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77화 (77/94)

77. 나랑, 결혼하자

2018.08.29.

법원에 들렀다 온 빛나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시선이 순식간에 그녀에게로 몰렸다.

심플한 블랙 하이웨스트 스커트에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눈이 부셨던 모양이다.

적어도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 변호사님…… 축하드려요!”

“네. 축하드려요! 어쩜…….”

부럽다는 듯, 축하한다는 말이 쏟아지자 빛나는 웃으면서 자신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의 시선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자신의 의자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은 그녀가 컴퓨터를 켜는 순간, 은지가 노크도 없이 쳐들어왔다.

“유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빨갛게 상기된 은지의 얼굴은 기쁨 반 원망스러움 반으로 뒤죽박죽이었다.

“뭐가? 도대체 다들 오늘 왜 그래?”

“몰라서 묻는 거야?”

“모르니까 묻지. 무슨 일 있어, 회사에? 나도 모르는 사이 나…… 승진했나?”

“헐!”

기가 막히다는 듯 은지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에 빛나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은지를 바라보았다.

“설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 무슨 일이냐고.”

“진짜 몰라?”

“모른다고!”

“세상에…….”

이번엔 은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젠 궁금하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오르기 일보직전이었다.

“유변…… 결혼하잖아…….”

“…… 뭐?”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하지만 은지의 벌어진 입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는 유변 결혼 소식을 본인이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내가 화가 나는 건, 그래도 우리 같은 건 진행하면서 그동안 친해졌다 생각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먼저 알 수 있느냐…… 이 말이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이거 봐! 기사 떴잖아!”

은지는 자신의 핸드폰에서 인터넷 기사를 보여주며 여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현희가 너네 결혼 축하한다고 자기 SNS에 글 올렸다고! 신부가 오해하질 않길 바란다면서, 행복하길 빈다고! 승현 씨랑은 아는 오빠 동생으로 아는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잠깐 만났고 단둘이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대. 여기…… 여기…… 보여? 결혼 축하 메시지. 그리고 네 이름…….”

빛나의 까만 눈동자가 은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몰리면서 그녀는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이게 뭐야! 이거…… 언제 뜬 거야? 응?”

“몇 시간 전에. 진짜 몰랐단 말이야? 어떻게 본인 결혼인데 몰라? 말이 돼?”

그래.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조현희가 올린 글은 일파만파로 퍼져 이미 기사의 헤드라인에 그녀 이름 석 자가 선명히 박혀버렸다.

KMK 컴퍼니 사건을 맡았던 유빛나 변호사와 마담 M 위승현의 기가 막힌 러브스토리!

헐…….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그리고 입도 바짝바짝 탔다.

더 이상 이대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뇌에 주름만 없는 줄 알았더니 행동을 할 때 필터링도 안 되는 모양이다.

열이 받은 빛나는 손을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조현희…… 그냥…… 부숴버릴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빛나는 은지를 내버려둔 채 사무실을 나왔다.

그러곤 성난 걸음걸이로 승현의 사무실까지 곧장 직행했다.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 때문에 승현은 뭔가를 들여다보다 놀라 고개를 들었다.

쾅!

그 앞으로 다가와 책상을 힘 있게 내려 친 빛나는 양쪽으로 뻗은 손아귀의 뼈가 으스러질 만큼 힘을 주며 잇새로 중얼거렸다.

“나 말리지 마. 조현희…… 죽여버릴 거야.”

“조현희가 왜?”

“몰라 물어? 지금 난리 났는데? 걔가 진담 같은 농담도 구분 못 하고 막 떠들어댔잖아! 이번엔 정말 가만 안 둬. 법정에서 볼 거야. 법정에서 지가 섹시한지…… 내가 더 섹시한지 한번 보지 뭐!”

흥분한 그녀의 말투에도 승현은 어쩐 일인지 자신의 회전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여유 있게 입을 뗀다.

“게임이 되나. 당연히 우리 유빛나가 훨씬 더 섹시하지.”

그러곤 그렇지 않아도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더욱 틀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데, 누가 그래? 진담 같은 농담이라고…….”

순간 빛나는 전율했다.

-우리…… 다음 달에 결혼하거든.

그렇다.

그 말은 진담 같은 농담이 아니라, 그냥 진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승현은 그의 참을성 없는 성질머리답게 공개연애 하는 것도 모자라 결혼마저도 입에서 내뱉은 지 3일 만에 공식화하는 기염을 토해내고 말았다.

승현을 바라보는 빛나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었다.

“농담이라고…… 말해줘. 제발…….”

빛나가 사정을 했지만 오히려 승현은 서운하다는 듯 들여다보던 노트북을 덮고 입을 열었다.

“왜, 넌 나랑 만나면서 결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그 되물음에 빛나가 책상 앞으로 굽혔던 허리를 펴며 조급한 듯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위승현과의 결혼이라…….

솔직히 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있었다고 할지언정 이렇게 빨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땐 승현이 국회의원 위태준의 아들이라는 걸 몰랐을 때였고.

하지만 불과 며칠 전을 기점으로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이젠 눈앞에 있는 이 못된 악동 같은 남자가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해져 버렸다.

그녀 인생에 그를 떼어놓고는 단 한순간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러나 오히려 승현이 가진 조건은 그녀에게 태산 같은 장애물이 되어버리지 않았겠나.

그것도 그녀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태산이었다.

대선이 코앞이다.

위태준의 집안에서는 사람이 들고 나는 것이 가장 중요해진 시점이란 말이다.

위태준은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 그 말은 곧 정권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과정만은 순탄치 않으리라.

상대는 마지막 발악을 할 것이다.

위태준을 털어 먼지 한 점 나지 않는다면 위씨 집안의 사돈에 팔촌까지 물고 늘어질 게 뻔했으니까.

가진게 없어 힘이 되어주지 못할지언정, 그 먼지가 되고 싶진 않았다.

비록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던 삶이지만 돈만 바라보며 최고의 이혼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날렸던 그녀의 과거가 떳떳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기에.

과연 승현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머리 좋은 그가 놓쳤다고 하기엔 너무 중요한 포인트인데 말이다.

결국 빛나는 처음으로 그와의 결혼 문제를 진지한 눈동자로 마주해야 했다.

“아니, 당연히…… 결혼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너지. 하지만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

“시기? 무슨 시기? 우리 연애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 것도 있고…….”

“연애기간은 짧지만 우리 알고 지낸 건 10년이야.”

“그래. 그 알고 지낸 10년 중 무려 9년 가까이는 서로 철천지원수처럼 지냈지.”

빛나의 말에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넓은 사무실이었지만 오늘따라 훤칠한 그의 기럭지 때문에 다소 좁아 보인다.

기분 탓일 것이다.

그만큼 승현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단 이야기니까.

그는 그녀 앞으로 다가와 책상 앞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그러곤 다정하게 손을 뻗어 빛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손끝에 맞닿은 그의 감촉이, 유난히 따스한 그 체온이 너무 좋았다.

“유빛나…… 내 말 잘 들어.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널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어. 기억나? 너 원장 수녀님 넘어졌단 전화 받고 병원으로 향하던 그날…… 내가 너한테 했던 마지막 한마디…….”

승현은 나지막이 속삭이며 맞잡았던 그녀의 손을 풀고 손끝을 마주했다.

두 사람의 다섯 손가락이 정확히 맞닿았다.

신체의 수많은 면적 중 가장 작은 부분이 닿았을 뿐인데도 빛나의 모든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제 손 끝에 시선을 주는 승현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들이 두 번째 악연이 시작된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누나라 부르라 해도 따박따박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 붙었던 승현의 모습이 불과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라…….

그 말이 뭐였더라…….

-나랑, 사귈래?

-나랑…… 사귀자.

“나랑…… 결혼하자.”

순간 10년 전 승현의 목소리와 지금 그의 목소리가 오버랩 되어 그녀의 귓전을 울려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야 그녀가 지낸 지난 10년이 승현의 10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널 처음 보는 순간부터 내 눈이 돌았었나 봐.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 너 밖엔…….”

“…….”

“그게 10년이야. 남들은 나한테 참을성이 없다, 인내력 결핍 장애다…… 그러는데. 사실…… 나만큼 잘 참는 놈 있음 나와 보라고 해.”

“하…… 진짜 너…….”

그녀의 손끝을 맴돌던 그의 손이 슬며시 깍지를 끼며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러곤 다시는 놔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책상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던 덕에 승현의 입술이 정확히 그녀의 왼쪽 가슴에 와 닿았다.

얇은 블라우스를 뚫고 그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하얀 가슴 위로 불꽃 같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니까 유빛나…… 이제 나 애 태우는 거 그만하고…… 진짜 내 거 하자.”

낮은 음색으로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빛나는 투정부리는 어린 아들을 달래듯 그의 머리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피부를 뜨겁게 데우고 들어와 심장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빛나는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칼 위로 입술을 내렸다.

아직도 그의 얼굴은 말 안 듣는 일곱 살 어린아이 같은 느낌인데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섹시한 음성이 그녀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남자를 거부할 수 있겠나.

그래서 빛나는 대답했다.

“그래. 그럴 거야. 근데…… 조건이 있어.”

“조…… 건?”

그녀의 말에 가슴 위를 배회하던 그의 뜨거운 입술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그녀와 마주한 그의 얼굴은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짓궂게 잘생겼다.

“무슨 조건?”

“나한테 시간을 좀 줘.”

순간 승현의 장난스러운 눈동자가 진하게 가라앉았다.

언제 봐도 이 매력적인 눈은 주인의 감정에 솔직했다.

그리고 지금은 몹시도 심기가 불편한 모습이었다.

“무슨 시간이 필요한데?”

“나도 마음의 준비라는 걸 해야 할 거 아냐.”

“마음의 준비? 웬 마음의 준비?”

기가 막히다는 듯 승현의 음성이 살짝 높아졌다.

하지만 빛나는 어린 아들을 달래듯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야. 한 달 사이에 게 눈 감추듯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나는 할 수 있어! 더는 못 참겠다고!”

“내가 안 돼.”

“유빛나!”

“위승현, 내 말 들어. 우리 아직 본사랑 제대로 된 협상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고, 무엇보다 강민식이랑 강석훈이 재판이 남았잖아.”

“설마 너…….”

“법정에 설 거야. 증인으로.”

“굳이 그런 것까지 안 해도 돼. 나 하나로 충분하다고.”

“아니. 할 거야.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나보고 그 말도 안 되는 자식들 때문에 또 참으란 이야기야? 10년으로 모자라?”

“10년 참았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되잖아. 약속해. 나…… 이번에 어디 도망 안 가. 딱 이 자리에 있을게. 그러니……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댓 발 나온 입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는 폼이 심통이 제대로 나신 모양이다.

하지만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건 왜일까.

“결혼 결정도 네 멋대로 했으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이번에도 역시 묵묵부답.

하지만 승현에게 선택권 따윈 없었다.

빛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싱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

그제야 그가 반응하듯 심술 돋은 목소리로 대꾸한다.

“뭐가? 나 아직 아무것도 대답 안 했는데?”

“그래도 고마워.”

“유빛나, 나 아직 대답 안 했다고.”

“나 일이 있어서 검찰청 들어가봐야 돼. 좀 이따 봐.”

빛나가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자 승현의 눈썹이 곤두섰다.

“야, 나 아직 대답 안 했다고!”

그러나 빛나는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웃음을 보이며 승현에게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데! 얼마나 더 참아야 하냐고!”

이번에 대답 없는 이는 빛나였다.

그녀는 대답 대신 경쾌하게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그의 사무실 문을 열고 사라져버린다.

닫힌 문 사이로 승현의 절규가 흘러나왔다.

“에이- 진짜! 그래도 못 물러! 도망갈 생각 하지 마! 절대 안 놔줄 테니까-아!”

그 비명소리에 승현의 사무실로 향하던 엘리스가 눈을 찔끔거리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지금 들어갔다간 저 분노의 화살이 다름 아닌 자신에게 향할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빛나는 상큼한 윙크를 날리며 엘리스에게 속삭였다.

“쟤, 열 받았으니까 휘핑크림 잔뜩 얹은 모카라떼 한 잔 들고 들어가요.”

“아아악- 유빛나, 진짜!”

“혹시 모르니 시럽도 조금 더 챙기고.”

***

무슨 정신에 여기까지 운전을 하고 왔는지 모르겠다.

-나랑…… 결혼하자.

-이제 나 애태우는 거 그만하고…… 진짜 내 거 하자.

다시 생각해도 가슴 설레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빛나는 그 자리에서 ‘Yes’를 외쳐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현실은 너무 혹독했기 때문이다.

“아, 유빛나 정신 차리자. 하나하나, 차분하게 해결하자고. 일단 눈앞에 있는 이거부터 먼저.”

그녀는 노란 서류 봉투를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덮어져버린 지난 강석훈 사건 파일이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위승준 검사라면 그 부족한 부분을 메워 완벽한 리얼리티를 살릴 수 있으리라.

빛나는 서류를 들고 차에서 내려 곧장 검찰청으로 들어갔다.

제아무리 강석훈이 마음을 바꿔 제 아비에게 맞서 증언을 한다 한들, 그 스스로의 죗값에서 벗어나게 할 순 없었다.

그들에게 혹독한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피해자들이 고통 받은 것 이상으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위승준 검사님께 전해드릴 게 있어서요.”

“약속은 하셨어요?”

“아니요. 저는 그냥 이것만 전해드리면 됩니다. 부탁드려요.”

서류 봉투를 넘긴 빛나가 조용히 검사실을 나왔다.

어찌되었건 아직은 위승준 검사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되도록 위씨 집안사람들은 당분간 피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1층 로비로 내려온 순간, 빛나는 진짜 원수와 마주치고 말았다.

“조현성…….”

저쪽에서 걸어오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폼이 절대 그냥 지나칠 기세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현성은 곧장 그녀에게 걸어와 음흉한 시선으로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이야, 때깔이 다르네. 유빛나…… 요즘 재미가 좋나 봐?”

그 말에 빛나는 대번에 짝다리를 집고 거만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백그라운드만 휘황찬란하면 뭐하나. 이렇게 입이 빈민인데…….”

“뭐야?”

“저번에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 못 차렸니?”

“그러는 너야말로 승현이랑 스캔들 좀 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아, 조현성을 보는 순간 각오는 했지만 참으로 타고 난 재주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찌하여 이 인간은 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빛나의 혈압을 위험수치까지 끌어 올리는 것인지.

뒷골이 띵하고 머리가 무거운 게, 눈앞에 있는 조현성의 답답한 눈을 위아래로 시원하게 찢어놓지 못하면 도저히 풀릴 화가 아니었다.

“아……놔, 진짜. 누가 그래. 스캔들이라고?”

빛나가 도도하게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그러자 현성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한다.

“안 봐도 뻔하지. 당연히 스캔들 아냐? 야,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널 받아들여? 말이 돼?”

젠장, 잘못 생각했다.

눈만 답답한 줄 알았더니, 저놈의 주둥아리도 답답한 소리를 하고 있다.

“조현성, 넌 어떻게 그렇게 맨정신으로 정신 나간 소리를 할 수가 있니? 그것도 정말 재주라면 재주다.”

“그럼, 그 스캔들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상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거든.”

“미안하지만 내가 사는 세계에선 내가 가진 상식이 보통이거든.”

“넌 어디 다른 별나라에서 왔니?”

이쯤 되자 현성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러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빛나의 눈부신 모습을 다시 한 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현성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식의 틀을 깨버린 여자.

예쁜 여자들은 멍청하다는 편견을 깨고 당당하게 법대 퀸카로 명성이 자자했던 빛나는 쥐뿔도 가진 게 없으면서도 그의 앞에 굴복하지 않았던 유일한 여자였다.

하물며 몇 달 전엔 발칙한 연기로 따귀 세례까지 던지지 않았나.

갑자기 그때의 억울함이 살아 돌아오자 현성은 저도 모르게 오른쪽 뺨을 감싸며 빛나에게서 두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와의 사정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다시는 그런 연기가 먹히지 않도록.

“나는 널 위해 충고하는 거야. 헛된 꿈일랑 일찌감치 접으라고. 사람들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위씨 집안이야. 차기 대선 후보라고. 그런 집에 언감생심 시집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지?”

“뭐야, 언감생심? 이 자식이 미쳤나…….”

“제수씨!”

“도대체 얼마나 맞아야 정신 차릴래?”

“제수씨!”

그때까지만 해도 빛나는 자신이 하는 말 중간중간에 들려오는 그 호칭에 반응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현성의 넥타이로 갈고리 같은 손을 뻗은 순간, 불쑥 튀어 나온 자신의 이름은 도저히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유빛나 씨!”

그제야 빛나의 눈동자가 반응하며 헐레벌떡 달려와 숨이 턱까지 차오른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꺼풀 없이 살짝 쳐진 눈매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남자였다.

그 웃음이 어찌나 선한지 현성으로 인해 찜찜했던 빛나의 기분까지 밝혀주는 것 같았다.

빛나는 현성의 넥타이 끝을 움켜잡은 채 그대로 멈춰 자신을 바라보는 그 남자를 놀란 눈으로 마주했다.

이렇게 뇌 사이사이에 있는 주름까지 밝혀주는 훈남을 그녀가 알고 있었던가?

“저…… 아세요?”

그러자 남자는 이제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화사한 눈웃음을 발사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요, 알다 마다.”

“…….”

“제, 수, 씨.”

순간 그녀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며 움켜쥐고 있던 현성의 넥타이 끝이 스르르 풀려났다.

그와 동시에 현성의 눈에선 곤욕스러움이 드러났다.

조금 전 빛나에게 생각 없는 말을 내뱉었던 제 주둥아리를 씹어 먹어버리고픈 심정이었다.

그러한 두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여전히 기분 좋게 웃으며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드디어 뵙네요. 위승준입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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