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56화 (56/94)

56. Please…….

2018.06.17.

딸랑.

투명한 카페 유리문이 열리자 종소리가 귓가를 울려왔다.

하지만 빛나는 곧장 카운터로 가지 않고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마냥 카페 안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창가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한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시선처리가 불안한 눈동자, 조급한 듯 무릎 위에 놓인 손을 한순간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여자를 보며 빛나는 그녀가 자신이 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박수정 씨죠? 제가 바로 유빛나입니다.”

빛나는 자리에 앉기 전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으나 싸늘한 한마디가 돌아왔다.

“악수는 아닌 것 같네요. 우리가 이렇게 얼굴 마주했다고 내가 변호사님의 그 어이없는 계획에 동조한다는 건 아니니까.”

여자의 말에 빛나는 말없이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지만 꽤나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빛나의 예상대로 강석훈 앞으로 알게 모르게 폭력이나 성폭력 사건으로 접수된 고소장이 여러 건 있었다.

그럼에도 언론은 침묵했고, 뒤늦은 합의가 이루어져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이었다.

그랬다. 이 순간 빛나와 마주 앉아 있는 이는 강간 미수로 고소까지 갔다가 합의에 의해 고소를 취하한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수십 번을 설득한 끝에 이뤄진 만남이라 빛나에겐 절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도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얼굴 한번 보고 싶었어요. 도대체 누가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나…… 전화 받고 솔직히 좀 놀랐거든요.”

여자의 말투는 차갑고 매몰찼다.

은폐하려 했던 그 사건은 여자에게도 크나큰 상처였던 것이다.

그런 상처를 아물기도 전에 빛나가 다시 후벼 파려 하고 있으니 여자가 이렇게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합의한 사건이에요. 이러는 거…… 상대방에게 실례 아닌가요? 요즘 유명세 좀 타시던데, 알아보는 사람 많으니 눈에 뵈는 게 없으세요?”

“박수정 씨!”

“다시 말씀드리지만 합의했다구요! 알량한 정의감에 이렇게 물불 안 가리고 덤비면서 과거 이야기 들고 나오면, 합의한 저는 뭐가 되나요? 돈에 환장해서 몸 팔아넘긴 년밖에 더 돼요? 아니면, 꽃뱀?”

“저는 그런 뜻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뜻으로 들린단 말입니다!”

“저도 피해자예요!”

순간 까맣게 가라앉아 있던 박수정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일렁였다.

그럴 것이다. 적지 않은 충격이겠지.

빛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박수정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 여자는, 또다시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렇게 날이 선 여자를 무디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는 것.

“저를 어떻게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박수정 씨에 대해 아는 것보다 박수정 씨가 저에 대해 아시는 게 없는 것 같아 간략하게 소개할게요. 네, 저 변호사입니다. 알량한 정의감? 사실 전 그딴 정의감보다는 현실적인 돈을 택한…… 양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변호사였단 말입니다.”

그렇게, 빛나는 박수정에게 다가갔다.

“몰랐…… 어요.”

“그 인간, 박수정 씨가 처음도 아니었고 내가 끝도 아닐 겁니다. 우리가 입 다물고 있는 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다 갈 놈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아시죠? 돈 있고 빽 있는 집안인 거. 세상이 어디 힘없는 우리 편이던가요?”

그럼에도, 여전히 박수정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한번 부딪쳐 깨져봤으니,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탓일 것이다.

“돈만 있으면…… 그렇게 당해 피해자 신분이었던 우리도 꽃뱀을 전락해 가해자가 되는 상황이라구요.”

“압니다. 하지만 그게 무서웠다면, 여기 이 자리까지 나오지도 않았겠죠.”

“저는…… 그만하고 싶어요.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건 연락 그만하시라고 말씀드리러 온 겁니다. 더 이상 지난 이야기 끌어내 내 상처 들추고 싶지 않아요. 지옥이란 말입니다.”

“그 심정도 압니다. 저도…… 저도 그랬으니까요. 내가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지, 그러고 말지…… 그런 심정에 저도 묻어두려 했습니다.”

“…….”

“적어도 그 자식이 제 아이들을…… 건드리기 전까지는.”

순간, 먼지 한 톨 내려앉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박수정의 눈에는 또 다른 충격이 스쳤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빛나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박수정은 눈앞에 있는 빛나의 모습을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어디서 저런 신념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일개 변호사 따위가 건드릴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신념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걸.

빛나는 절박했다.

“이해…… 하실 수 있으세요? 어떻게 그런 인간이……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 그 꽃 같은 아이들에게 키다리 아저씨로 둔갑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무슨…….”

“저는 보육원 출신입니다. 제겐 책임져야 할 아이들이 많구요. 헌데 어느 날…… 내가 묻었던 내 실수가 부메랑이 되어 그 아이들에게 돌아왔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박수정의 눈이 검게 가라앉았다.

진지한 빛나의 눈빛에 점점 숨이 막혀왔다.

빛나가 묻은 과거는, 결국 그녀가 묻은 과거였기 때문이다.

“그 인간이…… 사회봉사를 핑계로 그 가여운 아이들에게까지 손을 뻗었습니다. 아이들을 향해 웃는 그 인간의 얼굴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

“박수정 씨에게 강요하고자 온 게 아닙니다. 저도 묻고 싶을 만큼 충분히 상처고 실수라는 거 아니까. 다만……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름 아닌, 우리 힘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박수정은 제 앞에 놓인 커피 한잔을 막연하게 바라보며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를 힘 있게 틀어쥐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빛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제 연락처입니다. 생각이 바뀌시면 연락 주세요.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빛나는 자리를 돌아서 나왔다.

하지만 등 뒤로 박수정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은 그녀가 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떨어질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차에 오른 빛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운전대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힘들다. 나쁜 놈 하나 잡는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오늘따라 승현이 더욱 보고 싶었다.

***

서울 외곽에 위치한 고급 일식 레스토랑.

강석훈은 자리에 앉아 사시미 한 점을 위해 젓가락을 들긴 했지만 감히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고 있었다.

주눅이 들 만큼 고요한 주변의 공기가 오늘따라 아버지인 강민식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은밀히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시장 강민식.

잘나가는 사업가에서 건실한 정치인으로 이미지 변신하는 데 성공했지만 석훈에겐 예나 지금이나 늘 두렵고 막연한 존재가 바로 아버지였다.

왜냐고?

보이는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잔인한 성품까지도.

“안 먹냐?”

“네, 먹습니다.”

내려놨던 젓가락을 냉큼 집어 들고 노리던 사시미 한 점을 입에 넣었건만, 석훈은 그 감질맛 나는 살점을 채 맛보기도 전에 목이 턱 막히고 만다.

“유빛나, 그 변호사는 어떻게 아는 사이냐?”

강민식은 제 손으로 사케 한잔을 따라 입에 털어 넣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경 너머 그 심중을 알 수 없는 강민식의 작은 눈이 석훈에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눈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으면 빨리 풀어라. 그래야 이 아비가 말끔히 그 싹을 잘라내지. 이야기가 더 커지기 전에.”

“그냥,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요전번에 만나서 몇 번 즐겼던…….”

“유빛나 변호사랑? 헛…….”

기가 막히다는 듯 강민식이 새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석훈은 온몸이 쭈뼛 곤두서는 걸 느껴야 했다.

“거짓말 하면 못 쓴다. 그 계집이 반반하게 생긴 만큼 성깔도 엄청나더구나. 그런 앨…… 네가 데리고 놀았다고?”

순간 석훈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분명 강민식은 모든 것을 다 알고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더 이상 거짓말로 자신의 포장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강민식의 심기를 송곳으로 긁어내리는 격이었다.

“유빛나 변호사가 네 사건들을 파헤치고 다니더구나. 조용히 합의하고 마무리한 사건까지. 덜미 잡힌 게 있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그렇게 여자 보는 눈이 낮아서야…… 쯧쯔.”

“그 여자는…….”

“독기 품은 년이다. 보이는 외모가 다가 아니란 말이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말끔히 처리할게요.”

석훈은 자신의 아버지이지만 자식에게조차 인정사정없는 강민식의 성품을 떠올리며 젓가락을 놓고 다짐 또 다짐을 했다.

하지만 강민식은 그런 석훈의 행동에는 관심 없다는 듯, 간장에 와사비를 풀며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됐다.”

“네?”

“그년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그러니 넌 걱정 말고 밥이나 먹어라.”

“…….”

“사시미가 아주 싱싱하구나.”

***

“나는 이제 회사 들어가는 길이야. 너는?”

외근을 나갔다 이제 막 도착한 승현은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여지없이 빛나와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엘리스 없이 혼자였다.

[나는 좀 전에 들어왔어. 근데 감사는 어떻게 됐어?]

“진행 중이지, 뭐. 그것 때문에 엘리스가 꼼짝도 못 해. 덕분에 난 자유.”

그랬다. 엘리스는 현재 본사에서 나온 회계감사 때문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덕분에 승현은 오늘 있는 스케줄을 엘리스 없이 혼자 소화하는 중이었고.

[그것 때문에 다른 직원이 피해 보는 일은 없는 거지? 그럴듯한 핑계로 명예퇴직을 요구한다거나…….]

빛나는 걱정스러운 듯 자신의 의뢰인부터 챙겼다.

그러자 승현은 걱정 말라는 듯 그녀를 다독인다.

“우리 빛나, 나를 그렇게 못 믿나. 죄 없는 사람들은 안 건드려. 그리고 지금이야 회사가 손해 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정도는 감수하고 철수계획을 번복한 거니까 걱정 마. 본사 재정 상태는 생각보다 튼튼해.”

[그럼 다행이고. 오늘 야근이야?]

“야근은 아닌데 좀 늦을 것 같아.”

[왜, 무슨 일 있어?]

“집에 들어가봐야 해서.”

[집?]

“우리 집. 본가 말이야.”

[본가는 갑자기 왜?]

“네 이야기…… 하려고.”

순간 핸드폰 저편의 기운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잠시 할 말을 잃은 그녀를 보지 않아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빛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가슴이 아팠다. 며칠 전 일 때문에 더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정말 만일의 경우, 그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이 모든 리스크를 빛나가 끌어안아야 했다.

그 일을 대비해 승현은 그가 없어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실드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의 가족이 될 예정이었다.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려 했어. 근데 내가 못 참겠어. 이렇게라도 우리 관계 공식화해야 속이 편할 것 같아.”

승현의 말에 핸드폰 저편에서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평온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한단 말로 들려.]

“똑똑하네. 사랑해.”

[어제보다 더?]

“당근이지. 그리고 내일은 더 사랑해줄게.”

[아, 들어도 들어도 안 질리네. 이런 사랑 고백.]

다행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의외로 밝았다.

하지만 이미 엘리베이터가 17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는 바람에 빛나의 분위기를 더 이상 살펴볼 수가 없었다.

“빛나야, 나 지금 회사 들어가봐야 돼. 집에서 보자.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

[응. 몸조심하고.]

전화를 끊자 그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엘리스가 바로 옆으로 붙었다.

“왜 제 전화 안 받으세요? 제가 얼마나 전화를 드렸는지 아세요?”

“왜.”

“손님이 오셨다구요.”

“손님? 누구?”

습관적으로 되받아 쳤지만 승현은 벌써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때문에 엘리스는 그 손님이 누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가 사무실 문을 연 순간, 그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한 중년 남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그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승현의 머릿속엔 수만 개의 물음이 떠올랐다.

도대체 저 남자가, 왜?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앞으로 성큼 다가선 승현의 훤칠한 기럭지를 눈부시다는 듯 올려다보며 감탄을 서슴치 않았다.

“이야, 드디어 내가 마담 M을 다 만나 보네!”

그러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넉살 좋게 자기소개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는 서울 시장직을 맡고 있는 강민식이라고 합니다.”

***

승현의 전화는 한참 전에 끊겼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여운은 지금까지도 그녀를 잔잔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드디어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삶을 위해선 피할 수 없는 산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가족들은 어떤 사람일까.

빛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가 했던 이야기를 토대로 그의 가족 이미지를 그려봤다.

물론, 정상적인 그림이 나올 수 없는 패밀리였지만.

그때 핸드폰이 울려 그녀는 잠시 생각을 멈추어야만 했다.

“여보세요?”

[혹시 7851 차주 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제가 주차를 하다가 살짝 스쳐서요. 많이 흠집이 난 건 아닌데, 그래도 내려와서 확인하셔야 할 것 같아서.]

젠장, 하필이면 생각할게 많은 이런 상황에 사고라니.

하지만 빛나는 기꺼이 전화까지 해준 가해자의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

그녀는 곧바로 사무실을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차가 주차된 곳에서 아무도 만나 볼 수가 없었다.

“뭐야, 벌써 간 거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그나저나…… 도대체 어딜 스쳤다는 거야? 멀쩡한 거 같은데.”

빛나는 자신의 차를 한 바퀴 뺑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고를 당했다는 그녀의 차는 스친 흔적은커녕 먼지 한 톨도 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뭐야, 장난 전화인가?”

결국 빛나는 다시 지하 주차장을 벗어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야만 했다.

가까운 곳에 내려갈 생각으로 코트를 걸치지 않아서 그런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사무실이 있는 층에 도착해 이제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려던 찰나, 빛나는 누군가와 부딪쳤다.

쌀쌀한 날씨에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며 몸을 떨다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한 것이다.

“아, 죄송…….”

그녀는 사과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빛나는 그 사과를 끝끝내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그녀의 온몸이 공포로 굳어버렸다.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 온통 검은색으로 위장한 이 남자의 눈을 어디선가 한번 본적 있기 때문이다.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남자와 눈을 마주한 그 찰나의 순간이 마치 영원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이번엔, 이 남자의 손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까.

놀란 빛나는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미처 돌아서기도 전에 남자의 커다란 손에 의해 철저히 차단되고 만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그 손은 그녀의 입을 거칠게 압박해 왔다.

다른 한손으로는 그녀의 팔과 몸을 한 번에 틀어잡으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몸부림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흡! 읍!”

그렇게 빛나는 남자에게 질질 끌려 사무실 옆 외진 곳으로 몰렸다.

그곳은 아직 임대중인 사무실로 서늘한 화장실을 제외하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까맣게 가라앉은 밤이기에 복도 전면 유리에 투영된 두 사람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온통 까만 남자는 그렇게 벽에 붙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람에 그나마 유일하게 드러난 그의 눈마저도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전에 차가 들어오는 거 봤다며. 나가는 모습은 보지도 못했고. 그런데 사무실에 없다니 말이 돼?”

“거기 직원도 모르던데. 어디 갔는지.”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속닥이는 음성도 아니었기에 남자들의 대화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빛나는 그들에게 자신의 위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다.

그렇게 마지막 발악을 하려던 순간, 그녀는 듣고 말았다.

“아, 진짜. 이 쪼그만 변호사 계집이 벌써 눈치챈 거 아냐?”

“너희 둘은 이 층을 전부 뒤져봐. 나는 사무실로 들어가 다시 한 번 확인해볼 테니.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년 끌고 가야 돼.”

소름이 돋았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그년’이 바로 빛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등 뒤의 이 검은 남자와 엘리베이터 앞의 남자들 중 누가 그녀에게 더 위험한지도 감을 잠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그녀를 붙들고 있던 남자가 바로 곁에 있던 화재 경보 시스템을 작동시킨 건.

순식간에 귀가 찢어질 듯한 알람이 건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요즘 들어 커다란 화재로 인해 인명피해가 속출하는 사건이 많아 화재사고에 대한 경각심이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시점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재깍 반응했다.

곧이어 그녀의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쏟아질 듯 흘러나온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노렸던 사내들의 낮은 욕설이 들려왔다.

“젠장! 되는 일이 없어!”

아수라장이 된 그 틈에서 그녀를 찾을 방법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빛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등 뒤에 있는 이 남자 또한, 그녀에겐 더 없이 두려운 존재였으므로.

“흡! 흡!”

그녀는 진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발악을 위해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지만 강인한 남자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커다란 알람 소리에 대피하느라 정신없던 나머지 사람들은 그녀가 간신히 내는 신음소리 따윈 들을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온몸의 피가 소리 소문 없이 증발해버리는 것 같았다.

눈물이 흘렀다.

투명한 유리에 비친 제 눈에서 극도의 공포심을 보았다.

그리고 제 입을 틀어막은 강인한 팔에서 화려한 용문신도 보았다.

흔하디흔한 검은 용이었지만 섬뜩하기 그지없는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름끼치게 두려운 그 용문신과는 반대로, 귓전을 울려오는 조용한 목소리는 협박이 아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쉬…… 제발…….”

그것도, 너무 간절하게.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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