육원을 방문했지만 선물은 한 번도 가지고 와본 적이 없는 승현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웬 선물?”
애답지 않게 선물에도 시크한 반응이다.
“아니, 결혼도 하고…… 내가 너무 빈손으로만 온 것 같아서.”
“하긴, 그래요. 아저씨는 빈손으로 와서 일도 안 하고 갔잖아요.”
“야, 네 숙제 도와줬잖아!”
“그건 일이 아니에요.”
“이씨, 너 숙제는 하고 노는 거야?”
승현이 눈썹을 바짝 세우며 물었다.
그러자 아이의 진한 눈썹도 함께 치켜 올라간다.
어찌하여 이 녀석만 보면 자꾸 건드리고 싶은 건지, 저 발라당 까진 눈썹이 마음에 들었다.
톡 건드리면 바로 오는 녀석의 반응도 재미있었고.
“저녁에 할 거예요!”
“숙제도 안 하고 노는 거야?”
“다른 애들도 아직 안 했거든요?”
“다른 애들은 안 했어도 너는 해야지. 근데…… 넌 선물 안 가져가? 안 궁금해?”
그제야 아이는 못마땅한 눈매를 돌리며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섞여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자마자 승현이 아이를 잡아 세운다.
“근데, 네 선물은 거기 없어.”
“치, 일부러 내 것만 안 가져온 거죠?”
아이가 다시 한 번 눈썹을 곤두세우며 물어온다.
그 말에 승현은 저만치 떨어져 발을 땅바닥에 톡톡 치며 입을 열었다.
“너…… 이리 와봐.”
그 말에 아이의 까만 눈이 더욱 더 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그의 앞으로 와 성난 눈매를 치켜 들고 당돌하게 바라본다.
땀범벅이라 앞머리가 이리 저리 들러붙어 있었지만 여덟 살 아이 치곤 유난히도 매력적인 이목구비가 고집스럽게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왜요.”
“내가 네 선물을 안 가져온 이유는…… 넌 저런 게 필요 없기 때문이야.”
“왜요?”
“넌…… 내가…… 몸으로 놀아줄 거거든. 내가 이래봬도 몸으로 때우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해서 말이야.”
잘 이해하지 못한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이 승현은 눈높이를 마주하기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아저씨랑 노는 거 싫은데요?”
“거짓말. 너…… 일부러 그러는 거 알아.”
“뭘요?”
“숙제…… 일부러 안 하는 거 안다고. 원장님이 그러시던데. 너, 다섯 살에 구구단 뗀 애라고. 그런데 수학 숙제를 못 해서 매번 나만 오면 가지고 나왔잖아. 곱하기 나누기도 하는 애가 더하기 빼기를 못해 숙제를 못 한다는 게 말이 돼?”
심중을 들킨 아이의 입매가 꾹 다물어졌다.
그러곤 원망스러운 듯 승현을 마주한다.
“너, 아직도 빛나 좋아하냐?”
“여기서 누나 안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근데…… 이제부턴 빛나 그런 감정으로 좋아하면 안 돼. 요즘 연상 연하 커플이 유행이라느니, 나보고 도둑놈이라느니, 이런 말 하면 안 된다고.”
“왜요?”
“가족이란 틀 안에서 그런 사랑이 허용되는 건 딱 부부끼리거든. 그 이상은…… 천륜이 되는 거야.”
“천륜이 뭔데요?”
“하늘이 맺어준 인연. 부모와 자식관계, 또는 형제 사이를 일컫는 거야.”
“근데요?”
“빛나랑 너…… 나랑 너…… 이젠 천륜이라고.”
“…….”
“빛나 누나가 아니라 이젠…… 엄마라고. 아저씨가 아니라…… 아빠라고.”
그 말뜻을 알아들은 아이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승현은 보았다.
적대감으로 가득 찼던 그 눈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자존심이 센 놈이라 울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주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젠 울어도 되는데, 맘껏 울어도 그 눈물 받아줄 가슴이 생겼는데 왜 저리도 참는지 모르겠다.
그 모습에 그도 목이 꽉 막혔다.
입술을 앙 깨무는 모습이, 울지 않으려 눈을 끔뻑이는 모습이, 마치 어렸을 때 엄마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으려 이를 악 물었던 자신이 모습과 너무 닮아 보여서.
“흐흑…… 흑…….”
결국 아이가 참고 있던 눈물을 왈칵 쏟아낸 순간, 승현은 아이를 향해 제 넓은 가슴을 벌려주며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 아빠가 한번…… 안아보자, 아들…….”
그렇게 승현은 난생 처음으로 8년의 세월을 넘어 훌쩍 커버린 제 아들을 가슴 가득 안아보았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 다짐하며.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