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63화 (63/94)

63. 멘탈 갑 위승현

2018.07.11.

“아, 맞다. 이름은 알고 있지. 이름이…… 위승현이었던가?”

박 실장은 나중에야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는 듯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으며 다시 물어왔다.

하지만 마주한 승현은 대답해줄 의사가 전혀 없는 듯 꼭 다문 입술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박 실장은 다시 입을 연다.

“도대체 너, 뭐하는 놈이냐. 뭐하는 놈이길래 유령처럼 흔적이 없어? 엄마, 아부지는 계시냐?”

그제야 줄곧 말이 없던 승현이 잘생긴 입매를 틀어 올리며 반응했다.

“모르는 게…… 나을 텐데. 어차피 알아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조금 느린 듯한 승현의 말투에 줄 곧 평온을 유지하던 박 실장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가 제대로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박 실장의 입에서 한마디가 나오기도 전에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나가서 알아봐.”

젊은 남자가 돌아서기도 전에 그 소란의 원흉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진짜! 니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어이, 박 실장! 이 자식들한테 이야기 좀 해줘. 내가 누군지!”

등장부터 요란 법석.

줄곧 위압감을 조성하고 있던 박 실장을 손아래 사람 다루듯 부르며 겁대가리 없이 달려드는 이는 다름 아닌 강석훈이다.

그런 석훈을 보자 박 실장은 인상부터 찌푸렸다.

하지만 승현은 희미한 웃음을 보인다.

한 번 망나니는 어딜가도 제 자신을 숨길 수 없는 법.

그는 오늘만큼 석훈의 존재가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일이, 쉽게 풀릴 모양이다.

생각 없는 석훈이라면 그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줄지 모르니까.

박 실장의 부하들이 석훈을 붙들고 있었지만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박 실장이 눈짓으로 물러날 것을 요구하자 사내들은 석훈을 놓아주고 돌아섰다.

그러자 잠시 동안의 몸싸움으로 인해 구겨진 슈트를 털어내며 석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깡패새끼들이! 이게 얼마짜리 옷인데!”

옷깃을 다 편 그는 박 실장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웁쓰! 오늘 나 여기 온건 아버지한테 비밀! 아버지 알면 나도 마찬가지지만 박 실장도 좋을 거 없잖아? 우리 서로 상부상조하자고, 응? 그나저나, 나 들었어. 오늘 박 실장이 한 건 했다며?”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줄곧 감정 없던 박 실장의 목소리에서 짜증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석훈은 신이 난 듯 박 실장의 어깨를 툭 치며 속삭인다.

“뭐, 내 얼굴을 보든 우리 아버지 얼굴을 보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죽을 놈인데. 우리만 입 다물면 아버진 모르잖아. 그치?”

그러더니 석훈은 박 실장과 젊은 남자를 제치고 이죽거리는 웃음을 보이며 승현에게 접근했다.

“이야, 진짜네? 진짜로…… 잡혀 왔네? 대박!”

석훈이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 올리며 승현의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그러게, 우리 아버진 왜 건드려? 사람 잘못 건드린 거야, 너. 어쨌든 속이 다 시원하네. 내가 한 번쯤은 이런 위치에서 널 내려다보고 싶었거든. 항상 날 내려다만 보다가, 이렇게 올려다보는 느낌은 어때?”

전, 세, 역, 전.

석훈의 머릿속은 그 네 글자로 빼곡하게 도배가 되었다.

줄곧 대놓고 승현에게 당해만 오다가 오늘이야말로 자신이 갑이 되었다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고맙다. 네 발로 찾아와줘서.”

승현의 입에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 나왔다.

고맙다라니…….

“뭐라는 거야? 박 실장, 얘 머리 때렸어?”

석훈이 기분 나쁘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겁을 먹은 채 덜덜 떨고 있을 모습을 예상했던 석훈에게,

맞아 쥐어 터져도 잘난 승현의 얼굴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

피가 터져도 잘난 저 얼굴이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싶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제 앞에 무릎 꿇고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단 말이다.

그래서 석훈은 승현과 눈높이를 맞추며 무리수를 두었다.

“웃어? 그래, 좋다. 이래도 웃을 수 있는지 보자.”

“…….”

“네 여자, 유빛나…… 내가 가지려고. 그렇게 둘이 죽고 못 사니 널 위해 그 여자가 못 할 건 세상에 없겠지? 네 생각은 어때? 널 살리기 위해 그 여자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능글맞은 웃음.

그리고 주제넘은 생각.

가만히 있어도 승현은 지금 석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강민식 같은 인간에게서 이런 저능아 같은 아들이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일 정도다.

이쯤에서 승현은 석훈이 품은 헛된 꿈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레드선을 외쳐줄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 빛나에 대한 비밀 하나 이야기해줄까?”

“뭐?”

“귀 좀…….”

반은 의심이었으나 묶여 있는 승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어 석훈은 서서히 고개를 숙여 얼굴을 마주했다.

그렇게 다가온 석훈의 귓가에 그는 조용히 읊조린다.

“조심해. 우리 빛나는 다른 여자들이랑 좀 달라.”

그리고 다음 말은 들은 석훈의 얼굴이 대번에 흙빛으로 변했다.

“잘못 건드리면…… 물거든.”

***

승준이 경고하기 무섭게 복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때문에 승주는 집에 막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승현의 집으로 향해야만 했다.

그렇게 승주는 빛나와 마주했다.

“승주라고 합니다. 승현이 형.”

거부감 없이 조금 더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다.

높낮이 없는 억양, 그리고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포커페이스.

얼굴이라도 못났다면 정말 최악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다행인건, 승주가 그나마 인물은 훤칠하다는 것.

놀란 빛나는 얼떨결에 승주의 손을 잡긴 했지만 여전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였다.

“아무래도 이 일은 오빠가 전문일 것 같아서.”

복실이 다가서며 말하자 승주의 싸늘한 눈매가 빛나에게서 난장판인 거실로 향했다.

그러더니 주변을 소리 없이 둘러보았다.

저토록 큰 사람이 움직이는데도 그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심지어 발소리조차도 나지 않는 모습에 빛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는 그렇게 소리 없이 움직이더니 한 자리에서 자세를 낮춰 떨어진 핏방울을 보며 조용히 물어왔다.

“누가 손댔어?”

“아니, 들어왔을 때 그대로 보존한 거야. 혹시 몰라서.”

“잘했어. 그럼, 기다려보자.”

순간, 잔뜩 부풀었던 빛나의 기대가 뻥하고 터져버렸다.

기다려보자니!

빛나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데 고작 기다려보자는 말이 전부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전혀 상관없는 경찰 감식반이 와도 이정도로 무심하진 않을 것이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승현의 가족을 드디어 만났다는 성취감도 없이 빛나는 눈썹을 곤두세우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승주 앞에 날카롭게 버티고 섰다.

“그게 다예요? 어떻게…… 그게 다예요? 동생이 실종됐는데 어떻게 그게 다예요!”

“으아, 빛나야.”

은지가 기겁을 하며 빛나의 팔을 붙들었지만 이성을 잃은 그녀를 만류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뭐야, 당신…… 승현이 주워 왔어? 남이야? 남이라도 이렇겐 안 해! 하다못해 깡패도 자기 가족들은 챙긴다고! 그런데…… 고작 기다려보자고? 기다려? 뭘 기다려? 얼마나, 더!”

깡패라는 말에 너무 놀란 은지는 입을 틀어막은 제 주먹을 씹어 먹기 바로 일보직전이었다.

“빛나야, 그만! 제발 그만! 도대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비켜! 할 말은 해야겠어!”

하지만 빛나는 은지를 밀어버리며 승주 앞에 더욱더 단단히 버티고 섰다.

여전히 탐스럽게 찰랑이는 갈색 머리, 그리고 성난 눈동자로 승주를 올려다보는 빛나의 모습은 눈이 부셔 감히 바라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그제야 승주는 승현이 왜 이 여자에게 그토록 목을 맸는지 알겠다.

다혈질이다.

승현만큼이나 참을성이 없고, 승현만큼이나 겁이 없었다.

여자 위승현.

앞으로 사고깨나 치고 다닐 상이다.

게다가 그를 눈앞에 두고도 한 줌도 안 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노려보는 모습이라니.

정말 골라도 저랑 똑같은 여자를 골랐다.

“내가요,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어서요! 다섯 셀 때까지 그럴듯한 해결책 안 내놓으면 내가 직접!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자, 하나! 둘! 둘 반! 셋! 땡!”

헛웃음이 일었다.

숫자를 세며 ‘둘 반’이 나오는 것도 모자라 다섯까지 센다더니 셋으로 끝냈다.

정말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이다.

빛나의 겁대가리 상실한 반항기에 복실마저도 숨을 죽인 순간이었다.

전혀 예측 불가한 승주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그런 빛나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서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내가 감정 표현에 서툴러요.”

“뭐예요, 사이코패스예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요.”

복실이 기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게다가 무심코 던진 말에 의외로 순응하는 그의 대답이 돌아오자 빛나도 적지 않게 당황했다.

“내가 기다려보자고 한 건, 적어도 승현이를 믿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믿어요? 뭘요, 승현이가 슈퍼맨이라도 된데요?”

“알다시피 승현이 키가 187, 신체 조건이 워낙 탁월한 놈이라 활동반경이 넓어요. 게다가 허세가 있어서 크게, 아주 위협적으로 움직이는 편이죠.”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 동생이니까. 그리고 내가 가르쳤으니까.”

“그래요, 그렇다 쳐요. 그런데요?”

“그런데 이 현장을 정리한 게 아니라면, 보세요. 사물이 부서지고 몸싸움을 한 흔적의 범위가 매우 좁아요.”

승주는 손가락질로 소파 뒤쪽에서 유리 파편이 흩어진 반대편 범위까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은 곧 몸싸움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끝이 났다는 걸 의미합니다. 근데 승현인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거든. 주먹질은 제대로 못 해도 맷집이 좋아서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안에 그 녀석을 굴복시켰다면 답은 단 하나, 서로 합의 하에 그만둔 겁니다.”

“…….”

“제 발로 걸어 나간 거예요.”

참으로 독특한 어법이었다.

마치 사무적으로 무언가를 브리핑하듯 억양 없는 목소리는 그의 휴머니즘을 의심케 만들었다.

그러나 일리 있는 말이다.

정말 생긴 것만큼이나 인정머리 없이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럼 오빠가 찾을 수 있어?”

복실이 팔짱을 낀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찾아야지. 근데 굳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제 발로 걸어 들어올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의심병에 걸린 빛나의 날카로운 물음에 승주는 여전히 높낮이를 느낄 수 없는 그 특유의 억양으로 입을 연다.

“그런 안전장치 없이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놈이 아니니까. 생각보다 겁 많아요, 그놈.”

물론 승현이 몸을 좀 격하게 사리긴 하지만 겁이 많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하지만 복실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승현인 내가 데려올 테니 걱정 마세요. 근데, 우리가 지금 누굴 상대하고 있는 거지?”

아이고야, 빨리도 물어본다.

진짜 인정머리 없게 잘생긴 얼굴부터 억양 없는 특유의 목소리 톤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 대면했더라면 그러한 승주의 매력에 조금은 위축이 되었을 테지만, 지금은 제 동생 걱정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것 같은 그가 몹시도 얄미운 빛나였다.

“오빠, 내가 이야기해줄게. 일단 나가자.”

복실이 승주를 데리고 나갔다.

가장 존재감이 컸던 두 사람이 사라지자 어지러운 거실은 더욱 빛나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을 다스려야 했으니까.

“다들 나가 줬음 좋겠어.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세 사람은 조용히 그 집을 빠져 나갔다.

모두가 나가버린 텅 빈 집.

승현의 집이 이렇게 넓은 줄 미처 몰랐다.

아마도 그동안 그의 존재감이 너무 컸던 탓이리라.

그렇게 꽉 찼던 공간이 그 한사람 없다고 이렇게 싸늘해 보이다니.

빛나는 널브러진 유리 조각을 줍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놀라 잠시 손을 떼었다.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눈물이 났다.

“흑…….”

하지만 다친 손끝이 아파서 우는 게 아니다.

쓸쓸한 큰 집에 혼자 남겨진 게 외로워서도 아니다.

억울했다.

승현은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모르는데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분통 터졌다.

이런 순간, 승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러다 문득 강석훈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근데 이거 어쩌나, 조금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말이야…….

순간 빛나는 새어 나오는 비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돌아서는 순간까지 쓸데없는 자신감에 차 있던 석훈의 모습에서 이제야 진실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자, 새로운 가격으로…… 우리…… 다시 거래를 시작해볼까?

그 새로운 가격은 바로 승현의 몸값이었던 것이다!

“그 자식은…… 알고…… 있었어.”

이제야 알겠다.

그 보잘것없는 강석훈의 자신감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빛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떨리는 손으로 절대 전화 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핸드폰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이대로 승현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길 바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다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녀의 남은 인생은 지옥이 될 테니.

그렇게 빛나는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지긋히 눈을 감았다.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전화했어? 기다렸잖아.]

***

퍽!

인내심이 한계에 다 다른 박 실장이 주먹을 날리자 승현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네가 누군지, 그것만 말해주면 되잖아. 왜 이렇게 고집이 세. 응? 도대체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고. 회사에서도 네 인적 사항은 본사에서 직접 관리한다며? 뭐야, 너 간첩이냐?”

“젠장, 나도 내가 간첩이면 좋겠다. 그럼 말도 안 되는 논리 찾겠다 이 고생 안 해도 되는데. 너 같은 새끼…… 그 자리에서 밟아주는 건데.”

“뭐라고? 그래도 이 자식이!”

다시 한 번 박 실장의 주먹이 날아왔다.

하지만 이번엔 머리가 아닌 승현의 턱이다.

덕분에 터진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하루가 지났다.

일반인이라면 진즉에 무너지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지만, 승현은 신체 조건만큼이나 멘탈 또한 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채 끝을 내야 할지도 몰랐다.

질겨도 보통 질긴 놈이 아니다.

박 실장은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죽어도 이 어린놈을 제 발 아래 꿇려야겠단 말이다.

그렇게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 승현으로부터 경고 한마디가 날아들었다.

“하아, 분명 말했다. 얼굴…… 때리지 말라고. 너, 후회한다.”

그 와중에도 협박이라니, 박 실장은 실소를 터트렸다.

“야, 다 필요 없고. 걔 데려와. 걔…….”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있잖아. 나 잡아오라고 시킨 놈. 뒤에 숨어서 이래라저래라, 조종한 놈. 강석훈이 아버지. 진짜 나쁜 그놈…… 불러오란 말이야. 얼굴 좀 보게.”

“죽을 때가 되니 네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여기 안 오셔. 한 번도 오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실 거다.”

“뭐야. 그럼 난 죽는 마당에 날 죽인 놈 얼굴도 못 보고 죽는단 말이야?”

“그러게 경고했을 때 들었어야지. 적당히 타협했어야지. 왜 고집을 부려 여기까지 오나.”

“젠장. 장난해? 난 죽었다 깨어나도 정치랑은 타협 안 해.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야. 나한테 옵션 따윈 없었다고.”

“옵션 없는 세상이 어딨나. 전부 네가 선택한 거지. 그러니 누굴 원망하려거든 네 자신을 원망해.”

“헐…… 그러니까 나는 결국 죽었다 깨어나도 그 인간 얼굴을 못 본다는 이야기네.”

“말했잖아. 여긴 안 오신다고.”

“그럼, 여기서 그만 끝낼래. 하지만 안 죽을 거야. 억울해서…… 못 죽겠어.”

머리 쪽은 한 대밖에 안 때렸는데 아무래도 뇌를 다친 모양이다.

옵션 없은 세상이 어디 있냐는 한마디에 제 죽음을 옵션이라고 생각한 걸 보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듯 어린애처럼 웃으며 억울해서 못 죽겠단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까.

“마지막 기회다. 네가 누군지 말해. 이젠 짜증나서라도 알아야겠어. 내가 살다 살다 너처럼 뒷조사 힘든 놈은 처음이었거든.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얼레. 아직도 모르겠어? 학습능력, 겁나 떨어지네.”

“이 새끼가 장난하나!”

박 실장이 다시 주먹질을 하기 위해 오른 손에 힘을 잔뜩 실으려던 찰나였다.

승현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서서히 드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더디게 플레이되었다.

그렇게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머리가 터져 붉은 피가 낭자함에도 불구하고 잘생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그런데 그 잘생긴 얼굴이 오싹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

게다가 차분한 음성까지.

박 실장은 살다 살다 이렇게 멘탈 센 녀석은 처음 보았다.

진저리치는 박 실장에게 승현은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띠며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내가 형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우리 둘째 형. 이건 우리 둘째 형에 관한 이야기야…….”

느릿하게 시작한 그 별것 아닌 이야기가 소름끼치도록 섬뜩하게 와 닿았다.

그래서 박 실장은 그 이야기를 멈춰보고자 웬만해선 벗지 않는 슈트 재킷을 벗어던지며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러곤 대기 되어 있는 젊은 남자에게 말한다.

“나가 있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젊은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돌아섰다.

그러나 등 뒤로 박 실장의 신경질적인 고함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래, 이 새끼야! 너 멘탈 갑이다! 짱 먹어라!”

그 뒤로 묵직한 마찰음이 오갔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린 채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어느 정도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승현이 정말 이런 상황까지 버텨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박 실장이 홧김에 소리친 그 말이 맞았다.

그래, 멘탈 갑 위승현, 네가 이겼다. 너 다 해 먹어라!

대신, 조금만 더 버텨다오…….

남자가 그곳을 나오자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동료들이 그를 맞이했다.

“뭐야, 아직도 안 불어?”

“야, 대단한 자식일세. 저렇게 얻어터지고 아직도 주둥아리 살아서 나불거리는 놈은 저놈이 처음이지, 아마?”

하지만 남자는 그런 동료들의 물음에 굳이 대답하지 않은 채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동료들이 그에게 행적을 묻는다.

“어디 가?”

“화장실.”

무뚝뚝하게 이야기하고 돌아선 남자는 화장실에 도착해서야 다른 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분명…… 둘째 형 이야기를 했겠다?”

승현이 주저리주저리 둘째 형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다.

첫째 형이 아닌 둘째 형 이야기를 했으니 둘째 형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라는 이야기리라.

그렇게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떨어지고 드디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유난히도 메마른 음성.

기계처럼 높낮이를 느낄 수 없는 그 특유의 말투에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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