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내가 바로 진짜 ‘갑’
2018.07.18.
예닐곱 명 이상의 건장한 남자들이 잔뜩 긴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선 거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고요한 공간 속에 유일하게 움직이는 이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불청객뿐이다.
점점 그들과 거리를 좁혀오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건, 저렇게 큰 남자가 움직이는데도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박 실장은 피범벅이 된 승현을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뭐야! 너네 형, 경찰이냐?”
하지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온다.
“경찰 간지가 아닙니다, 실장님.”
“뭐라고? 경찰 간지가 아니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곱씹으며 박 실장이 앞으로 서서히 걸어 나왔다.
하지만 박 실장을 중심으로 튀어 들어온 남자들은 오히려 일제히 뒤로 물러서는 기이한 행동을 보였다.
팽팽한 긴장감.
“도대체 뭐하는 새끼길래…….”
잔뜩 날이 선 박 실장이 입을 연 순간, 드디어 이 분위기를 살인적인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었던 불청객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박 실장은 할 말을 잃었다.
-경찰 간지가 아닙니다.
조금 전 한 남자가 했던 말의 뜻을 여실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난히 하얀 피부에 까만 머리, 그리고 까만 눈동자.
하지만 세상만사가 무료한 듯한 남자의 표정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섬뜩함을 담고 있었다.
저런 남자가 경찰이라고?
절대 아니다.
저건 법을 수호하는 경찰 간지가 아니라, 오히려 일탈을 꿈꾸는 범죄자에 가까웠다.
그제야 박 실장은 알 수 있었다.
남자들은 그에게 긴박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건물 안으로 뛰어든 게 아니라, 미처 넓은 세상으로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건물 안 구석으로 몰린 것이라는 걸.
“뭐해. 이 자식들아! 가서 잡지 않고!”
박 실장이 소리를 질렀지만 남자들을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그가 가까워질수록 박 실장을 제외한 모든 남자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물러나기 급급했다.
감히 그를 지나 밖으로 도망 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도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박 실장이 알기론 열 명이 넘는 조직원이 대기 중이었는데 건물 안으로 뛰어든 이들은 고작 일곱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인원들은 벌써 당했단 말인가?
고작 한 명한테?
거기까지 생각이 앞서자 박 실장도 두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불청객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나머지 남자들처럼, 그도 본능이었다.
건물 안의 모든 시선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가 승현에게 다가서는 모습을 소리 없이 지켜보았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오감이 곤두섰다.
어떤 이는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아내기도 했다.
이렇듯 각자 움직임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건물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렇게 서로의 눈치를 보며 건물 입구 셔터문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촤르륵! 철컥!
거짓말처럼 셔터 문이 닫히며 유일한 탈출구의 빛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셔터 문을 닫은 이는 저벅저벅 걸어와 승현에게 다가섰다.
모든 이들이 그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모두가 남자의 기에 눌려 얼음이 되어버린 이 순간, 남자와 마주 보며 설 수 있는 용기에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행동에 박 실장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형주…… 너 이 새끼, 어떻게 네가 감히!”
그랬다. 형주라 불리운 사내는 다름 아닌 승현을 이곳까지 데려온 조직의 일원.
하지만 그는 새로운 침입자에게 맞서기 위해 선게 아니라 승현의 결박을 풀어주기 위해 그 자리에 선 것이었다.
몸이 풀려나자 승현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하는 것을 형주가 받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형주는 축 늘어진 그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그제야 시선을 올려 승주의 모습을 본 승현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씨,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하마터면…… 진짜로 죽을 뻔했잖아.”
이에 승주는 짙은 눈썹 끝을 처참하게 구기며 욕설을 내뱉는다.
“씨X, 도대체 어떤 새끼가 남의 동생 얼굴을 이렇게 곤죽을 만들어놨어.”
처음으로 듣는 그 목소리에 박 실장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문장은 물음이 분명했으나 물음표가 없는 독특한 어법.
그래서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몰라 대답도 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그보다 더 섬뜩한 사실은, 온몸에서 풍기는 다크한 아우라로 보아 그보다 더 심한 욕설을 내뱉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남자 입에서 고작 ‘씨X’이라는 한마디가 무척이나 어색하게 튀어나왔다는 것!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해도 저보다는 리얼리티가 살 것이다.
심지어 국어책을 읽어도 저보다는 필이 충만할 것이다.
한마디로, 눈앞의 이 남자는 평소에 그런 욕을 웬만해선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그가 오늘 그런 욕을 내뱉었다는 건, 기분이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는 죽음의 복선이라는 것도.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이 상황에서도 싸우기도 전에 전투 의지를 상실해보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직 가능성은 있었다.
누가 뭐래도 저들은 고작 셋.
게다가 그나마도 하나는 거동이 불편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동안 수많은 경험으로 익힌 본능이 순간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전략을 짰다.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박 실장의 간절한 믿음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듯,
축 늘어졌던 승현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손가락질을 했다.
“형, 저 새끼가…….”
그리고 그 단 한 번의 고자질은, 일종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 차갑고 감정 없는 검은 눈동자가 여지없이 박 실장에게 향했으니.
***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저희가 그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단 사실.”
한참을 울고 난 후에야 이해인 수녀와 마주 앉은 빛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참담한 현실은 좀처럼 바뀌질 않았다.
“아셨던 거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이번 건에 연연하셨던 거고.”
그랬다. 이해인 수녀가 그토록 정부 지원 사업에 연연했던 이유,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자라온 이곳,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이 있는 이곳이 철거 대상인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었다.
그 사실을 짐승만도 못한 강석훈의 입을 통해서야 알게 되다니, 빛나는 다시 한 번 피가 날 만큼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다. 그런데 내 힘으론 역부족이더구나. 정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보육원을 유지하기 위해선 그만한 기부자가 나와야 하는 상황인데 기부금도 봉사자도 줄어드는 요즘…… 무슨 수로 그런 큰 기부자를 찾아낸단 말이니. 그래서…… 저 사람이 한 제안이 내겐 희망이었다.”
끝내 이해인 수녀는 말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눈물을 훔쳤다.
“그러니까 복지, 복지 하면서 보육원 5곳을 선정해 지원금을 늘리는 대신, 다른 면으로는 시설 유지비 지원마저도 아끼기 위해 대체적으로 규모가 적은 보육원들을 블랙리스트에 넣어 다른 보육원과 합병해버린다는 거네요. 참, 더럽게 영리하네.”
그랬다. 강민식의 이면을 알고 나니, 그의 꼼수가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미 뉴스에는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이번 복지 사업이 크게 이슈가 되어 있었다.
단연 보육원 지원분야뿐 아니라 그밖에 몇몇 복지 사업을 세분화하여 발표한 바 있다.
덕분에 강민식은 대한민국 대다수에 해당하는 서민들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았더랬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이면은 조명되지 않았다.
문제는, 5곳의 보육원이 늘어난 지원금을 받는 대신 20곳이 넘는 소규모 보육원들이 정리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 간교하고 기가 막히게 영악한 수법이었다.
“사실, 그래서 저번에 네 이야기를 듣고 저 사람들의 지원을 받는 건 포기했다. 그래도 산 사람인데, 산 입에 거미줄 치겠나…… 하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안 되더구나. 이제 우린…… 어쩌면 좋니, 빛나야?”
떨리는 목소리로 울음을 집어 삼키며 묻는 이해인 수녀의 손을 빛나는 다정하게 맞잡았다.
“걱정 마세요. 저 애들…… 뿔뿔이 흩어져 천덕꾸러기처럼 다른 시설에 맡겨지는 거, 그건 저도 못 봐요. 제가…… 어떻게든…… 지킬게요.”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해인 수녀는 빛나가 일어나는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을 나왔다.
그러자 밖에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은지가 그녀의 곁으로 바짝 따라 붙었다.
“저기, 내가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니고…… 벽이 너무 얇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들었는데, 너 어떻게 하려고? 설마 강석훈이랑 그 말도 안 되는 딜을 정말 할 생각은 아니지?”
“해야지. 이젠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 되어버렸으니까.”
“안 돼! 말도 안 돼!”
은지가 기겁을 하며 그녀의 앞을 가로 막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런 은지의 어깨를 다독이며 빛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은지야, 우리…… 변호사잖아. 이번 딜, 우리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최대한 이끌어 내면 돼.”
“근데…… 저 인간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인간이야. 내가 저런 인간 한두 번 보니? 아니, 내 짧은 인생 동안 봐왔던 쓰레기들 중 단연 저놈이 최고다! 그런데, 저런 놈을 상대로 무슨 딜?”
“그럼…… 이대로 가만히 손 놓고 있어? 승현인 어디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자라왔던 이 보육원은 공중분해 되게 생겼는데?”
“그러지 말고 우리 승현이 형님을 한번 믿어보는 게…….”
“승현이 형님을 믿고 마냥 기다린다 치자. 그럼 우리 보육원은? 저 애들은?”
빛나는 때마침 장난을 치며 복도를 뛰어다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은지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에게 시선이 머문 은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만다.
그렇게 빛나는 그녀의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곤 은지를 지나쳐 강석훈이 기다리고 있는 원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은지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빛나야…….”
***
“뭐야,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만들어? 나 참을성 없는 거 몰라? 거래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빛나가 들어서자 강석훈은 거만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다시 고쳐 앉으며 그 얄미운 입을 필터링 없이 열었다.
“거래, 하려고 왔잖아. 하자고 그 거래.”
“진작 그럴 것이지. 허…… 울었나? 이런, 그 예쁜 눈으로 울면 내가 마음이 아프잖아.”
촉촉이 젖어 있는 그녀의 눈매를 보며 으레 짐작한 석훈은 주제넘게 손을 뻗어왔다.
이에 빛나는 미간을 구기며 그의 손을 탁 쳐냈다.
“어딜 손대?”
“뭐야, 거래하자며? 거래하려면, 이제부턴 내 손길에 익숙해져야 할걸?”
석훈의 그 능글맞은 웃음에 빛나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제발 그녀가 이 딜을 마무리하기 전까지 저 얄미운 강석훈의 목을 틀어쥐지 않아야 할 텐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난 너랑 딜을 할 게 아니라서 말이야.”
“뭐?”
“네 아버지, 서울 시장 강민식과 직접 딜을 하겠어.”
“무슨 소리야? 미쳤어? 네가 딜을 하는 상대는 바로 나야!”
“하지만 모든 전권은 네 아버지가 쥐고 있지? 안 그래? 승현이도, 이 보육원에 대한 결정권도…… 결국은 네 아버지잖아. 난 가장 확실한 사람과 딜을 하고 싶어.”
그 말에 강석훈의 눈썹 끝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야말로 빛나가 알량한 그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다.
“미쳤군.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그나마 나나 되니까 이렇게 관대한 조건에 딜을 제안한 거야. 우리 아버진, 그딴 딜 안 해. 살면서 그딴 거, 해본 적도 없으실걸?”
“그럼 이번에 처음으로 한번 해보셔야겠네. 그, 딴, 거.”
“돌았어. 너.”
“보육원은 없어지기 일보직전이고, 애인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제정신이면 사람이 아니지. 그래. 나 미쳤다. 그러니 어서 네 아버지한테 연락해. 이 미친년하고 딜 한번 해보시라고.”
빛나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벼랑 끝까지 몰리고도 어디서 저런 패기가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인 강민식과 직접 마주하겠다니, 이렇게 간 큰 여자를 봤나.
하지만 빛나의 그러한 행동은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에게 열등감이 있는 강석훈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이제야 진정한 갑이 되었다는 생각에 시종일관 능글맞은 웃음을 보이고 있던 그의 입매가 서서히 굳어갔다.
그러곤 그녀의 정직한 눈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순간적인 광기가 돌았다.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것 같아?”
안 될 말이다.
빛나가 강민식에게 찾아가는 순간, 그 화는 강석훈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럼, 오늘 우리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네. 걱정 마.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는 내가 더 잘 아니까. 네가 못 하면,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
빛나는 더 이상 강석훈과 마주 앉아 있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강석훈도 자리에서 튕겨 일어나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었다.
“이, 미친년이!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감히 어딜 가!”
“미안하지만 우리 이야긴 끝났어. 네가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딜을 제안하는 순간, 이미 끝난 이야기였다고! 그러니 내가 직접 네 아버질 찾아가겠다고! 더 이상 너랑 이야기하기 싫다고!”
“말했잖아!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다고!”
결국 강석훈이 폭발하고 말았다.
늘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기도 못 펴고 살았던 그의 광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빛나는 몸을 움츠린 채 그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공포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어머, 빛나야!”
열어둔 문을 통해 뒤늦게 들어온 은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빛나는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곧이어 느껴질 고통에 미리 몸이 움츠러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 따윈 없었다.
은지가 강석훈을 말린 것일까.
하지만 강석훈에 비해 턱 없이 모자란 그녀가 무슨 수로?
빛나는 여전히 웅크린 어깨에 힘을 빼지 않은 채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제 의지에 반하여 누군가에게 손을 붙들려 당황한 석훈의 모습이 보였다.
석훈의 손을 붙든 이는 은지가 아니다.
은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훤칠하고 건장한 남자였다.
하물며 덩치라면 전혀 밀리지 않는 석훈조차도 한 없이 작게 만드는 이 남자.
도대체 누굴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유형이 딱 두 가지가 있는데 말이야.”
남자가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폭발하기 직전의 석훈을 마주했는데도 남자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뒷모습만 봐도 흘러넘치는 여유는 보통 사람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진자 ‘갑’의 모습이었다.
남자는 그렇게 붙든 바들바들 떨리는 석훈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며 조금 전과 다름없는 목소리로 다음 말을 떼었다.
“첫째는, 좀 있다고 없는 사람 상대로 갑질하는 인간.”
“…….”
“둘째는, 여자한테 손찌검하는 남자.”
남자에 의해 자신이 행동이 철저히 차단되자 석훈은 처참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뒤로 물러섰다.
“근데 넌…… 둘 다인 것 같군. 용서가…… 안 돼.”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말투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된 인격을 가진 사람.
말투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 태생을 짐작케 했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마주한 석훈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간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뒤에 있는 의자에 걸려 비틀거리는 추한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다.
“윽!”
작은 신음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흩어진 자신의 슈트를 매만지며 돌아섰다.
그렇게 돌아선 남자를 빛나는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하…….”
빛나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세상에나!
눈앞에 있는 그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뒷모습만 봐도 진짜 ‘갑’의 기운이 흘러넘쳤던 바로 이 남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인물, 김우빈!
그런 그가, TV에서 볼 때보다 더 화려한 웃음을 보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리 온다고 온 건데, 요즘 사랑하는 제 와이프가 화장실 한번 들어가면 30분이라, 좀 늦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우빈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문제는 그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
하지만 잠시 후 그 의문은 자동으로 풀렸다.
누군가 그들 앞에 나타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꺄아악- 오빠! 얘 좀 봐봐! 승현이 오빠랑 완전 닮았어! 뭐야. 얘, 우리 오빠가 숨겨둔 아들 아냐?”
승헌의 손을 잡고 좋아 죽는 승희를 보며 빛나의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너무 놀라 턱이 빠질 것 같았다.
“맙소…… 사.”
일생일대, 가장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빛나는 은지에게 SOS 구조 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은지야, 나…… 볼 한 번만 꼬집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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