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66화 (66/94)

66. 그가 만들어준 세상

2018.07.22.

위승현. 위승주. 위승희.

빛나의 머릿속엔 그 이름들이 버퍼링이 걸린 듯 번갈아가며 반복되고 있었다.

물론 어제 만난 승주가 고약한 성질답게 성은 쏙 빼고 이름만 읊었지만 ‘위’ 씨라는 성과 잘 어울리는 이름에, 바보라도 알 수 있는 돌림자.

게다가 마지막으로 법조인이라면 절대로 몰라서는 안 되는 이름 위승준까지 가세한다면, 그야말로 충격의 쓰나미다.

“이게…… 말이 되니?”

말이 안 된다고 우겨보고 싶었지만 현실에선 분명이 설득력이 있는 일이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하물며 고등학교 때 돌았던 헛소문을 사실이라 믿었던 지난날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네가 어떤 집안이라도 상관없어.

-어떤 집안?

-조폭이든, 깡패든 상관없다고.

빛나는 눈을 꼭 감았다.

승현을 처음 만났던 그날이 그림처럼 스쳐 지나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흩어진 머리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그의 모습은 어디를 봐도 귀티가 흐르는 도련님의 모습이지 않았나.

그런데 그 헛소문을 의심 한 번 없이 믿어버리다니.

그러나, 여기 또 한 사람의 멘탈이 유체이탈을 시도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한성 그룹 김우빈.

저기를 봐도 세계적인 톱모델, 제이.

‘설마’를 가장했지만 빛나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은 ‘그것’과 비슷한 맥락의 생각이 석훈의 머릿속을 토네이도처럼 휩쓸었다.

물론 빛나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눈앞에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설마, 누구나 다 아는 톱 모델 제이가 말한 ‘우리 오빠’가 그가 아는 ‘승현’일까.

만일 아니라면, 승현은 도대체 한성그룹과 무슨 친분이 있는 것일까.

전자든 후자든 지금 석훈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택하라면 그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핏줄로 엮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러나,

오늘 하늘은 석훈의 편이 아닌듯 이마저도 뜻대로 되질 않았다.

우빈의 섬뜩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송곳처럼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우리 막내 형님을 데리고 있다고 하던데 좋은 말로 할 때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처음 그 상태로…… 예쁘게…… 돌려놓지?”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여자보다 고운 얼굴형을 가지고 있지만 주목받는 최고의 CEO답게 그 말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문제는 이미 승현의 상태가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상태라는 것.

그 사실을 지금 이 남자가 안다면 석훈은 과연 이 문을 걸어서 나갈 수 있을까.

참담함에 눈을 감아버렸다.

그토록 아니길 바랐건만, 그들은 물보다 진한 핏줄이었다.

그제야 석훈의 머릿속에 얼마 전 지나친 자신감이라 생각했던 승현의 몇 마디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으로, 함부로 덤비지 말란 말이다.

-처음부터 넌 나랑 동등한 위치일 수가 없으니, 절대로.

그랬다. 지나친 자신감이나 오만함 따위가 아니었다.

태생이 그러했던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순간, 석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체면이고 뭐고 뭐 빠지게 줄행랑이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선 우빈의 부드러운 다갈색 눈동자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다.

건드려도, 제대로 잘못 건드린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설명드린다는 게 깜빡했네요. 오늘부터 한성그룹이 정식으로 이 보육원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오전 부로 건물부터 이 부지까지 전부 인수한 상태고, 한성그룹이 버티고 있는 한 이 보육원 운영도 문제없다는 것을 알려드리려고요.”

그 말에 빛나는 숨을 훅 들이켰다.

어쩜 저리도 잘생긴 남자가 말도 저렇게 예쁘게 하는 것일까.

지금 우빈은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인 한성 그룹이 보육원의 본격적인 후원자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 말인 즉, 정부 보조금 따위에 허덕일 필요도 없으며, 수시로 바뀌는 정책 따위에 운명을 달리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말 같지도 않은 딜로 그녀의 혈압을 올린 저 버러지같은 인간의 얼굴에 침을 뱉어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빛나는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점점 더 썩어가는 석훈의 얼굴 표정에 통쾌할만도 하건만, 아직 뭔가 부족했단 말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잠시 후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 한통이 강석훈의 운명을 결정 지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어라, 멀쩡하네? 응? 아냐, 회사 정책상 조금 늦어진 감은 없지 않아 있었지. 그래도 적절한 타이밍에 온 것 같아. 안 그래도 속이 뒤틀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내친김에 저놈은 내가…….”

걸려온 의문의 전화 한통에 갑작스럽게 신나 하던 우빈이 잠시 말을 멈추고 빛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이들이 숨죽인 가운데, 우빈은 자신의 휴대 전화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아 든 빛나는 만 하루 만에 듣는 그 목소리에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빛나야…….]

승현이었다.

[미안. 많이 걱정했지?]

“어떻게…… 어떻게…… 흡,흑…….”

뒤를 돌아 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모습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가슴 졸이며 하루를 버텨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하루가 백년 같았으리라.

말은 하지 못했지만 지옥 길을 걷는 느낌이었으리라.

그 심정을 알기에 모두들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난 괜찮아. 그래도 우리 승희랑 매제가 제 시간에 도착했나 봐? 다행이다. 걱정 많이 했는데.]

세상에, 지금 남 걱정할 땐가?

빛나는 눈물을 훔치고 일단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말이 나오질 않는다.

지금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반응에 울고 있음을 눈치 챈 승현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마치 그녀의 지금 심정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듯.

[울지 마라, 유빛나. 네가 울면…… 지금까지 내가 고생한 보람이 없잖아.]

“흑, 그걸 말이라고 해? 이 나쁜놈아?”

[후훗, 그래. 나도 사랑해.]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만든 장본인은 정작 이런 순간에도 장난을 치고 있다.

정말이지, ‘위승현’다웠다.

하지만 그러한 장난기도 잠시뿐, 곧이어 그의 진지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조용히 울려온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유빛나. 거기…… 강석훈이 있지?]

그 물음에 빛나는 뒤를 돌아 아직도 얼어붙은 채 서 있는 석훈을 바라보았다.

우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점점 창백해진 석훈의 얼굴은 이제 거의 말기 암 환자처럼 파리해 보이기까지 했다.

“응. 있어.”

[그래. 잘됐어. 그 자식 놓치지 마. 네가 말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은 네 손으로 잡아야겠다고.]

“하지만…….”

[나는 우리 빛나 성깔 부릴 때가 제일 예쁘더라. 그러니까…… 이젠 참지 마.]

“…….”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 그 자식…… 물어버려!]

낮지만 분명하고 정확한 목소리에 빛나는 홀려버린 것 같았다.

세상에 이보다 더 듬직한 목소리가 있을 수 있을까.

언젠가 옥외 광고 속 모델 제이를 보며 부러워했던 그녀에게 승현이 한 말이 떠올랐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저 세상, 너한테 줄 수 있어.

그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빈과 승희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족했던 2%가 이제야 가득 채워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빛나는 마지막 강력한 한방을 위해 전화를 끊고 석훈에게 다가갔다.

눈빛이 달라진 그녀를 보며 석훈은 짐짓 당황했다.

지금까지 가장 큰 위험 요소는 바로 눈앞에 있는 우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작고 나약해 보이기만 했던 빛나의 그림자가 갑자기 거대해져 있었다.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탐스러운 코랄빛 입술을 틀어 올리며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결코 착각도 아니요, 환청도 아니었다.

“우리…… 딜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아.”

“…….”

“그런데 이거 어쩌나. 가격이 많이 올랐어.”

세상에나, 며칠 전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리고 있었다.

그것도 더욱 차갑고, 더욱 섬뜩하게.

석훈은 어제 승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조심해. 우리 빛나는 다른 여자들이랑 좀 달라.

-잘못 건드리면…… 물거든.

이제야 그 말뜻을 알아들은 석훈은 온몸으로 후회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렇게 가까스로 벌려놓은 거리를 한걸음에 좁혀든 빛나가 사악하게 눈꼬리를 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근데…… 네가 가진 옵션은 딱 하나야.”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느낌이다.

그러나 여기서 살아 나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옵션이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아버지인 강민식과 함께 살 궁리라도 해볼 게 아닌가.

그래. 일단 벗어나자.

하지만 뒤이어 빛나가 제시한 말도 안 되는 옵션은 세상에서 제가 가진 권력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석훈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네가 가진 그 알량한 권력, 딱 그만큼만…… 추락하는 거.”

그렇게 빛나는 승현이 만들어준 세상에서,

온전한 주인이 되었다.

***

한편 그 시각,

빛나와 통화 후 핸드폰을 다시 경찰에게 건넨 승현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서 그를 부축하던 응급 요원과 경찰이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걱정하며 물어왔다.

“걸을 수 있으세요?”

“그럼요. 걸을 수 있어요.”

승현은 대기 된 엠뷸런스로 발길을 옮기다 다른 조직원들과 함께 차가운 은빛 수갑을 차고 체포되어 걸어가는 형주를 보았다.

“잠시만요!”

형주를 연행하던 경찰이 그를 돌아보았다.

“풀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승현의 부탁에 경찰은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이건…… 절차라…….”

“그 친구…… 도망 안 갑니다. 제가 보장하죠.”

그 말에 경찰은 말없이 형주의 수갑을 풀어준다.

승현과 형주의 눈이 말없이 스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에서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

걸어왔던 길은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함께 했던 끈끈한 과거가 그들을 묶었다.

그렇게 승현은 경찰차에 올라타는 형주를 바라보며 이틀 전 일을 떠올렸다.

***

이틀 전.

“어떻게…… 네가…….”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침입자와 마주앉은 승현의 입에선 망연자실한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그런 그를 마주한 형주가 조용히 입을 연다.

“그렇게…… 됐어.”

승현의 시선이 형주의 손목 문신에 이르자 그는 부끄러운 듯 옷소매로 그 문신을 가렸다.

하지만 승현은 그제야 지금까지 흘러왔던 상황들이 모두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빛나를 누나라고 불렀던 거구나. 그래서…… 빛나를 구해준 거구나.”

“…….”

“거긴, 어쩌다가 들어가게 된 건데?”

그의 질문에 형주의 떨리는 눈동자는 고통스러운 듯 시선을 떨구었다.

“말하자면 길어. 살아왔던 세월이, 처했던 상황이…… 내 편이 아니었거든.”

“좋아.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우리……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왜 네가 걸어왔던 길을 거부하고 돌아섰냐는 거야. 도대체…… 왜?”

“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빛나 누나를 마주한 순간,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달았어.”

“…….”

“누나 눈을 다시 마주한 그 순간…… 처음으로…… 두려웠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

“내가 이 자리에서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 그건, 그나마 밝았던 학창시절 기억 때문이었어. 내가 가진 기억 중, 가장 좋았던 부분이니까. 내가 여기서 누나를 해하게 되면…… 그 기억마저 검게 물드는 거니까. 그게…… 두려웠다.”

“미련한…… 자식.”

“숨이 막혔어. 처음으로 후회란 것도 해봤다. 그리고 널 다시 봤을 때…… 내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여실하게 깨달았어.”

“…….”

“널 지켜야 했다. 널 이 일에서 제외시켜야 했어. 그래서 협박도 해봤는데…… 안 통하더라.”

“설마, 그 사진…… 네가 보낸 거야?”

“응. 하지만 위에선 몰라. 너에 대한 정보도 내가 차단했어. 거기선 네가 누군지, 뭐 하는 놈인지…… 다른 사람들이 아는 만큼만 알지.”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든 그림의 퍼즐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이게 모두, 형주 덕이었다.

그가 놈들로부터 철저히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안 돼. 그래서…… 이렇게 내 자신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오더가 떨어졌어. 널 데려오라는…….”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내가 거부한다고 해도 다른 놈이 널 찾아올 테니까.”

그를 바라보는 형주의 눈에서 그동안 겪었을 번민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승현은 당장에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이 일을 멈출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겨버렸다.

“형주야, 아직 늦지 않았다. 돌아와.”

“내가? 넌 몰라. 난…….”

“만회하면 돼.”

고통과 당혹스러움으로 범벅이 된 형주를 바라보는 승현의 눈동자가 사악하게 빛났다.

도대체 승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만회? 그걸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고해성사를 하란 말인가?

그도 아니면, 자수?

잠시 후 승현의 말뜻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 상상도 할 수 없던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 그놈, 잡자.”

***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을 진동했다.

그리고 뇌를 자극하는 통증에 절로 신음소리가 났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신음 소리조차도 제대로 낼 수 없는 사람에게 재갈은 왜 물린 것일까,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박 실장은 퉁퉁 부운 눈꺼풀을 무겁게 밀어 올리며 저 멀리 떠나가려는 흐릿한 멘탈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깨부터 목까지 모든 근육이 마비 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단 말이다.

손과 발은 결박당한 상태라 그럴 수 있다지만 도대체 왜 고개조차도 제 맘대로 들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박 실장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아직도 구분이 되질 않았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승현의 손가락질 한 번이 그의 운명을 갈라버린 건.

싸움이라면 질리도록 단련이 되었던 박 실장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얌전히 범생처럼 생긴 얼굴이 주무기였던 그는 그의 생김새에 안심을 하는 적에게 허를 찌르는 공격으로 따끔한 충고를 했더랬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한 충고 따윈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기론 상대방에 주먹 한번 날리지 못하고 그대로 당했으니.

움직임을 볼 수도 없었다.

태어나 그토록 간결한 동작으로 그토록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첫 한 방은 거의 신세계였다.

그 한 방에 정신을 잃지 않은 자신이 오히려 대견할 만큼.

그랬다.

상대방은 인정머리 없는 말투만큼이나 잔인하고 살벌했다.

감히 어느 누구도 그의 움직임에 훼방을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박 실장이 속절없이 당한 이유다.

한 놈도, 도와주질 않았단 말이다!

-하아, 분명 말했다. 얼굴…… 때리지 말라고. 너, 후회한다.

승현이 했던 경고가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상대방이 그 경고를 무시했던 박 실장을 대차게 응징하려는 듯 작정하고 얼굴을 노리며 달려 들었던 탓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박 실장은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으…… 하.”

지금 여긴 어디일까.

그동안 지은 죄로 보건데, 결코 천국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지옥이란 말인가?

박 실장은 엄청난 통증을 이겨내며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개를 든 박 실장에게 또 다른 시련이 있었으니.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네.”

실제로 느끼는 통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 없는 목소리만으로도 극한의 통증을 유발하는 바로 ‘그’였다.

승현의 둘째 형이라는 그 말도 안 되는 놈.

실제로 다시 본 승주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얼굴의 좌우 대칭이 완벽하고 어디 한군데 죽은 곳 없이 완벽하게 살아 있는, 바로 그런 얼굴.

그래서인지 더욱 인정머리 없게 느껴지는 그 모습에 박 실장은 가까스로 부여잡은 멘탈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정신 차려. 그렇게 넘어가면 널 살려 데려온 보람이 없잖아.”

저도 모르게 눈이 뒤집어졌던 모양이다.

사람이 눈앞에서 식겁해 넘어가는데도 승주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한 채 박 실장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마주한 그 검은 눈동자에 숨이 탁 막혀 왔다.

온몸으로 느끼는 통증보다 아우성 대는 정신적인 고통이 더 컸다.

그렇게 승주는 말없이 박 실장을 한참 동안 마주 보았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어둠속에서 줄 곧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승주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다 일어선 승주는 박 실장이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거대했다.

딱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체격이 결코 운동만으로 얻어진 결실이 아님을 알 수 있을 만큼.

도대체 그는 왜 박 실장을 살려 데려온 것일까.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네가 머리가 아니라는 거 알아. 하지만 나는 ‘그 머리’가 필요해. 그러니 네가 협조해줘야겠어. 내 동생 그렇게 만든 그놈, 잡을 수 있게.”

“흡…… 읍!”

“말 필요 없고 고개만 끄덕여. 네가 알고 있는 거, 그 동안 네가 그 새끼 때문에 해온 더러운 일, 전부 말해. 하나도 빠짐없이.”

고해성사라도 하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 수만 있다면 거짓 증언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박 실장은 전신을 엄습하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은 삶이 절실하지 않았던 박 실장이었으나 직접 지옥 맛을 보고 나니 막상 미련이 생겼다.

살아야겠다.

이왕이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살아 오늘 맛본 지옥행은 최대한 뒤로 미뤄야겠다.

모든 것을 다 고할 것이다!

그리고 이곳을 꼭 살아 나갈 것이다!

문제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결박당한 입이다.

이래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박 실장은 눈짓으로 제 입을 가리켰다.

재갈을 풀어달란 의미다.

그러나 승주는 여전히 전매특허 낸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과 같은 어이없는 말을 남겼다.

“나 말고 우리 형한테.”

그 순간, 박 실장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아니! 너처럼 징글징글한 형이 또 하나 있단 말이더냐!

하긴, 승현이 둘째 형이랬으니 분명 누군가는 첫째일 것이다.

문제는 이미 승주 하나만으로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최악의 지옥을 맛 본 박 실장에게 의문의 첫째형까지 상대할 정신력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

이제야 박 실장은 말할 기운도 없는 그에게 왜 이토록 단단히 재갈을 물렸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박 실장은 혀라도 깨물어 자살하고픈, 딱 그런 심정이었던 것이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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