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그만 아는 정의
2018.09.12.
오전 11시가 넘은 시각.
빛나는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카페 입구가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사람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시선을 주었다.
평소 그녀답지 않게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그때 문이 한 번 더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카페 안의 분위기가 남자로 인해 확 밝아진 느낌이다.
“감사해요. 바쁜데 나와 주셔서.”
“아닙니다. 당연히 나와야죠. 제수씨가 오셨는데…….”
승준이었다.
몇 날 며칠 고심 끝에 결국 그를 만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커피, 어떤 스타일로 드세요?”
“앉아 계세요. 제가 주문하겠습니다.”
그는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와서 빛나 앞에 앉았다.
얼마 전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보는 이까지 환하게 만드는 그 웃음은 여전했다.
“승현이가 속 썩입니까? 아시죠? 철없는 자식이라, 저는 무조건 제수씨 편입니다.”
“후훗. 말씀만 들어도 감사하네요. 그래도 집안에 제 편 한 분은 있는 것 같아…….”
“무슨 말씀을. 저희 집안 송두리째 제수씨 편일 겁니다. 특히 아버지가 더욱.”
“아버…… 님이요?”
뜻밖의 말에 빛나가 되묻자 승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저희 아버지가 온통 제수씨 이야기입니다. 예쁘다, 야물다, 현명하다 등등……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수식어는 죄다 쓰시는 것 같아요. 덕분에 저는 저희 아버지 어휘력이 그토록 풍부했다는 사실에 거듭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저한테 그러시죠. 너는 왜 그런 여자 못 데려오냐고.”
“아, 죄송해요. 그 사람이 삼 형제 중 제일 막내인데 큰아주버님 제치고 이렇게 먼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드린 말씀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저희는 승희가 제일 먼저 시집갔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이미지는 그런 분이지만 의외로 격식에 얽매이는걸 싫어하셔서 결혼할 사람 있으면 순서 없이 먼저 가라고 예전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세요.”
“…….”
“우리 승현이 잘 부탁합니다. 철없는 그 녀석 제수씨한테 떠넘기는 것 같아 죄책감까지 듭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배려가 느껴질 만큼.
빛나는 긴장감을 풀기 위해 더블샷으로 주문했던 커피가 유난히 달게 느껴졌다.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사람 하나 때문에.
“제가, 참 사람 복이 많나 봐요. 아버님에…… 아가씨에, 아주버님에.”
“무슨 말씀을…….”
“항상 감사해요. 그때 저희 뒤 봐주신 것부터, 전부 다.”
“네?”
승준이 커피를 입가로 가져가다 말고 반문했다.
그러자 빛나는 들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에 달그락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날, 그 사건. 강석훈이 김병훈 검사와 제 아버지 힘으로 버젓이 걸어나갈 수도 있었던 그 일을…… 강하게 처벌해주신 거, 아주버님 맞으시죠?”
“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 승준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튀어 나온다.
그랬다.
그날, 그 사건.
처음엔 복실의 아버지가 힘 좀 썼으려니 싶었다.
천방지축 딸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외동이라 그녀의 아버지가 무척이나 귀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그만한 파워를 가진 사람은 복실의 아버지가 유일했고.
하지만 아니었다.
“누굴까, 궁금했어요. 하지만 이젠…… 그 궁금증이 풀렸네요.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더 강력하게 처벌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승현이가 제수씨 이름이 거론되는 거 자체를 싫어하다 보니, 마약 이외의 건으로는 엮어 넣을 수가 없었어요.”
“네. 알아요.”
“하지만 이젠 판이 바뀌었습니다. 절대……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승준이 확신을 심어주듯 이야기했다.
그 목소리엔 더 없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빛나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승준에게 떠 넘겨 버린 것 같아 내심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리고 몇 날 며칠 고민을 하다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강석훈이 최종 공판 날짜 나왔다죠?”
“네.”
승준의 대답을 들으며 빛나는 자신의 가방에서 하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그에게 내밀며 차분하게 입을 연다.
“제가…… 실수로 자료 하나를 빠트렸어요. 중요한 증인인데…….”
“그래요? 피해자가 또 있단 말입니…….”
승준은 빛나가 내민 서로 봉투에서 서류를 빼들다 언 듯 비친 세 글자 이름을 보고선 말을 멈추었다.
피해자, 유빛나.
선명한 그 세 글자 이름이 그의 눈에 아로 박혔다.
“제수씨…….”
“다른 피해자들에겐 용기를 내라, 그렇게 말해놓고선…… 정작 저는 그 자리에서 발을 뺐네요. 물론, 증명도 할 수 없는 미수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강석훈이 죗값을 받는데 한몫을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자리에 설 겁니다.”
그녀의 말에 줄 곧 웃고만 있던 승준의 눈매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승현이는…… 압니까?”
“아직요. 그 사람은 제가 강민식 재판에 서는 것도 싫어해서요.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 제가 빠졌구요. 하지만 강석훈이 만큼은 꼭 제 손으로 잡아야 할 것 같아서요.”
“모든 언론이 주목하는 사건입니다. 저쪽에서 매몰차게 몰아세울 겁니다.”
“알아요.”
“신문을 하는 위치와, 신문을 당하는 위치도 다릅니다. 그 자리…… 생각보다 힘들어요.”
“그것도 압니다. 하지만 강석훈이 빠져나갈 수 있는 그 어떤 길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요. 예상하고 있으시죠? 분명, 약물 중독 상태였단 핑계로…… 감형을 시도하려 할 거예요.”
정확히 강석훈의 행보를 예상하고 있는 빛나의 말에 승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 핑계, 제가 만들어줬어요. 만일 그날…… 제가 전면에 나서 사건의 진위 여부를 따지고 들었다면, 마약이 아닌 성폭행 미수로 분명하게 엮어 넣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대신…… 전 도망가는 걸 택했어요.”
“…….”
“그것 때문에 강석훈이 감형을 받게 된다면, 저를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빛나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정확했다.
그 흔들림 없는 톤에 승준이 겸허해질 만큼.
“그래서, 제가 직접 증인으로 나서 그 도주로를 차단하려구요.”
“후회…… 없으시겠습니까?”
그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왔다.
그리고 그 물음에 빛나는 확고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후회, 안 하려고 그 자리에 서는 겁니다.”
***
철컹.
문이 열리며 작은 면회실에 죄수복을 입은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러자 말끔한 양복을 입은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얼굴이 많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
“아들 녀석이 내 등에 칼을 꽂은 판국에 정상일 수 있겠나?”
다소 야위어버린 얼굴, 하지만 여전히 작은 눈을 빛내며 무표정한 얼굴로 양복 사내를 바라보는 이는 다름 아닌 강민식이었다.
그리고 말끔한 양복을 입은 채 강민식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의 변호사인 박중훈이다.
기존 고문 변호사도 포기 선언을 하고 나가떨어진 후, 그가 이 사건을 맡겠다 나서기까지 불과 24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것도 무료 변호.
인권 변호사와는 거리가 먼 대형 로펌 변호사였기에 모든 사람의 의문을 샀던 부분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기도 하고.
“이틀 후 대질 신문이 있습니다. 아시죠? 저쪽 검사가 생긴 건 그렇게 생겼어도 아주 악질입니다. 심리전에 능하고, 유도신문 전문가예요. 여기 오신이래, 가장 긴 시간이 되실 겁니다. 절대 말리시면 안 됩니다. 거기서 말리면 향후 재판에도…….”
“자네는 내게 승산이 있다 생각하는가?”
“네?”
“내가 여기서 나갈 가능성이 있어 보이냐, 이 말일세.”
“그건…….”
박중훈은 입을 열다 말고 고개를 떨구며 작은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는 데까진 해볼 겁니다. 몇 가지만 부인하고 잘 빠져나가면 형을 줄여서…….”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군.”
강민식은 말을 툭 잘라내며 감정 없는 작은 눈으로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자네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똑똑했더랬지. 내가 본 아이들 중 가장 영특했어.”
“…….”
“그래서 간혹 그런 생각을 했네. 자네가 내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제가 감히…… 어떻게……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까지야, 그게 자네 복인 것을.”
“아닙니다. 시장님 아니었으면…… 저는 아직도 그 거지 같은 집구석에서 아버지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했을 겁니다. 나머지 인생은 다…… 시장님 덕분입니다. 로스쿨을 나오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 시장님이 안 계셨다면 저는…….”
박중훈은 목이 메인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지옥 같았던 어린 날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던 탓이다.
“자네가 그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고문 변호사로 다른 사람을 부리고 자네를 아꼈던 이유를 아나?”
“그럼요. 늘 말씀하셨죠. 저한테만은…….”
“그래. 자네한테만은 이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세.”
“하지만 이젠 절 이용하셔야 합니다. 곁에…… 남은 이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시장님 말씀대로 여러 곳에 연락을 해봤지만 도움을 받기란 힘들 것 같더군요. 심지어 관계를 부정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 말에 강민식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겠지. 이제 내게 붙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을 테니.”
“몸을 사리고 있는 듯합니다. 상대가 특검 위승준 아닙니까. 그 젊은 나이에 거기에 오르기까지 위 검사가 쳐낸 정치인에 기업인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물었다 하면 사돈에 팔촌까지 고생이니 누가 감히 나서려 하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사돈에 팔촌은커녕 남은 이가 하나도 없어 무서울 게 없는 놈입니다. 그동안 시장님께 큰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갚게 해주십시오.”
박중훈은 진심이었다.
강민식이 없이는 그의 지난 20년은 있을 수 없는 날이었기에.
그 말에 강민식은 박중훈의 눈을 진지하게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순간이 안 왔으면 했네만 결국 오고 말았군. 내가 자네의 힘을 빌릴 날이…….”
“제가 최선을 다해 감형을 해보겠습니다.”
“아니, 나는 감형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닐세. 상대가 누군가. 웬만한 정치인에 기업인들도 피해간다는 특검 위승준 검사가 아닌가. 내 그 명성은 익히 알고 있지. 내 나이 낼모레면 육십이 아닌가. 5년, 10년 덜 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일세.”
“그럼…….”
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박중훈이 말을 더듬는 사이 지금껏 감정이 없던 강민식의 작운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내가 자네를 위해 20년 전에 했던 일…….”
“…….”
“이젠…… 자네가 나를 위해 해줘야겠네.”
순간 박중훈은 얼어붙고 말았다.
20년 전 강민식이 그를 위해 해주었던 일.
술을 마시던 아버지의 폭력에서 그를 구해준 일.
하지만 문제는 그 후로 그의 아버지를 영원히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강민식은 지난 20년의 대가로 그의 나머지 인생을 원하고 있었다.
***
웅성웅성.
두 번째 기자회견인데도 빛나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곁에 있는 은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있는 자신의 생수 한통을 전부 비우고 이젠 빛나의 물통으로 손을 뻗고 있었으니까.
“너 그러다 중간에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쩌려고 그래. 자제해.”
“하, 근데 긴장이 돼서.”
빛나는 그런 은지의 무릎을 손으로 다독이며 진정시켜주었다.
“결과발표는 저쪽에서 할 거고, 우리는 기자들이 몇 가지 질문을 하면 거기에 응해주면 돼. 그러니까 걱정 마.”
“진짜 우리는 그것 말고는 한마디도 안 해도 돼? 나 목소리 떨려서 개망신 당할까 봐 그래.”
“그럼 질문에 대한 답변도 내가 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라고.”
긴장한 은지가 심호흡으로 덜렁이는 심장을 달래고 있을 때 승현이 나타났다.
그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준비됐어요?”
“잠시만요, 제가 지금…….”
“괜찮아요.”
첫 번째 기자회견 때보다 더 덜덜 떠는 은지를 다독이며 승현은 기자들이 모여 있는 그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뒤를 빛나와 엘리스가 따랐다.
“나왔다! 나왔어!”
“빨리 찍어!”
그들이 나타나자 동시에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무작위로 들려오는 셔터 소리와 눈부신 플래시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승현의 유명세와 더불어 거대한 범죄조직까지 소탕한 이 사건이 얼마나 큰 이슈가 되었는지 모인 기자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기자회견보다 더 많은 기자들, 더 많은 관심들.
수많은 기자들이 모였음에도 질서 정연한 모습에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읽어 볼 수 있었다.
순간 빛나는 목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
곁에 있는 은지는 벌써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와 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KMK 아시아 지부 본부장, 위승현입니다.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저희의 협상 결과뿐 아니라 그동안 이 일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공금횡령 사건으로 알려진 KMK 사건은…….”
힘 있으면서도 섹시한 그의 목소리가 기자회견장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숨죽인 듯 그를 지켜보았다.
단 한 명도 어긋나는 이가 없었다.
“나…… 왜 이렇게 목이 막히니? 진짜 이게…… 우리가 한 일 맞니?”
은지가 속삭이듯 그녀에게 물어왔다.
그러자 빛나도 그 심정이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가 했어.
빛나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며 떨고 있는 은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따스한 온기가 전달되자 그제야 은지는 기자들을 향해 똑바로 시선을 둘 수 있었다.
“저희는 직원들의 요구사항을 적극 수용하여 공금횡령으로 수령하지 못한 3개월분 월급 지급과 지난 연봉의 10% 인상 조건에 전 직원들의 재 채용을 결정했습니다. 또한 사라진 돈의 90% 이상을 회수한 이번 건에 대해 상대측 변호사와 직원들의 힘이 컸으므로 그 공로를 높이 사 회사 측에서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도 지급할 예정입니다. 공식적으로 그동안 회사를 지키기 위해 힘 써준 직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다시 한 번 시작되는 플래시 세례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빛나만큼이나 예상치 못했던 파격적인 협상 결과에 모두들 감동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곧 질문이 터져 나왔다.
“언제부터 강민식 시장을 의심하시기 시작한 겁니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러다 수많은 질문을 뚫고 귀에 콕 들어와 박히는 물음 하나가 있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이번 건은 단순히 공금 횡령 사건을 해결한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정의를 실현하신 거라고.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질문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몰렸다.
그리고 그 자리엔 이번 건에 대해 철저히 한몫을 했던 이정이 사회부 기자 특유의 고집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서 있었다.
그랬다.
이정이 정확한 포인트를 짚은 것이다.
그들은 단지 힘없는 직원들을 위해 이 자리에 섰던 게 아니었다.
그들이 한 일은 그 이상의 정의를 실현한 일.
“그 이상의 정의…… 젠장, 빛나야…… 나 좀 울어도 되겠니?”
결국 가슴이 벅찬 은지는 빛나가 말릴 새도 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하지만 승현은 그러한 질문에도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이상의 정의라…… 잘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의와 제가 생각하는 정의가 좀 달라서.”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정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정말 주관적인 정의라.”
“들어볼 수 있으까요?”
이정이 미쳤나 보다.
빛나의 눈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런 질문을 왜 하는 것일까.
이정 때문에 그가 곤란한 건 아닌가 싶어 빛나는 불안한 눈동자로 승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집요한 이정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말로 설명하긴 좀 그렇고…… 원하신다면, 직접 보여드리죠.”
그 순간 빛나는 보았다.
승현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하는 모습을.
더불어 그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치켜 올라가는 모습을.
설마…….
아닐 거야…….
소름 돋는 생각에 빛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뒤에 은지가 가로막고 있어 그 이상 벗어나진 못했다.
그가 엘리스와 장 부장을 제치고 그녀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슈트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미는 모습도.
“유빛나, 나랑 결혼해줄래?”
젠장! 설마가 사람 잡았다!
어제 갑작스러운 기자회견 소식을 전하며 싱글벙글 웃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걸리더라니!
그 찜찜함의 정체, 바로 이것이었다!
공개 프러포즈!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유빛나가 제 여자라는 사실을 공식화 할 수 있는 바로 이 순간!
저 혼자 하는 사랑마저도 공개적으로 했던 그가 아닌가.
그쯤이면 이 정도는 짐작했어야 했는데!
“대박! 공개 프러포즈야?”
“빨리 찍어, 빨리!”
“클로즈업해봐. 클로즈업!”
프러포즈를 받는 그녀보다 더 난리 난 기자 회견장.
심지어 빛나의 표정을 클로즈업 하려는 기자들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집중적으로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빛나가 이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승현의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 이상이 정의? 나는 그딴 거 몰라.”
“…….”
“내가 아는 정의는 오직 하나…… 바로 너니까.”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폭발은 설렘으로 인한 폭발이 아니었으니.
“유빛나, 사랑해.”
독보적인 사랑고백.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치명적인 프러포즈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이처럼 열 받아 보긴 처음이었다.
“평생…… 내 정의가 되어줄래?”
저 잘생긴 얼굴에 손톱을 박아 넣어주고 싶을 만큼.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