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농담 같은 진담
2018.08.26.
“저거 봐, 저거 봐! 지금 쟤 우리한테 욕하는 거라니깐?”
“몇 번을 이야기해. 마그네슘 결핍이라고.”
“언니, 쟤 가슴 했다.”
“자연산이래.”
“아냐. 했어. 딱 보면 알겠는데?”
“기사 떴어. 자연산이라고.”
“그럼 그 기사, 사기!”
정작 현희는 너무 놀라 한 마디도 못하고 입만 떡 벌린 채 바라보고 있는데 두 사람은 거의 만담 수준으로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급기야 빛나와 복실은 그 자리가 마치 제 자리인 것처럼 너무도 태연스럽게 앉아버렸다.
이에 기겁한 현희가 너무 긴장해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 아세요?
그 목소리에 빛나의 갸름한 눈썹이 대번에 구겨졌다.
암, 알다마다!
빛나는 눈앞에 있는 조현희가 생각보다 예쁘다는데 몹시 불쾌했다.
자연산이라는 가슴도 육감적이 몸매도, 머리가 비었다고 사람들이 욕은 하지만 그래도 연예인은 연예인이다.
그 사실이 다소 짜증이 난 빛나는 빨리 끝내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고, 유치하게 질투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더 이상 승현을 빌미로 조현희가 시선을 끄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명함을 현희 앞으로 내밀며 간단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길게 가지 말고 짧게 가자. 나도 입 아프니까. 위승현이랑 찍은 사진 있지? 그거, 당장 내려. 그리고 네 입으로 직접 해명해줬음 좋겠어. 위승현이랑 너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변호사…… 예요?”
그 물음에 대답할 가치도 못 느낀 빛나는 날카로운 눈매로 현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곁으로 언제 주문했는지 소주와 꼬치를 끼고 앉아 있는 복실도 입과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나 눈은 현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연예인이란 직업을 가졌고, 누구보다 주목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그곳의 생리상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걸 즐기는 현희였지만 이 두 여인의 눈빛만은 정중이 거절하고 싶을 정도였다.
“오빠가…… 승현 오빠가 보낸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요?”
하지만 막상 현희에게서 뜻밖의 질문이 터져 나오자 빛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모습에 현희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본다.
그녀도 연예계에서 굴러먹은 지 어언 10년이다.
상식은 딸릴 지 모르나 눈치는 누구보다 빠른 현희였다.
“이상하네. 당사자도 가만히 있는 사진을 왜 당신들이 내리라 마라야?”
순간적으로 날이 선 현희가 겁 없이 선을 넘어버렸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꼬치구이를 입안 한가득 넣었던 복실이 볼이 터질 듯한 얼굴로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쏟아냈다.
“이 대아리 삐도 아마른여이 지그 이리 보거 다시이라거 하거야?”
이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년이 지금 우리 보고 당신이라고 한 거야? 라는 말이었으나 입안 가득 음식을 넣은 덕분에 제대로 된 언어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완벽한 언어가 아닐지라도 충분한 뜻 전달은 가능했다.
복실이 다 훑어 먹은 날카로운 꼬치를 양손에 들고 현희의 눈앞에 흔들며 눈을 부라렸기 때문이다.
잘하면 찌를 기세다.
아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여자 같았다.
생긴 것만큼 그녀의 마음까지 순수하지 않다는 건 술 먹는 버릇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복실이 입에 있는 음식이 넘어가지 않자 소주를 물 삼아 들이켰기 때문이다.
쾅!
그러곤 테이블에 잔을 큰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현희는 놀란 눈동자로 복실을 바라보았다.
“됐어, 복실아. 흥분하지 말고 먹던 거나 먹어. 너 저녁도 안 먹었다며.”
빛나가 흥분한 복실을 달랜 후 현희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고분고분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체면상, 그리고 현희의 신분상, 머리채 잡는 그런 막장 드라마는 되도록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이제부턴 유빛나 인내심 테스트 되시겠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더 이상 큰일 만들지 말자고.”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날 위해서 이런다는 게 참 웃기네요. 도대체 우리 오빠랑은 무슨 사이예요?”
빠직!
뭐시라? 너 방금 우리 오빠라 했냐!
빛나의 이마에 순식간에 실핏줄이 돋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은 눈앞에 있는 조현희의 가늘고 예쁜 목을 잡고 비틀 것 같아 애먼 물 잔을 바스라지도록 틀어쥐었다.
“승현이랑 내가 무슨 사이인지는 네가 알 바 아니고. 사진, 내려야 할걸. 안 그럼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거거든.”
“참나, 무슨 이유로? 승현 오빠 명예훼손 한 사실이 없는데?”
“말 짧다. 네 뇌 속에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주름은 위아래도 구분 못 하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빛나의 눈썹이 허공으로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현희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감히 그녀들을 상대로, 뇌만 없는 줄 알았더니 간도 배 밖으로 가출한 모양이다.
“어쨌든, 제가 아무리 뇌에 주름이 없어도 명예훼손죄가 뭔지는 알거든요? 사실이나 허위 사실을 유포해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면 그게 명예훼손 아니에요?”
속사포처럼 쏴붙이고 숨을 씩씩거리던 현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빛나를 마주 보았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녀가 말을 너무 잘해 빛나가 할 말을 잃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수박 겉핥기식의 아는 척은 오히려 빛나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는 꼴이었다.
더군다나 법률용어라니, 바로 그녀의 전공이 아닌가.
빛나는 앙칼진 현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 말이 맞아. 잘 알고 있네, 명예훼손죄에 대해서. 그런데 말이지,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취지에서 볼 때 특정인의 사회적 가치 내지 평가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면 충분히 명예훼손죄가 성립이 되거든. 네가 올린 사진과 글은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을 만큼 우회적인 표현을 했기에 피해갈 수 없을 거야.”
차분하고 끝이 분명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현희는 머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너무 유식한 말들 때문에 과부하가 걸린 뇌가 빛나의 말들은 걸러 듣지 못한 것이다.
뭐라고? 특정인의 사회적 가치…… 어쩌고…… 저쩌고…….
“그리고, 알지? 위승현이 인물과 배경으로 주목받는 바람에 그 능력이 잠시 뒤로 밀린 건 사실이지만, 광고 마케팅 분야에선 거의 신의 손이야. 승현이 아시아 지사로 오면서 성사시킨 계약이 몇 건이나 되는지 알아? 그리고 진행 중인 것도 마찬가지고. 거기에 걸린 금액도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야. 너야, 네 이미지 개선 시켜보고자 객기로 올린 사진일 수 있겠지만 만일 그로 인한 이미지 실추로 승현이 그 계약 중 단 한 건이라도 놓치게 된다면?”
“…….”
“그에 대한 손해배상도 해야 할지 몰라. 그리고 또 하나, 그게 내 전문이거든.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직접 그 사건을 맡아 변호할 거야.”
뭐라? 변호를 한다고?
놀라 눈이 동그래진 현희를 바라보며 빛나는 그 어느 때보다 섹시하게 턱을 괴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때, 이 언니 법정에서 한번 볼래? 완전 개-쉑시한데.”
그 말에 현희는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빛나가 내민 명함은 시선만 주었을 뿐 감히 집어들지도 못했다.
말문이 막힌 현희의 모습에 복실은 옳거니, 박수를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적어도 법정에선 가슴 큰 애보다 뇌 큰 우리 언니가 더 먹히지!”
상황으로 보건대, 현희가 KO패였다.
물론 그녀의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처음 접한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빛나가 자신을 변호사라 소개하며 명함을 내민 그 순간부터 이미 승부는 정해져 있었는지 모르겠다.
곧 죽어도 말주변 없는 조현희에겐 말로 먹고사는 빛나가 최고의 천적이었으므로.
과연, 이대로 그냥 돌아설 것이냐.
위승현만 잡으면 그녀의 이미지 변신이 문제가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연예계를 완전히 떠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 이상 남들에게 무뇌아라 손가락질받지 않아도 되고, 싸구려라 숙덕대는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문제는 눈앞에 있는 그녀들이 한 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빛나의 말대로 명예훼손으로 고소라도 당하는 날엔, 그렇지 않아도 좋지 못한 이미지 더 개판 치는 걸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생매장당할 수도 있었기에.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그래봐야 돌 굴러가는 소리, 도통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놀란 목소리가 세 사람의 귓전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빛나야, 네가 어떻게 여길…….”
세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약속시간에 맞춰 나온 승현이 서 있었다.
가뜩이나 넓은 어깨와 훤칠한 키 때문에 부스 안이 꽉 찬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현희는 보았다.
지금까지 의기양양하고 차분하던 빛나의 우아한 눈동자가 당혹스러움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머리는 안 돌아가지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현희였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빛나가 와서는 안 될 자리에 왔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런 걸 바로 전세역전이라고 했던가?
현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승현의 팔을 붙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래봬도 연기 인생 5년이다.
“오빠! 왜 이제 왔어! 나 저 언니들 때문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연기였다.
복실이 기겁을 하며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워! 야, 나는 네가 더 무섭다! 어디서 그런 발연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유난히 꿋꿋한 현희다.
반대로 빛나는 참담한 표정으로 틀어쥔 물 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런 낭패가 있나.
질투하지 않겠다 대인배처럼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현희까지 찾아와 이런 유치한 쇼를 벌여 놓았으니, 창피함에 그냥 땅으로 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무지 승현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빨개진 얼굴로 변명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앉아 있는 빛나를 보며 승현은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온 것이다.
그제야 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틀어막으며 왼쪽 팔에 붙어 있는 조현희를 떼어냈다.
“덥다, 좀 떨어져 봐라.”
“흐음, 오빠. 이 언니들이 나 막 협박했다고.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는 둥, 손해배상 청구한다는 둥…….”
하지만 승현은 현희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그녀를 떨쳐내곤 자연스럽게 빛나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빨개진 그녀의 얼굴에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어지간히도 창피한 모양이다.
그런다고 승현이 왔던 자리를 돌아갈 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오히려 잘됐다.
빛나 몰래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고 마련한 자리인데 이젠 당사자도 있으니 내친김에 그 사진에 대해 확실히 해두어야겠다.
그래야 결혼 후에라도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걸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뭐야, 신경 안 쓴다더니…….”
웃음을 가득 머금은 그의 목소리에 빛나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고 개미만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랬지. 그랬는데…… 아, 복실이가 자꾸 오자고 그러잖아.”
“커억! 내가-아?”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소주 한 잔을 들이켜던 복실이 사레들린 목을 컥컥대며 되물었다.
보통 억울한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승현에겐 현희의 질투뿐 아니라 그러한 복실의 억울함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눈에 담을 수 있는 건, 질투로 얼굴이 빨개진 유빛나뿐이었다.
심지어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빛나야, 나 좀 봐봐.”
“아, 진짜. 눈치 없게스리. 나 지금 쪽팔려서 얼굴 못 드는 거 안 보여?”
“아니, 이게 왜 쪽팔릴 일이야?”
“그게 왜 쪽 팔일 일이냐면요, 오빠도 가만히 있는데 변호사라는 이 언니가 나타나서 저를 막 협박하고 그랬거든요.”
질문은 빛나에게 했으나 대답은 현희에게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승현의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는 시종일관 빛나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라? 이거 분위기 겁나 이상하다.
승현이 등장하는 순간, 그리고 빛나의 얼굴에 스친 그 민망함을 포착한 순간, 현희가 그린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는 빛나와 그런 그녀의 의자 뒤를 긴 팔로 감싼 채 시종일관 시선을 떼지 않는 승현의 모습, 그야말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저 눈빛은 누가 봐도 사랑이었다.
바보에 연애 고자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러한 현희의 예상은 점점 현실이 되어갔다.
“하마터면 진짜 서운할 뻔했잖아.”
“뭐가?”
“아무리 나를 믿는다지만 진짜 질투조차 안 하는 줄 알고.”
질투와 창피함으로 범벅이 된 여자와 그런 그녀를 마냥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저 남자.
뭐? 남자 하나 잘 만나 지긋지긋한 연예계 빠이빠이 하고 팔자 한번 바꿔보겠다고?
아, 멀어지는 꿈이여!
아무래도 조현희는 평생 연예계에 뼈를 묻을 팔자인가 보다.
그것도 여전히 무식한 캐릭터 1호로.
“내친김에 우리 오해도 좀 풀자. 현희 네가 직접 말해줄래? 그 사진, 아무런 의미 없는 사진이라고. 너랑 나 만난 거 고작 서너 번이잖아. 그러다 내가 독일로 잠깐 떠나면서 연락이 끊겼고.”
“아냐, 됐어. 승현아……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말해. 너랑 나,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고.”
빛나가 말렸지만 승현의 마지막 말투는 무척이나 단호했다.
마치,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하지만 억울했다.
지금까지 그녀들에게 당한 건 현희인데 마지막까지 그녀들이 원하는 그것을 덥석 던져주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그래서, 외쳤다.
“아니, 내가 왜요? 차라리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명할래요-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아무리 무식하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남자로부터 온 팬레터도 꽤 되고 팬클럽도 있는 연예인인데, 이런 식의 취급은 용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승현의 한마디가 또 한 번 세 여자의 넋을 빼놓고 만다.
“우리…… 다음 달에 결혼하거든.”
“푸헉!”
빛나가 마시던 물을 뿜어냈다.
하필이면 그 앞에 조현희가 있었고.
***
“푸하하하하- 고년 얼굴 봤어? 아효, 스트레스가 그냥 확 날아가네!”
빛나가 뿜어낸 물을 처참하게 얼굴로 받아낸 조현희를 떠올리며 복실은 차 뒷좌석에서 거의 드러누워 웃어댔다.
다시 생각해도 고소한 모양이다.
“얼굴이 아주 썩더라고! 푸하하하.”
“그만 좀 웃어. 넌 이 상황이 재미있니?”
생각하면 할수록 민망하고 아찔한 상황이라 빛나 얼굴은 여전히 발그레 한 상태였다.
“언닌 안 재미있어? 갈 때만 해도 머리끄댕이 잡을 것처럼 가더니 너무 우아하게 나오길래 난 우리 언니가 뭐 잘 못 먹은 줄 알았지? 그런데 역시 고단수였어. 클라이맥스는 따로 있었다고.”
“다시 말하지만 계획적이었던 게 아니야. 너무 놀라서 그만…… 나도 실수한 거라고.”
빛나는 차분하게 설득시키려 했지만 어쨌든 결과에 만족한 복실을 이해시키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취기가 올라와 눈이 풀린 상태에선 더더욱.
“승현아, 우리 좀 빨리 가야 할 것 같아.”
“왜?”
“그냥 내 말 들어. 조짐이 안 좋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승현은 예민한 빛나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그 뜻을 거스르거나 토를 달았다간 오늘 밤이 편치 못할 것 같았으므로.
“어쨌든 우리 언니 목적은 달성했네. 걔가 더러워서 내일 해명한다잖아. 두 사람 사이에 끼기 싫어서.”
복실은 아예 앞으로 상체를 내밀어 두 사람 사이에 탁 끼어 운전을 하는 승현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승현의 느낌도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좋겠다. 두 사람은, 결혼도 하고.”
“복실아, 뒤에 허리 붙이고 앉아 벨트 매. 멀미하면 취기가 더 빨리 올라온단 말이야.”
빛나가 복실을 뒤로 밀며 신신당부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동문서답이었다.
몸은 여기 있는데 멘탈은 가출을 한 것마냥 눈의 초점도 점점 없어진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서글픈 표정으로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으아…… 나도 시집갈 거야! 위승주 불러줘-어!”
“흡!”
“헉!”
그와 동시에 승현과 빛나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조금 전부터 불안하던 그 기운이 활화산처럼 터져 버리고 만 것이다.
강복실…… 취했다!
“위승주 불러-오라-고오!”
“빨리 밟아. 승현아! 아직…… 우리 아직 시간 있어!”
“바…… 밟고 있어!”
“더 빨리!”
“그렇다고 신호를 무시할 순 없잖아! 결혼도 하기 전에 여기서 인생 종 치고 싶진 않다고!”
“인생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내 멘탈이 종 치게 생겼어! 빨리 밟으라고! 강복실, 아직 변신 전이라고!”
“도대체 술은 언제 그렇게 먹었대?”
“야, 인마! 너네 형 어딨냔 말이야! 저번에도 얍삽하게 잘 빠져나갔겠다? 차까지 바꿔 타고?”
“강복실! 승현이 운전 중이잖아! 멱살은 왜 잡아! 왜! 남의 남자를!”
난리 났다. 술기운이 올라오자 흥분과 설움으로 범벅이 된 복실이 운전 중인 승현의 멱살을 움켜쥔 것이다.
“에이, 진짜! 개복실!”
열 받은 승현의 입에서 드디어 개복실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빛나가 가까스로 복실을 밀어 떨어트려 놓았다.
그녀의 힘에 밀려 나간 복실이 뒷좌석으로 풀썩 쓰러졌다.
긴 머리가 앞으로 쏠리자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으스스한 분위기다.
하지만 그 으스스함은 공포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불길한 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오늘도 여지없이 비켜가는 법이 없었다.
“으윽, 언니…… 우웩!”
“으아아-악! 개복실! 너!”
드디어 개복실 변신 완료.
오바이트를 하고 나면, 그나마 가느다랗게 유지되고 있던 강복실 멘탈은 영원히 바이 바이를 하고 그 유명하다는 ‘멍멍신’이 강림하신다.
가뜩이나 길어 행동반경이 큰 복실이었기에 차 안에서 강림하신 멍멍신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어떻게든 그 길은 피해보고자 몸부림을 쳤건만, 오늘 그들의 운빨은 여기서 끝이 난 모양이다.
“하…… 망했다!”
“아, 젠엔-장!”
진동하는 냄새에 망연자실해진 승현이 악에 받친 듯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빛나는 거기에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조현희와 한 신경전보다 맨정신으로 개복실과 마주한 충격이 더 컸던 탓이다.
“최대한 빨리 가. 알지? 그분 강림하시면 ‘더듬이 신’도 같이 오는 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복실이 뒤에서 운전석을 덥석 끌어안았다.
덕분에 기겁한 승현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온다.
“아악! 어딜 만져! 이 손 못 떼?”
“오빠-앙! 우리 오빠…… 어디 갔다 이제 왔노? 복실이 집에 데려다 줄거양? 응?”
“에이. 진짜!”
따지고 보면 안쓰러워 결국 승현은 튀어나오는 욕을 집어삼키며 액셀을 깊게 눌러 밟았다.
정말 원수가 따로 없다.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나 보다.
아무리 조현희라도 그 가슴에 대못 박으니, 멍멍신 강림하사 복실을 통해 바로 벌을 내리지 않았겠나.
결국 승현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안전벨트보다 더 든든한 복실의 팔에 안겨 왔더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빛나는 승현의 한마디가 신경 쓰여 가슴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리…… 다음 달에 결혼하거든.
농담 치곤 진담 같은 한마디였기에.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