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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설레게하는 그대-62화 (62/94)

62. 너는 누구냐!

2018.07.08.

“우리…… 다시 거래를 시작해볼까?”

석훈이 내뱉는 뜨거운 입김이 빛나의 귓불에 소름 돋게 내려앉았다.

그에게 붙들린 어깨가 미친 듯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빛나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이를 악 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 꿈 깨시지? 죽었다 깨어나도 너 같은 놈이랑 거래 따윈 안 할 테니까.”

석훈에 비해 정말 한 줌도 안 되는 여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앙칼지게 올려다보는 빛나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게 보였다.

작은 여자에게서 이런 기운이 풍기다니.

역시나,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탐이 나는 여자다.

“과연, 그럴까? 사람 일이란 한치 앞도 모르는 거라잖아. 나중에 얼마나 아쉬우려고 이러시나.”

“걱정 마. 아무리 아쉬워도 너한테 구걸하는 일 따윈 없을 테니.”

“…….”

“그러니까…… 이것 좀, 놔줄래? 내가…… 좀 깔끔해서 말이야. 더러운 게 몸에 닿는 거, 질색이거든.”

순간 석훈의 눈이 분노로 꿈틀 거렸다.

도대체 이 맹랑한 여잔, 왜 이리도 겁이 없단 말인가.

아무래도 알려줘야겠다.

그에게 다시는 이따위 무례한 말을 내뱉을 수 없도록.

“너 자꾸…… 으아악!”

하지만 그렇게 떨어진 가르침은 곧 처절한 비명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쾅!

빛나에게 머물러 있던 그의 팔이 가차 없이 꺾이고 몸이 돌아가더니, 결국은 엄청난 소음과 함께 그의 몸은 주인의 의지를 벗어난 듯 벽에 오징어처럼 들러붙어 버렸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놀라 파르르 떨리는 그의 귓가로 여자의 것인지 남자의 것인지 모를 섬뜩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손버릇이…… 몹시, 똥이네.”

뒤로 꺾인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에다, 보기 흉한 폼으로 벽에 들러붙은 민망함이 더해져 석훈은 폭발 직전이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무방비 상태였다지만 제 체중의 반도 안 되는 여리여리한 여자에게 이렇게 속절없이 당하다니!

게다가 안간힘을 써도 빠져 나갈 수가 없다.

“아악, 이…… 미친…….”

절로 욕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복실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다.

“이 손버릇 못 고치겠으면, 내가 기꺼이 가르침을 줄 수 있는데. 어때…… 한번 받아볼래?”

그리 세게 잡고 있지도 않은 것 같은데 복실에게 붙들린 팔에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저릿하게 올라왔다.

그렇게 올라온 통증이 대뇌를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석훈은 그동안 머릿속을 맴돌기만 하던 의문을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너, 뭐냐! 군인이냐?”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네 캐릭터가 설명이 된다!

“군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뭐야, 아니야?

그럼, 너…… 도대체, 뭐냐!

“들어봤을랑가 모르겠네. 성북동 미친개라고…….”

미친년이구나!

이제부터 너는 사람 카테고리에서 제외다!

석훈은 복실의 손에서 벗어난 이 순간부터 앞으로는 그녀와 상대를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미친년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으므로.

“복실아, 됐어. 애들이 보고 있어.”

빛나의 만류에 복실은 어쩔 수 없이 석훈의 손을 놓아주어야 했다.

그녀의 말처럼 복실과 함께 놀던 아이들이 창가에 다닥다닥 붙어 무슨 일인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오늘 저 애들 때문에 산 줄 알아라.”

복실이 속삭이듯 말하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이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할 필요가 없어서다.

그렇게 복실이 멀어지고 나서야 석훈은 그녀들로부터 서너 발자국 더 물러났다.

조금 전 빛나와 함께 있을 땐 어떻게 해서든 거리를 좁혀보고자 했던 그였지만, 복실이 있는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멀어지고 싶은 상황이었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자.

저 여자가 손을 뻗어도 도망칠 수 있는 여유가 있도록.

아직까지도 아릿한 손목을 매만지며 복실을 노려보는 석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가 싶었지만, 그 시선이 빛나에게 옮겨가자 무섭도록 안정을 되찾았다.

“너랑은 절대 그딴 거래 안 해. 네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그러니 다시는 애들 앞에 얼씬도 하지 마.”

빛나는 자신의 의견이 확고하다는 듯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석훈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히쭉 웃는다.

도대체 왜?

빛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이토록 석훈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는 것일까.

“아직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군. 말했지.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래서…… 가격도 올랐다고…….”

빛나는 뒷걸음질 치는 석훈을 바라보며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무슨 상황이 바뀌었단 말일까.

다름 아닌 그들이 찾고 있는 그 누군가가 바로 강민식이라는 것?

그도 아니면 이제야말로 서로의 진짜 적을 알게 되었다는 것?

하지만 석훈은 끝끝내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은 채 돌아서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네 발로 날 찾아온 순간…… 오늘 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은 걸, 넌 후회하게 될 거야.”

“…….”

“내가…… 꼭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복실이 혀를 찼다.

“어허, 내가 저 자식 사람 되는 꼬라지를 보고 죽을라고 했더니, 그러려면 지겹도록 영생을 누려야겠네. 쯧즈…… 가망이 없어, 가망이.”

그러나 빛나는 찜찜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가슴이 턱 막혀 온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닐 거라는 전체도 크게 깔아 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정의 입에서 ‘강민식’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패는 갈렸다.

“복실아, 우리도 가자. 승현이랑…… 할 말이 있어.”

그랬다. 어서 그를 만나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제야 베일에 싸인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았으니, 그와 함께 전면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큰 싸움이 될 것 같았다.

***

운전대를 쥔 빛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집으로 가는 도중 몇 번이나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승현이 받질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지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복실아, 다시 한 번 전화해봐. 회사에서 그 시간에 출발했다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어. 감이…… 안 좋아.”

“집에 들렸다 온다 했다며. 샤워하나 보지. 걔가 좀 깔끔해?”

복실이 운전하는 그녀를 다독이며 위로했지만 빛나의 불안감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벌렁이는 심장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적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의외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 시장 강민식.

문제는 강민식의 이미지가 강석훈과는 달리 더 없이 인자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

조금 더 독하고 조금 더 강인한 이미지일거라 생각했기에, ‘설마’를 외치며 배제하려 했던 인물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무슨 정신에 어떻게 운전하고 왔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자 은지가 귀신처럼 전화를 했다.

[어디야! 왜 전화 안 받았어! 내가 얼마나 속이 탔는 줄 알아?]

“미안. 일이 생겨서. 나 지금 집에 왔어. 주차장이야.”

[그래?]

“은지야, 승현이 집으로 넘어와. 나…… 할 말 있어.”

은지도 알아야 했다.

어쨌든 은지 또한 이 일에 몸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할 말 있다는 그녀의 말에 은지가 더욱 숨이 넘어갔다.

[그래? 나도 할 말 있다! 잘 됐어. 집 앞에서 기다릴게. 빨리 올라와.]

전화를 끊은 후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그리고 7층에 내려서자 정말 은지가 바로 앞까지 나와 있었다.

하루 종일 빛나와 연락이 되지 않아 은지는 지금 속이 바짝 바짝 타던 중이었다.

아니, 이미 타버려 새까만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정에게마저 소박을 맞았으니 그야말로 끙끙 앓다 못해 죽어 나가는 중이었다.

말 못 할 비밀이 있다는 게 이렇게 숨 막히는 일일 줄이야.

어서 털어버리고 홀가분해지고 싶었다.

때문에 은지는 빛나를 보자마자 발을 동동 굴리며 눈을 빛냈다.

“나, 진짜 심각하게 할 말 있다. 내가 먼저 하면 안 될까?”

빛나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 은지가 이야기했다.

하지만 심각한 그녀의 얼굴은 은지의 이야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

“알았다. 알았다!”

어서 말하고 싶은 생각에, 은지는 전혀 반항의 기색 없이 빛나를 따라 승현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실이 그 뒤를 따랐다.

현관문의 센서등이 거실로 향하는 복도를 잠시 밝혀주었다.

그때까지도 빛나는 집 안에 흐르는 이상한 기운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승현아! 승현아!”

지금 이 순간, 가장 간절한 사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그를 찾으며 복도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거실에 도착한 순간, 빛나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할 말을 잃어야 했다.

“빛나야, 나 먼저 이야기해도 되나? 응? 진짜 입이 너무 근질근질해서 그래.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승현 씨가 말이야…… 음…… 응?”

뒤따라 들어오던 은지도 빛나의 어깨 너머로 본 거실 광경에 말문을 닫았다.

거실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소파를 중심으로 테이블과 화병이 제 자리를 벗어나 흩어져 있었다.

게다가 커다란 스탠드 또한 뒤로 넘어가 깨져 있다.

바닥의 일부분은 깨진 스탠드와 화병 조각으로 난장판이었다.

“아악! 도둑…… 든 거야?”

놀란 은지가 숨이 넘어갈 듯한 고음을 발사했다.

“어머, 그랬나 봐! 빛나야, 뭐 없어진 거 있나 확인해봐!”

하지만 두 사람을 제치고 나온 복실은 차분하게 거실을 훑어보며 분위기를 살피는가 싶더니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의외의 말을 뱉어낸다.

“도둑의 흔적이 아냐.”

“그럼?”

복실은 빛나의 되물음에도 대답 없이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한 눈에 봐도 승현의 것이 분명한 핸드폰이었다.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그리고 돌아선 복실은 승현의 핸드폰을 내밀며 치 떨리도록 두려운 현실을 기어이 확인시켜 주고 만다.

“이건…… 몸싸움의 흔적이야.”

빛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주워 삼켜야만 했다.

***

식탁에 빛나와 마주 앉아 있던 엘리스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보며 벌렁이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앞의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통해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자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세상에나, 지금 빛나에게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엘리스는 그들의 진짜 적을 바로 며칠 전 코앞에 두고도 그대로 놓아준 셈이었다.

“그래서…… 강민식이 왔던 거구나, 그날.”

그 중얼거림에 빛나가 고개를 들었다.

“강민식이 왔었다구요? 언제?”

“이틀 전에요. 갑자기 본부장님을 찾았었죠. 사무실에서 짧은 시간 대화 후 돌아갔구요. 물론, 본부장님 표정으로 보아 좋은 일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말도 안 돼. 정말…… 그 인간이 며칠 전에 승현이를 보러 왔었다구요? 승현이가 뭐래요?”

“자세한 말은 못 들었어요. 중요한 건 그쪽에서 딜을 제안했고, 본부장님이 거절했다는 것 정도.”

“그러고는요?”

“그러고는 뭐가 있겠어요. 아시잖아요, 본부장님 스타일. 생긴 게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며 퉁퉁 불어 있었죠.”

빛나는 암담함에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간 보려고 온 거예요. 승현이 제 사람이 될 수 있나…… 그러다, 버리기로 결정한 거고.”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래서 먼저 움직였더라면, 오늘과 같은 사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빛나는 자신의 무능함에 속이 타들어갔다.

왜 몰랐을까.

조금만 더 생각을 달리 했다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법한 일이었다.

때문에 오늘 승현에게 벌어진 일이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아 가슴이 무너졌다.

그 표정을 읽은 이정이 곁에서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네 탓 아니야. 너무 자책하지 마.”

“어떻게 그래. 지금 승현이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살아 있는지도!”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그러자 몇 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난장판인 거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복실이 경찰에 연락하는 것을 만류해 그대로 놓아둔 거실이지만 볼 때마다 승현이 당했을 일이 생각나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당했던 일도 생생히 떠오른다.

빛나야 운이 좋아 빠져 나왔지만 승현에겐 그런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안 되겠어.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릴 순 없어.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아냐, 언니. 그럼 안 돼. 잘못하면 정치 싸움으로 번져. 내가…… 내가 사람을 불렀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이번에도 복실이 나서 그녀를 말렸다.

빛나가 정신이 없어 복실이 말한 정치 싸움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고 넘어가진 않았지만 곁에 있던 은지는 그 말에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기 대선 후보와 서울 시장이라.

만일 강민식이 더 큰 꿈을 가지고 있다면, 진짜 전쟁이 시작될 터였다.

그리고 정확한 증거 없이 몰아붙인다면, 자칫 강민식을 향한 마녀사냥이라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강민식에게 역공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절대 그리돼서는 안 될 일이었다.

때문에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강민식을 엮어 넣으려면 심증보다는 정확한 물증이 필요하니까.

“답답해 미치겠네. 왜 경찰에도 신고를 못 하게 하는데! 지금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이게 미룬다고 될 일이야?”

빛나가 소리쳤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거실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빛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이정과 은지, 엘리스도 심리적으로 무척이나 불안한 상태였다.

여기서 가장 이성적인 사람은 의외로 복실이다.

시종일관 차분한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가장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때 침울한 분위기를 깨고 현관에서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승현 이외에 도어록을 저렇듯 자연스럽게 열고 들어올 이가 없었기에 빛나는 일말의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러한 긴장감을 깨고 나타난 이는 난생처음 보는 남자였다.

승현만큼이나 한참을 꺾어봐야 할 만큼 큰 키에 강단 있는 몸매, 게다가 검은 점퍼와 검은 바지, 온통 검은색으로 무장한 몸과는 달리 유달리 하얀 피부가 눈에 쏙 들어와 박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한번 시선을 고정하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소름끼치게 잘생겼다.

그랬다. ‘소름끼치게’와 ‘잘생겼다’는 어떻게 보면 의미가 서로 상충되는 말이었으나 이 남자는 딱 그 표현이 어울렸다.

“누구……?”

빛나의 물음에 남자는 시선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낯선이가 집에 들어와 있는데도 빛나는 전혀 거부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집에 속해 있던 사람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오빠, 왔어?”

여기에 복실이 나서며 남자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러자 주방 테이블에서 이정이 뛰쳐나와 그를 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저…… 저 남자!”

이정은 이 남자를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이정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빛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그리고 타고난 이미지가 순식간에 그녀의 머릿속을 초토화 시켰다.

빛나 인생에 이런 남자가 있었던가?

잠시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지는 사이, 남자는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무미건조한 억양으로 인사를 건넨다.

“승주라고 합니다. 승현이 형.”

***

한편, 그 시각 철거 딱지가 붙어 깡그리 비워진 건물 밖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린 이는 잘빠진 슈트핏을 자랑하는 40대 남자였다.

그는 다른 사내들의 인사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곁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귀신처럼 따라 붙었다.

남자는 그를 보자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데리고 오는데 힘들었나 보군. 저 녀석이 보통은 아니었나 보지? 자네 얼굴에 그 정도 상처를 낸 걸 보면.”

“잔재주가 좀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습니다.”

“고생했어.”

“아닙니다. 그동안 진척 사항이 없어, 죄송했습니다.”

“자네라고 별수 있었겠나. 워낙 귀신같은 놈인데. 내가 알아보니 회사 인사 서류도 없더군. 하지만 이제 됐네. 이렇게 실물이 눈앞에 있으니…… 직접 물어보면 되겠군.”

헐벗은 공간 한가운데로 온 그는 의자에 결박당한 남자를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이제부턴 내 몫이야. 여기서부턴…… 내가 직접 처리하겠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눈동자, 심플한 무테안경 너머 그 눈은 세상만사를 모두 통달한 듯 굉장히 무료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셀러리맨같은 평범한 얼굴임에도 무척이나 섬뜩하게 느껴진다.

박 실장은 그러한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턱을 틀어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새끼, 인물 하나는 더럽게 훤하네.”

매력적인 아몬드형 눈매를 마주한 박 실장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다.

하지만 곧이어 박 실장은 다시 한 번 눈높이를 맞추며 그보다 더 은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하나만 묻자. 너…… 진짜 이름이 뭐냐?”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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