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선과 악의 경계선
2018.07.01.
“붉은 눈의 용이라고?”
줄곧 얌전히 승현의 설명을 듣던 승준이 ‘붉은 눈의 용’이라는 말에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응. 흔하디 흔한 게 용 문신이라는 건 아는데, 눈이 핏빛이래. 찾을 수 있을까, 형?”
승현의 물음에 승준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고 물 한잔을 마셨다.
그 반응에 승현도 눈썹이 곤두섰다.
“왜? 아는 문신이야?”
그는 제 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겉은 이토록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라지만 그 누구보다 강인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때문에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도 않는 승준이었다.
그런데, 그런 승준이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이 일은 너 혼자 풀면 안 되겠다.”
“왜, 뭐 하는 놈들인데?”
“사실, 아는 건 아니고 들어 본 적은 있어. 워낙 비밀리에 움직이는 조직이라 나도 본 적이 없거든.”
“조직? 그럼…… 조폭들이란 말이야?”
승현의 결론에 승준은 고개를 내저으며 한층 진지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조폭이 아냐.”
“…….”
“조폭보다 훨씬 더 지능적이고, 훨씬 더 잔인한…… 악질 중의 악질이라고.”
그 말에 승현은 입맛이 싹 달아 난 듯 들고 있던 젓가락을 테이블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헛, 이거…… 점점 재미있어지네.”
“그 문신의 핵심은 용이 아니라 붉은 눈이야. 사람들이 흔히들 문신에서 가장 먼저 보는 게 검은 용이라 처음엔 ‘흑룡파’라고 불렸어. 하지만 포인트는 붉은 눈이란 말이지. 네가 말한 대로 그냥 붉은 빛이 아닌 핏빛.”
“…….”
“그게 피를 상징하는 거래.”
“그거, 조폭 아냐?”
“말했잖아. 더 악질이라고. 일반 조직폭력배랑은 좀 달라. 살인으로 신고식 하고, 사업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랑하듯 제 조직을 노출하는 무식한 조직폭력배가 아니라 지능형 청부 조직이야.”
“지능형…… 청부 조직?”
“한 번도 자신들을 노출한 적이 없거든. 소문은 있지만 증거가 없어 잡힌 적도 없고. 그래서 경찰에서도 주시는 하고 있지만 어디서부터 파야 할지 몰라 헤매는 중이고.”
“근데 그게 청부 조직이라고?”
“시작은 청부야. 은밀한 뒷거래를 위해 전형적으로 살인이며 잡다한 청부를 받았던 조직이 덩치가 커지면서 진짜 조직화가 된 거지.”
“말도 안 돼. 그런데, 아직까지 꼬리가 안 잡혔다고?”
“응. 감만 잡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그 실체가 드러난 적이 없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놈들이야. 잡는다고 해도 그걸로 끝. 머리를 잡지 못하면…… 꼬리를 끊고 도망가는 도마뱀과 같아.”
“점…… 조직이라…….”
승현의 눈썹 끝이 구겨졌다.
지금까지는 그저 정치인을 위해 움직이는 양아치 정도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생각보다 거대했다.
“지능형…… 조폭. 흔 잡을 곳 없이 세련되고, 깔끔하지.”
“테러리스트들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네. 그게 가능해?”
승현의 물음에 승준은 더욱 은밀한 목소리로 확실하게 대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정치라면, 가능하지.”
그 말에 승현의 아몬드형 눈매에 금세 날이 섰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과 너무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필연처럼 느껴질 만큼, 아주 정확히.
“이제…… 이야기가 되네. 나도…… 뱀 같은 정치인 하나를 찾고 있는 중이거든. 근데 청부를 받아 한 일이 조직화 된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정치, 그게 이유야. 말 그대로 무작위로 돈만 오가면 은밀히 거래되었던 청부들이 한 사람에게로 집결이 된 거지. 누군가에게…… 소속이 된 거야.”
“그게…… 정치인이라…….”
“그렇게 추측만 하고 있을 뿐, 증거는 없어. 단,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머리가 좋아. 숨죽여 기다릴 줄도 알고, 자기 자신을 철저히 위장할 줄도 알지.”
그 순간, 우연치 않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인물 하나.
빛나가 준 힌트도 있었지만 승준이 말한 그 이미지에 불현듯 떠오른 강민식의 웃는 얼굴은 눈앞에 진수성찬을 두고도 입맛이 싹 달아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승현은 긴장감으로 인해 바짝 메마른 입술을 물로 적시며 승준에게 은밀히 입을 열었다.
“형, 만일…… 내가 그 증거 가져다주면? 그럼…… 형이 그 자식 잡아넣을 수 있어?”
그 말에 승준의 쳐진 눈매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위험한 놈이야.”
안다.
그래서 더 잡아야 했다.
승현은 자신의 슈트 재킷을 챙겨 입으며 승준을 내려다보고 입을 열었다.
그것도 아주 조용하고, 단호하게.
“형, 그 위험한 놈…… 내가 잡아야 할 것 같아.”
이 새끼, 잡고 말리라.
빛나와 자신을 위협하는 그림자가 생각보다 더 큰놈이란 걸 알았으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런 승현을 승준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제 동생의 성질머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말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충고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청부 조직이야.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마.”
“…….”
“승주, 내일 저녁에 들어온다. 연락해보든가. 그건…… 그 녀석 전문이니까.”
“알았어. 고마워.”
승현이 레스토랑을 벗어났다.
하지만 승준은 아직 벗어날 생각이 없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
후덜덜.
손발이 다 떨려온다.
은지의 목적은 김병훈 검사였지만, 승현과 승준을 보는 순간 마법에 걸린 듯 레스토랑까지 그들을 따라왔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대화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은 멈추지 않았다.
위승준, 위승현 형제라니!
이거야말로 진짜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정치적인 문제로도 번질 수 있다.
제아무리 뼈대 굵은 법조계 집안이라지만 그러한 은지의 집안조차도 순식간에 풍비박산 날 수 있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지는 발을 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렸으니까.
“워…… 우리 빛나…… 빛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승현이 자리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곤, 제 모습이 들킬까 봐 은지는 바짝 자세를 낮추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어서 이 소식을 빛나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신호음만 떨어질 뿐 빛나는 전화를 받지 않아 은지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심장 마비가 올 지경인데, 은지는 핸드폰을 끊고 다시 전화를 하려다 누군가 자신의 핸드폰을 낚아채는 모습에 기겁해 소리를 내질렀다.
“옴-마야!”
놀라서 커다랗게 확장된 그녀의 동공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 테이블 너머에 앉아 있던 승준의 훤칠한 모습이 보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따뜻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가까이서 보니 그 분위기가 더욱 오묘하다.
헌데, 그 오묘한 분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건 왜일까.
“저…… 저기…… 제가…….”
뭐라고 해야 할까.
도대체 뭐라고 변명을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저 다갈색 눈동자에서 당장 빠져나올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당황한 은지를 보고 승준은 부드럽게 물어왔다.
“기자인가?”
놀란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다.
헌데 승준은 의외로 그녀의 핸드폰을 다시 손에 쥐여주며 싱긋 웃어 보인다.
눈이 반달로 휘며 보기 좋은 치아가 적당히 드러난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주하지 않았다면, 첫눈에 반했을 법한.
“그럼 됐고. 조심해서 가요.”
그녀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 또한 어찌나 다정한지, 감동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은지는 그렇게 승준이 시야를 벗어난 후에도 얼음이 된 것처럼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
박수정과의 만남은 생각 외로 이야기가 길어졌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시작된 만남은 오후 다섯 시가 지나서야 끝이 났으니까.
하지만 카페를 나온 빛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박수정이 마음을 바꿔 다시 강석훈과 맞서기로 한 것이다.
첫 출발이 좋았다.
이렇게 한 사람이 나서기 시작하면 도미노 현상처럼 나머지 피해자들도 서로 나서겠다 나올 것이다.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 세 번째는 쉬운 법이니까.
빛나는 차에 올라타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은지로부터 다섯 통의 전화가 와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중요한 말이 있는지 은지는 어제부터 이렇게 계속 전화를 해댔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는 빛나가 늦게 퇴근해 얼굴을 못 보고 오늘은 은지가 바빠 얼굴을 못 봤던 탓이다.
그래서 빛나는 전화를 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은지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야, 얼굴 좀 보자.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무슨 말인데 어제부터 계속 할 말이 있대? 지금 하면 안 돼?”
[안 돼. 이건 얼굴 보고 해야 돼. 너랑 나…… 이렇게 둘이서만. 은밀히…….]
“알았어. 그럼 저녁에 보자. 내가 집으로 넘어갈게. 너 외근 나갔다가 사무실 안 들어오고 바로 퇴근할 거잖아, 그치?”
[응. 여덟 시 정도면 될 것 같아.]
“알았어. 시간 맞춰 갈게.”
[근데 빛나야…….]
“왜.”
[내가 좀 걱정이 돼서 그러는데…… 오기 전에 청심환 하나 먹어주겠니?]
“뭐?”
[이왕 너 먹을 거면, 내 것도 하나 챙겨다 주면 고맙고. 약국 갈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럼 저녁에 보자.]
전화는 끊겨 있었다.
불안한 듯 떨리지만 어딘지 모르게 은지만의 묘한 설렘을 느낄 수 있는 목소리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은지가, 뭔가 하나를, 제대로 물었나?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이내 보육원에서 걸려온 한 통화의 전화로 인해 그리 오래 가질 못했다.
“여보세요?”
[응, 빛나야. 난데…… 네가 저번에 당부했던 게 생각나서…….]
“당부요?”
[응. 그 사람 오면, 꼭 연락 달라고 하던 당부.]
그 말에 평온했던 빛나의 눈썹이 대번에 곤두섰다.
이정숙 수녀가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석훈이다.
그 인간이 다시 보육원을 다시 찾아온 것이다.
만일을 대비해 이정숙 수녀에게 그가 다시 찾아오면 연락을 달라고는 했지만 저번에 그런 일을 겪고도 또 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제가 지금 당장 갈게요.”
전화를 끊은 빛나는 손발이 덜덜 떨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운전대를 쥔 손에 땀이 났다.
“미쳤어. 미친놈이…… 틀림없다고…….”
빛나는 중얼거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곤 먼저 승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납치 사건이 있은 후로 그녀는 어디를 가던 그에게 먼저 자신의 위치를 보고하는 습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나야. 나 오늘 사무실 못 들어갈 것 같아. 보육원에 잠깐 가봐야겠어.”
[거긴 왜, 갑자기?]
“강석훈이 왔대.”
[그럼 혼자는 안 돼. 복실이 데려가. 복실이가 집에서 지금 출발하면 너랑 비슷한 시간에 도착할 거야.]
“알았어. 연락해볼게.”
[나도 시간 되면 바로 갈게.]
“아냐. 안 그래도 일 많은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이번에 내가 가서 끝내고 올 거야. 걱정 마. 복실이 있잖아.”
승현을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은 후 빛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을 하는 그녀의 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놈이 아이들과 함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늘은 기어이 강석훈과 담판을 짓고 말리라.
박수정이 마음을 바꾼 이상,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으니까.
***
-머리가 좋아. 숨죽여 기다릴 줄도 알고, 자기 자신을 철저히 위장할 줄도 알지.
어제 들은 승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아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강민식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틀 전 강민식의 방문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다. 이놈은 그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찾아왔다.
“어디서 그렇게 구린내가 나나 했더니…….”
감히, 나를 농락했겠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놈을 잡으려면 증거가 필요했다.
도대체 그 증거는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일을 전부 마치고 서둘러 퇴근 준비를 했다.
저녁 여섯 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고 승현은 보육원으로 향했다.
운전을 하는 도중 빛나에게 복실과 보육원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도 받았다.
더불어 복실이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까지.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정말 강민식이 그가 생각하는 범인이 맞다면 강석훈 또한 쉬이 지나칠 수 없는 위험인물이었으므로.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근육통까지 찾아왔다.
결국 승현은 보육원으로 가던 운전대를 살짝 틀어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가는 길에 있는 집이니 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진통제도 한 알 주워 먹을까 해서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타기까지, 그는 집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꿈에도 모른 채였다.
“하…… 강민식, 강석훈…….”
이 갈리는 그 이름들을 반복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답답한 넥타이를 잡아당겨 숨통을 텄다.
어두운 집에 들어오자 자동 센서가 불을 밝힌다.
신발을 벗으려는데 그 옆에 낯선 신발 자국 하나가 보였다.
물론 신발은 없었지만 먼지와 함께 선명히 남은 신발 자국에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누가?
-승주 내일 저녁에 들어온다. 연락해보든가. 그건…… 그 녀석 전문이니까.
혹시 승주가 들어왔나?
하지만 그렇다면 당연히 신발 자국뿐 아니라 신발도 남아 있어야 옳았다.
승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신발을 신고 조심스레 거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긴장한 덕분에 그의 훤칠한 키와 딱 벌어진 체형이 더욱 위협적인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거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보았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너…… 이 새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승현의 목소리를 듣고도 남자는 놀라지 않는 듯 서서히 몸을 일으켜 그를 돌아보았다.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 온통 검은색으로 위장한 바로 그 남자였다.
선인지, 악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은 눈동자.
어디서든 스칠 수 있을 만큼 흔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독특한 친숙함 때문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눈매이기도 했다.
그런 남자가 그를 찾아왔다.
빛나가 아닌 그에게.
드디어 적이 미끼를 물기 시작한 것이리라!
승현은 긴장감 넘치는 주먹을 꼭 틀어쥐며 서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현관의 센서등이 꺼진 거실은 암막 커튼으로 인해 시야가 어두운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느린듯하면서 날이 선 승현의 움직임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눈매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싸울 의사가 없는 듯 축 늘어진 두 손을 올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단 말이다.
결국 승현은 먼저 놈을 잡기로 결심했다.
죽기 살기로 이 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이 놈만이 그가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으니까.
그렇게 뻗은 주먹이 남자의 턱에 제대로 꽂혔다.
그러자 남자는 잠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더니 드디어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빨랐다.
그리고 정확했다.
덕분에 승현은 남자에게 턱을 고스란히 내주고 말았다.
입안에서 씁쓸한 피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남자의 주먹이 제대로 타격을 준 모양이다.
하지만 한 대 맞은 승현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대번에 그 빛을 달리했다.
입가에 묻어나는 피를 닦아낸 그는 팽팽한 긴장감속에 남자를 바라보며 짜증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너 지금…… 내…… 얼굴 쳤냐?”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진심으로 답을 원하는 것일까.
순간 남자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얼굴 한번 맞았다고 저토록 짜증을 내는 이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이씨…… 이게 미쳤나. 우리 작은 형도 얼굴은 웬만하면 안 때리는데!”
조금 전 그 위협적인 움직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의 눈에 살기가 번뜩 거렸다.
“너 오늘 잘 걸렸다. 집에 갈 생각 마라. 내 얼굴 때리고 집에 제대로 걸어간 놈은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으니!”
아차하는 순간 승현의 움직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순식간에 두 남자가 서로 엉켜 시야로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엎치락뒤치락 했다.
서로 주먹이 오가고 작은 비명이 오갔지만 신체적인 조건이 탁월한 승현이 결국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물론 얼굴 한 대 맞고 광분한 지랄 맞은 성격도 한 몫을 하긴 했지만.
그는 남자의 몸에 올라타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남자도 벗어나기 위해 승현의 팔을 움켜쥐는 과정에서 장갑을 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손목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그리고 승현은 보았다.
남자의 손목을 타고 오르는 붉은 눈의 용을.
“너…… 아주, 딱 걸렸어!”
드디어 잡았다!
승현은 저도 모르게 남자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섬뜩한지 누가 선이고 악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이 새끼……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서서히 손을 뻗어 남자의 모자를 벗기고, 드디어 마스크도 벗겨냈다.
하지만 그 순간, 승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 넌?”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어둡고 음침한 색이 다 떨어져 나가자 선인지 악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던 남자의 눈동자는 그 색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승현이 기억하는 남자는 선(善)이었다.
충격이 스치는 그에게 남자는 선하디 선한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위…… 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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