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야하고 섹시하게.
2018.08.19.
살짝 치켜 올라간 눈썹이, 꾹 다문 입술이, 분명 화가 난 얼굴이었다.
우빈은 도망가라 충고했지만, 도망이라면 열 받은 승주로부터 늘 하던 것이라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승현은 돌아설 수가 없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탔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시원스럽게 따귀를 걷어 올리면 어쩌지?
성격으로 보건대 정강이를 걷어찰 수도 있겠구나.
만일 어퍼컷을 날리면?
빛나는 도저히 예측 불가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어떤 그림도 아름답지 못할 거라는 것.
승현은 지금까지도 도망가라 충고하는 우빈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그녀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그를 올려다볼 때까지 기다렸다.
눈앞에 도착해 마주친 그녀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까맣고 진지했다.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과연 그가 예상한 보기 안에 그 답이 있기는 한 걸까?
승현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녀가 두 주먹을 꼭 그러쥐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협상을 위해 우리 측에서 원하는 협상안 엘리스한테 줬어. 본사랑 협의해보고 다음 협상 때 참고해줬으면 해.”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예쁜 입술이 열렸을 땐 생각보다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름 돋는 침착함에 승현은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간 듯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경찰서 간 건 잘됐어?”
도대체 그에게 왜 이러는 것일까.
천국을 가장한 지옥에 떨어진 느낌이다.
너무 긴장한 탓에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비롯해 자신이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 일 없었냐고.”
다시 한 번 되물어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번에도 역시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빛나가 그러쥔 주먹을 여전히 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됐어.”
하지만 빛나는 그의 끄덕임에 다정한 토닥임을 보였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머물다 간 심장 근처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뻐근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빛나는 그렇게 돌아서 버렸다.
시원스럽게 따귀를 걷어 올린다거나 정강이를 걷어차는 폭력 따윈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다그치는 추함 따위도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빛나는 우아하게 돌아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닫히는 문 사이로 엘리베이터 중간에 있는 손잡이를 하얀 뼈마디가 보일 만큼 그러쥐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시종일관 차분한 모습으로 그에게 말했다.
“좀 있다, 집에서 봐.”
이번에도 역시 승현은 말없이 넋을 놓은 채 기계적으로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야 승현은 방금 전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화가 났음이 분명했지만 시종일관 침착하고 우아한 모습은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유빛나가 누군가.
그 성격에 그의 이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을 접했다면 우빈의 말처럼 산채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회 떠 먹었을 여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히 넘어갔다?
설마…… 모르는 것일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어쩌면 그가 너무 긴장한 탓에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그랬나 보다.
자, 이젠 그가 살 길은 하나뿐이다.
어차피 터져버린 사건 빛나가 모르길 기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모를 수 있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일, 빨리 수습하는 것이 그가 살 길이었다.
그가 해명 기사를 내든지, 조현희가 해명 기사를 내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물론 조현희가 스스로 해명 기사를 내는 것이 완벽한 그림이 될 것이다.
빨리 움직이자.
그래야 빛나가 손톱을 세우며 달려들 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엘리스, 지금 조현희 기사 살펴보고 법적으로 걸고넘어질 수 있는지 한번 알아봐.”
“왜요?”
“몰라 물어? 내 명예 회복은 해야지!”
“그러니까, 왜요?”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
머리 좋은 엘리스가 빛나를 모를 리 만무한데?
“빛나가 알면, 저 성격에 이번 일 무사히 넘어갈 것 같아? 나도 살 궁리는 해야 할 거 아냐?”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여는 승현에게 엘리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물었다.
“설마, 지금 유 변호사님이 그 스캔들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돌아서던 승현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엘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엘리스의 얼굴이 선명히 눈에 들어와 박혔다.
그러곤 다시 한 번 확인 사실을 해준다.
“헐…… 꿈도 크셔라.”
그렇게 엘리스는 날로 일취월장하는 한국어 실력으로 승현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겨주고 말았다.
***
“짜, 증, 나!”
빛나는 복실이 내민 치즈 케이크를 옆으로 밀어 버리며 자신의 기분을 또렷하게 밝혔다.
귀에 쏙 들어오는 그 발음에 복실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가 내민 치즈 케이크를 제 앞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짜증 나면 끙끙 앓지 말고 말을 하던가. 그년, 뭐하는 년이냐고.”
“어디 내 주제가 그럴 주제나 되니? 나도 파혼한 과거가 있는데.”
그랬다. 때문에 낮에 기사를 본 즉시 쫓아 올라가 승현을 대면했지만 두 주먹을 꼭 틀어쥐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과거까지 사랑했던 그가 아닌가.
그 사랑을 되돌리자면, 그녀도 그의 과거를 보듬어 안아야 옳았다.
문제는, 생각보다 그녀가 그리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아량이 얼마나 좁은지 처절하게 느낄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쿨한 척하려는데…… 속에서 천불이 나. 미치겠다고.”
“그래. 언니 성격에 따져 묻지도 못하고 천불이 나겠지.”
그렇게 말하며 복실은 욕심 많게 빛나가 밀어버린 케이크와 본래 제 것이었던 케이크까지 동시에 한입씩 베어 물었다.
그런데 빛나는 그런 복실의 모습이 마냥 예쁘기만 하다.
조금 특이한 성격 빼고는 어디 하나 모자람 없는 복실이 왜 그토록 목석같은 남자에게 목을 매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생김새 빼고는 사람인지 사이보그인지 모르겠는 그 남자에게 말이다.
“넌……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
“누구? 승주 오빠?”
“응.”
“좋지. 안 좋아하면 미쳤다고 내가 그렇게 목을 매겠나.”
“그러니까, 내 말이.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조건 없이 사람이 좋을 수가 있어?”
“언니, 사람 싫은데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 좋은 데는 이유가 따로 없는 거야. 그러는 언니는…… 승현이 왜 좋은데?”
“그거야…….”
잘생겼으니까, 돈 많으니까, 능력 있으니까…… 등등,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되지 않았다.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승현은 빛나에게 사랑이었다.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라도 이젠 그 손을 놓을 수 없는.
“승현이니까…….”
그랬다.
다름 아닌 위승현이니까, 그냥 조건 없이 좋은 거다.
대답을 하는 빛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위승현은 끊을 수 없는 마약처럼 점점 치명적이 되어가는데, 반대로 그녀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가 가진 조건이 그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동안 남에게 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 생각했는데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그녀가 넘을 수 없는 선은 분명히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넘을 수 없는 선 안에 승현이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점점 지치게 만든다.
“말할 처지도 못 되면서 쿨하게 잊지도 못해. 나부터 다른 사람을 사랑했던 과거가 있으면서 승현이 사랑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화가 나, 내 스스로한테.”
“헛. 무슨 소리야? 승현이 사랑? 언니, 설마 승현이가 걜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냐? 그러니까 만났겠지.”
“헐…… 이 언니 큰일 날 소리 하네. 승현이가 날라 먹어서 그런 여자 좋아했을 것 같지? 근데 그 녀석, 의외로 되게 고지식한 취향을 가지고 있거든. 승현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조현희처럼 가슴 크고 머리 빈 애들이야. 걔, 이번에도 무슨 퀴즈 프로 나와서 무식 터지는 소리해 욕을 바가지로 먹더만?”
“그래도 걘 예쁘잖아. 여자가 봐도 예쁘던데, 가슴도 자연산이고.”
“그래도 아냐. 승현인 절대 그런 스타일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그럴 여유도 없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도 20년째 외기러기 사랑을 하고 있지만, 그 녀석도 징그럽게 고집스러운 놈이거든. 걘…… 처음부터 끝까지 언니밖에 없었어.”
“뭐라고? 하지만 그땐 우리 다시 만나지도 않았던 땐데?”
“참, 우리 유빛나…… 의외로 순진하네. 언니, 나랑 승현이가 아는 사이라고 한 그 순간부터 뭔가 짚이는 게 없어?”
“짚이는 거?”
“아, 그 머리로 사법고시 어떻게 합격했대?”
“무슨 소리야?”
“언니랑 내가 만난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엄연히 전공도 다르고 심지어 수업 받는 학교 건물로 달랐는데?”
“…….”
“승현이야. 그 녀석이 부탁했어. 현성이가 언니랑 같은 학교라는 걸 안 순간부터, 그 미친놈이 언감생심 언니 넘어본단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 물론…… 그다음부턴 내 자의에 의해 언니 옆에 붙어 있었지만.”
순간, 빛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생활에서 우연치 않게 승현과 재회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 재회 한 번으로 대학 생활 내내 법대 얼짱이란 타이틀을 가지고도 연애 한번 해보지 못했던 지난날도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그 모든 게…… 전부 계획된 일이었단 말이야?”
“뭐, 계획된 일은 아니지. 승현인 그냥 언니를 현성이 그놈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때 그랬어. 그 녀석을 안 이래 처음으로 망설이는 모습을 봤어. 욕심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고 말았던 그 녀석이 언니는 쳐다만 봤다고.”
“…….”
“쳐다만 보는 게 뭐가 대수냐고? 하지만 언니도 승현일 알잖아. 그 녀석한테는 그게 바로 ‘대수’야. 참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 녀석이 두 눈 가득이 갖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언니는 쳐다만 봤으니까.”
“…….”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언니는 충분히 질투할 자격이 있는 여자야.”
“…….”
“바로 위승현의 여자니까.”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앉아 유난히 그녀답지 않게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복실의 목소리에 가슴 한켠이 뭉클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물론 원장 수녀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긴 했지만 가족이 줄 수 있는 조건 없는 사랑에 비할 수가 없었다.
늘 빛나의 가슴 한켠엔 채울 수 없는 공백이 있었다.
한때는 그 공백을 원준이 채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그녀의 가슴 한 자락은 여전히 쓸쓸했다.
그런데 바로 오늘, 그 가슴 한켠이 꽉 메워졌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들어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로부터 줄 곧 사랑을 받아왔단 사실은 수년간의 허기를 메우고도 넘쳤으니까.
“아, 진짜 위승현…… 웬수가 따로 없다.”
빛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복실이 싱긋 웃으며 이야기한다.
“걔가, 생각보다 감동이야.”
그때 카톡이 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승현도 양반은 못 되는 듯싶었다.
[아파트 앞으로 나올래? 기분 꿀꿀한데 아이스크림이나 먹자.]
그 카톡에 빛나는 절로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누구야, 승현이야?”
“응.”
“나가봐.”
복실의 말에 빛나는 냉큼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신발을 신는 그녀의 등 뒤로 복실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찾아 든다.
“알지, 언니? 속으로 끙 앓지 말고 따귀를 날리든, 주먹을 날리든, 맘대로 하라고. 그러다 병나지 말고.”
그 말에 빛나는 손을 번쩍 들고 인사를 건네며 현관문을 뛰쳐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도중에도 심장은 왜 그리 난리를 치는지.
마치 연애 처음 하는 사람처럼, 짝사랑하는 동네 오빠 만나러 가는 열여섯 소녀처럼, 마냥 설레었다.
그리고 드디어 아파트 입구를 벗어나 그 앞에 서 있는 그를 보았을 때 빛나는 바람처럼 달려가 찰떡처럼 안겨들었다.
그렇게 폭풍처럼 달려드는 그녀를 승현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제품으로 받아내었다.
물론 에너지 충만한 그녀가 넘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해 너무 높이 점프해 달려드는 바람에 단단히 그녀를 안아 올려야 했지만, 이 정도쯤이야.
“뭐야, 잔뜩 우울할 줄 알았더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자진납세 해 감형이라도 받아보고자 궁리 끝에 아이스크림 데이트를 계획했다.
여자는 단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승희의 말이 기억나서다.
그런데 의외로 빛나는 한껏 상기된 표정이다.
심지어 볼도 발그레한 것이 어찌나 예쁜지, 여기서 아이스크림을 먹였다간 날개 달고 하늘로 승천할 기세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좀 우울했더랬지.”
“그런데?”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알았거든.”
“헛.”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우울함 끝에 술을 한잔한 것일까?
어쩌면 저 발그레한 볼이 알코올 기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해, 위승현.”
난데없는 사랑 고백에 승현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갔다.
그렇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폭탄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승현은 그런 빛나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런 시한폭탄이라면 기꺼이 끌어안고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내가 더 사랑하지, 유빛나.”
까만 밤하늘 아래, 더없이 예쁜 그들이었다.
***
“맛있어?”
“응. 달달한 게 아주 좋아.”
“아이스크림이 유명한 집이래. 직접 만든다고.”
“그런데 이런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했대?”
“승희가 알려줬지. 여자는 기분 나쁠 때 단걸 먹으면 좋아진다고.”
오픈카에서 SUV로 갈아탄 덕에 까만 밤하늘을 직접 마주할 순 없었다.
하지만 선루프를 열어 마주한 작은 밤하늘은 끝도 없는 밤하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한 남자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떤 밤하늘을 데려다 놓아도 빛나에겐 가장 예쁜 세상이 될 테니까.
“많이 속상했어?”
승현이 운전대에 기대어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어왔다.
오늘따라 강아지 같은 그 모습에 빛나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심장 어택을 당했다.
“조금. 하지만 이젠 괜찮아. 질투 안 할 자신 있어.”
“음, 그건 좀 서운한데.”
“뭐가?”
“질투는 해야지.”
“그럼 나 질투해도 돼? 후회할 텐데…….”
빛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승현은 웃음을 머금고 만다.
“질투해. 맘껏 해. 안 하면 오히려 서운해. 대신…….”
“대신?”
“걱정은 하지 마.”
“…….”
“넌, 나만 바라보고 있으면 돼.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치울게.”
이씨, 오늘 위승현 날 잡았다.
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감동이란 말인가.
그러면 빛나 심장은 어떻게 살라고.
“너무 그러지 마. 이러다 나 정말 내 힘으론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가 될 것 같아.”
“이젠 편하게 좀 살아도 돼. 투정도 부려도 되고, 서러우면 울어도 돼. 다 네가 감당하려 하지 마.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진짜 유빛나로 살아. 말했잖아, 내가 책임진다고.”
“…….”
“참는 게 습관이라고, 내 앞에서까지 두 주먹 꼭 그러쥐고 참아내면…… 내가 숨 막혀. 오늘 하루 종일 그랬다고. 곧 터질 것 같은 모습으로 따귀라도 한 대 날릴 것처럼 다가와서는 그냥 가버리면…… 나는…… 나는 어떻겠니. 차라리 터트려. 기꺼이 맞아줄 테니. 그럴 각오로 네 앞에서 도망 안 간 거야. 변명도 안 한 거고.”
“사람이 어떻게 매번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그리고 참았길래 망정이지, 그 자리에서 네 따귀라도 날렸으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니? 후회했을 거야. 너 때린 거.”
“유빛나…… 말이나 못 하면.”
승현이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뺨을 훑어 내렸다.
간질이는 그 손동작에 빛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작은 웃음을 보였다.
“간지러워. 그러지 마.”
“예뻐서 그래.”
“아이스크림이나 먹어. 다 녹겠다.”
“알잖아. 나 단 거 안 좋아하는 거.”
“그럼 이것도 내가 먹으라고? 너무 많아. 너 먹어.”
“후회할 텐데.”
“왜?”
“내가 아이스크림을 좀 야하게 먹거든. 완전 섹시하게.”
“풋! 도대체 어떻게 먹어야 야하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데? 어디 한번 보여줘 봐. 나도 따라 해 보게.”
“진심이야?”
그 물음에 빛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스푼 하나를 내밀었다.
하지만 승현은 여전히 운전대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볼 뿐 그 스푼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강아지 같은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짙게 가라앉으며 반짝 빛이 났다.
“안 먹어?”
“난 스푼으로 안 먹어.”
“응? 그럼 어떻게 먹어?”
떠먹는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안 먹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먹겠단 이야긴가.
하지만 곧 빛나는 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먹지.”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덮쳐왔다.
말랑하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훑었다.
그러자 아이스크림으로 인해 차가웠던 입술이 순식간에 열기로 휩싸였다.
입안으로 곧장 침투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이 묻은 입술을 핥는 그 움직임이 어찌나 야한지 발끝까지 찌릿할 정도였다.
“그냥 먹으면…… 너무 달거든.”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달콤했다.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 내리깐 눈매가 너무 섹시했다.
다시 한 번 그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하지만 이번엔 그의 숨결이 갈라진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달콤함에 젖어 있던 그녀의 모든 것을 휘어 감았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였다.
단걸 먹으면 아이처럼 유난히도 하이퍼가 되거니와, 단맛을 좋아하지도 않기에 이렇게 그녀의 입술에 묻은 걸 먹으면 일석이조가 아닌가 싶어 시도한 키스였다.
그런데, 너무 달다.
그냥 아이스크림 한 통을 죄다 들이부은 것처럼 달아도 너무 달았다.
덕분에 승현의 기분은 원 없이 치솟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그녀를 보며 지금까지 잘 참아왔던 원초적인 감각까지도 모조리 들고 일어났다.
“젠장, 유빛나…… 너무 달잖아.”
좁은 차 안이라 끙끙 앓는 그의 모습에 빛나는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위승현. 아이스크림이 달지, 쓸 줄 알았어?”
“달아도 너무 달아. 정신줄 놓겠다고.”
승현은 끙, 하는 신음 소리를 토해내며 다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멈출 것 같지 않은 뜨거운 숨소리가 차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서로에게 정신없이 달려드는 그들 머리 위로 까만 밤하늘의 별들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승현은 그날 밤, 원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더랬다.
그것도 그 어느 때보다 야하고, 섹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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