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감히, 너 따위가
2018.06.13.
이정의 전화를 받은 승현의 눈썹 끝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말을 하는 이정이 횡설수설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빛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승현으로서는 충분히 상황을 예측해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빛나가 사실 예전에 잠깐 약혼을 했었는데…… 고아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파혼을 당한 적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 남자 어머니라는 사람이 굉장히 악질이에요. 아주 악질 중에도 최고 악질…… 그 어머니가 지금 빛나랑…….]
“거기, 어딥니까?”
[네?]
“그 남자 엄마랑 빛나가 같이 앉아 있는 곳, 거기가 어디냔 말입니다.”
[거기가 어디냐면…….]
이정에게 장소를 전해들은 승현은 차선을 바꾸기 위해 운전대를 틀었다.
운전대를 쥔 그의 손에 저릿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머릿속에 원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더불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그의 어머니란 여자도.
“진짜 더럽게 질긴 과거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물론 오늘 원준의 어머니를 만난다면, 원준을 만났을 때처럼 모른 척 지나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그들 앞에 나타나면 이 문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직면해야 할 현실이 되고 만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현은 발끝에 닿은 액셀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미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녀를 한 번 버린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또 나타나 아물지도 않은 그녀의 상처를 들쑤시려 한단 말인가!
“그렇겐…… 안 되지.”
절대.
다른 건 몰라도 이번엔 그 버르장머리 하나만큼은 확실히 고쳐 놓으리라 다짐하며 승현은 이정이 가르쳐준 커피숍으로 차를 몰았다.
어떻게 운전을 하고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어떻게 커피숍으로 들어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 순간 그가 기억하는 거라곤, 오로지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뿐이다.
도대체, 저 여자.
“천애 고아 주제에…… 어떻게…… 어떻게 너 따위가 감히…….”
…… 빛나에게 뭐라고 지껄이는 것일까.
여기까지 달려오며 아슬아슬하던 심장 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다음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조금 전 그 순간에서 지금 상황으로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자가 빛나에게 뿌리려 했던 그 물 컵을 그가 붙들고 있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누군가에 의해 제지당하자 날이 선 송 여사의 눈동자가 그 방해꾼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친 송 여사는 넋을 놓았다.
“너무 귀해서…… 저는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런 거 뿌리실 땐 제 허락을…… 받으셔야지요.”
그는 송 여사의 손에서 물 컵을 빼앗아 테이블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제야 빛나가 돌아서 그의 모습을 확인했다.
“승현아…….”
그녀의 음성에 한번쯤 바라볼 법도 하건만, 승현의 차가운 시선은 시종일관 송 여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허튼짓을 할 잠시의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빛나를 당겨 제 뒤로 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감히, 쳐다보지도 말라는 무언의 경고.
그 모습이 너무나 섬뜩하여 송 여사는 잠시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송 여사 또한 요즘 들어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승현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위협거리였다.
송 여사는 턱 막히는 호흡이 정상적인 상태가 될 때까지 큰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즈음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입을 떼었지만,
“빛나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제 사람입니다. 이쯤이면 짐작하셨어야죠.”
가차 없이 밟혔다.
그러나 버르장머리 없다는 억지도 못쓰겠다.
그만큼 승현은 최소한의 예의는 깍듯이 지키면서 송 여사를 한없이 작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제 끝난 일 아닙니까. 아들분이 찾아와 이 사람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이젠 어머니까지…….”
“그건 내가 사정이 있어서…….”
“그동안 괴롭히신 걸로는 모자랍니까? 충분하다 못해 넘쳤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시지요. 마지막 경고입니다.”
송 여사의 손발이 파르르 떨렸다.
반듯하고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날이 선 한마디 한마디의 의미는 송곳보다 더 예리하게 그녀의 몸에 들어와 박혔다.
“가자.”
“승현아, 잠깐만…….”
“나중에 이야기해. 나 폭발 직전이니, 일단…… 여기 좀 벗어나서…….”
그러나, 이렇게 짓밟히고 가만히 있을 송 여사가 아니다.
알량한 자존심 하나로 여기까지 버텨온 그녀가 아닌가.
그 자존심 때문에 빛나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몰아낸 빛나 앞에서 이런 망신은 더더욱 참을 수가 없었고.
“혹시…… 그거 알아요? 빛나랑 우리 아들, 약혼까지 했던 거. 내가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좀 있어서…….”
그래서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지만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는 없었다.
걸음을 뚝 멈춰선 승현이 돌아선 순간, 송 여사는 혈관을 타고 순환하던 피가 딱 얼어 붙어버리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말…… 바닥까지 가시겠습니까?”
그 목소리가 너무 허스키하고 낮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송 여사는 똑똑히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목소리가 경고할 대상을 정확히 알고 파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송 여사는 그의 기세에 밀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원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늦게야 송 여사의 위치를 알게 된 원준이 헐레벌떡 달려온 것이다.
“어머니!”
“아이고, 원준아!”
송 여사는 원준의 모습을 보자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듯 얼굴색을 밝혔다.
하지만 원준의 등장은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승현의 화에 기름을 들이 부은 격이었다.
게다가 그마저도 송 여사의 편이 아니었고.
“도대체 여긴 왜 오셨어요! 빛나는 또 왜요!”
원준의 모습을 보자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승현이 한 발자국 다가섰다.
“너, 내가 경고했지.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승현아, 제발. 하지 마…….”
송 여사가 보는 앞에서 당장 저 녀석의 주리를 틀어버릴 생각이었다.
그의 경고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톡톡히 보여줄 생각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의 앞을 막아선 빛나 때문에 승현은 원준에게 더 이상 다가설 수가 없었다.
빛나가 그러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의 가슴팍을 잡고 밀어내는 그녀의 손끝이 긴장감으로 인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떨림이 얇은 와이셔츠를 뚫고 그의 피부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결국 승현은 짜증이 나는 모자의 모습을 뒤로한 채 빛나의 손을 잡고 카페를 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그녀를 차에 태우고 이제 막 자신도 돌아 타려던 찰나, 카페에서 달려 나온 원준의 모습이 보였다.
“원준아! 원준아!”
물론 그 뒤를 따라 송 여사도 달려 나왔지만 원준을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잠깐만요, 빛나한테 할 말이…… 빛나야! 빛나야!”
원준이 승현의 차로 다가와 빛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접근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그녀와 원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승현의 모습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다.
고작 두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 그녀가 있는데, 마치 그들 사이에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였다.
“물러서.”
귓가를 송곳처럼 후벼파는 목소리.
그리고 강인한 힘에 의해 원준은 가까스로 좁혔던 거리를 다시 벌려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뒷걸음질을 쳤을까.
빛나의 사정거리 안에서 원준이 벗어나자,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퍽!
멱살을 움켜쥔 승현이 순식간에 주먹을 날리자 원준은 그 충격으로 인해 보기 좋게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놀란 송 여사가 다가와 피가 흐르는 원준의 얼굴을 보고 분노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아니! 왜 애먼 사람을 치고 난리야! 우리 원준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고소할 거야! 내가 가만 안 있을 거라고!”
“조용하세요! 어머니!”
원준은 울먹이는 송 여사를 뒤로한 채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승현을 올려다보았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그 눈동자에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빛나를 보내버리면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빛나한테 사과하려고…… 어머니 일은 내가…….”
그러나.
승현은 그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끝까지…… 이기적이네.”
“…….”
“누구 편하라고…… 사과 따윌 하는 거야. 그렇겐 안 되지.”
그래. 안 되지.
지금까지는 그녀가 당한 수모를 사과 한마디로 풀었겠으나, 이젠 아니다.
배로 갚아주리라.
분노한 승현이 으르렁거리는 울림을 내며 원준에게 다가왔다.
그 검은 그림자에 원준은 소름이 돋았지만 이번 일 만큼은 빛나에게 무릎 꿇고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늘 그랬듯, 송 여사의 성품은 누구보다도 아들인 그가 잘 알고 있었기에.
“미안해요. 어머니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하지만 빛나하고도…… 으아악!”
그러나 그 용기는 처절한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다가선 승현의 구둣발이 바닥을 짚고 있는 원준의 손을 가차 없이 밟아버린 것이다.
원준의 비명에 송 여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승현의 발로 달려들었다.
“어머, 이 미친놈이! 정신 나갔나! 우리 아들, 의사야! 손이 생명이라고! 이 발 못 치워?”
하지만 승현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오히려 그는 발끝에 지긋이 힘을 주며 살벌한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다시는…… 그 더러운 입에 빛나 이름 올리지 마.”
“…….”
“이젠 내 여자야.”
“…….”
“감히, 너 따위가……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고.”
순간, 송 여사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 아파할 사람이 생겨서 말이죠.
-천애 고아 주제에…… 어떻게…… 어떻게 너 따위가 감히…….
그랬다. 승현은 지금 송 여사가 빛나에게 했던 그것을 그대로 원준에게 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송 여사의 넋 나간 시선이 발을 치우고 슈트 단추를 잠그며 서서히 돌아서는 승현의 뒷모습에 고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승현은 그의 돌발 행동에 놀라 차에서 뛰어내린 빛나를 달래 그곳을 벗어나 버렸다.
그렇게 승현이 왔다간 자리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송 여사가 원준의 손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원준아, 걱정 마. 엄마가 저 자식 고소…….”
“그만하세요, 어머니!”
그답지 않게 원준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송 여사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묻는다.
“넌, 억울하지도 않니?”
헛, 억울하냐고?
송 여사의 질문에 원준은 다시 한 번 승현의 살벌한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감히, 너 따위가…….
태어나 처음으로 듣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맞아서 터진 입술은 쓰리고, 밟혀서 부러진 손가락은 뇌가 마비될 정도로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데도 자꾸 입가에선 헛웃음이 일었다.
감히, 너 따위가.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뇨. 전혀요. 어머니.”
오히려 속이 홀가분했다.
빛나를 저 정도로 지킬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승현은,
“충분히,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
차 안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승현이었다.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하지?”
“응.”
그는 왜, 묻지 않는 것일까.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너…… 괜찮아?”
대개는 이런 순간, 남자가 여자에게 해야 하는 질문이었으나 빛나는 그 물음을 양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겪어왔던 그녀와는 달리 승현은 오늘이 처음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던진 물음이 또 다른 물음이 되어 돌아왔다.
“너는?”
“나는…… 괜찮아.”
“그럼, 나도 괜찮아. 걱정 마.”
도대체 어떤 남자가 이런 순간에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 것일까.
마치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후 다시 찾아온 평온처럼 승현은 조금 전 불길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게다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까지.
그저 미안하고 고마운 순간이었다.
차가 어느새 빌딩 주차장에 도착하고 시동이 꺼지자 그는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고, 그녀의 안전벨트도 풀어 준 후 입을 열었다.
“우리 빛나, 한번…… 안아보자.”
그리고 그 순간 빛나는 울음이 터졌다.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진 것처럼, 그렇게 한번 터진 눈물은 그의 가슴이 흠뻑 젖을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흐-흐흐흑.”
“그동안은 못 울었지? 근데 이젠 울어도 돼.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해도 된다고.”
그랬다. 그동안은 이런 아픔을 잊고 살았다.
너무 많이 찔려 그 아픔에 무뎌진 줄 알았단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무뎌진 게 아니라, 당연한 줄 알고 참고 살았을 뿐.
그리고 승현이 그 아픔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송 여사가 후벼 판 자리는 곪을 대로 곪아 펑 터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이 전부가 아닌 이유는,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따스한 체온 때문이리라.
빛나의 서러운 울음소리는 그 후로도 수분 동안 계속되었다.
***
그날 저녁.
승현은 샤워를 마친 후 와인 한 병을 사이에 둔 채 빛나와 마주 앉았다.
오늘 일로 인해, 빛나의 과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알았어? 그 사람이 내…… 전 약혼자라는 거?”
힘들게 꺼낸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받아내는 승현의 심장도 함께 펄떡이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거의 처음부터?”
“어떻게?”
“나, 그 결혼식에 있었어. 그때 예식장에서 너…… 봤어.”
처참함에 빛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손을 뻗어 빛나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그게…… 문제가 돼? 너랑 내 사이에?”
“왜…… 말 안 했어?”
“그야 네 상처일 수도 있으니까. 10년 전 그날 이후…… 다시는 실수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렸어.”
승현은 10년 전 그날, 자신의 가슴에 들어와 콕 박혀버린 빛나의 모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너한테 그날 이 말을 하지 않은 건…… 가장 미련한 실수였고……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이었어.
그날 이후, 빛나는 승현에게 가장 어려운 여자가 되어버렸다.
눈앞에 그녀만 있으면 평소와 달리 그는 어쩔 줄 몰라 했으니.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인내하는 것만이 그가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빛나의 입장은 달랐다.
그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날…… 어떻게 참았니?”
그래, 어떻게 참았을까.
하지만 그렇게 가슴 아픈 질문에 설레는 대답이 돌아왔다.
“참은 게 아냐. 사랑한 거지.”
코끝이 시큰해졌다.
잘 울지 않기로 유명한 빛나였지만 오늘만큼은 두 번째 눈물을 아끼지 않았다.
도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가 그녀에게 해준만큼 그녀도 해줄 수 있을까.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여준 인내심은 사랑, 그 이상이었으니까.
빛나가 울먹이자 승현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싱긋 웃어 보인다.
“울어도 된다고 했다고…… 이렇게 자주 우나.”
“이건…… 화나고 슬퍼서 우는거 아니다.”
“그럼?”
“감동해서, 그리고 행복해서…… 우는 거다.”
처음 알았다. 행복해도 눈물이 나는 구나.
“어쨌든 오늘 일로 유빛나 눈에 더 이상 피 눈물 나는 일은 없는 거다? 이걸로 끝.”
승현이 끝을 맺었다.
더 이상 이 일로 미안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더 이상 과거로부터 숨어 있지 말라는 말이다.
더불어, 그가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었다.
이런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두 사람만 생각하자. 우리 인생…… 우리가 사는 거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거 아니니까.”
“…….”
“그럼 의미에서 유빛나……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키는 걸로.”
“무슨 말?”
“헛, 기억 안 나? 오늘 낮에 통화할 때, 네가 한 말.”
순간 줄곧 진지하기만 하던 그의 눈매가 유연하게 가늘어지자 끝이 예쁘게 모인 아몬드형 눈매가 진가를 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빛나는 그 비글미 뿜뿜하는 모습에서 시커먼 흑심을 읽어냈다.
그제야 머릿속에 오늘 낮에 전화를 끊으며 흘렸던 말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각오해. 몸보신 제대로 시키고 밤새도록 괴롭힐 테니.
그때는 그냥 흘렸던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섹시하고 음흉하게 들리는지.
아무래도 시커먼 흑심은 전염병인 모양이다.
치료제도 없고, 예방도 안 되는.
결국 빛나는 그 뜨겁고 섹시한 눈빛에 고양이처럼 반응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음을 흘렸다.
“흠, 몸보신도 안 했는데 괜찮겠어?”
“네 눈엔 내가 몸보신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여?”
물론,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지만.
그렇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빨려 들어갔다.
침대에 눕는 그 순간까지 서로를 탐하는 그 손길에 부끄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샤워를 하고 난 후, 그녀의 특유의 체향은 가뜩이나 희미한 그의 이성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수분 가득 담은 부드러운 피부는 또 어떻고.
태어나 처음이다.
인내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를 이렇듯 인내하게 만든 여자도,
그리고 그 인내심을 거침없이 폭발하게 만든 여자도,
그녀가 처음이었단 말이다.
때문에 승현은 절대로 빛나를 놓을 수가 없었다.
거칠게 놀다가 콕 들어와 박혀버린 가시처럼,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그 통증까지도 사랑하게 만들어버린 여자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여자가 침대에 누워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그에게 기꺼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승현은 자신의 셔츠를 거침없이 벗어던지며 그녀에게로 입술을 내렸다.
그의 손놀림에 의해 몸에 있는 옷들이 하나둘씩 벗겨져 나가고, 예민한 피부에 뜨거운 입술이 와 닿을 때마다 빛나는 온몸을 떨었다.
그렇게 그녀는 제 가슴에 머물러 있는 승현의 입술을 느끼며 그를 꼬옥 끌어안았다.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그의 묵직한 체중이 너무 좋았다.
마치 든든하게 보호 받고 있는 느낌.
그래서 빛나는 그의 체중이 제 몸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다리로, 손으로 붙들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결국은, 저도 모르게 고백을 하고 만다.
“하, 승현아…… 위승현…….”
“…… 응?”
“사랑해…….”
그 뜨거운 고백에 승현은 입술을 위로 올리며 그보다 더 진한 고백을 했다.
“유빛나…….”
“응?”
“내가 더 사랑해.”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터지기 일보 직전인데, 오늘 승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섹시하게 달아 오른 그의 입술은 빛나의 입술을 가볍게 물며 결국 또 한 번 그녀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할게.”
참았던 만큼 뜨겁고,
서러웠던 만큼 행복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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