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반칙의 여왕
2018.09.02.
“드디어 뵙네요. 위승준입니다.”
승준이 손을 내밀자 빛나는 넋이 나간 눈동자로 얼떨결에 그 손을 맞잡았다.
환한 눈웃음만큼이나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왔다.
“유…… 빛나예요.”
빛나는 너무 놀라 겨우 제 이름만 금붕어처럼 뻥긋뻥긋 읊어냈다.
뿐만 아니라 빛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성 또한 본의 아니게 승준과 마주해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 인사도 안 하고 가시다니, 서운한데요.”
“아…… 아니에요. 바쁘실까 봐. 진행 중이신 사건이 워낙 큰 건이라…….”
“그래도 제수씨 볼 시간은 있죠. 아참…… 제가 제수씨라고 부르는 거, 혹시 불편하진 않으시죠?”
승준이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데 불편해도 도무지 불편하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런 웃음을 보고 면전에 어찌 싫은 소리를 읊을 수 있겠는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빛나의 대답에 승준은 더욱 화사한 눈웃음을 보인다.
아이고, 눈부셔라.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장차 큰 아주버니가 될 승준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중인격이라 하여 다소 엄한 분위기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본 승준의 모습은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선한 느낌이었다.
어찌하여 사남매가 이토록 다른 분위기를 타고 났는지 모르겠다.
승희가 외모와는 달리 정신없고 어수선하다면, 승현이 정말 말 안 듣는 못된 분위기라면, 그리고 승주가 다소 감정 없고 소통 불가능한 냉혹한 분위기라면, 승준은 이러한 동생들을 충분히 감싸주고도 남을 만큼 따뜻한 분위기였다.
아슬아슬하지만 정말 묘하게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남매다.
보면 볼수록 감탄을 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빛나는 생각했다.
‘이 집에도 노멀한 사람이 있었어!’
그녀의 머릿속에 광명이 비치는 듯했다.
어쩌면 승현과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시댁 적응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렇게 오셨는데 커피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저번에 집에서 아버지랑 같이 저녁 식사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제가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거든요.”
“아, 어쩌죠. 제가 지금 회사에 바로 들어가 봐야 해서.”
빛나가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도 그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아닙니다. 너무 제 생각만 했네요. 다음에 승현이랑 정식으로 한번 저녁 어떠세요?”
“저야, 영광이죠. 언제든지.”
승준의 따뜻한 분위기에 놀란 빛나의 경계심이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물안개’라는 미친 별명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렇게 환한 사람을 말이다.
“그리고 서류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당연한걸요. 사실…… 직접 사건을 맡아 주셔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몰라요. 이제야 제가…… 피해자들을 볼 낯이 생겼으니까.”
그를 마주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그 모습을 승준은 잠시 웃음을 거둬들이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브라운 계열의 탐스러운 머리카락, 그리고 자그마한 얼굴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현명한 그녀의 눈이 뼛속부터 법조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여리여리한 몸에 사방으로 뻗어 있는 핏줄까지도 올곧아 보였다.
그 모습에 승준은 슬며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몸에 딱 붙는 스커트 정장을 입고 본격적으로 법정에 선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니 어찌나 예쁘고 섹시한지.
한마디로 눈앞에서 본 빛나의 모습은 승준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당차고 아름다웠다.
“정말 감사해요.”
“그런 소리 들으니 민망하네요. 가장 큰 일을 한 건, 제수씨인데.”
“큰일이라뇨.”
“권력에 굴복해 숨은 피해자들을 설득시키는 일만큼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신으로 가득 찬 피해자들의 눈을 직접 들여다보고 고통을 공감하고 소통하는 일만큼 힘든 일은 없습니다. 저도 해봐서 알죠. 나쁜 놈들의 썩은 눈을 마주하는 것보다,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눈을 들여다보는 게 더 힘들다는 걸.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그가 그 말을 끝내는 순간 현성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아귀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눈물이 울컥했다.
그 말에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턴 제가 하겠습니다. 강민식도, 강석훈이도 쉽게 놔줄 생각 없습니다. 죗값…… 치러야지요. 그래서 제가 최대한 오래 데리고 있을 생각입니다.”
살짝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보다 먼저 웃는 눈매에 결국 빛나도 함께 웃었다.
위씨 집안에 품었던 경계심과 두려움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다소 예상치 못했던 만남이었지만 이렇듯 승준과의 대면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차 있던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말끔하게 없애주었다.
그리고 두려움이 사라진 그 자리엔 가슴 설레는 승현의 프러포즈만 남아 있었다.
-나랑…… 결혼하자.
그래. 그 결혼 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빨리 모든 걸 정리하고 그녀가 제 자리에 우뚝 서야 했다.
승현에게 어울리는, 위씨 집안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빛나가 승준의 눈부신 눈웃음을 바라보며 얼었던 마음을 녹일 때 즈음, 지금 이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낯빛이 시꺼멓게 죽어가는 이가 하나 있었으니.
빛나가 제 소매를 놔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굳어 도망가지도 못하는 현성은 승준의 웃는 얼굴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하, 세상에…….
저런 말을 어찌 저렇게 웃으며 하는지.
누가 보면 오해하겠다.
마냥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착각 말라!
웃고 있는 승준의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제외한 다음, 필터를 걸쳐 제대로 번역을 하자면 승준의 말뜻은 이러했다.
제 동생의 얼굴을 그리 만든 인간들 편하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최대한 얼굴을 대면하고 쥐어짤 만큼 쥐어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면 그때 최고 형량을 받아 조용한 교도소로 유배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이 부분에서 ‘죗값’이라 함은, 법관이 때리는 형량이 아니라 사건 진행 도중 그와 함께한 시간에 해당했다.
그야말로 소름이 돋다 못해, 혈액순환마저도 멈추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 사이엔 여전히 블링블링한 분위기가 샘솟았다.
“제수씨 바쁜데 제가 너무 시간을 붙들었나 보네요.”
“아니에요. 이렇게 봬서…… 너무 좋았어요.”
아직 결혼도 하기 전인데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끈끈한 가족애다.
“운전하고 오셨어요? 주차장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차가 바로 앞에 있어서.”
빛나는 한사코 사양하며 기분 좋게 돌아섰다.
현성을 만나는 바람에 성나 있던 기분이 한층 업이 되었는지 웃는 모습이 눈이 부실 만큼 반짝였다.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승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현명하고 가식 없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마음도 한층 놓였기 때문이다.
저런 여자라면, 톡톡 튀는 승현을 충분히 붙들 수 있으리라.
출신 따윈 상관없다.
승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한 자격이 있었기에.
“진짜…… 예쁘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예뻤다.
올곧은 그 심성도, 파르르 떠는 그 불같은 성질머리도.
무엇보다 피해자들 중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성폭력 피해자들을 설득시킨 그녀의 진심이 승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말뜻을 잘못 이해한 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우리 빛나가 예쁘긴 무지 예쁘죠. 대학 때도 아주 유명했어요. 법대 얼짱으로.”
빛나도 사라진 마당에 그녀 편을 들어 승준에게 점수 한번 따보고자 제깐에는 노력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오히려 승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지만.
“뭐? 우리…… 빛나?”
아직까지도 웃음기가 맴도는 눈매였지만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그 음성에 현성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게…… 빛나…….”
“빛…… 나?”
“저희가 대학 선후배 사이긴 하지만 워낙 친해서 줄곧 이렇게 이름을…….”
“어디서 이름질이야? 아직도 모르겠어?”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빛나를 빛나라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위험을 감지한 현성이 뒷걸음질을 쳤지만 승준은 여전히 웃는 모습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옴짝 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빛나의 갈고리 같은 손보다 더 억센 힘이었다.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내가 커피가 한잔 마시고 싶군. 나랑 커피 한잔할 텐가?”
“아니…… 제가 방금 커피를 마시고 와서…….”
“내가 사지. 그 커피.”
“그게 아니라, 제가 카페인을 과다 섭취하면 심장이 벌렁거려서…… 제발…….”
“걱정 마. 그 심장도 내가 지그시 즈려밟아줄 테니.”
애초부터 현성에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게 현성은 곧 죽을 것 같은 낯으로 웃고 있는 승준에게 끌려 나갔다.
누가 보면, 사이 더럽게 좋은 줄 알겠다.
***
그날 저녁, 빛나는 샤워를 하고 머리도 채 마르지 않은 승현과 진지하게 얼굴을 마주했다.
평소엔 장난기로 가득 찼던 그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까맣다.
반지도 없이 무계획으로 한 프러포즈였지만 그토록 애매한 대답이 흘러나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승현은 기어이 오늘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어야 했다.
“나 시간이 별로 없어. 우리 결혼해야 돼.”
이번엔 빛나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왜?”
그래. 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한부 인생을 산다고 하기엔 욕실에서 물기도 제대로 닦지도 못하고 나온 그의 벗은 상체가 건강하다 못해 눈이 부실만큼 섹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현은 빛나의 의문스러운 눈동자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조심스러웠다.
“작은 형이 두 달 후에 떠나.”
“작은…… 형님이? 어디로?”
“그건 잘 모르겠고, 이왕이면 우리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결혼하고 싶었어. 우리 작은 형도……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 말에 빛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평소엔 사람인지 로봇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무미건조하다가도 어린 조카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져 쩔쩔매는 승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충분히 자격이 있는 사람…… 이라…….
“당연하지…… 충분히 자격이 있는 사람…….”
빛나는 저도 모르게 승현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야 승현이 저리도 어이 없이 결혼을 서두르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버린 지금, 그녀는 더 이상 결혼에 대한 대답을 미룰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넌 우리 작은 형에 대한 기억이 그리 안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 인간이…….”
“그래. 해, 그 결혼.”
“존재감이 큰…… 인간이라…….”
“하자고, 다음 달에.”
“진짜로?”
너무 쉽게 흘러나온 대답에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한톤 높아졌다.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사정이라면 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외로운 결혼식이 될 텐데, 나도 작은 형님 없는 자리에서 웨딩마치 올리고 싶진 않아.”
빛나가 각오를 다지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이야기 했지만 지금 승현은 그 사실을 인지할 수도 없을 만큼 흥분 상태였다.
세상에나, 지금 유빛나가 결혼하겠다고 한 거 맞지?
생각지도 못한 진실에서 빛나가 약해지고 말았다.
진작 사실대로 이야기 할걸, 화장실 문고리 사건으로 인해 승주에게 꿍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실수였다.
“넌 준비할 거 없어. 내가 다해! 내가 다!”
행여나 그녀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워 결혼준비도 제가 다 하겠다 나섰다.
물론 경험이 있는 승희가 이미 도우미를 자처했지만 말이다.
“야호! 나 진짜 다음 달에 유부남 되는 거 맞지? 그치?”
유부남 되는게 뭐 그리 좋은 일이라고 만세 삼창도 아끼지 않는 승현을 보며 빛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애 같은 남자를 어쩌면 좋나.
“뭐가 그렇게 좋아? 유부남 되는 게 좋아?”
기가 막힌 빛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묻자 승현은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입을 맞췄다.
잠시 왔다간 입술이지만 그의 온도가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빛나,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내가 유부남이 돼서 좋은 게 아냐.”
“그럼?”
그 물음에 승현은 매력적인 입술을 틀어 올리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속삭이듯 대답했다.
“유빛나가 유부녀가 되는게 좋은 거지. 이제 딴 새끼들은 쳐다도 못 볼 거 아냐?”
그럼 그렇지.
빛나가 뭐라고 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지만 그 사이로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승현의 입술이 뜨겁게 밀고 들어왔다.
얼마나 달콤한지 모르겠다.
처음 그녀에게 키스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단지 그녀만 보면 미친 듯이 뛰어대는 이 심장이 화가 나서 뛰는 건지, 설레서 뛰는 건지 확인해보기 위한 그 위험천만한 행동이 결국 그를 유빛나 폐인으로 만들어버렸다.
태어나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첫 키스를 한 것도 아닌데 첫 키스를 한 수줍은 소년처럼, 그녀의 입술을 한번 맛 본 순간 이 여자가 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친 듯이 앞만 보고 직진을 했던 것이다.
단 한 번도 눈을 돌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달려 결혼 허락이 떨어진 지금, 끝을 볼만도 하건만 그녀는 여전히 꿀단지처럼 달기만 하다.
“달잖아. 너무…….”
“음…… 좀 전에 화이트 와인 마셔서 그래.”
빛나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승현은 그녀의 티셔츠를 끌어 올려 드러난 맨살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흔적이 남았다.
빛나는 제 가슴 근처까지 올라온 그의 숨결을 느끼며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음,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나 회사 그만두려고…… 흡!”
“맘대로 해. 난 상관없으니.”
“음…… 그 말에 후회하기 없기다? 내가 좀 씀씀이가…… 헤…….”
빛나는 차마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에서 올라온 그의 입술이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안으로 농밀한 침략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린 승현이 안방에 있는 커다란 대형 사이즈 침대에 그녀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밀려 올라간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로 인해 드러난 그녀의 늘씬한 몸매가 눈을 아프게 찔러 왔다.
침대로 그의 체중이 실리자 매트리스가 묵직하게 꺼졌다.
하지만 빛나는 그러한 승현의 묵직함이 좋았다.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그들이 미래가 정해져버린 지금 이 남자의 묵직한 체중과 넓은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제…… 그녀에게도 진짜 ‘가족’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 ‘가족’이라는 의미를 넘어 빛나에겐 그녀의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최고의 행운이자 사랑이었다.
빛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슴 한 켠이 누군가에게 보호받는단 느낌에 물컹해졌다.
참으로 다행이다.
그녀의 사랑이 다름 아닌 바로 그라서.
그녀는 입술에서 목으로 내려오는 입술을 느끼며 그의 허리를 두 다리로 꼭 끌어안았다.
그러곤 순식간에 그를 뒤집어 제 아래 두었다.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승현의 눈이 커졌다.
“왜?”
“그게, 아직 내가 할 말이 안 끝났거든.”
“아직도? 뭔데?”
조급해진 그가 제 위에 있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상체를 일으켜 빛나를 끌어안았지만 그녀는 단번에 그의 어깨를 눌러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러곤 평소보다 훨씬 더 몽롱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유혹하듯 속삭인다.
“거절하기 없기.”
“뭔데 거절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 흡, 빛나야…….”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길다란 머리카락이 잔뜩 달아오른 그의 피부를 간질였다.
그것만으로도 죽겠는데 그녀의 입술은 결국 그의 인내심에 잔인한 화산 폭발을 일으켰다.
피부를 태울듯 뜨거운 그녀의 입술이 그의 가슴 예민한 부분에 와 닿은 것이다.
“으…… 이건 반칙이잖아…….”
그래, 명백한 반칙이었다.
자고로 거래란 서로의 이성이 멀쩡히 제 구실을 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게 정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승현의 이성은 거대한 쾌락의 쓰나미에 처절한 희생양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반칙이다!
그것도 옐로카드 없이 바로 레드카드로 선수 퇴장을 외쳐야 하는.
그러나 승현은 그것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술이 탄탄하게 잘 드러난 그의 갈비뼈를 타고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아득해지는 그 음성이 거절의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밖에는.
“그래……뭐든지. 네가 원하면 뭐든지…….”
그것이 승현이 대답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던 그녀가 원하면 뭐든지.
까짓거, 그거 하나 못 해줄쏘냐.
그래서 승현은 그날 무조건 YES를 외쳤더랬다.
역사에 없는 희대의 YES맨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
다음 날.
“흠…… 유빛나, 넌 할 수 있어!”
빛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평소답지 않게 긴장한 얼굴로 구호를 외쳤다.
그러곤 다시 한 번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확인했다.
“아, 진짜…… 내가 이것까지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승현과 결혼을 하기 위해선 필수 과정이다.
결혼을 하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도 그의 의사가 가장 중요했기에.
빛나는 자신이 차에서 내려서 뒷 트럭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운전기사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준비되셨죠?”
“네. 그럼요. 저희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죠!”
“그럼. 제가 전화 드릴 때까지 여기에 대기해주세요. 그리고 전화 드리면…… 아시죠? 바로.”
“걱정 마십시오!”
각오를 다진 빛나는 유난히도 높아 보이는 3층 집 담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그녀가 이 담을 넘어 설 수 있을까.
아무것도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승현과 맞바꿀 수 없다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졌다.
넘어야 할 산이다.
그 산이 너무 높다면, 꼭대기를 깎아서라도 넘어서야 했다.
그리고 빛나는 오늘 그 각오로 이 자리에 섰다.
“아, 나는 할 수 있다! 알잖아! 유빛나, 반칙의 여왕. 안 되면 편법을 쓰지 뭐.”
그렇게 빛나는 위태준의 집 대문을 넘어섰다.
그리고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위태준과 1대 1로 마주했다.
“여긴…… 어떻게?”
갑작스러운 그녀의 방문에 넋이 나간 위태준이 소파에 앉아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위태준을 상대로 빛나는 위험천만한 딜을 시작한다.
“아버님!”
“……응?”
“제게, 승현이…… 파십시오!”
투지에 불타는 빛나와는 달리,
위태준의 영혼이 유체 이탈을 시도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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