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최후의 반격
2018.07.29.
테이블 위에 놓인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수습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강민식은 이틀 전 보았던 위태준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아들 얼굴 보기 전에 먼저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애 얼굴 보면 이렇게 돌아설 수 없을 테니까.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국회의원 위태준이 아닌 내 아들의 아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부디, 이게 마지막이길.
그저 평범한 그 말의 속뜻은 소름 끼치도록 살벌한 것이었다.
위승현의 아버지 위태준으로서 강민식을 마주하게 된다면, 제 속내를 감춘 채 그냥 돌아서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부디 그럴 일 없도록 알아서 피해 다니란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참담함에 강민식은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 여운으로 남은 위태준의 분노가 그를 극도로 예민한 상태까지 몰아갔다.
지난 이틀이 강민식 인생 역사상 가장 긴 이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폭풍 전야.
말없이 돌아선 위태준의 조용한 분노가 언제 어디서 닥쳐올지 몰라 그야말로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긴장했던 이틀이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찰의 급습으로 승현이 풀려나는 것도 모자라 조직원들이 잡혀 들어가는 최악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박 실장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그는, 빠져나간 것일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 머리야.”
다시 한 번 편두통이 찾아왔다.
지난 이틀 두통약을 달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통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서랍을 급하게 열고 두통약을 찾았다.
그렇게 목으로 알약 두 개를 넘기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왔다.
“저기, 시장님.”
“무슨 일이야?”
“지금…… 뉴스 좀 보셔야겠는데요.”
“뭐라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드디어 위태준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까?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바짝 긴장한 채 비서가 내미는 아이패드로 시선을 돌렸다.
『강민식 시장 아들 강석훈, 성폭행으로 피소』
『박모 씨, 강민식 서울 시장 아들 강석훈 성폭력 혐의로 고소장 접수』
하지만 기사는 위태준의 흔적이 아니었다.
요 며칠새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많은 일들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빛나의 흔적이다.
기사 제목을 읽는 순간 강민식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하필이면 이럴 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예전 같은 상황이면 이런 일쯤 훌쩍 지나가는 배앓이 정도 수준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박 실장도 없는 마당에 터진 이 같은 기사는 그에게 치명타였다.
손발이 묶여버렸다.
철저히 고립되어버린 것이다.
한낱 정의감에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줄 만 알았던 그녀가 그를 제대로 한 방 먹였다.
“아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고소장이 접수가 돼? 어떻게 언론이 이렇게 빨리…….”
마치 기사를 미리 작성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는 듯, 고소를 당한 당사자들보다도 빨랐다.
철저히 계획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잠깐, 잠깐. 생각할 시간 좀. 나가 있게.”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아이패드를 남기고 나간 후 강민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지 않았나.
지금이 바로 그러한 기지를 발휘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편두통 때문인지 앞뒤 꽉 막혀버린 그의 머리는 좀처럼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젠장할!”
욕설과 함께 분에 못이긴 그는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손으로 쓸어버렸다.
그 요란스러움에 놀라 비서가 뛰어 들어왔지만 강민식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나가 있으라 손짓을 했다.
생각을 해야 한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생각.
강민식은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때 책상 서랍에서 핸드폰이 울려오자 정신없이 사무실을 오가던 강민식은 발길을 뚝 멈추었다.
서랍에 있는 핸드폰은 박 실장과 연락을 할 때 주로 사용하던 개인폰이었다.
그는 재빨리 다가가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자네 어딘가?”
[죄송합니다. 이제야 연락드립니다. 주변이 좀 조용해질 때까지 숨어 기다리느라.]
오, 하늘이시여!
그래도 정녕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이렇게 박 실장이 건재한 것을 보면.
강민식은 갑자기 숨통이 탁 트이는 걸 느꼈다.
“어쨌든 상황은 내가 대충 알고 있네.”
[네. 죄송합니다. 제가 일찌감치 놈을 처리했어야 하는데.]
“됐고. 한동안은 몸을 숨기는 게 좋겠네. 어차피 지금 잡혀 들어간 녀석들이야 조직의 실질적인 운영권이 누구한테 있는지 모르는 놈들이니 경찰들이 죽기 살기로 파고 들어봐야 동네 양아치 정도로밖에 결론이 안 나겠지만, 자네가 노출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숨어 있게나. 한동안 내게도 연락하지 말고.”
[저기…….]
“왜, 무슨 할 말이 있는 겐가?”
정말 중요한 시기다.
이런 시기에 박 실장마저 노출이 된다면 강민식은 그대로 주저앉아야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 박 실장이 다른 마음을 먹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박 실장은 조직과 강민식을 관련지을 수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였기에.
[강 이사님이 거기 왔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놈들은 아마도 강 이사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욕지거리가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석훈이 그곳에 나타났단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을뿐더러,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므로.
“이런 미친 녀석을 봤나…….”
이가 갈렸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놈이 평생 도움이 안 되는 망나니였다.
강민식은 이를 악물며 박 실장에게 마지막으로 신신당부 후 전화를 끊었다.
석훈의 성폭력 사건은 그 고약한 취미를 버리지 않는 이상 언제고 곪아서 터질 일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최악의 타이밍에 터졌다는 것.
곧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석훈의 얼굴을 대문짝만 하게 올릴 것이다.
그런 석훈의 얼굴을 엮여 들어간 녀석들 중 한 놈이라도 알아보게 된다면?
상황은 정말 최악으로 치닫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상황만은 피해야 했다.
강민식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틀 전 위태준은 승현의 사건에 그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왔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확실한 강민식을 눈앞에 두고도 왜 위태준은 참고 돌아서야 했을까.
이유는 단 하나.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거야.”
강민식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위태준이 그 어마어마한 분노를 뒤로 한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확한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젠 물증이 생겼다.
승현을 납치해 현행범으로 걸려든 놈들이 석훈을 지목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정확한 물증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조심히 자신의 턱선을 매만지며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석훈이 이번 사건을 피해갈 수 없다면, 모든 걸 뒤집어쓰는 건 어떨까.
계집애 하나 때문에 얽히고설킨 치정 사건으로.
물론 석훈은 그에게 더 없이 귀한 아들이었다.
때문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던 아들 녀석의 뒤치다꺼리를 다 해준 게 아닌가.
하지만 그가 살아야 석훈도 살 수 있었다.
그가 이 권력을 쥐고 있어야만 석훈도 구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그에겐 가장 큰 관건이었다.
그에게도 타격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 하나 때문에 생긴 치정 사건이라면 위태준의 이미지도 무사하진 못하리라.
시기가 시기인 만큼 작은 헛소문 하나가 거대한 쓰나미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강민식은 그제야 입가에 웃음을 띄울 수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었다.
***
일주일 후, 승현은 예상보다 빠른 퇴원을 했다.
시기적으로 병원에 오래 있을 수도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잘생긴 얼굴에 흠집이 난 건 말할 것도 없고 팔이 올라가지 않아 도와주는 이가 없으면 셔츠 하나도 못 입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물론 덕분에 빛나가 늘 그의 곁에 붙어 있는 건 더없이 좋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승현의 넥타이를 매어주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더 치료받아야 하는데 너무 일찍 나온 거 아닌가 몰라.”
“헐, 그런 말 하지도 마. 병원에 더 있다간 복실이 때문에 정신병동으로 트렌스퍼 요청해야 했을 거야.”
“너무 그러지 마. 그래도 내내 네 병실 지켜준 건 복실이었어. 알지?”
“암, 알다마다. 그리고 걔 목적이 내 안위가 아니라 우리 형이라는 것도.”
그랬다.
워낙 바쁜 가족들이다 보니 24시간 그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빛나마저도 강석훈이 고소 건 때문에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 그나마 가장 한가한 복실이 그의 병실을 지켰다.
허나, 그의 병실을 지키는 유일무이한 목적인 승주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복실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서둘러 퇴원 수속을 마친 이유 중 하나가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어. 강복실의 손에서. 근데 바보가 된 느낌이네. 셔츠 하나도 제대로 못 입고.”
“말은 똑바로 하자고, 위승현. 바보가 아니라 애야, 너.”
빛나 말이 맞았다.
승현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선 빛나 곁에 찰떡처럼 붙어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화장실에 있는 시간마저도 못 견디는 듯 꼭 그 시간만 되면 사고를 쳐서 부른다.
외출을 해야겠다는 둥, 옷을 바꿔 입어야겠다는 둥, 샤워가 하고 싶다는 둥, 핑계도 가지가지였다.
덕분에 그녀는 다 큰 애 하나를 뒷바라지하는 느낌이었다.
그 애가 미치도록 섹시하고 잘생겼다는 점만 뺀다면.
“음…… 이거 흉터 남으면 어쩌지?”
그녀는 넥타이를 다 매어 준 후 승현의 오른쪽 눈썹 위쪽에 난 상처를 보며 속상해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씨익 웃으며 그녀 앞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연다.
“요기에 뽀뽀 한번 해주면 말끔히 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으이구, 가서 쥐어 터지고 오더니 머릿속이 더 음흉해졌어!”
하지만 빛나는 그런 그가 밉지 않은 듯 곱게 눈을 흘기며 까치발을 들어 그의 상처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렇게 그녀의 입술이 막 닿으려던 찰나, 승현은 고개를 획 들어 이마가 아닌 입술로 그녀를 공략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쪽 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상큼하게 울려온다.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입술을 틀어막고 소리를 질렀다.
“나 방금 립스틱 발랐단 말이야!”
하지만 승현은 들은 척도 안 하며 방을 나가버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뒷모습이 영락없이 엄마 말 안 듣고 말썽만 피우는 개구쟁이 큰아들 같았다.
립스틱은 다시 발라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방을 나와 핸드백을 집어 든 빛나는 승현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회사로 출근하는 거지? 데려다줄게.”
“데려다준다고? 넌 회사로 안 가?”
“나는 경찰서 들어가봐야 돼. 강석훈이 추가 증언을 해서 그거 때문에.”
슈트 재킷을 집어 들던 승현은 빛나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띠며 입을 연다.
“강민식이 급하긴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이젠, 제 아들까지 버리고…….”
“그게 마지막 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어떻게든 제 자리를 지키려는 거지.”
“유빛나, 강석훈이 무너트릴 자신 있지?”
“말이라고. 딴 놈은 몰라도 강석훈인 내가 잡아. 하지만 그 녀석이 아무리 못돼 처먹은 인간말종이라고 해도 본인이 저지르지 않는 죄까지 뒤집어쓰며 침몰하는 꼴은 못 봐. 네 얼굴 이렇게 만든 놈도 그만한 값을 치러야지. 그것도 아주 비싸게.”
빛나는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그의 입가를 매만지며 속삭였다.
그러자 승현은 그녀가 예뻐 죽겠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음, 그 웃음 알지. 뭔가…… 좋은 수가 있나 보지?”
“있지. 있다마다.”
“뭔데?”
그가 되물었지만 빛나는 대답을 아낀 채 그로부터 가볍게 돌아서 현관으로 갔다.
찰랑이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서 상큼한 샴푸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그 향에 취한 승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신발을 신는 그녀의 늘씬한 뒷모습을 바라본다.
드디어 하이힐을 다 신은 그녀가 현관에 있는 전신거울을 통해 제 모습을 확인하며 승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아버지랑 그 아들…… 싸움 한번 붙여보려고. 누가 이기는지.”
그 말에 승현은 씨익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젠장, 유빛나. 넌 너무 치명적이야.”
***
경찰서로 들어온 빛나는 석훈과 대면했다.
며칠 사이 초췌해진 그의 얼굴에선 예전의 빈정거림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첫 시작은 이정의 기사였다.
이정은 그동안 참았던 기자로서의 기질을 한 번에 폭발시키려는 듯, 매몰차고 정확하게 그를 비판했다.
이정이 쓰는 언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도하는 재주는 그야말로 탁월했다.
사람들이 일어났다.
심지어 그가 경찰서로 첫 출두하던 날 수 많은 취재진과 삼엄한 경비를 뚫고 계란 세례를 받았더랬다.
게다가 그토록 믿었던 아버지를 통해 거짓 진술까지 하라는 강요를 받았으니 그의 정신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거의 유리 멘탈 수준이리라.
조금만 건드려도 균열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건드렸던 손가락을 떼는 순간, 강석훈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마담 M 납치 사건도 네가 한 짓이라고 진술했다지?”
그녀의 첫 물음에 강석훈은 시꺼멓게 죽은 얼굴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왜, 이번 사건을 여자 하나 때문에 벌어진 감정싸움으로 몰아가게? 그렇겐 안 되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이미 경찰에 다 진술했는데. 내가 했어. 내가 그 깡패 새끼들 데려다 네 애인 납치하라고 사주했다고. 그럼 널 가질 수 있을 줄 알고.”
침착함을 유지했던 빛나의 눈썹이 허공으로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왜 아직도 마담 M이야? 그 자식 이름, 위승현이잖아. 위승현. 국회의원 위태준 아들 위승현. 아냐?”
“맞아. 하지만 아직 언론엔 공개되지 않았으니까.”
“막는다고 진실이 없어져?”
석훈이 히죽거리며 대꾸하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빛나가 받아쳤다.
“그러게, 너 말 잘했다. 진실이 막는다고 없어지나? 아냐, 진실이 왜 진실이게?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바꾸고 싶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기에 진실이야. 그리고 우린 그 진실을 막고 있는 게 아냐. 타이밍을 노리고 있을 뿐이지. 언론에 그것을 이슈화시킬 적당한 타이밍. 틀어막는다고 위승현이 김승현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미안하지만 그 납치 사건의 주범은 나야.”
“강석훈이라면 정말 이가 갈리게 싫은데 말이야. 내가 선서를 한 사람이거든. 그래서 널 놔줬음 놔줬지 네가 저지르지 않은 일로 처벌받게 할 순 없다 이 말이지. 그건…… 내 신의에 어긋나.”
“이게 아니면 넌 날 못 잡아. 어차피 지나버린 성폭력 사건이야.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는. 분명 나는 무죄로 판명이 날 거고, 풀려나면 명예훼손 혐의로 다시 반격을 하겠지. 정말…… 이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싶어? 그럼 널 믿고 같잖은 용기를 낸 그 여자는?”
젠장, 얼굴은 시꺼멓게 죽었어도 강석훈은 강석훈이다.
이런 순간에도 저렇게 얄밉게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러나 말이라면 그녀도 지지 않는 변호사였다.
이젠 그에게 현실을 인지시켜줘야 할 때다.
그래서 빛나는 가장 잔인한 어휘 선택으로 거침없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쯧즈. 정말 세상 물정 모르네. 아직도 네 아버지가 짱인 줄 아는 모양이지? 적당히 덮어쓰고 들어가 있으면 분위기 봐서 재빨리 빼주신다던? 미안한데 이번 건에서 제대로 나오려면 국내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들로 빵빵하게 준비해야 할 거야. 물론 네 아버지가 그때까지 버텨줄지는 모르겠지만.”
“뭐?”
“상황이 바뀌었어. 넌 아직도 내가 박수정 씨 변호인으로 이 자리에 온 줄 아는 모양이지? 이거, 민사 아냐. 형사 소송으로 넘어갔어. 오늘 아침에.”
“말도 안 돼. 난 그런 말 들은 적이…….”
“그런데 이거 어쩌나. 그 검사가 말이야, 같은 법조인이라도 혀를 내두를 만큼 곤조 있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알려나 모르겠네, 위승준 검사라고. 일명, 이쪽 계통에선 ‘물안개’로 통하는데.”
“물…… 안개?”
허, 거참 희한한 별명이다.
곤조 있는 검사치곤 너무 물러 터진 별명이 아닌가.
그래서 석훈은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도는 궁금증을 필터링 없이 물었다.
“그게 뭔데?”
“응. 한번 물면 안 놓는 미친개.”
물론 금세 그 물음을 후회했지만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꺼멓게 죽은 그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격하게 흔들리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그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으나 빛나는 이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 채 불안해하는 그에게로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석훈의 귓가에 달콤하고 따뜻한 숨결이 아찔하게 와 닿았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녀가 탐이 나거나, 그 숨결에 흥분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예감이 좋지 않다.
제아무리 잔머리를 굴려 봐도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질 않는단 말이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늘 정확한 적중률을 자랑한다.
곧이어 들려오는 살벌하고 치명적인 그녀의 목소리가,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그의 유리 멘탈을 거침없이 틀어쥐어 버렸으니까.
“한마디로…… 네 아버지가 너 버렸다고. 이 병신아.”
그렇게, 최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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