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61화 (61/94)

61. 악마와의 거래

2018.07.04.

“아, 내 팔자야. 나 기자 맞니? 젠장, 이러려고 그 어려운 언론고시 합격했나.”

이정은 빵 한 조각으로 저녁을 때우며 차에 앉아 투덜댔다.

며칠째 박충식의 변호사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던 그녀는 오늘도 여지없이 저녁을 위해 고급스러운 한정식 집에 들른 그를 따라 왔다.

물론 한정식은 그녀에게 그림의 떡이었지만 말이다.

들어간 지 벌써 두 시간째, 박충식의 변호사는 누군가를 만나 따뜻한 밥 한 끼를 하고 있을 것이다.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와 자신의 신세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떠올리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평소 그녀에게 전화를 잘 하지 않는 은지의 이름이 뜨는 걸 보며 이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보세요.”

[이정 씨, 난데!]

평소 새초롬한 은지와는 달리 오늘따라 한층 업이 된 그녀의 목소리가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왔다.

[있지! 있지! 왜 빛나 전화가 안 돼요? 나랑 여덟 시에 집에서 보기로 했는데?]

“글쎄요. 근데 지금 여덟 시 안 됐잖아요. 기다려봐요. 약속 하나는 철저히 잘 지키는 애니까. 근데 어제부터 은지 씨 좀 이상하네. 무슨 일 있어요?”

이정이 묻자 은지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숨이 넘어갈 정도로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그게…… 그게 말이지! 내가 완전 엄청난 사실을 하나 알아냈는데. 아무래도 빛나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을 해줘야 하는데 어제오늘 얼굴을 볼 수가 있어야 말이지. 오늘은 꼭 말해줘야 하는데…….]

어찌나 빠른지, 듣는 이정이 숨이 가쁠 정도였다.

“그래요? 무슨 일인데?”

[아, 진짜 말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있죠. 승현 씨 말이야…….]

은지가 국가 기밀이라도 털어 놓는 것마냥 숨을 죽이며 이야기 하려던 찰나,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박충식의 변호사를 보았다.

그 순간 이정은 다 씹지도 못한 빵을 꿀꺽 삼키며 은지의 말을 끊었다.

“미안, 은지 씨. 내가 나중에 들어야 할 것 같아.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어머, 안 돼! 안 돼! 나 정말 말하고…… 아악, 젠장!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숨이 넘어가는 은지의 전화를 끊고 이정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박충식의 변호사를 노려보았다.

“야…… 이게 며칠째냐. 이제 좀 그럴듯한, 뭐라도 던져주란 말이다. 더 이상 내 인내심 테스트하지 말고…….”

그런데 박충식의 변호사가 나온 후 간발의 차이를 두고 다른 남자가 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람마냥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이정은 보았다.

차에 오르는 남자에게 본능적으로 눈인사를 건네는 변호사의 모습을.

그래서 이정은 카메라 셔터를 사정없이 눌러대며 속삭이듯 외쳤다.

“잡았다!”

아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들어갈 때도 따로, 나올 때도 따로 나왔다.

분명 같이 식사를 한 사이임이 틀림없었으나 서로에 대한 친밀감 따윈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친밀감 대신 두 사람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그 무엇은, 바로 상하 관계다.

그것이 바로 50대 후반인 박충식의 변호사가 이제야 40대가 되었을 법한 젊은 남자에게 정중한 눈인사를 건넨 이유이리라!

이정은 그 남자가 출발하자마자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고 핸들을 꺾었다.

하지만 이번엔 박충식의 변호사가 아닌 처음 보는 남자의 뒤를 따랐다.

기자로서의 본능이었다.

말쑥한 정장에 안경을 쓴 남자, 언 듯 보면 특징 없는 평범한 샐러리맨 같은 스타일이지만 생김새와는 달리 슈트발이 아주 죽이는 남자였다.

나이에 비해 큰 키와 다부진 체격이 그 슈트발의 비밀이다.

그녀의 본능이 이 남자가 위험인물임을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냐, 오늘 끝을 보자.”

이정은 남자가 탄 고급 승용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야도 어두운데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은밀한 추격전을 벌이기 딱 좋게, 더 없이 싸늘하고 음산한 밤이었다.

***

한편 그 시각.

인천 국제공항에 밤비행기 한 대가 도착했다.

그곳에서 은밀히 내린 한 남자는 출국 게이트를 지나자마자 귀신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오자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검은 모자에 검은 점퍼를 입은 그는 내리는 비가 짜증스럽다는 듯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어둡고 칙칙한 하늘이었다.

하지만 짜증스러움이 드러나는 것도 잠시, 다시 포커페이스로 돌아온 그는 늘 자신의 차가 서 있는 옥외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검은 SUV에 도착한 그는 차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순간적으로 긴장한 그가 눈썹을 곤두세우며 돌아섰다.

하지만 상대방을 눈에 담는 순간, 새파랗게 곤두섰던 칼날이 무뎌졌다.

“형.”

승준이었다.

한두 번 해외 나갔다 온 것도 아니고, 이젠 한국과 미국을 제 집 드나들 듯 왔다 갔다 하는 그인지라 평소답지 않은 승준의 마중에 의아함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게다가 이렇게 비가 오는데 우산까지 챙기지 못하고 내려선 승준의 모습은 음침하다 못해 서늘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기운이다.

늘, 선한 기운으로 위장하고 있던 그가 이렇게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하지만 그에게 다가선 승준은 그 서늘한 기운과는 반대로 다정하게 운을 뗐다.

“승주야, 기억나냐? 승현이 어렸을 때…….”

승현의 어렸을 때 이야기가 나오자 승주는 그 의도를 알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승현이…… 사고를 친 모양이다.

아니면, 칠…… 예정이던가.

“그 녀석 말 더럽게 늦게 텄잖아. 네 살이 다 되서야 문장 구사력이 생길 정도로…….”

“어. 나는 걔, 바본 줄 알았어.”

“나도 그랬어.”

“그래도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지금은 제일 말 많잖아. 귀찮을 정도로.”

“그렇지. 그래…… 후후.”

승현을 떠올리면 그저 웃음이 나온다는 듯 승준은 조금 전과는 달리 미간을 부드럽게 풀며 그의 옆으로 섰다.

그러곤 내리는 비 때문에 유난히도 습해 보이는 공항 건물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연다.

“근데 걘 말이야. 말을 못 할 때도 제 의사 표현 하나는 정확히 했어. 그거 알아? 세 살 때인가? 너무 울어서 내가 엄마 몰래 허벅지를 꼬집은 적이 있거든.”

“말을 못하니 그 성질머리에 울기밖에 더 하겠나.”

“그러게. 근데 그땐 나도 어렸을 때라 몰랐지. 그냥 너무 울어대는 게 싫어서 꼬집었던 건데…… 세상에, 그 녀석이 고자질을 하더라. 말을 못 하니 손가락질로.”

“…….”

“엄마한테…… 많이 혼났다, 나.”

그때가 그립다는 듯 승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웬만해선 감정 표현에 인색한 승주마저도 그리움에 눈이 가늘어진다.

“차라리 말 못 할 때가 나았어. 그 녀석은, 그때부터 조짐이 보였거든.”

“그랬지. 툭하면 일렀으니까. 또 우리 성격에…… 승현이 무슨 일 당했다고 하면 가만히 못 있었잖아. 그때는 모자란 앤 줄 알았으니까. 안 그래도 모자란 애, 어디 가서 놀림당하나 하고.”

“그랬지.”

“기억나? 여덟 살 때인가? 밖에서 여자애한테 진탕 맞고 들어온 거. 그거…… 너한테 이르던데?”

“어. 그게, 복실이었어.”

“아…….”

“그래도 나한테 맞은 건 아버지한테 안 일러바치더라고. 저도 양심은 있었는지.”

“응. 그건 나한테 일렀어.”

그 말에 승주는 지긋이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나마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는데 그마저도 뒤틀린 기억이었다니.

“어쨌든…… 승주야.”

“응.”

“대기하고 있어. 승현이가…… 큰 판을 벌릴 것 같아.”

“…….”

“지금은 모자라기는커녕 넘치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우리 성격에, 그 녀석 혼자 사지로 내몰 순 없잖아?”

“…….”

“그냥 미리 알아두라고. 가만있다 날벼락 맞는 것 보다는 나을 테니.”

말을 마친 승준이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승주도 덩달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승현이, 어지간히도 큰 놈을 물 모양이다.

하지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넘치는(?) 동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니까.

***

“원장 수녀님이 이번 지역 사업 지원 건에 대해 기대가 많으시더라고. 그런데 거기에 내 입김이 좀 제대로 작용했거든. 그 말은 곧 그 결정권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 말이야.”

열 받은 빛나가 어금니를 꽉 물며 강석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설마, 그녀가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눈에서 불꽃이 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강석훈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더욱더 은밀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요즘…… 내 뒤를 파고 다닌다며?”

젠장, 제대로 이해한 모양이다.

“그거 그만두면…… 내가 그 지역 사업 지원 리스트에 확실히 올려줄 수 있는데…….”

눈앞의 강석훈은 아이들의 생존권을 빌미로 그녀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말종인지는 알았지만 정말 다시 한 번 눈앞의 인간이 소름 끼치게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감히…… 감히…… 어떻게 내 앞에서…….”

아이들을 빌미로 이런 협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뜨겁게 불붙은 심장이 곧 터질 것 같아 마지막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했다.

하지만 싸늘하게 굳어버린 그녀의 얼굴과 검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모든 걸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 세상에 법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또는 그녀가 법의 수호자만 아니었다면,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목을 제대로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 생각해봐. 서로 윈윈 하는 방법이잖아. 나는 과거 일 묻어 좋고, 당신은 애들 확실히 지원할 수 있어 좋고. 안 그래?”

빛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강석훈에게 ‘그딴 개 소리 집어치워!’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은밀히 제안하는 이 일이 보육원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정부 지원금도 줄었고 네가 준 돈으로는 한계가 있어. 그리고 너도 언제까지 애들 뒷바라지하며 평생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잖니.

-우리한텐, 지금…… 저 돈이 절실해. 언제 끊길 지 모르는 조바심 따위 내려놓고…… 정기적으로 나오는 돈이니까.

오늘 강석훈과 대면하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온 그녀를 붙들고 원장 수녀가 한 말이었다.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이성적인 충고다.

원장 수녀 말을 곱씹으며 험한 말을 입안으로 집어 삼키는 빛나에게 석훈은 거만하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나 보면 열 받지? 그러니까 밖에 나가서 시원한 바람이라도 맞으면서 차분하게 생각해. 생각할 시간을 줄게.”

퍽이나!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격이다.

빛나는 이를 갈며 싸늘한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왔다.

창문 너머로 아이들과 게임을 하고 있는 복실이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어두운 바깥 공기만큼이나 암울했다.

“이러려고 온 자리가 아닌데…….”

그랬다. 다시는 강석훈이 이곳에 발을 못 붙이게 만들어 놓기 위해 온 자리가 아닌가.

게다가 그녀에겐 그를 잡을 수 있을만한 비장의 무기도 있었고.

헌데, 그렇게 각오 하고 온 자리에서 그녀는 역공을 당한 셈이었다.

그것이 억울하고 속이 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큰마음을 먹고 만났던 박수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변호사님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어요. 그 인간…… 꼭 잡아주세요.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하지만 손발이 덜덜 떨려 힘을 줄 수가 없었다.

“하…… 진짜…… 빌어먹을 세상…….”

욕이라도 실컷 해주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의 세상이 이렇듯 나쁜 놈 편만 들어준단 말인가.

한 번쯤은,

정말 한 번쯤은 세상이 그들 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했지만 이마저도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그렇게 분노로 어찌할 줄 몰라 덜덜 떨고 있을 때 즈음, 차갑게 굳은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는 이가 있었다.

“빛나야…….”

바로 원장인 이해인 수녀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그녀는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거친 손으로 빛나의 고운 손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힘드니?”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에 빛나는 더욱 이를 악 물었다.

죽어도 눈물만은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말없이 이를 악 무는 모습에 이해인 수녀는 그녀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내가 괜한걸 물었구나. 힘들어도…… 곧 죽을 만큼 아파도…… 절대 네 입으로 힘들단 소리 안 할 앤데…….

그랬다. 빛나는 어렸을 때부터 독하기로 유명했다.

공부도 독기로 했고, 성공도 독기로 했다.

헌데 독기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세상이 와버렸다.

저렇듯 보잘것없는 놈에게 이렇듯 흔들리는 것을 보면.

“안에 있는 저 사람이 널 힘들게 하는 모양이구나.”

“수녀님…… 전 진짜…… 저 사람이 싫어요…….”

“…….”

“우리 애들 옆에 얼쩡거리는 것도 싫고, 애들 눈에 저 사람 그림자가 비치는 것도 싫어요. 근데……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네요. 이번에도…… 역시.”

굳이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울음을 삼키는 그녀의 목소리에 말보다 더 강한 이유가 들어 있었다.

이해인 수녀가 그것을 읽어냈다.

“내가…… 한 말 때문인 것 같구나.”

이유야 어쨌든, 이해인 수녀는 이렇듯 강석훈을 반대하는 이유가 그녀의 자존심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대면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한 이해인 수녀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한 말이…… 또 한 번 네 앞길을 막았나 보다.”

“…….”

“내가 경솔했어. 이번 일은 네게 선택권을 주마. 우리 저 돈 안 받아도 산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잖니. 조금 더 아끼면 되지. 네가 그렇게 진저리 낼 만큼 싫은 사람이 주는 돈이라면…… 그 돈을 받는 우리 애들도 떳떳할 수가 없으니…….”

“…….”

“나…… 저거, 안 받으련다.”

“수녀님…….”

“그러니, 너 알아서 해라. 그렇게 꼭꼭 참으면…… 병난다, 우리 빛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두 살 때부터 그녀를 키워온 이해인 수녀가 아닌가.

때문에 그녀의 숨소리만 들어도 빛나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빛나의 거친 숨소리에서 이해인 수녀가 읽어낸 건, 다름 아닌 경멸 그 이상의 ‘분노’였다.

그것을 쉬이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빛나를 절대적으로 믿는 한 사람이기도 했고.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괜찮다마다. 나는 우리 애들…… 깨끗한 돈으로 키우고 싶다. 말은 예쁘게 자라라,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 입바른 말만 하면서, 내가 검은돈으로 애들을 키우면 되겠니? 까짓거, 없어도 산다. 그러니 걱정 말고 너 하고 싶은대로 해.”

이해인 수녀는 그렇게 빛나를 다독이고 건물을 안으로 들어갔다.

직접 이해인 수녀 입으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홀가분해진 느낌이다.

게다가 그녀에겐 누구보다 든든한 세상이 있지 않은가.

-유빛나…… 봉인 해제.

-그 자식 잡으라고. 이제부터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고……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승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빛나는 여전히 그 테이블에 앉아 전화 통화를 하는 강석훈을 창문 너머로 싸늘히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는 그의 표정에 어제 먹은 저녁이 다 올라오려 했다.

빛나는 결심을 한 듯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한번 눈 감는 것으로 허용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이코패스들의 살인이 작은 동물에서 시작되어 점점 커지는 것처럼, 이 한 번의 타협이 강석훈을 진짜 큰 범죄자로 만들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녀 손으로 잡을 수 있다지만, 나중엔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그녀의 손으로, 저놈을 잡아야 했다.

강석훈은 충분히 잠재 능력을 가진 범죄자였기에.

다짐을 하고 들어가 그가 내민 타협안을 보란 듯 거절하려는데, 핸드폰이 울어댔다.

줄곧 강석훈과의 긴장감 때문에 은지의 전화를 피하던 빛나는 이번엔 받아들 생각으로 그것을 빼들었다.

그런데 은지가 아닌 이정이다.

빛나는 강석훈을 바라보던 창가에서 시선을 돌려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이정아, 곧 집에 들어가는데 집에서 이야기하자. 지금은 좀…….”

[안 돼. 지금 해야 돼.]

“내가 상황이 좀 그래서…….”

[누군지…… 알았어.]

순간 그녀는 이정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회부 기자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형사들보다 배짱이 두둑해진 이정이었다.

그런 이정이 핸드폰으로도 그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목소리를 떠는 일은 흔치 않았다.

때문에 빛나는 예감했다.

이정이 말하는 그 누군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 냈다고?”

더불어 되묻는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려 피부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박충식의 변호사가 오늘 한 남자를 만났거든. 내가 오늘…… 그 남자를 뒤쫓아 와봤는데…… 맙소사…….]

두려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모양이다.

이에 빛나도 한층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누구 사람인지 아니?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진짜.]

“누군……데?”

[서울시 시장…… 강…… 민식.]

순간, 빛나의 머릿속은 진공상태가 되었다.

눈앞이 까매지며 내쉬던 숨이 목구멍에 탁 걸려 버렸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느린 동작으로 눈을 한번 깜박이면 다시 그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름 돋는 목소리가 그녀를 무의식 세계에서 잔혹한 현실 세계로 되돌려 버리고 말았다.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았나 보지?”

빛나는 귓가를 울려오는 이정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서서히 고개를 돌려 강석훈을 바라보았다.

어둠속에서 이죽거리는 그의 모습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서자, 석훈은 위협적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근데 이거 어쩌나, 조금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말이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빛나가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석훈은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우며 그녀에게 서서히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 빛나의 얼굴 위로 음침한 그늘을 만들어낸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도록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들을 소름끼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가격이…… 많이 올랐어.”

“…….”

“자, 새로운 가격으로…… 우리…… 다시 거래를 시작해볼까?”

마치 그녀의 영혼을 탈탈 털어가려는 악마처럼.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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