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57화 (57/94)

57. 그녀를 구하다!

2018.06.20.

승현은 책상 앞에 마주 앉은 강민식의 얼굴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저 남자가 이곳엔 웬일일까.

혹시나 빛나가 그의 아들을 엮어 넣으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왜 그는 곧장 빛나에게 가지 않고 그에게 왔을까, 등등.

정말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게다가 이 남자, 안경에 가려진 작은 눈이 생글생글 웃어 반달이 되었는데도 은근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평생을 웃고 살아온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그 눈매가 싫었다.

정치하는 사람치곤, 저렇게 웃는 인상이 드물었기에.

그리고 만약, 정말 그가 평생을 저런 인상으로 살았다면 그것은 진짜 자신을 가리고자 하는 위장전술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건지.”

“우리 진도 천천히 나갑시다. 이제 한두 번 얼굴 볼 사이도 아닌데.”

그 말에 승현이 흥미롭다는 듯 강민식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보니 화면보다 더 훤칠한 젊은이네? 성함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냥 MK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는 자신의 명패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국 이름은 없으신가?”

“일을 할 땐 한국 이름 잘 안 써서요. 본론으로 들어가죠.”

“…….”

“저를 왜, 찾아오신 거지요?”

승현의 물음에 강민식은 다소 자리가 불편한 듯 자세를 고쳐 앉더니 다시 반달형 웃음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마담 M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소이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사업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어떻소?”

“사업 제안?”

“지금 보니 아직은 회사가 적자인가 보던데, 아마도 내가 제안한 거래면 순식간에 흑자 전환이 가능할 거라 예상합니다.”

“저희가 아직 적자인 건, 다들 아시다시피 그 사건 때문에 회수되지 않은 돈을 모두 끌어안고 있어 그런 거지 엄연히 따지면 그렇다고 볼 수도 없죠. 하지만 사업 제안을 하신다니,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승현은 전혀 듣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귀가 솔깃한 제안을 하겠다는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회전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강민식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살짝 치켜 올라간 입꼬리와 매력적인 눈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강민식 또한 마주한 승현이 예상외로 거대하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그는 빈손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기필코 눈앞의 이 어린놈을 제 손에 넣든지,

아니면 제 손으로 부숴버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리라.

“마담 M의 업적은 이미 내가 충분히 검토해보았소. 명성만큼이나 대단합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 흥미를 끄는 게 하나 있던데…….”

“…….”

“조나단 케이너. 그 게이 모델을 그 자리에 올린 것도 바로 마담M이라지요? 남자가 여성 속옷 모델로 선다는 것. 예전 상식으론 이해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파격적인 선례가 그 브랜드를 업계 1위로 올려놓는 것은 물론, 성적 소수자에 불과했던 조나단 케이너를 최고의 모델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죠. 어디 그뿐입니까? 패션업계에 성적 소수자 모델에 대한 인식이 바뀐 시점이기도 하죠.”

“…….”

“내가 여기서, 뭘 봤을까…….”

작은 눈을 반짝이며 연설을 하듯 장황한 설명을 마친 강민식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그의 앞으로 몸을 깊숙이 숙이며 속삭이듯 다음 말을 이었다.

“당신이 한 건…… 단순한 광고 마케팅이 아니야.”

“…….”

“한 사람의 인생을 설계하고…… 사람들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편견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

“…….”

“바로 그게…… 당신이 한 일이라고.”

“…….”

“그리고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순간, 승현의 눈썹 끝이 살짝 구겨졌다.

일정 거리에서 조금 가까워졌을 뿐인데도, 구린내가 진동한다.

천생 웃는 인상을 가진 남자에게서 왜 이렇듯 악취가 나는 것일까.

강민식보다 그 쓰레기 같은 아들을 먼저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눈앞에 있는 이 인간이 싫은 것일까.

편견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승현은 뒤끝이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 아닙니까. 파격적인 조건으로.”

별거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어서 이 남자가 그 말 같지도 않은 사업 제안을 끝내고 여기서 떠나줬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런데 강민식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웃는 인상으로 다음과 같은 말들을 흘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엔 나를 제2의 조나단 케이너로 만들어줬으면 합니다.”

미친놈이다.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하지만 승현은 여전히 미동도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이미지 메이킹을 해달라…… 이 말입니까?”

“그렇소. 사례는 충분히 할 터이니.”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계신 걸로 아는데요.”

“서울 시장으로서는 그렇죠.”

순간, 여전히 웃고 있는 강민식의 얼굴을 보며 승현은 얼굴을 굳혔다.

서울 시장으로서는…….

그 한마디로 강민식이 앞으로 제안할 거래가 무엇인지 모두 예측할 수 있었던 탓이다.

“대선 출마를…… 하실 생각입니까?”

“정치인 아닙니까. 이 정치라는 게 마약 같아서 한번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더군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저희 회사는 정치에 그렇게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압니다. 정치라는 게…… 한번 엮이면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그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해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이 회사에 이보다 든든한 백이 어디 있습니까? 시너지 효과를 생각해보라, 이 말입니다.”

승현의 생각이 맞았다.

이 남자의 웃는 인상은 위장용 전술이었다.

위험천만한 말을 하는 이 순간에도 저렇듯 사람 좋은 웃음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사업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며 강민식은 이 만남을 끝내려는 듯 자리에 일어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천천히 생각해도 돼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나는 생긴 것과는 달리 승부사입니다. 때문에 승산 없는 일은 하지도 않지요. 나를 한번 믿어보는 게 좋을 겁니다.”

강민식이 웃으며 돌아섰지만 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대신, 조금 전보다 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앉아 강민식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멀리 안 나갑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어린놈이 건방지기도 하여라.

돌아선 강민식의 웃던 눈이 잠시 그 진짜 정체를 드러내듯 매섭게 빛났으나, 그가 다시 문을 열고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다시 웃음을 위장했다.

하지만 승현은 강민식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속에 담고 있던 진짜 인사를 건넸다.

“그래. 부디…… 조심해서 가라. 뒤에서 확 덮쳐버리기 전에.”

그렇게 빌딩을 나선 강민식은 대기 된 자신의 차를 타에 올랐을 때야 비로소 얼굴에 머물렀던 웃음을 거둬들였다.

그러곤 목을 조르고 있던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며 오늘따라 유난히 선선한 바람이 부는 창밖을 올려다보며 짜증스럽게 한마디 했다.

“어린놈이…… 건방지게.”

그랬다.

눈으로 직접 본 승현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훤칠한 생김새 때문이 아니다.

시종일관 강민식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단 한 번도 그 의중을 내비치지 않았다는 게 더 크게 와 닿았다.

강민식은 포커페이스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자부했다.

자신의 야망을 웃는 얼굴 속에 숨기며 평생을 살아온 그였으니까.

그런데, 고작 서른 남짓한 승현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자신의 생각을 숨기는 데 능했다.

게다가 강민식은 누군가와 함께 있는 공간이 이렇듯 답답하고 비좁게 느껴진 건 난생처음이었다.

심지어, 승현의 사무실은 축구를 할 만큼 널찍한 공간이었는데도 말이다.

“박 실장 전화 연결해.”

날카로운 그의 목소리가 지시를 내리자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잠시 후 핸드폰을 건넸다.

그 핸드폰을 받아 든 강민식은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상대방을 다그쳤다.

“마담 M에 대해선, 아직도야? 어디 출신인지, 부모는 누군지, 그딴 거 하나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하늘에서 뚝 떨어진 녀석도 아니고!”

하지만 박 실장이 고작 알아낸 건 성도 모르는 ‘승현’이라는 이름 하나.

좀처럼 그의 모습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약점을 알아야 물고 늘어지기라도 할 게 아닌가.

그 약점이라도 알아낼 겸 승현을 떠보기 위해 만든 오늘 자리는 오히려 강민식을 더욱더 조급하게 몰아갔다.

결국 전화를 끊은 그는 결심했다.

“내가 데리고 놀지 못할 것 같으면…… 내 손으로 직접 부숴버려야지.”

서서히 출발하는 그의 등 뒤로 건물을 뒤흔드는 화재 알람이 울려왔다.

***

한편, 그 시각.

며칠 전 승현의 방문으로 인해 패닉이 온 박충식은 감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치하시는…… 그분…… 말입니다, 그분.

섬뜩한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알고 있었어. 분명…… 알고 온 거라고.”

박충식은 확신했다.

승현이 분명 ‘그분’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왜 그를 찾아왔을까. 직접 찾아가 바로 묻지 않고.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승현이 다섯 사람 중 오직 그만 찾아왔단 사실을 떠올렸다.

만일 승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얼마 전 있었던 면회는 그에게 가장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가 협조한 줄 알 테니까.

“그렇겐…… 안 되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혼자 이 일을 뒤집어쓴단 말인가.

만일, 그런 오해가 시작된다면 그는 적이 아닌 아군에 의해 참수당할 것이다.

-진짜 죗값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다시 생각해도 소름 돋는 승현의 모습은 상상 그 이상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여기서,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믿어왔던 신뢰를 저버리고 승현의 편에 서서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만큼 간이 크지도 못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엄청난 싸움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죽기 직전까지 이 비밀을 사수하고 침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일단 오해의 씨앗부터 제거해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결국 그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박충식은 간수에게 접근해 은밀히 이야기했다.

“내 변호사한테 연락해주시오. 긴히…… 할 말이 있다고…….”

***

“이거, 파이어 알람인가요?”

귓가를 울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엘리스는 브리핑을 하다 말고 승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와 동시에 밖에 있던 김 비서가 뛰어들어와 그들에게 외쳤다.

“화재경보입니다! 어서 이 건물을 빠져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승현은 앞에 나 있는 유리를 통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 어디서도 연기 따윈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화재사고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고 있는 요즘, 요란하게 울려대는 이 화재경보를 무시할 순 없었다.

“위층 연결해서 직원들 모두 대피할 수 있도록 하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일단 이 건물을 빠져나가라고 해.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네, 알겠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다.”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은 모양이다.

결국 엘리스가 그의 소매를 붙들며 다그쳤다.

“그럼 저희도 이제 그만…….”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와 비상구 계단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승현은 그 와중에도 제 물건을 챙겨 나가려는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전부 놔두고 나가요! 빠져나가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니!”

그의 목소리에 결국 직원들은 제 물건을 남겨놓고 서둘러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승현은 17층 사무실이 전부 비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발길을 돌렸다.

그제야 엘리스도 안심하며 비상구로 몸을 틀었다.

적어도 그때까진 모든 게 괜찮았다.

앞서 나간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가며 17층이나 되는 계단을 질서 있게 내려갔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불길한 징조는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안심하기엔 너무 일렀나 보다.

엘리스가 작은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본 순간, 승현은 내려가던 발길을 틀어 9층으로 들어가는 문을 넘어서고 있었으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이럴 시간 없다구요!”

“빛나가…… 빛나가 전화를 안 받아.”

그제야 엘리스는 9층이 바로 빛나가 있는 로펌이 있는 층이라는 걸 깨달았다.

“9층은 이미 대피했을 거예요. 걱정 마시고…….”

“아니, 감이 안 좋아. 이런 상황에…… 전화 한 통화 없었다고.”

그랬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위기의 순간 그가 그러하듯, 그녀 또한 그의 안위부터 확인하려 들지 않았을까.

그런데 전화가 없다.

그 사실에 승현은 이상하리만치 소름이 돋았다.

“먼저 내려가 있어. 아래 빛나 있으면 전화 한 통 주고.”

결국 엘리스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말릴 생각 따윈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며 엘리스는 울분을 터트렸다.

“아악. 못 말려, 진짜!”

***

승현은 9층으로 진입해 싸늘한 복도를 뛰었다.

비상구 계단에서 빛나의 사무실까지는 이 복도를 통과해야만 갈 수 있었다.

복도를 뛰는 그 찰나의 순간이 지옥 같았다.

도착한 그녀의 사무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간 직후라 한산하다 못해 서늘해 보였다.

“빛나야! 유빛나!”

온 사무실을 다 뛰어다니며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물론 어디서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무실을 완벽하게 빠져나간 모양이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것을 보면.

승현은 또 한 번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그녀라면,

다름 아닌 유빛나라면,

“전화를 했겠지.”

어디서 그런 믿음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찾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런 급박한 상황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

전화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데 승현은 제 목을 내걸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귓가를 요란하게 울려오는 화재경보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빛나를 찾지 못하면, 그도 이 건물에서 나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곁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이런 위급 상황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신경을 쓰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너무 경황이 없던 나머지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 그의 탓도 있었다.

거의 닫혀가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스치는 승현의 모습을 보며 검은 눈 하나가 반짝 빛을 발했다.

남자는 보았지만, 승현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악연인지 인연인지 모를 두 사람은 또 한 번 스쳐 지나갔다.

마치,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엉망이 되어버린 운명이었다.

그 중간을 끊어내지 않고는 절대로 풀어낼 수 없는.

“젠장…… 유빛나, 도대체 어디에 있는…….”

그때였다.

엘리베이터 곁에 있는 길고 음산한 복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곳은 공사 중인 사무실이 있는 곳이라, 평소에도 복도 불이 꺼져 있어 인적도 드물고 어두운 곳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사람이?

물론 그 사람이 빛나라는 걸 알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빛나야!”

승현이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아직도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피부가 조금 전 겪었던 살 떨리는 공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승현은 떨고 있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우선 제대로 숨도 못 쉬는 그녀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일 것 같아서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숨 쉬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피가 머리로 쏠리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서 전해져 오는 떨림에 그도 함께 질식사할 것 같았다.

“일단, 여기를 나가자. 다른 사람들은 전부 대피한 것 같아. 이제 우리만…….”

뇌까지 뒤흔드는 알람소리에 승현은 우선 이 건물을 빠져나가는 게 먼저라 생각했다.

그래서 떨고 있는 그녀를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빛나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더니, 울먹이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부…… 불……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좇아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엔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오픈된 수동 화재경보 시스템이 있었다.

놀란 그의 눈동자가 다시 빛나에게로 돌아가자 그녀는 넋이 나간 눈동자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승현아…… 그 남자…… 그 남자가 왔었어.”

“누구?”

“그 남자, 저번에 집에 침입했던…….”

순간 그의 눈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언젠가 남자가 돌아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돌아와 상대해야할 사람은 빛나가 아닌 바로 그였다.

때문에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밝힌 게 아니던가!

빛나에게 몰렸던 관심을 그에게로 돌리기 위해서.

“왜…… 내가 아닌 너한테…….”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아닌 빛나를 다시 찾아온 것일까.

그들의 진짜 적은 빛나가 아닌 바로 그일 텐데 말이다.

그런데, 빛나의 다음 말은 그의 상상을 뒤집어엎었다.

“그 남자가…… 날…… 구했어.”

“뭐…… 라고?”

되묻는 승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조금 전을 상기시키는 빛나의 커다란 눈동자에 기어이 눈물이 들어차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도 살 떨리는 공포.

그녀를 붙들고 있는 그 남자뿐 아니라 누군가 그녀를 또 노리고 있다는 사실.

사방이 적이었다.

누구의 손에 죽을지, 그녀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

-쉬…… 제발…….

너무도 간절하여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공포에 이성이 얼어붙는 그 상황에서도 빛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를 해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오히려, 얼굴도 모르는 또 다른 낯선 이들로부터 그녀를 구하기 위해 돌아온 목소리임을.

정말 살 떨리는 두려움에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이제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그 남자가,

“흐흑…… 날 해친 게 아니라…… 구했다고.”

그녀를 구했다는 것을.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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