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인간 수면제
2018.06.24.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박 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석훈은 여전히 골프 레일 퍼딩 매트 위에 있는 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였다.
고난이도 집중력을 발휘해 공을 홀에 넣고 나서야 제 할 일이 끝난 듯 박 실장을 돌아보았다.
“왔어?”
“왜 부르셨습니까.”
다소 딱딱한 박 실장의 물음에 석훈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누구보다 박 실장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석훈으로서는 그나마 그가 이 자리에 와준 것만으로도 감개무량이다.
“너무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앉지? 내가 할 말이 있어. 커피 한잔하겠나?”
“아닙니다. 용건만 듣고 가겠습니다. 제가 여기 온 걸 알면 그분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버지인 강민식의 사람.
실장이란 타이틀을 제외하면 석훈도 잘 알지 못하는 남자였다.
본가를 드나들 때도 눈인사를 주고받은 게 전부였고, 제 아비의 사람이 확실하지만 어디 소속인지도 불분명한 인간.
그래서 분명 존재는 하지만, 유령이나 다름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석훈은 이 남자가 아버지의 수족으로써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쯤은 충분히 가늠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에게 떨어졌을 법한 최근 임무도.
“여긴, 회사야. 박 실장은 그저 내가 아는 사람 정도에 불과하고. 신분이 들통 날 염려 없으니 걱정 말라고.”
“보는 눈이 있습니다.”
“알잖아. 여기, 페이퍼 컴퍼니나 다름없어. 밖에 있는 쟤들도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를 걸? 그냥 월급 주니 앉아 있는 거지.”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 내가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저는 아버님의 사람이지, 이사님의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박 실장만이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어. 꼭, 당신이어야.”
그 말에 안경 너머의 박 실장 눈이 가늘어졌다.
도대체 이번엔 이놈이 무슨 귀찮은 부탁을 하려나, 하는 눈치다.
물론 그래봐야 사람 부리는 일이겠지만.
“아버지가…… 최근에 사람 하나 처리하라고 하셨지?”
“무슨…….”
“유빛나.”
석훈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줄곧 감흥 없던 박 실장의 눈이 번쩍했다.
“그걸 어떻게…….”
“내가 왜 몰라. 나 때문에 그러신 건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박 실장이 알기론, 빛나는 KMK 컴퍼니 건으로 표적이 된 케이스였다.
게다가 강민식의 성품으로 미루어보건대, 절대 이런 중차대한 일을 석훈과 공유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일에 강석훈이 개입되어 있다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식이다.
하지만 강석훈의 눈은 제법 진지하다.
농담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말인데, 박 실장. 사실은 말이지…… 아버지 스타일 내가 더 잘 아는데, 박 실장이 중간에서 적당히 해줬으면 해서.”
“무슨 말씀인지…….”
“그 여자랑 내가 만날 때 좀 꼬이긴 했지만 좋은 방향으로 풀어보려 노력 중이거든.”
“…….”
“쉽게 말해서…… 내가 관심이 좀 있거든. 근데 그 예쁜 얼굴에 상처가 나면 곤란하잖아. 앞으로 나랑 어떤 사이가 될지도 모르는데. 안 그래?”
그랬다.
빛나가 그의 뒤를 캐고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인 강민식의 입으로 전해 들은 순간부터, 그리고 그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그것이 걱정이 되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누구보다 강민식의 잔인한 성품을 알기에.
“몸에 상처 안 나게, 적당히…… 겁만 주라고.”
아버지의 화는 평생 가도 적응이 안 될 만큼 두려웠지만 빛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강민식의 화를 무릎 쓰다니.
그런데 멈출 수가 없다.
그녀를 향한 ‘갖고 싶다’는 탐욕은 밤새 석훈의 몸을 괴롭혔다.
덩달아 따라오는 승현의 오만한 시선이 석훈의 지랄 맞은 승부욕에 불을 붙이기도 했고.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녀석.
그 녀석의 여자였기에 더 탐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한량 같던 그 녀석이 반응하는 유일한 순간엔 늘 그녀가 있었으니까.
“조금만 시간을 벌어줘. 내가…… 그 여자 설득시킬 테니까.”
석훈은 자신감 있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박 실장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강민식이 두렵고 큰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강석훈만큼은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앞뒤 생각 없는 망나니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박 실장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놈은, 철 들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겠다.
“저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전화가 와서요.”
때마침 진동하는 핸드폰에 박 실장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그것이 왼쪽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이라는 걸 아는 순간 그는 서둘렀다.
“아버님 전화입니다. 제가 여기 왔다는 건 비밀입니다. 그분께서 모르시는 게 이사님께도 좋을 겁니다.”
그 말에 석훈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나가라 손짓했다.
석훈의 사무실을 나온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네, 접니다.”
[그놈…… 당장 처리해야겠네.]
기다렸다는 듯 조급함이 묻어나는 강민식의 목소리가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왔다.
마담M을 직접 대면한 후인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저 놈의 신상명세서에 대해서만 재촉했던 게 전부였는데,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것일까.
잠시 후 박 실장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놈이…… 박충식을 만났어.]
“마담M이 말입니까?”
놀란 박 실장이 되물었지만 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강민식은 한 번 한 말은 다시 되풀이하는 이가 아니었으니.
대신, 살벌한 다음 한마디가 날아들었다.
[실수 따윈 용납 안 돼. 자네가 직접 하게.]
“알겠습니다. 마담M은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전화는 끊겨 있었다.
하지만 박 실장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망설이고 나서야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그저 겁 없이 나대는 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오만이 전부 허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기까지 쫓아온 것을 보면 말이다.
결국 그 어린놈이, 기어이 제 손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박 실장은 제 손에 떨어진 것은,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
박 실장의 차가 떠나자 잠시 후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박 실장과 대면 이후 퇴근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던 석훈이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려다 말고 저만치에서 통화 중인 박 실장의 한마디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마담M은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순간, 그는 전율했다.
그리고 정수리를 강타했던 그 찌릿한 느낌은 아직까지도 그의 발끝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박 실장은 분명 아버지인 강민식과 통화 중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담M은 왜 강민식의 타깃이 된 것일까.
“도대체…… 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제 아비가 그와 마담M의 묘한 신경전에 대해 알 수는 없을 터.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그 오만한 놈이 기어이 제 아비의 신경을 거슬렀기 때문이리라.
거기까지 계산이 끝나자 석훈의 입꼬리에 야릇한 웃음이 걸렸다.
“이거……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는데?”
***
샤워를 마친 후에 빛나는 거울 앞에 앉아 넋 나간 눈빛으로 제 모습을 응시했다.
젖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앉은 자리였으나 헤어드라이어는 작동시키지도 못한 채였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쉬…… 제발…….
왜, 그녀를 구했을까.
그리고 그녀를 노리는 또 다른 낯선 이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느낌.
울고 싶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이기에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괴로움에 절로 눈이 감겼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젖은 머리로 다정한 손길이 와 닿았다.
“머리 안 말리면 감기 든다. 이리 줘봐. 내가 말려줄게.”
승현이었다.
어느새 샤워를 마친 그가 다가와 그녀의 뒤로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그러곤 미처 그녀가 하지 못했던 헤어드라이어를 켜고 젖은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경찰에선 뭐래?”
허위 화재경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대피한 오늘 사건은 경찰로 넘어갔다.
하지만 역시나 범인은 찾지 못했다.
문제는, 이 허위 화재경보가 결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
그 경보는 낯선 이들로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남자가 시도한 교란 작전이었다.
덕분에 허위 화재경보를 울린 남자는 경찰의 조사 대상이 되었다.
“각층 CCTV를 확보하고 있어. 건물 내 있는 건 모조리 다. 그런데 아직까지 범인의 얼굴은 확보하지 못한 모양이야.”
그럴 것이다.
남자는 예전에도 그랬듯, 모자와 마스크로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남자는 이번에도 역시 CCTV를 귀신처럼 피해갔다.
하지만 빛나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네 사무실을 찾아왔던 그 사람들? 안 그래도 선정 씨가 경찰서에 출두해 CCTV 자료를 근거로 증언을 하고는 있는 모양인데 딱히 그 사람들의 신분을 알아낼 만한 증거는 못 되는 것 같아.”
그랬다.
남자가 울린 허위 화재경보로 인해 묻혀버린 그녀의 납치는 그 의도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채 미수로 끝나 버렸다.
또한 빛나가 들은 이야기 이외에, 남자들이 그러한 범행을 계획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 않은 상태라 그들의 신분을 안다고 해도 경찰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경찰이 못 하면 내가 따로 알아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녀석 꼭…… 잡을 테니.”
각오를 다지는 그의 목소리에 빛나는 제 머리를 말리던 그의 손길을 붙들고 마주 앉았다.
그러곤 세상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정말이야. 그 사람이 날 구했어.”
“네 착각일 수도 있어. 내가 널 부르는 그 순간까지도 네 뒤에 있었다며. 내가 현장이 도착했기 때문에 널 해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단 말이야.”
승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의 입장에선 남자의 행동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나는 단호했다.
전혀 제 말을 번복할 의사가 없다는 듯.
“아니, 분명 날 구했어. 착각 아냐.”
“뭘 근거로?”
“내가…… 붙들리기 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어. 주차장에서 누가 내 차를 흠집 냈다고. 그러니 와서 봐달라고.”
“네 차를?”
“근데, 내려가서 보니 차는 멀쩡했단 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전화도 그 남자가 한 것 같아.”
그랬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
만일 그녀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그녀를 납치하고자 했던 남자들과 정면으로 마주쳤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내가 그 사람들하고 부딪히지 못하게 유인한 거야.”
“그걸 왜 이제야 이야기해? 그럼 네 핸드폰에 그 번호 남아 있겠네? 줘봐.”
승현은 빛나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 번호를 찾아내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없는 번호란다.
젠장!
낮은 욕설이 목구멍 너머로 쓰게 넘어갔다.
“그리고 또 하나, 나…… 아직 말 안 한 게 있어. 경찰서에서도 말 안 한 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모든 걸 다 털어놓아도 사건에 진척이 있을까 말까 한 이 상황에, 왜 제 사건 담당자인 강 형사에게까지 그녀가 본 결정적인 그것에 대해 꾹 입을 다물어버렸는지.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살 떨리게 두려웠던 남자였다.
그런데,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보호하고자 침묵을 선택했던 것일까.
털어놓아야 했다.
남자를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
그녀가, 눈으로 본 그것을.
“문신이…… 있었어. 아주 인상 깊은 문신이…….”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승현의 눈매가 진해졌다.
“어떤 문신?”
“용 문신. 여기…… 손목 바로 위로.”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가리키며 문신이 있던 그 자리까지 정확히 일러주었다.
“다 보진 못했지만 꽤 큰 문신 같았어.”
“용문신은 그런 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흔한 이미지야.”
“알아. 하지만 달랐어. 그 사람 건…… 진짜 살아 있는 용 같았다고.”
아직도, 그 끔찍한 붉은 눈을 잊을 수가 없다.
공포심에 숨이 넘어가는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온통 새까만 색인데…… 눈이 핏빛이었어.”
생생했던 그 붉은 눈의 용을.
그제야 승현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눈이 붉은색이었다고?”
“…… 응.”
“이미지 보면, 알아볼 수 있어?”
“응.”
그의 눈매가 대번에 달라졌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길에서 가로등 하나를 만난 느낌이다.
어쩌면, 놈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좋아.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하자. 경찰이 못 하면 내가 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다시 헤어드라이어를 작동시켜 그녀의 긴 머리를 말려주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감촉만으로도, 그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혼란, 두려움.
그리고 그의 안에서 말없이 소용돌이치는 엄청난 분노.
상반된 감정이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머리가 다 말라갈 때 즈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다른 방에서 잘까?”
“왜?”
“잠이…… 안 올 것 같아. 나 뒤척이면 너도 못 자잖아. 가뜩이나 일 많아 잠 부족하면 예민해지는데.”
그 말에 승현은 거울 너머로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조금 전 진지했던 눈매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짓궂은 사내아이가 들어앉아 있다.
“자꾸 툭 하면 따로 자자고 그러는데, 내 집에 들어온 이상…… 우리가 함께 사는 이상, 더 이상의 각방은 없어.”
“하지만…… 진짜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우리는 싸워도 한 침대, 토라져도 한 침대, 전쟁이 나도 한 침대야!”
마치, 엄마랑 잠을 못 자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내일 할 일 많잖아. 나 때문에 너 잠 못 자면…….”
“그런 걱정 말라니깐? 내가 재워줄게.”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빛나를 번쩍 안아 들고 파우더 룸을 나와 침대로 향했다.
“자면, 악몽을 꿀 것 같아. 내가 좀 예민해서…….”
“그러니까 내가 재워준다고. 그렇게 나랑 같이 자고도, 아직도 모르나?”
“뭘?”
“나, 걸어 다니는 인간 수면제. 내가 곁에 있으면 세상만사 다 편해지고 근심 걱정이 없어져. 아주 치명적인 매력이지.”
“헐…… 혈압 상승으로 인한 졸도시키기가 주전공이 아니고?”
그 말에 승현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을 하는 듯 눈을 굴렸다.
“…… 그런가? 가만, 그러고 보니 내가 그쪽을 더 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모습에 빛나의 웃음이 터지고 만다.
이런 순간에도 장난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짜 이 남자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한번 빠지면 절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어쨌든 오늘 밤은 내가 확실히 재워줄 테니 너무 걱정 마, 유빛나.”
그가 호언장담을 했다.
“그것도 아주 푹…….”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빛나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냉큼 침대 한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숨도 못 쉴 만큼 세게 그녀를 껴안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잘 자라 우리 빛나! 앞들과 뒷동산에-엑! 새들도 아가 양도 다들 자-아는데-.”
아, 진짜!
뭐? 걸어 다니는 인간 수면제?
곁에 있으면 세상만사 편해지고 근심 걱정도 없어진다고?
이런, 사기꾼을 봤나!
결국 빛나는 숨이 막힌 듯 캑캑 거리며 소리를 빽 질러야 했다.
“아악- 위승현!”
그래도…… 좋다.
“노래 더럽게 못 불러, 진짜!”
그가 있어, 악몽도 이겨 낼 수 있는 밤이니까.
***
어둠 속에서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뀌자 승현은 허망한 눈으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유빛나…….”
잠 못 잘 것 같다며,
예민하다며,
그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어놓고.
“겁나…… 잘 자네.”
이렇게 잘 자기…… 있기? 없기?
그가 그토록 목청껏 노래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품 몇 번 하더니 바로 곯아떨어졌다.
웬만하면 그의 노랫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이는 있어도, 이렇게 곯아떨어지는 이는 없는데 말이다.
승현은 일단 팔에 놓여 있는 그녀의 머리를 베개에 눕히고, 그의 가슴을 꼭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팔도 서서히 풀어냈다.
그러곤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려 잠이든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세상 평온해 보인다.
게다가 무슨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입가엔 미소까지 담고 있다.
“그래도 못 자는 것보단 낫다. 잘 자…… 유빛나.”
그 모습이 너무 예뻐 승현은 머리카락을 조심히 넘겨준 후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잠시 후, 침대에서 날랜 동작으로 기어 나온 그는 바지를 입고선 핸드폰을 찾아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러자 밤기운에 쌀쌀해진 바람이 그의 벌거벗은 상체를 매섭게 훑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위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의문.
-날 해친 게 아니라…… 구했다고.
도대체 그 남자의 정체는 뭘까.
보이는 눈빛 빼고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어 더 기억에 남는 남자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남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승현은 가지고 나온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여보세요. 아…… 형, 나야. 자고 있었지?”
[음?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 바로 승준이었다.
“나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뭔데?]
“형, 범죄자들 특별한 문신 하면 사진 같은 거 남겨놓지?”
[그렇지. 근데…… 너, 범죄자랑 엮였어?]
범죄자란 말에 잠이 확 달아난 듯 승준은 조용한 목소리로 캐묻기 시작했다.
하지만 큰형답게 반은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놈들이랑 엮였다면 너 혼자 풀려고 하지 마. 차분히 풀자고.]
“나도 그러고 싶은데…… 못 참겠어. 어떤 새끼인지 꼭 찾아내고 말 거야.”
[왜 그러는데?]
다시 승준이 물어왔다.
아무래도 제대로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움직여 줄 기세다.
그래서 승현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 건드렸어.”
잡아야만 했다.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빛나의 목숨을 담보로 모험 따윈 할 수 없었다.
이번엔 그녀를 구했다지만,
“내 여잘…… 건드렸다고.”
다음엔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기에.
반복되는 그 말에 핸드폰 저편에서는 수초 동안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이에 승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에 볼 수 있는 유일한 달빛마저도 구름에 가려져버린 지금,
군데군데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어둠은 오늘따라 더욱 음침하고 칙칙했다.
그래서였을까.
짧은 침묵을 깨고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온 승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섬뜩했다.
[그래? 그럼…… 조져버려, 승현아.]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