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나, 지금 뭘 본 거니.
2018.06.27.
아침부터 법원에 들러 이제야 들어온 빛나는 붐비는 엘리베이터를 제일 마지막으로 올라탔다.
그런데 저만치에서 엘리스와 함께 걸어오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승현을 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멀리에서 그를 한눈에 알아보듯,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껴 있어도 그 역시 한눈에 그녀를 알아본 듯싶었다.
물론 저쪽에서 VIP 전용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다 갑자기 돌아서 버린 승현을 엘리스가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뒤늦게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그의 곁에 있는 빛나를 보고서야 엘리스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보였다.
붐비는 엘리베이터 안이라 두 사람의 몸이 가까이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사람과도 몸이 부딪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승현이 긴팔을 뻗어 뒷사람과 빛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그녀에겐 여유분의 공간이 있었다.
보는 눈이 많아 서로에게 편안하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만 알아차릴 수 있는 작은 배려, 그리고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의미심장한 서로의 눈빛에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답답한 엘리베이터 안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눈앞에 승현의 가슴이 보였다.
슈트 단추를 잠그고 있지 않아 셔츠 밑으로 탄탄한 가슴 근육이 고스란히 비쳐진다.
밤마다 안기는 가슴이지만 볼 때마다 그 설레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나갔다.
엘리베이터 내릴 차례가 되자 빛나는 아쉬움에 돌아서며 슬쩍 그의 허리에 손을 뻗었다 거둬들였다.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은밀하고도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며 그를 향해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웃음에 그의 입술도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아, 진짜 돌겠다.
저 여자가 내 여자라 말하고 싶어 죽겠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이 공개 연애가 원칙이던 그에게 너무 많은 변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상황을 어서 정리를 해야겠다.
각오를 다지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엘리스가 곁으로 따라 붙으며 물어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일은 무슨 일. 그냥…… 욕구 불만이야.”
그렇다. 욕구 불만.
이혼한 부부처럼 각방 쓰는 건 끝이 났지만, 그녀를 제 여자라 부르지 못하는 욕구 불만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엘리스는 그 욕구불만이란 단어를 다른 뜻으로 해석했다.
“아니, 집에서 그렇게 보고 그것도 모자라 회사에서도 쪼르르 쫓아가 보면서 그것도 못 참으세요? 좀 전엔 안타까워서 어떻게 헤어졌대요?”
“그래서 나도 따라 내릴 뻔했어.”
“선녀와 나무꾼이 따로 없네.”
“견우와 직녀겠지.”
아옷, 저거! 상사만 아니면, 그냥!
엘리스는 불편한 심기로 인해 퉁퉁 불어터진 승현의 뒤통수를 매섭게 노려보는 것으로 자신의 화를 달래며 복식호흡을 했다.
후아, 후아!
요즘 들어 승현으로 인해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올랐다 내려가는 혈압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가 찾아낸 방법이다.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엘리스를 뒤로한 채 사무실로 들어온 승현은 오늘 오전 승준으로부터 받아온 USB를 그의 노트북에 꽂았다.
저장된 파일을 열자 수백 개의 사진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뭐야, 뭐가 이렇게 많아?”
이걸 하루 안에 훑어 볼 수 있을까.
벌써부터 눈이 아파올 지경이다.
승현은 승준에게 전화를 시도했다.
“여보세요?”
[파일 열어봤어?]
“응. 근데 뭐가 이렇게 많아?”
[그럴 줄 모르고 달라 한 거야? 용문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문신이라고.]
“아, 머리야.”
[그래도 봐야지. 1분 1초라도 빨리 찾아내서 끝내버리자고. 혼자 움직이지 말고 나한테 이야기해. 그런 놈들과 개인적으로 엮이는 건 자살 행위니까.]
평소보다 더 조용하고 차분한 승준의 목소리가 귓가를 의미심장하게 울려왔다.
그 순간 승현은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근데, 형. 왜…… 나 안 말려?”
그랬다. 평소 여자문제라면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충고하는 승준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유독 그런 승준이 더 재촉하고 몰아붙인다.
도대체 왜?
잠시 후, 그 의문이 풀렸다.
핸드폰 저편으로 아주 짤막한 이유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처음이었어. 네가 여잘…… ‘내 여자’라고 표현하는 거.]
“…….”
[그럼 지켜야지. 다른 이유 필요 있어?]
승준이 맞았다.
다른 이유 따윈 필요 없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다음부터, 빛나는 그가 지켜야 할 그의 여자였으니까.
“눈알이 빠져도 오늘 안에 다 봐야겠군.”
승현은 전화를 끊고 작정한 듯 컴퓨터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러곤 한 장 한 장 화면을 넘겨가며 세상에 있을 법한 별의별 용 문신을 다 보기 시작했다.
기필코 그놈을 찾아 이 상황을 어서 끝내리라, 다짐에 또 다짐을 거듭하며.
***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콩밥 먹고 있는 5인을 비롯해 김병훈 검사 주변까지 탈탈 털어봐도 정치하는 놈이라곤 딱…… 이 사람뿐이란 말이지.”
빛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마 전 은지가 작성한 인맥지도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정확히 짚어냈다.
강민식.
모든 의심은 그 세 글자 이름으로 집결되었다.
그러나, 증거가 없다.
게다가 그나마 그가 유력 용의자로 이름을 올린 것도 김병훈 검사와의 인맥 때문이지, 따로 놓고 보면 성품으로 보나 스타일로 보나 강민식은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모든 건 김병훈 검사의 인맥으로 인한 심증뿐, 물질적 증거 없이 한창 상종가를 때리고 있는 강민식을 건드렸다간 이정의 걱정대로 진짜 사회적 생매장을 당할 수도 있었다.
증거를…… 잡아야 한다.
“설마…… 탈탈 털어 먼지 한 점 안 나왔다며.”
은지가 정색을 하자 빛나는 더욱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더 의심이 되는 거야. 탈탈 털어 먼지 한 점 안 나오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그만큼 숨기는 데 능한 사람이란 이야기지.”
빛나는 사진에서조차 사람 좋아 보이는 강민식의 웃는 인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은지야, 우리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 박충식이 움직이지 않는 한, 우리가 가진 자료로는 강민식이 전부야.”
“사태 심각성을 모르겠어?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이야.”
“어차피 이 사건 자체가 우리가 건드려서는 안 될 사건이었어. 각오하고 뛰어든 거잖아.”
“참…… 유빛나, 요새 삶과 죽음 사이를 몇 번 오가더니 배짱만 좋아졌네.”
은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언제 어디서 덮칠지 모르는 칼날에 조바심이 나면서도, 넘치는 펌프질로 인해 심장이 뜨거워졌다.
은지는 이 느낌, 이 감정을 놓칠 수가 없었다.
“아 정말. 너랑 있으면 나도 이상해지는 것 같아. 겁대가리가 없어진단 말이지.”
은지의 말에 빛나는 싱긋 웃었다.
앙숙이었던 두 사람, 이렇게 잘 맞을 줄 누가 알았겠나.
너무 비슷해 서로를 욕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럼 나는 김병훈 검사랑 강민식 관계를 더 파볼게. 만일 강민식이 진짜 우리가 찾는 그 사람이라면, 김병훈 검사도 깨끗하진 않을 테니까.”
“좋아. 강민식이 제 몸에 묻은 먼지는 털어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 몸에 묻은 먼지까지 신경 쓰지는 못했을 거야. 우린…… 그걸 찾으면 돼.”
“그래도 몸 사리고 있어. 너무 여기저기 들 쑤시고 다니지 말고. 어제 일도 있으니 오늘은 승현씨 시간 안 맞으면 복실이 불러. 나는 좀 늦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은지가 일어나 사무실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핸드폰이 울려왔다.
“네, 유빛나 변호사입니다.”
[저…… 예요, 변호사님. 저번 그 건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시간…… 되세요?]
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잔뜩 숨을 죽인 듯한 박수정의 것이었다.
***
돌아버리겠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디자인의 용문신이 있는지 정말 처음 알았다.
물론 그중에는 애들 장난처럼 실지렁이 같은 용도 있었지만, 빛나의 설명처럼 생생히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붉은 눈의 용은 찾을 수가 없었다.
두 시간째 쉴 새 없이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본 승현은 그야말로 눈알이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악! 눈이야!”
결국 책상 앞에 엎드렸다.
눈의 피로를 풀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에서 시작된 시큰한 통증이 전신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마치, 독이 퍼지듯 그렇게.
“아, 이 많은 용문신중에 왜 그 놈만 없는 거야? 빨간 눈이라고? 레드 아이? 안구 건조증이야? 왜 눈은 빨갛고 지랄이야?”
괜히 모든게 원망스러워졌다.
특징 있는 문신으로 인해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그의 부드러운 베이비 펌에 와 닿았다.
살살 어르고 간질이는 폼이 마치 강아지를 쓰다듬듯 했다.
이 시간에 그의 사무실에 들어올 사람이 없는지라 승현은 당연히 엘리스라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졸린 듯 느리지만 선이 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임자 있는 몸이다. 그러니 만지지 마라.”
그러자 상대방도 다정하지만 확실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알아. 그 임자가 바로 나니까.”
순간 승현은 피곤한 눈꺼풀을 느리게 밀어 올렸다.
머리를 만지고 있는 사람이 그녀라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좋아…….”
살살거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주는 느낌이 너무 행복했다.
이대로 책상 앞에 엎드려 일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많이 피곤했나 봐. 이렇게 엎드려 있는 거 처음 봐.”
“피곤…… 했었지.”
그랬다.
피곤했었다.
예민하다, 악몽 꿀 것 같다던 이를 달래 곤히 재우고 그 후로 꼬박 밤을 새워버린 그였으니까.
“나 때문에 어제 잠 설쳤지? 그러게 나 따로 잔다니깐. 내가 예민해지면 자꾸 뒤척여.”
풋.
유빛나, 진심으로 하는 소리니?
그렇게 시체처럼 잘 자놓고?
심지어, 아침에 못 일어나 깨우게 만든 게 누군데?
“나, 웃으라고 하는 소리지?”
“아닌데? 진심인데?”
말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승현은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정해야만 했다.
“왜…… 네가 복실이랑 그렇게 죽이 잘 맞는지 이제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이토록 무사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놈의 안구 건조증에 걸린 레드아이 용을 찾느라 시달렸던 눈이 절로 안구정화가 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 이젠 살겠다.”
믿을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이런 만족감을 줄 수가 있을까.
“쨘! 오늘은 내가 점심 사왔지. 우리 같이 먹고 하자.”
빛나가 포장이 된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김 비서가…….”
“김 비서한테는 내가 미리 말해놨어. 오늘은 네 점심 신경 쓰지 말라고.”
“아, 그래?”
그렇게 그녀가 테이블에 풀어 놓은 것은 얼마 전부터 노래를 불렀던 삼계탕이다.
승현은 그것을 보자 대번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어이, 이걸 먹이겠다고? 유빛나…… 각오는 하고 있나?”
“헛, 무슨 각오? 그 머릿속엔 음흉한 생각이 하루도 마를 날이 없지?”
“왜, 내 에너지 원천인데.”
그 말에 빛나는 밉지 않다는 듯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러면서 그가 먹을 삼계탕의 뼈를 일일이 골라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마치 일곱 살 어린 아이를 돌보는 엄마처럼.
“뜨거운 거 못 먹잖아. 이렇게 살 바르면 좀 더 빨리 식어.”
그렇게 그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이를 넘어,
“넌 생수 못 마시잖아. 김 비서한테 티라도 한 잔 가져오라고 해야겠다.”
자신보다 상대방이 더 익숙해져버렸다.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머문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에 없을 마음의 평안도 얻는다.
그래서 점점 닥쳐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강석훈이 사건에 좀 진척이 있을 것 같아. 피해자가 연락이 왔거든. 내일 만나보려고.”
“그래? 나도 그 문신에 대해 좀 알아보고 있어. 조만간 답 나올 거야.”
“참, 있지. 넌 강민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순간 승현은 들고 있던 수저를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울 시장 강민식? 그건 왜?”
“아, 그냥. 네가 보기에 그 사람 이미지가 어떤가 싶어서. 사실…… 그 다섯 사람을 포함한 주변인을 전부 둘러봐도 이렇다 할 실마리가 없었거든. 하지만 KMK 사건에 대해 검찰에 외압이 작용했다는 전제하에 찾아보자면 주변에 강민식밖에 없더라고.”
“외압이 작용했다는 증거는 있고?”
“아니, 그것도 장담을 할 수 없어. 검찰 자료는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하거든.”
“빛나야, 다른 건 몰라도 정치하는 놈들은 심적인 증거만으론 그 이름을 거론하기도 힘들어.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가 있다고.”
“알아. 그래서 아직은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은지 빼곤.”
“뭐, 그래도 강민식에 대한 내 의견을 듣고 싶다면…….”
승현은 어제 보았던 강민식을 떠올려보았다.
그러곤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맺는다.
“그냥……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
고집스럽게 내뱉은 그 말에 빛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위승현다운 평가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제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조금 더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 앞으로는 낯선 사람 전화도 안 받았음 좋겠어.”
“응? 어떻게 그래? 누구 전화인 줄 알고?”
“그럼 받더라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마. 그리고 사람 많은 곳으로만 다니고. 만나려면 주로 공공장소를 이용해. 주차장도 이왕이면 길거리 주차 하고, 안 되더라도 CCTV가 설치된 주차장 사용하는 거 잊지 마. 계단 안 되고, 무조건 엘리베이터 이용해. 안 타고 1층이면 더 좋고.”
“나보다 잔소리 더 심함.”
“그래서 싫다고?”
“아니, 그래서 행복하다고.”
빛나가 웃자 행복감에 물든 그 큰 눈이 반달로 휘었다.
그러자 승현은 그 모습을 눈이 부시다는 듯 바라보며 한 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하나 더. 아무한테나 그렇게 웃어주지 마라. 이왕이면 안 웃고 화내면 더 좋고.”
“뭐라고?”
그 황당한 요구에 결국 그녀의 웃음보가 터졌다.
작게 소리 내서 웃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 흔들림에 찰랑이는 머릿결이 얼마나 예쁜지,
그녀는 알까…….
“나, 진지하다. 웃지 말랬다.”
“사람이 안 웃고 어떻게 살아! 말이 돼?”
“그래도 이왕이면 심술궂게 하고 다니라고.”
“갑자기 왜 그래?”
“찌질한 놈들 가슴에 불이나 싸지를까 봐 그래!”
어린애 같은 투정에 한번 터진 그녀의 웃음은 끝이 없었다.
죽을 뻔하기도 하고, 납치도 당할 뻔한 요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알았어. 알았어. 나 화내고 다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귀여운 투정 때문에 입에 걸린 웃음은 가시질 않는다.
“지금도 웃잖아!”
“봐, 됐지? 이렇게!”
빛나가 눈에 잔뜩 힘을 주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입가에 맺힌 웃음기까지 거둬들이지 못했다.
결국 승현의 혈압이 어여쁘게 폭발해주셨다.
“아악! 진짜! 그래도 입은 웃고 있잖아! 짜증나게!”
그랬다. 제아무리 화가 난 표정으로 얼굴을 굳혀도 그녀의 입매는 지금 빛나가 느끼는 감정을 아주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나.
좋아 죽겠는 것을.
“하하핫!”
“웃지 말라고-오!”
그깟 위협 따윈 그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어 버렸다.
서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이 일을 끝내는 것뿐이었으므로.
***
그날 저녁.
결국 승현은 다시 검찰청으로 들어갔다.
조급함에 문신을 바라보던 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시간대가 잘 맞아 검찰청 로비에서 승준을 만나볼 수가 있었다.
승준은 독립한 이래 얼굴도 잘 못 보던 동생이 오늘 하루만 두 번이나 찾아온 터라 조금 의아했다.
“뭐야, 벌써 찾았어?”
“아니. 눈이 너무 아파. 뭐, 인내심 갖고 보면 찾아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확실히 이미지 안에 있다는 보장도 없고 해서. 혹시나…… 형이 내 설명을 들으면 범위를 좀 좁힐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럼 이야기나 좀 들어보자. 저녁은 먹었니?”
“아니. 아직.”
“따라와. 간단하게 저녁이나 하면서 이야기 하자. 오늘 야근이라 저녁 미리 먹어두려던 참이거든.”
승현과 승준이 나란히 검찰청을 나왔다.
그 훈훈한 비주얼을 한자리에서 보기란 흔치 않은지라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쏠렸다.
그런데 그 시선들 중 유독 호기심 어린 시선이 하나 있었다.
바로, 김병훈 검사의 뒤를 집요하게 쫓고 있던 은지였다.
할아버지 때부터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던 알짜배기 법조계 집안인 은지가 승준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 그런 승준이 승현과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내려오는 모습은 당연히 그녀의 흥미를 끌 수밖에.
“어떻게 승현 씨가…….”
놀라 중얼거리던 그녀는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위승준…… 위승현…….”
끝자리 한자만 틀린 이름.
6살 유치원생이라도 알겠다.
이쯤 되자 은지의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벌어진 입에서 튀어나온 감탄사는 옵션이다.
“맙소사…… 나 지금 뭘…… 본 거니.”
그야말로, 충격의 쓰나미였다.
하지만 여기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쫓는 한 쌍의 눈동자가 또 있었으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블랙 컬러로 무장한 남자였다.
심지어는 마스크 때문에 얼굴도 알아볼 수가 없는.
남자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발길을 돌리려다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어딘가?]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분한 듯하지만 냉랭하기 그지없는 누군가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진척이…….”
[아, 됐네.]
“네?”
분명 마담M에 대한 내용을 독촉하기 위한 전화라 생각했다.
그답지 않게 이번엔 너무 많은 시간을 끌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방은 그따위 것엔 흥미가 떨어진 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됐다고. 그 녀석이 누군지, 어떤 놈인지…… 이젠 필요 없게 되었단 말일세.]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 내 앞으로 데려오게나.]
순간 남자는 눈을 감아버렸다.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오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오늘이 될 줄은 몰랐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번처럼 실패는 없어야 할 거야. 자신 없다면…….]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이틀 주지.]
전화는 끊겨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쉽사리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힘없이 핸드폰을 떨구었다.
흔들리는 그의 시선에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가득 들어찼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