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70화 (70/94)

70. 과연 그녀의 운명은?

2018.08.05.

전화를 끊고 난 승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맴돌았다.

강민식의 경악에 찬 외침이 아직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그렇지 않아도 살짝 치켜 올라간 입술 끝이 그의 기분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하늘로 승천 예정이다.

“아, 이제야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겠네.”

그동안 어떻게 해야 강민식에게 가장 화려한 최후를 선사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미지 메이킹으로 최고의 스타를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승현은 몰락한 정치인의 최후를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설계한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강민식이 오늘 현장에서 승준에게 구속이 되었으니 적어도 내일이면 세상이 또 한 번 뒤집히리라.

“내일이면…… 좀 정신 사납겠군.”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진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도 되지 않을까.

적어도 오늘만큼은.

“집에 가서 빛나랑 와인이나 한잔해야겠다.”

드디어 강민식의 목을 틀어쥐었음을 자축하는 의미로 빛나와 조용하고 섹시한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벌써부터 그 생각에 몸이 달아올랐다.

빛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에 저릿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그때 승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응. 왜?”

[오빠, 언제 들어와?]

“무슨 소리야?”

[응. 나 지금 빛나 언니랑 같이 있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승현은 입꼬리에 물고 있던 웃음기를 서서히 거둬들였다.

불길하다.

도대체 승희가 어떻게 빛나와 함께 있는 것일까.

가뜩이나 아직은 부담스러워 그 만남을 피하려고 했던 그녀였던지라 더욱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다.

“빛나랑? 지금 어딘데?”

[집.]

“우리 집? 너, 우리 집에 왔어?”

[아니, 오빠 집 말고 우리 집.]

“너네 집에 빛나를 데리고 간 거야? 어떻게?”

[아니, 아니. 우리 집. 아빠 집. 본가 말이야.]

“엉? 뭐라고?”

순간 승현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되물었지만 이미 몸은 그 충격을 흡수하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후였다.

“빛나가 왜 본가에 가 있어?”

말도 안 된다.

빛나가 제 발로 본가로 걸어 들어갔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응. 우연히 카페에서 만났어. 그래서 오늘 저녁에 초대했지. 아빠도 괜찮다고 하셔서.]

“아버지도 계신다고?”

[당연하지. 좀 이따 우빈 오빠도 올 거야.]

앞이 까마득해졌다.

빛나가 무방비 상태로 그의 본가에 던져졌다니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 심적인 부담이 오죽할까 하는 생각에.

하지만 그것은 고작 서두에 불과했으니.

[꺄아- 곧 작은오빠도 들어온대!]

세상에나, 승주까지!

위승희 하나로도 정신이 없을 텐데, 위태준에 승주까지.

빛나가 감당하기에 그들은 너무 버거울 것이다.

[오빠도 올 거지?]

당연히 가야지!

가족들 사이에서 얼음이 되어 있을 빛나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심장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이게 아닌데, 가장 쉬운 승희부터 천천히 시작하려 했는데 그의 가족은 거대한 쓰나미처럼 한방에 빛나를 덮쳐버렸다.

“기다려. 금방 가! 금방 가!”

승현은 전화를 끊고 부리나케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엘리스가 업무 보고를 위해 그의 사무실로 향하려다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승현을 황당한 모습으로 바라본다.

“본부장님, 본사에서…… 어머, 나 지금 누구하고 말하고 있니.”

오늘도 여전히 엘리스는 외로웠다. 혼자 말하고 혼자 일해야 했으니.

하지만 애가 탄 승현은 그런 엘리스의 사정까지 봐줄 수가 없었다.

그저 머릿속엔 쓰나미에 허우적대는 빛나만 있을 뿐이다.

그가 엘리베이터 단추를 두세 번 누르자 급하게 문이 닫혔다.

입에선 절로 간절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하, 빛나야. 내가 간다.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

잔뜩 긴장을 한 빛나의 눈동자가 위태준만큼이나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집안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앤티크 가구,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빛나가 보기에도 고가의 미술품들이 즐비한 집이었다.

올드한 느낌과 현대적인 느낌이 적절히 믹스되어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집안의 분위기가 빛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승희에게 얼떨결에 저녁 초대를 받아 거절 못 하고 여기까지 왔지만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빛나는 얼음이 되어 있었다.

마치, 넘어서는 안 될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

주방에서는 승희가 오늘 저녁을 돕겠다며 들어가 도우미 아주머니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고, 조금 전에 도착한 우빈은 오늘은 자고 가겠다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눈앞엔 조금 전부터 위태준이 말없이 앉아 있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그림이라 빛나에겐 정말 인정머리 없이 잔인한 공간이었다.

그나마 여기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온기가 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이제 막 두 발로 서기 시작한 예준뿐이었다.

아이는 우빈의 다갈색 눈동자를 빼다 박았지만 세상 해맑게 웃는 모습은 승희를 쏙 닮아 있었다.

게다가 그녀를 바라보고 웃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빛나는 하마터면 제 발밑에 맴도는 아이를 안아볼 뻔했다.

아이에게 뻗었던 손을 움찔하며 거둬들이는 사이, 그 모습을 본 위태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애들…… 좋아해요?”

“아, 네.”

“그럼, 한번 안아봐요.”

“그래도…… 될까요?”

위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빛나는 예준을 안아 올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또 한 번 까르르 웃는다.

그 모습에 위태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예준이가 우리 빛나 양을 많이 좋아하나 보네.”

“말씀 낮추세요.”

“아니, 오늘은 초면이니 다음부터.”

편안한 스웨터와 면바지 차림인 위태준은 TV에서 볼 때와 달리 훨씬 더 젊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빛나는 움찔움찔 겁을 먹었다.

행여나 그녀의 출신에 대해 이야기가 나올까 봐.

그래서 시작도 해보기 전에 승현의 손을 놓아야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위태준은 그녀에게 사적인 이야기는 전혀 묻지 않았다.

배려심인지, 관심이 없어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빛나에겐 천만다행인 순간들이었다.

“병원에서 그렇게 뒷모습만 보여주길래, 나는 또 뒤태만 예쁜 미인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본 앞이 훨씬 더 예쁜 미인이네.”

“죄송해요.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괜찮아요. 내가 그렇게 쉬운 이미지는 아니지? 하지만 정치를 하다 보면 어쩔 수가 없어요. 쉬운 놈은 숨도 못 쉬어보고 잡아먹히기 마련이니까.”

치열했던 그의 정치 라이프를 반영이라도 하듯 위태준은 단 한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집안에서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만 보아도 그의 성품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근데 우리 승희가 바쁜 사람을 너무 잡아끈 게 아닌가 몰라. 그랬다면 정말 미안한데. 요즘 임신을 해서 이 집안 최고 파워를 가진 존재라 나도 못 말려.”

진지하게 흘러나오는 그 농담에 빛나는 풋,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집안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보이는 미소였다.

“참, 웃는 모습이 예쁘네. 하긴…… 우리 승현이가 어렸을 때부터 삼형제 중 인물은 최고로 밝혔어.”

“과찬이세요.”

“이번에 승현이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들었어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있어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오히려 죄송한 건, 접니다. 제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보니, 힘이 되어주지 못했어요. 더 시원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제가 발목 잡았을 거예요.”

“이런…… 우리 빛나 양이 뭘 잘 모르네. 우리 승현이가 좀 철은 없어 보여도 누군가가 쉽게 쥐고 흔들 수 있는 스타일은 절대 아닙니다. 가진 게 없다니, 그런 승현이를 움직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빛나 양은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건데. 우리 승희가 김 서방을 움직이는 것처럼, 저렇게.”

위태준이 가리킨 곳에는 이제 막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들어선 우빈에게 꽃무늬 앞치마를 묶어주는 승희의 모습이 보였다.

세상에나,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천하의 김우빈이 그것도 핑크색 꽃무늬 앞치마를 하고 주방에 서 있는 모습이라니!

“자, 뭐부터 하면 돼?”

“오빤, 이거.”

“넌 뭐하고 있는데?”

“계란프라이!”

“오늘의 메뉴가 뭔데?”

“위승희표 비빔밥!”

“으음, 맛있겠다!”

“아이고, 괜찮아요. 나가 계세요. 제가 다 할게요. 아가씨도 이왕이면 나가 계시구요, 몸도 무거운데 자꾸 주방에 들어와 계시며 탈나요.”

“어머, 아니에요. 자주 하는 요리도 아닌데 오늘은 가족들이 다 모이는 날이니 제가 그 정도는 해야죠. 아줌마, 계란프라이는 내가 확실하게 할 테니 다른 거 해주세요.”

“그러니까요, 아가씨! 자주 하는 요리가 아니니까…… 그냥 나가 계시는 게…….”

입주 가정부는 버럭 화를 내는 듯하다가 한발 물러섰다.

그러곤 주방에 들어와 있는 두 사람이 마냥 마음에 걸리는 듯 자꾸 돌아보았다.

진정 그들이 요리를 하기 위해 들어갔는지, 아니면 요리를 방해하기 위해 들어갔는지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곧 그 의심은 현실이 되었다.

“장담컨대, 우리 승희가 주방에 들어간 이상 오늘 저녁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위태준의 조용한 말에 무슨 뜻인가 싶어 되물었지만 곧 빛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놀란 우빈의 목소리가 집안을 쩌렁쩌렁 울렸기 때문이다.

“승희야! 계란 탄다! 타!”

“응? 안 되는데?”

“앗, 이것도 넘친다! 꺼야 하나? 응?”

“오빠, 그것 좀 꺼줘.”

주방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결국 입주 가정부는 사정을 해야 했다.

“제발…… 두 분, 나가 계시면 안 돼요?”

하지만 우빈과 승희는 그렇게 주방을 초토화시킨 후에도 여전히 그곳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듯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자 가정부는 적절한 묘안을 내놓는다.

“아가씨, 제발…… 다른 건 손 안 대도 좋으니 이거 하나만 하시겠어요? 딱 집중해서 이거 하나만 하세요. 타지 않게, 적당히 익게끔.”

“그래. 승희야, 우리 이거 하나만 하자. 하고 싶으면 이거 끝내고 하자고.”

“아, 하나에만 붙어 집중력 발휘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닌데. 멀티로 하고 싶은데.”

진정 위승희는, 주제넘은 욕심쟁이였다.

그런데 그런 승희의 모습에 왜 자꾸 승현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지.

-내 동생은 하나에 오랜 시간 집중을 못 해. 자신이 멀티 플레이어인 줄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지. 정작 본인은 몰라. 자신이 얼마나 비글미 넘치는 주의력결핍장애를 앓고 있는지.

언제가 해준 적 있던 형제들의 이야기.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가족 이야기를 해달라고 칭얼대는 그녀를 잠재우기 위해 약간의 조미료가 첨가되어 맛깔스럽게 꾸며진 이야기인 줄 알았단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승현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여과 없이 그녀에게 해준 것이다.

“에구머니나, 아가씨! 계란을 이렇게 몽땅 깨버리면 어떻게 뒤집어요!”

“아줌마, 나는 하나씩 하는 건 체질이 아냐. 이렇게 몽땅 해서 얼른 뒤집어 끝내고 다른 거 할 거야.”

“아가씨, 제발!”

“그럼 나 저거 해도 돼? 된장국 내가 끓일게!”

“아가씨, 계란은 어떻게 하구요!”

한 자리에 일 분을 못 버티고 있는 승희였다.

덕분에 가정부의 이마에서 실핏줄이 터져 나왔다.

목에선 곧 피가 넘어올 기세다.

이쯤 되자 빛나도 이젠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억지로 온 저녁 초대, 거절하고 나갈 수도 없고 과연 승희가 만든 저녁을 무사히 먹을 수 있을까.

안절부절못하고 앉아 있는 빛나를 보면서도 위태준은 태연했다.

마치 저 난리가 처음 있는 일이 아닌 듯 태연하다 못해 평화로워 보인다.

게다가 이 상황에 티를 한잔 마시는 여유까지!

빛나는 목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을 느끼자 예준이를 내려놓고 위태준처럼 자신의 앞에 놓인 티 한잔을 집어 들었다.

나도…… 태연할 수 있다!

그렇게 자기 암시를 걸었다.

작은 불안함의 씨앗은 곧 커다란 공포가 될지니.

처음부터 자신의 불안함을 잘 다스릴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승현이 올 때까지는 맨정신으로 버텨야겠단 생각에.

그러나, 그다음으로 들려오는 가정부 외침에 빛나는 입가에 가져갔던 티를 하마터면 위태준의 얼굴에 뿜어낼 뻔했다.

“아이고, 아가씨! 그건 소금이 아니라 설탕이라구욧!”

“어머, 무슨 소리야! 우리 집은 흑설탕 쓰잖아!”

“아니에욧! 흑설탕, 백설탕 다 쓴다구욧!”

“몰랐어! 소금 다시 뿌리면 되는 거 아냐?”

그 대화에 위태준은 헛기침과 함께 신문을 펼쳐 들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우리 안성댁…… 월급 올려줄 때가 되었군…….”

결국 빛나는 제 입을 틀어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 화장실 좀…….”

위태준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일단 화장실로 들어온 빛나는 텁텁한 입안을 씻어내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 새 핼쑥해진 그녀의 모습이 정말 볼만 했다.

“가만있자. 여동생이 주의력결핍장애. 또…… 뭐가 있었지? 아, 맞다. 분노조절장애랑 이중인격이 있었지.”

빛나는 승현이 했던 말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앞이 까마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의력결핍장애에 이렇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인데 앞으로 닥칠 분노조절장애와 이중인격은 또 어찌 감당해야 할까.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빛나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애가 타는 승현의 목소리가 커다란 혼동 속에 있는 그녀의 뇌를 울려왔다.

[빛나야! 살아 있나? 살아 있어?]

“흡! 승현아-아!”

[그래. 안다. 알아. 조금만 더 버텨. 금방 갈게.]

“빨리 와. 나…… 여기 있다 독살당할지도 모르겠어.”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승현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헐! 위승희 주방에 있어? 이게, 미쳤나!]

“언제 오는데?”

[곧 곧! 차가 막혀서 늦었어. 근데 우리 작은형도 온다던데, 거기 왔나?]

“자…… 작은…… 형?”

순간 그녀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얼마 전 보았던 그 살벌하도록 잘생긴 얼굴이 번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때 당시 뭣 모르고 허리에 팔을 올린 채 짝다리까지 짚고서 그 잘생긴 얼굴을 향해 했던 황당한 질문까지.

-뭐예요, 사이코패스예요?

이런 젠장! 빛나는 제 혀를 씹어먹어 버리고픈 심정이었다.

“승현아, 빨리 와라. 빨리 와서 네가 나를 구해줘야 돼!”

[응?]

“나…… 나…… 네 작은 형한테 사이코패스냐고 했단 말이야!”

[흐억! 진짜? 언제?]

“너 납치당했을 때! 눈에 뵈는 게 있어야 말이지! 그러니까 빨리 와! 빨리! 난 죽었다 깨어나도 네 형이랑 너 없이 독대는 못 하니까!”

[알았어.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응?]

전화통화라는 걸 알면서도 빛나는 말 대신 겁먹은 눈동자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밖에서 때마침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현이는.”

분명 물음일 텐데, 끝을 올리지 않는 독특한 어법.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빛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타일 벽에 몸을 밀착시켜 오징어처럼 붙었다.

그러곤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승현에게 속삭인다.

“그, 그분…… 오셨다.”

[누구?]

“네…… 형님!”

[헐, 벌써? 아 젠장! 나도 집 앞이야. 주차만 하면 돼! 5분…… 아니 2분만 버텨. 바로 올라갈게!]

그런데 빛나는 2분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로 문밖에서 그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나 손 좀 씻고.”

화장실 앞이다!

손을 씻기 위해 그녀가 있는 화장 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도대체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중인격?

아님 분노조절장애?

하지만 잠시 후 빛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뭐야. 문이 안 열리잖아. 또 고장 난 거야?”

그 순간, 퍽!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갔다.

원래 문이라 함은, 안과 밖을 구분 짓고 가로막는 역할이라 튼튼해야 정석이 아니던가.

그런 문이 저토록 힘없이 떨어져 나가버리다니.

빛나는 뻥 뚫린 구멍을 허망한 눈동자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두 번 생각해보지 않아도 분노조절장애다.

일반 사람이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저렇게 문고리를 잡아 뜯어 버리진 않으니까.

잠금장치가 걸려 있던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자 화장실 문은 힘없이 열어 젖혀졌다.

그리고 그곳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을 치켜뜨며 당당하게 사이코패스라 불렀던 그가 여전히 잘생긴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승희의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오빠! 미쳤어? 그 화장실 문 어제 고쳤단 말이야-아!”

더불어 당혹스러운 위태준의 목소리까지.

“내가……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거기…… 손님 계신다고…….”

결국 빛나는 새어 나오는 비명을 한 손으로 틀어막은 채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놀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위씨 집안 가족들이 화장실 입구로 하나둘씩 모여드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더디게 플레이되었다.

아버지부터 아들에 딸, 사위까지.

하나 같이 눈부신 비주얼들이다.

이렇게 눈이 호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를 한눈에 담은 빛나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과연 그녀는……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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