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분노조절장애가 있어.
2018.07.15.
낯선 이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을 때 승주는 흠칫했다.
-저…… 승현이 친굽니다. 지금 승현이가…….
하지만 곧 그 낯선 이가 승현의 안전장치라는 걸 알았을 때 승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승현이 붙들린 장소의 주소를 받아 자리를 떴다.
그리고 거의 다 도착할 때 즈음 되어서야 승준과 통화를 시도했다.
[가고 있다고? 승현이한테 연락 왔어?]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승준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되어 있었다.
“아니. 승현이가 아니라 그 녀석 친구한테서.”
[친구? 하……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아부지 아직 모르신다. 승현이 이 자식 빨리 못 찾으면 진짜 난리나.]
“걱정 마. 데리고 올 테니. 지금 막 도착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주는 음산한 건물 앞 부지에 차를 세웠다.
그러자 붉은 가로등 아래 건물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내 몇몇이 험악한 눈으로 그의 차를 바라본다.
[그리고 또 하나. 진짜 우리가 상대하는 놈이 바로 그놈이라면……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돼. 저쪽에서 증거 인멸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 쳐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승현이가 제 목숨 담보로 여길 기어들어간 거 아니겠어?”
사내 몇몇이 그의 차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얼굴 표정으로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기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 승주의 얼굴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표정 변화가 없었다는게 맞다.
그렇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들이 운전석으로 다가와 까만 유리창 너머로 험악한 그 얼굴을 들이밀며 위협을 가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야, 차 빼!”
밖은 전쟁이라도 날 기세였지만 여전히 그는 여유롭다.
심지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승준의 목소리에 초집중 상태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해.]
그런데 그때, 사내 하나가 유리창을 내리칠 기세로 주먹을 치켜 올렸다.
그 모습에 승주는 핸즈프리에 있던 핸드폰을 빼들고 말없이 창문을 내렸다.
“뭐야, 이 새끼?”
까만 유리창이 내려가며 그의 얼굴이 보이자 주먹을 치켜 들었던 사내가 황망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내 일생 일대 가장 최악의 실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승주는 자유로운 한손을 번개처럼 뻗어 사내의 뒷목을 움켜쥔 채 끌어들여 운전대에 처박아버렸기 때문이다.
퍽!
“으아악!”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함께 다가왔던 사내들이 주춤했다.
그렇게 승주는 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여전히 핸드폰을 든 채, 마치 동네 마실 나온 사람처럼 어둡고 음산한 건물을 무료한 눈동자로 훑어보았다.
“너, 뭐야!”
“뭐하는 새끼냐고!”
사내들이 날을 세우며 그를 에워쌌다.
[내 말 듣고 있어?]
핸드폰 너머로는 승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응. 듣고 있어.”
그가 대답하며 차갑고 감정 없는 검은 눈을 움직여 눈앞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들려오는 승준의 목소리가 조금 더 은밀하고 조금 더 살벌해졌다.
[내부 사항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
[살아 있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강력 범죄 등 큰 사건을 주로 담당했던 검사로서의 촉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적당히 강약을 조절해야 한단 말이다.
하지만 그는 분노조절장애라는 사소한 문제를 앓고 있었다.
과연 그는, 살아 있는 증거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아, 피곤하게 생겼다.
***
이해인 수녀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빛나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괜스레 아이들을 위한다는 자신의 욕심이 그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해인 수녀는 그녀에게 감히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숨이나 제대로 쉬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이해인 수녀에게 그 어떤 틈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 이해인 수녀만큼이나 걱정에 숨넘어가는 이가 있었다.
잔뜩 겁을 먹은 채 따라 나온 은지였다.
빛나가 꼭 알아야만 하는 진실.
하지만 그 비밀을 품은 채 기회가 오지 않아 단 한마디도 발설할 수 없었던 은지는 빛나만큼이나 잠을 못 잔 사람 중 하나였다.
때문에 이렇게 빛나가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게 맞는 일인지 도저히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승현이 없어진 마당에 이렇게 손 놓고 있다는 것은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그래, 뭔가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뭔가가 사람만도 못한 강석훈과의 거래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빛나야, 우리 정말 이게 맞는 걸까? 그래도 승현이 형님 말씀처럼 기다려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 나는 그렇게 못 기다려. 승현이…… 내가 직접 찾을 거야.”
은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단단히 마음을 먹은 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있지, 빛나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네가 승현이 형님 말씀을 무시하면 안 되는 이유…… 내가 말해줄게. 그게 말이야…… 사실은…… 승현 씨가…….”
이제 막 그의 정체에 대해 입을 떼려던 찰나, 원장실 문이 열리며 강석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능글능글한 모습에 빛나는 현기증을 느꼈고, 은지는 나오려던 말을 도로 씹어 삼켰다.
“이야, 군기 바짝 들었네. 내가 10분 빨리 왔는데, 나보다 일찍 왔어? 쯧즈, 그러게…… 진작 내 말을 들을 것이지. 안 그래?”
막상 눈앞에 석훈의 모습을 마주하자 빛나는 위에서 쓴 물이 넘어오는 것 같았다.
그토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도 여전히 이 인간의 모습은 참기 힘들다.
“원장님,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이해인 수녀가 자리를 비우자 이번에 빛나는 은지도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의외로 은지는 그녀 옆에 딱 붙어 앉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여기 있을 거야. 나도…… 관련 있는 사람이잖아.”
사실은 그 이유가 아니었다.
석훈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으니 빛나를 혼자 내버려둘 수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물론 복실만큼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보는 눈 한 쌍이 더 있으면 석훈이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나, 그것은 은지만의 착각이었다.
보는 눈이 한 쌍이든 두 쌍이든, 석훈의 출처 없는 오만함은 이미 도를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이야, 미인이 둘이라…… 나야 눈이 호강하니 좋지. 그쪽도 변호사인가?”
석훈이 능글맞게 웃으며 상체를 그들 앞으로 숙였다.
그러자 빛나는 단숨에 그의 말을 잘라버리며 말문을 열었다.
“본론으로 넘어가죠. 승현이…… 어딨어?”
“어허, 성질 되게 급하네.”
“알고 있잖아. 넌…… 그날,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한테 다시 거래를 제시했던 거고. 맞지? 네가 벌인 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 아버지…….”
빛나는 차마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못했다.
그 이름을 내뱉는 순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우리 아버지가 벌인 일이 곧 내가 벌인 일이지. 안 그래?”
“조건이나 말해.”
“각오는 되어 있나? 말했다시피, 가격이 좀 많이 올랐는데 말이야.”
“나는…… 승현이만 돌려받으면 돼. 그것도 무사히.”
“좋아. 그럼 우리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고. 일단, 네가 진행하고 있는 내 사건들은 그냥 묻어줬음 좋겠어. 앞으로도 영원히.”
빛나는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그러자 곁에서 은지가 그 떨리는 주먹을 꼭 잡아주었다.
속이 곧 폭발할 것처럼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좋나.
그녀를 믿고 마지막 용기를 냈던 박수정의 그 눈빛을 끊어낼 수가 없었다.
정말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
빛나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다독이며 이 모든 증상의 근원인 발암조직을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또 하나, 그놈이랑 헤어져.”
“뭐…… 라고?”
빛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도대체 이 자식이 뭐라고 중얼거리나 의심이 되었단 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다.
그 후로도 석훈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내 말은, 나랑 만나자고.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달만, 나랑 만나보자고. 혹시 알아? 나랑 한 달 만나보고 그 자식 싫어 평생 내 여자 될지.”
그 말에 빛나는 결국 틀어쥐고 있던 주먹을 책상 위로 올렸다.
하지만 이 거머리만도 못한 인간의 얼굴을 내치기도 전에 곁에 있던 은지가 벌떡 일어나 석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이 미친 새끼가! 너 지금 제정신이야?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쳐? 이게 장난처럼 보여?”
하지만 석훈은 간단하게 은지의 손을 내치며 삐뚤어진 타이를 매만지곤 신경질적으로 말문을 텄다.
“이 여자가 왜 이래? 내가 그쪽이랑 딜하는 거야, 지금? 여기서 모든 패를 쥐고 있는 건 나야! 알아들어? 내가 바로, 그, 갑이라고!”
이제야 알겠다.
석훈이 왜 딜을 하는 장소로 다름 아닌 그녀의 보육원을 택했는지.
그는 지금 빛나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기하길 바란 것이다.
굳이 이 공간에서 그녀를 굴복시키는 것이, 진정한 정복이라 믿는 교활한 악마였으니까.
정말이지, 강석훈다운 발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 잊었나 본데, 나는 지금 승현일 되찾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그를 포기하란 말이 나와?”
“말했잖아. 값이 올랐다고. 이틀 전에야 내 사건만 포기하면 되었지만 이제 난 그보다 큰 더 걸 물고 있거든. 그러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러야지. 그 정도도 각오 안 하고 나왔나, 이 자리에?”
“딜은……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성사될 수 있는 거야. 그게 딜의 기본이라고.”
“너랑 나, 왜 말이 안 돼? 그림 나오잖아? 잘 들어, 우리 아버지가 바로 강민식이야. 내가 그 아들이라고. 지금은 서울 시장이지만 우리 아버지 꿈은 그게 끝이 아니거든. 잘 생각해. 겉만 번지르르한 그 녀석이 내 조건보다 나은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빛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서 그 자리를 벗어나기도 전에 강석훈의 마지막 한 방이 강력하게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네가 이번 딜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단순히 그 녀석 하나로 끝나지 않아. 서울시에선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몇몇 시설을 합치려 하고 있어. 단순히 지역 사업 리스트에 올라가고 안 올라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 보육원이 없어지느냐 존재하느냐의 문제라고. 그러니 네가 선택해. 그 녀석과 이 보육원을 지키든지. 아니면 그 녀석도 잃고, 이 보육원도 잃든지. 모든 건…… 네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으니까.”
“뭐라고? 보육원이…… 없어져?”
“허, 몰랐나? 여기 원장님이 말 안 해? 이 보육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데.”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곁에서 은지가 부축해주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원장실을 나오자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악물어봤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쉬이 멈추질 않았다.
“나 참, 살다 살다 저런 미친놈은 또 처음이네. 사람이야?”
은지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이를 갈았지만 빛나에겐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때 한 아이가 다가와 작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쳐낸다.
“누나, 왜 울어?”
승헌이었다.
외모도 이름마저도 승현과 닮아버린 아이.
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가 더 보고 싶게 만드는 아이.
결국 빛나는 그 아이를 껴안고 서럽게 목 놓아 울었다.
그 모습에 은지도 뒤로 돌아 눈물을 훔쳐낼 수밖에 없었다.
금수저로 태어나 남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자부했던 은지에게,
“더러운 세상…….”
처음으로 세상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
“독한 새끼.”
박 실장은 입안이 까슬해지는 것을 느끼며 욕설을 내뱉었다.
진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뭐 이런 새끼가 있나, 이젠 진저리가 날 정도다.
승현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체력이 좋은 건지, 정신력이 좋은 건지, 그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 다 때렸냐?”
“도대체 너 뭐하는 새끼냐? 아니, 다 필요 없다. 이젠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아.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나마 내가 너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것마저도 사라져 버린 지금…… 네가 더 이상 살아 있어야 할 이유도 없어져 버렸어. 끝이라고.”
박 실장은 결정을 내렸다.
도대체 이놈이 뭐하는 놈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이제 그만 끝내기로.
왜냐고?
궁금해 죽기 전에 열 받아 죽게 생겼으니까.
도대체 저놈의 주둥아리는 가만히 있질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치고 들어와 박 실장의 혈압을 위험수치까지 올려놓는단 말이다.
때문에 웬만해선 흥분하지 않는 박 실장이 오늘은 천국과 지옥을 수십 번도 더 오갔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냐? 정치인 따까리나 하는 주제에? 넌 어차피 일회용이야. 뒤에서 착한 척 깨끗한 척하는 놈 더러운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이젠 판단이 서질 않는다.
“너 이 자식, 아직도 주둥아리 놀릴 기운이 남아 있냐?”
꼭 틀어쥔 박 실장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승현은 여전히 필터링 없는 날카로운 말로 박 실장을 자극했다.
“도대체 넌…… 뭘 위해서 싸우는 거냐? 정의나 대의와는 거리가 먼 것 같으니 그런 소리 집어치우고, 진실을 말해봐. 강민식이…… 저 끝까지 올라가면 네게 한자리 내준다던?”
“그래도 이 자식이!”
“잘 들어. 강민식은 절대 너 같은 깡패를 전면에 세울 놈이 아니다. 넌 평생 이런 그늘에서 살아야 해. 그러다 필요 없으면 가차 없이 버려질 거야. 그땐, 지금 내 모습보다 더 비참할걸?”
퍽!
결국 박 실장의 주먹이 또 한 번 승현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여유가 넘쳐흐른다.
“하…… 이 새끼야, 몇 번을 말해. 얼굴은 때리지 말라고.”
또 그놈의 얼굴 타령!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지 않은 한, 사람이 이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에게 이토록 믿음을 준 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있지, 우리 둘째 형이 말이야…….”
“너네 둘째 형 이야기는 그만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
“아냐. 아냐. 들어야 해. 들어두는 게 좋을 거야. 왜냐면…….”
승현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들며 고개가 푹 떨어졌다.
이제 그도 한계에 온 모양이다.
그제야 박 실장의 입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그럼 그렇지, 저도 사람인데 얼마나 버티나 했다.
“그러게 곱게 기절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얻어터지진 않았을 거 아냐? 아니면, 그 지긋지긋한 둘째 형 이야기를 그만 좀 멈추던가.”
그랬다.
정신력, 체력 하나는 박 실장이 혀를 내두를 만큼 톱이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둘째 형 이야기가 귀에 거슬렸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은 둘째 형 이야기로 그를 조롱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단 말이다.
하지만 결국은 승현도 사람인지라 굴복하고 말았다.
그렇게 박 실장이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으아악!”
뭔가가 부딪치는 둔탁한 마찰음, 그리고 비명 소리.
박 실장이 고개를 돌리자 셔터 문이 올라가며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실장님, 저기 어떤 놈이…….”
“무슨 일이야?”
박 실장의 곤두선 물음에 대답한 이는 그의 부하가 아닌 승현이었다.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던 그는,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미처 마치지 못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 왜냐면…… 곧 만나게 될 테니까. 우리 둘째 형…….”
그리고 그 순간 빛을 등진 채 한 남자가 유유히 건물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들어서자 밖에서 건물 안으로 뛰어든 남자들이 그를 중심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빛을 등지고 있어 아직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그의 걸음걸이가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마치, 지옥 불을 뚫고 나온 저승사자처럼.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그려졌다.
그 와중에도 박 실장은 ‘설마’라는 생각을 아끼지 않았다.
설마, 저 불청객이 진짜 승현의 둘째 형일까.
설마, 저 인간이 밖에 있는 많은 조직원들을 뚫고 여기까지 두 발로 걸어들어온 것인가? 그것도 혼자서?
설마, 진짜로 설마…… 지금까지 승현이 했던 둘째 형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그런데 그때, 이젠 기력이 떨어져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던 승현이 서서히 고개를 들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차…… 그리고 내가 미처 말을 못 한 게 있는데 말이야. 우리 둘째 형이 말이야…….”
또 그놈의 둘째 형 타령이다.
다 죽어가던 놈의 쓸데없는 발악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싶었단 말이다.
하지만 승현의 다음 중얼거림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박 실장의 귓전을 통과해 대뇌(大腦)에 콕 들어와 박혔다.
“…… 분노조절장애가 있어. 그래서…… 너희들이 좀…… 힘들 거야.”
그제야 박 실장이 입이 쩍 벌어졌다.
‘설마’가 사람 잡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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