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내겐 너무 벅찬 그들.
2018.08.12.
“푸헉!”
순식간에 모든 사람이 얼음이 되었다.
심지어 거대한 헤일이 덮쳐 와도 목석처럼 그 자리에 앉아 수저질을 할 것 같은 승주마저도 잠시 멈칫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승희는 도저히 멈출 생각이 없는 듯 입을 열었다.
그녀가 이토록 말을 잘했던가, 의심스러울 만큼 굉장히 설득력 있는 어휘력을 구사하며.
“오빠, 설마 큰오빠랑 작은오빠 장가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아니지? 그러다 빛나 언니 늙어 죽어. 우리 노멀한 사람 먼저 제 짝 찾자고. 우리 집에서 그나마 내가 제일 노멀하니까 먼저 간 거 아냐? 그 다음은 막내 오빠 순서야.”
물론 그녀답게 끝까지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한 탓에 다소 말도 안 되는 이론이 첨가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승현은 그 말도 안 되는 이론을 냉정하게 콕 집어냈다.
“누가 그래, 너보고 노멀이라고?”
“아니, 그럼 지금 순서대로 가겠단 이야기야? 작은오빠 간 다음에? 말이 돼? 어느 세월에?”
그 말에 결국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은 승주가 물었다.
“너희들은 의외로 내가 결혼을 빨리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안 하니?”
심지어 평소답지 않게 물음 끝을 올리면서 까지 말이다.
남들에겐 노멀한 말투였지만 승주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에 식탁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승주에게 쏠렸지만 딱 거기까지다.
순식간에 빛나와 승현의 머릿속에 복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빛나는 웃었지만 승현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이 노멀하다 주장하는 승희와 누가 봐도 비정상인 복실, 거기에 빛나까지 가세한다면 위씨 집안 남자들 숨이나 쉴 수 있겠나.
결국 승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형이 결혼만은 신중해줬으면 해. 그리고 우리 결혼은 우리가 알아서 결정할게. 아직 빛나랑 거기까지 상의해보지도 못했어. 심지어 빛나는 이 자리에 거의 끌려오다시피 했다고.”
“나는 괜찮아, 승현아. 오늘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감사하다잖아.”
승희가 말했지만 승현은 그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작은형을 있는 그대로 대면했는데? 심지어 화장실 문고리도 뜯었잖아! 빛나 안에 있는데!”
“그건 사고였어.”
“나도 봤어. 그건 사고였어. 우리가 말릴 새도 없었거든.”
우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주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쯤에서 끊어주지 않으면 오늘 하루 종일 밥을 못 먹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 빛나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지금껏 지켜보던 위태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이쯤에서 그만하고 밥부터 먹자. 빛나 양 배고프겠다.”
그제야 가족들은 수저질을 할 수 있었다.
혀끝에 기름기가 돌고 감질 맛이 나니 밀려왔던 허기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조용한 식사 시간을 견디지 못한 승희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참, 언니는 우리 작은오빠 그전에 한번 봤었다죠?”
승희의 물음에 빛나는 수저질을 멈칫했다.
승현이 납치당했다고 생각했던 그날 밤을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눈에 뵈는 게 없어 겁을 상실했던 바로 그날 밤.
그런데 승희의 말에 위태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승주는 누가 봐도 처음 그를 대면한 사람에게는 절대 쉬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번째라니, 첫 번째보단 두 번째가 조금 더 나으리라 생각하며 위태준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것 참 다행이네. 우리 승주가 말 수도 없고 좀 무뚝뚝해서 첫인상이 그렇게 좋진 못한데.”
“아버님, 무슨 말씀을! 그래도 승주가 생긴 걸로는 여자들한테 절대 호감입니다!”
“내 생김새 가지고 왜 네가 흥분하고 난리야.”
승주가 못마땅한 듯 입을 열었지만 우빈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 모습에 승현이 웃으며 빛나에게 부연 설명을 해준다.
“작은형이 우리 집 유일한 구멍이지.”
“뭐, 구멍?”
그 말에 승주의 잘생긴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나름 양호했다.
적어도 승현이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지는.
“보면 볼수록 매력 있는 블랙홀. 그래서 한번 빠지면 정신줄 놓게 된다는 그 블랙홀. 덕분에 복실이 지금 20년째 그 모양이잖아. 그 블랙홀에 빠져서.”
“너, 진짜. 다시는 그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
승주가 수저를 놓고 승현을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까만 눈동자가 유난히도 도드라져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빛나는 이쯤에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승주는 지금 복실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일까, 아니면 놀리듯 말하는 블랙홀이란 단어를 이야기하지 말란 뜻일까.
머릿속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의문으로 가득할 때 즈음 위태준이 적당히 끊어주었다.
“남의 귀한 딸, 그렇게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거 아니다. 복실이가 좀 독특하긴 하지만, 얼마나 예쁘냐. 소탈하고 천진하고 착하고.”
“아버지, 그거 아시죠? 걔 이번에 한국 들어온 날, 자기네 집 담 넘다가 경찰 뜬 거.”
그 말에 위태준이 잠시 눈을 감았다.
남의 집 일 같지 않아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승희도 우빈을 만나기 위해 몇 번이고 집의 담을 뛰어넘은 적이 있었기에.
“흠흠. 어쨌든 우리 빛나 양이 승주를 두 번째 본다니 마음이 좀 놓이네.”
“맞아요, 언니. 생각보다 우리 작은오빠가 참 정이 많아요. 표현을 못 할 뿐이지.”
가족들은 저마다 승주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래도 오늘 화장실 문고리 사건이 가슴에 맺힌 모양이다.
하지만 가족들이 그렇게 승주의 편을 들어주면 들어줄수록 빛나도 미안하고 죄스러워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날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게 아니었는데, 어쩌자고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어버렸단 말인가.
결국 빛나는 수저를 놓고 승주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빨리 인정하고 털어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다.
“그날은…… 죄송했어요. 승현이가 납치되었다고 생각하니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그만…… 마음 많이 불편하셨죠?”
“아뇨. 별로.”
“어머- 언니! 뭘 그런 거 가지고 사과까지 하고 그래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 오빤 언니 화장실에 있는데 문고리까지 잡아 뜯었잖아요. 오히려 사과를 해야 한다면 우리 오빠가 해야지.”
“아니에요. 제가 그날은 말이 좀 헛나가서…….”
“그럴 수도 있죠. 그쵸, 아빠?”
“그럼, 그럼. 그럴 수 있다마다.”
위태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승희와 우빈도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뿐만 아니라 승현은 그녀의 등까지 토닥인다.
본인인 승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하고.
아, 이제야 속이 다 시원하다.
아무래도 승주의 특수함을 모두 인정하다 보니 빛나의 무례함도 용서가 될 수 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빛나의 착각이었다.
그리고 그 착각은 곧 ‘레드선’을 외치는 승현에 의해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도대체 형한테 뭐라고 했는데?”
무심코 물은 질문에 빛나도 무심코 대답했다.
“응, 사이코패스냐고…….”
“흡!”
“푸헉!”
조금 스페셜한 자식들 덕에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위태준도 딱 멈춰버린, 그런 순간이었다.
***
우여곡절 끝에 식사가 끝이 났다.
비빔밥 한 그릇 먹는 시간이었는데 빛나에겐 영원보다 더 긴 시간이었던 듯하다.
향이 진한 커피 한 잔이 이렇게 꿀맛일 수가 없었다.
거기에 블루베리 치즈 케이크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조합이다.
“와, 커피 향 정말 좋네요.”
“그쵸, 언니! 제가 내린 거예요! 저 바리스타 자격증 있거든요!”
승희가 성공했다며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그러자 승현이 커피 하나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우리 승희는 요리만 안 하면 돼.”
그 말에 빛나는 저도 모르게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그녀가 커피 잔을 든 손에 힘을 줄 때 즈음, 듣다 못한 우빈이 이번에도 역시 아내 사랑 바보 온달끼를 물씬 발산한다.
“너무 그러지들 말라고. 그래도 우리 승희는 한다고 얼마나 노력한 건데.”
“맞아! 나빠, 막내 오빠! 그래도 이번엔 좀 나았지, 오빠? 저번처럼 계란 껍질은 안 씹혔잖아. 그치?”
승희가 애교스럽게 우빈의 품을 파고들며 이야기하자 그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럼그럼. 이번에는 계란 껍질 안 씹혔어. 먹을 만했다고. 좀 짠 거야…… 물 한 통 마시면 금방 정화되지. 이 김에 물도 많이 먹고 얼마나 좋아?”
“역시 우리 오빠가 최고!”
무한 긍정 마인드, 김우빈.
그의 뒤로 번쩍이는 후광과 함께 하얀 날개가 보이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알다시피 다소 요란한 사랑을 하긴 했지만, 진정 사랑으로 맺어진 커플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아, 진짜…… 못 말려.”
“왜? 이보세요, 막내 형님. 이래봬도 우리 승희 음식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욕심 없이 음미하면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고. 그리고 혹시 알아? 아직 결혼도 안 하신 우리 형님들…… 꼭 요리 잘하는 와이프 얻으란 법 없잖아? 그럴 때를 대비해 미리 혀의 감각을 익혀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나는 그럴 일 없어. 우리 빛나가 생각보다 요리를 잘하거든.”
다소 어이없는 우빈의 논리에 승현은 냉정하게 잘랐다.
그러자 화살은 승주에게 돌아갔다.
“어이, 둘째 형님. 그대는 어때? 그대의 미래도 그다지 밝지 않을 것 같던데.”
그 말에 빛나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간신히 틀어막았다.
설마, 이 집안 식구들 전부 다 복실이 승주에게 품은 그 야한 욕망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단 말인가?
여긴 없지만 존재감 확실한 복실을 떠올리며 빛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하지만 그러한 우빈의 물음에 승주의 대답이 더 가관이다.
“걱정 마. 나는 밖에서 사 먹을 거야.”
아마 복실이 들었으면 기립 박수를 쳤을 대답이었다.
“이것 봐, 다들 모르시나 본데 우리 승희가 얼마나 사회에 큰 이바지를 하고 있는지 알아? 요리를 못하니까 우리 집에 늘 상주하는 아주머니가 계시잖아? 청소 못하니까 청소해주는 사람 따로 있고. 생각해봐, 요즘처럼 일자리 각박한 세상에 벌써 우리 승희 덕에 몇 사람이 일자리를 얻었어? 이게 바로 경제 용어로 따지자면 고용 창출이라는 거야.”
유능한 CEO답게 승희의 무능력한 부분을 말도 안 되는 고용창출 논리로 열변을 토하는 우빈을 위태준은 흐뭇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제 딸을 저렇게 사랑해주는 사위인데 어디가 안 예쁠쏘냐.
그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생긴 것만큼이나 우빈이 예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우빈의 모습에, 요리 못한다 타박하는 형제들의 모습에, 그 모습을 보고 말없이 흐뭇하게 웃는 위태준의 모습에 빛나는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힘들기만 한 자리였는데 이제야 면역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일까.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점점 이 자리가 편해진다는 것.
그 사실이 행복하면서도 무서웠다.
어쩌면 좋나.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마치, 정말로 그녀에게 가족이 생겨버린 느낌이었다.
그렇게 빛나가 두려움 반, 감동 반으로 설레고 있을 때 즈음 승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 든 승희의 얼굴에 반가운 듯 화색이 돌았다.
“응, 복실 언니! 어디야? 저녁 먹으러 오랬더니 왜 안 왔어? 우리 비빔밥…… 응? 언니? 언니?”
전화가 끊겼나 보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그 분위기도 뚝 멈춰버렸다.
빛나는 뒤통수가 싸해지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복실이가…… 뭐래?”
승현의 물음에 승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응. 작은오빠 있냐고 물어보는데? 그리고 끊었어.”
순간, 무서우리만치 침착한 정적이 감돌았다면 빛나만의 착각일까?
이런 젠장, 착각이 아니다!
승현이 고개를 돌려 자신이 벗어둔 재킷으로 시선을 두는 사이, 그보다 한발 앞선 승주가 그 재킷을 들고 번개처럼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아니, 형! 진짜 이러기야? 이건 반칙이잖아!”
하지만 이미 현관문을 나서버린 승주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유빛나, 당장 일어나. 빨리!”
“응? 왜?”
“우리도 나가야 돼! 빨리. 빨리! 아버지, 다음에…… 다음에 다시 올게요!”
“아니…… 도대체 왜…….”
빛나는 위태준에게 인사할 사이도 없이 승현의 손에 끌려 그 집을 나왔다.
대문을 나서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고 나서야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뭐야! 아버님한테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나왔잖아!”
“괜찮아. 지금은 응급상황이야. 아버지도 이해하실 거야.”
“도대체, 왜?”
“몰라 물어? 강복실이 온다잖아!”
“그게 어때서!”
“형을 눈앞에서 놓친 강복실이 성 바꿔 개복실 되는 거 순식간이야.”
“개복실 한두 번 봐?”
“하…… 아니. 지금까지 네가 본 개복실은 강아지 수준이었지. 진짜 개복실은 광견에 가깝다고. 알겠어?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근데…… 차 바꿨어?”
“아니. 이거 작은형 차.”
“작은형님? 네 차는?”
“좀 전에 봤잖아. 형이 내 재킷 가지고 나가는 거.”
“근데?”
“차 키가 재킷에 있거든.”
아이고야!
어쩔 수 없이 빛나는 낯선 검은 SUV에 올라탔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승현이 차를 급하게 출발시켰다.
집 모퉁이를 돌아 그 동네를 벗어나면서도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룸미러로 꾸준히 동태를 살폈다.
그렇게 동네를 이제 막 벗어나 큰 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즈음, 등 뒤로 차 한 대가 급커브를 돌며 내는 마찰음이 귓전을 갈라놓았다.
끼이이-익!
운전대를 쥔 승현의 눈이 금세 커졌다.
룸미러를 확인한 그가 낭패라는 듯 중얼거린다.
“젠장, 잡혔다!”
사이드미러를 보니 하얀 승용차 한 대가 한적한 도로를 무법자마냥 내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들의 뒤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폼이 마치 술에 취한 개복실 같다.
설마.
빛나는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그 설마란 말을 그 짧은 순간 안에 백만 번은 되새긴 것 같다.
그리고 그 설마가 사람 잡았다.
“지금 당장 복실이한테 전화해.”
“왜?”
“형 차…… 우리가 타고 있다고. 형은 내 차 타고 나갔다고.”
맙소사! 도대체 이 무슨 생난리란 말인가!
빛나는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 승현의 정체를 안 순간부터 시월드에 대해 수많은 상상을 했던 건 사실이다.
송여사처럼 혈압 오르는 시월드는 아닐지라도 만만치 않을거란 생각은 했었다.
그래서 수많은 경우의 수를 두었다.
마음 단단히 먹었다.
위태준이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나.
의외로 슈퍼 모델 J가 제대로 된 시누이 노릇을 하면 어쩌나.
하지만 그 단단히 먹은 마음속에 개복실은 없었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게 들이 닥친 위씨 집안 토네이도를 맨몸으로 맞이한 것도 모자라 이젠 개복실이란 후 폭풍까지 불고 있으니!
더 불안한 건, 이 추세라면 개복실이 이 기가 막힌 시월드에 합류하기까지는 그리 먼 미래가 아니라는 사실.
“빨리! 개복실이 뒤에서 들이받기 전에!”
결국 빛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어야 했다.
***
한편, 그 시각.
강철 멘탈을 자랑하는 빛나조차도 버거워 하는 그 위대한 시월드의 또 다른 희생양이 있었으니,
“내 변호사가 올 때까지 난 한마디도 하지 않겠네.”
바로 승준과 1:1 면접을 보고 있는 강민식이었다.
철저히 자신을 위장하기 위해 썼던 스마일 마스크를 벗어던져 버리고 본 모습으로 돌아온 강민식은 살벌한 눈동자를 들어 승준을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 앉아 있는 승준은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그 인상으로 안색 한번 바뀌지 않았다.
동생이란 놈도 어린 나이에 제 감정을 숨기는 데는 아주 일가견이 있더니, 이놈은 서너 살 더 먹었다고 그보다 한 술 더 떠 인내심까지 끝내준다.
보통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얼마 전에 저희 아버지를 만나셨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
“아버지가…… 안부 전해달라십니다.”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그의 모습에 강민식은 온몸의 혈관이 폭발할 듯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무너질 순 없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달려왔는데 주저앉는단 말인가.
지금부터는 정신력 싸움.
산전수전 다 겪었던 지난날의 평탄치 않았던 삶이 강민식에게 남겨준 거라곤,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냉소적인 멘탈뿐이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강민식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때, 취조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와 승준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 순간 강민식은 보았다.
매력적인 승준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가는 모습을.
불안감이 엄습했다. 굳이 내용을 듣지 않아도 강민식에게 불리한 내용이 전달되었다는 건 짐작해볼 수 있었다.
잠시 후, 그 불길한 짐작은 여지없이 현실이 되었다.
“아직도, 저와 대화를 할 의사가 없으십니까?”
“전혀. 내 변호사 없인…….”
“그런데 이거 어쩌나. 그렇게 애타게 믿고 찾는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다는데.”
쿵.
해머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제가 실력 좋은 국선이라도 소개해드릴까요?”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구속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등을 돌리는 이가 나온단 말인가!
그것도 그의 돈으로 호의호식을 하던 인간들이 말이다!
너무 예상 밖의 전개라 패닉이 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외압이 작용하지 않는 한 절대 이럴 수는 없었단 말이다!
강민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내리치며 그동안 지그시 눌러 참고 있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함정이야! 이건, 엄연한 정치 보복이라고!”
그것은, 엄청난 발언이었다. 정치인이라면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한마디로 혼자 죽지 않겠단 이야기다.
죽어야 한다면, 위태준까지 같이 끌어안고 침몰하겠단 이야기다.
그야말로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발악은 승준의 내면에서 줄곧 잠자고 있던 또 다른 그를 끌어내고 말았다.
“정치라니. 누가…… 정치를 했다는 겁니까?”
순식간에 눈빛이 바뀐 승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민식을 마주했다.
웃음기를 거둬들인 얼굴, 굳어버린 입매.
끝이 처진 눈매지만 감정이 사라진 눈동자가 등골을 서늘하게 얼려왔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당신이 한 건 정치가 아냐. 쇼를 한 거지.”
“뭐…… 라고?”
“근데, 그 쇼가 이제 막을 내렸어.”
그가 느린 동작으로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러자 가뜩이나 뛰어난 신체조건이 강민식의 시야에 더욱 선명하게 들어와 박힌다.
“이젠, 내 차례.”
더불어, 머리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그 웃음까지도.
“각오해. 내가 좀…… 험하게 놀아서 말이야.”
태어나 처음 느끼는 공포가 강민식의 뇌를 좀 먹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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