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내겐 너무 귀한 사람
2018.06.10.
딸각.
이번에도 역시 빛나는 실망감을 안고 전화수화기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그녀는 지금 강석훈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에게 전화 연결을 시도했던 참이다.
하지만 모두들 조용히 합의하고 끝을 낸 상황이라 이 일이 또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걸 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마지막 피해자에게서조차 부정적인 대답을 들은 빛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나쁜 놈 하나 잡겠다는데, 뭐가 이렇게 힘드냐.”
오늘따라 승현이 너무 보고 싶었다.
지금 이 시간쯤이면 아마도 그는 교도소에서 면회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 일이 꼬이니 승현이 하고 있는 일이라도 잘되어야 할 텐데.
빛나가 이제 막 핸드폰을 들여다볼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승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나야. 지금 회사 들어가는 중이야.]
“벌써…… 끝났어?”
[길게 한다고 좋을 거 뭐 있어? 간단하게, 하지만 임팩트 있게, 절대적인 한 방이 중요한 거지.]
“발연기 한 건 아니고?”
[헐…… 무슨 소리. 네가 박충식 눈을 봤어야 하는데. 기다려. 조만간 박충식이 움직일 거야. 그러면 우린 박충식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만 잘 감시하면 돼.]
“걱정 마. 그건 이정이 전문이야. 기다렸다 감시하고, 증거 포착하는 거…… 웬만한 형사 저리 가라 수준이라고.”
[그래도 여잔데 너무 험한 일 시키는 거 아닌가 몰라.]
“우리 위승현 씨, 서이정을 너무 모르네. 이정이 ‘산전수전 다 겪은’이란 말을 괜히 입에 달고 사는 게 아냐. 걔가 잠복취재 하다 맹장까지 터졌던 애야. 정말 그 열정만큼은 아무도 못 말려. 우리가 못 하게 해도 쫓아갈걸?”
[후후. 유빛나 친구답네.]
“이번 건에 완전 곤두섰어. 말리면 울지도 몰라.”
[그래. 그래. 그럼 우리 그건 이정 씨한테 맡기자.]
“근데 오늘은 퇴근 몇 시 정도?”
[왜?]
“음, 우리 요새 저녁 너무 소홀했잖아. 맛있는 거 해 먹게. 내가 먼저 가서 저녁 차리려고.”
[우렁각시처럼?]
“어머, 솔직히 내가 우렁각시보다 낫지! 어디다 비교를 해?”
그 말에 핸드폰 저편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에 빛나도 따라 웃었다.
사실, 며칠 전 이정이 승현을 보고 핼쑥하다는 말을 했던 게 내심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물론 이정이 흘렸던 말을 도로 주워 담긴 했지만, 더불어 핼쑥하다는 말로 그를 표현하기엔 그의 허우대가 너무 빛이 났지만 그녀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오늘 저녁은 몸보신을 위해 삼계탕이라도 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흘린 물음에 엉뚱한 대답이 흘러 나왔다.
[보고 싶어.]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행복한 한마디였다.
“진짜, 이번엔 내가 먼저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젠장, 또 선수를 빼앗겼다.
아차 하는 마음에 그녀는 입술을 말아 넣었지만 승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늘, 넘치는 사랑은 그의 몫이라는 듯.
[좀 있다 보자. 일찍 들어갈게. 그럼 나 완전 찐하게 안아줘야 한다?]
그 말에 그녀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이런 낯 뜨거운 말을 어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응석을 부리듯, 그렇게.
하지만 위승현다운 애정표현이었다.
부끄럼 없고, 거칠 것 없고, 애교인 듯 아닌 듯 툭 던지는 사랑.
덕분에 빛나 또한 그 사랑을 돌리는 데 있어 망설임이 없어졌다.
“각오해. 몸보신 제대로 시키고 밤새도록 괴롭힐 테니.”
빛나의 대답에 핸드폰 저편에서 승현의 행복한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
실체 없는 웃음소리긴 하지만 그 행복감 넘치는 웃음에 빛나도 절로 입매가 올라갔다.
보지 않아도 그가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여운은 핸드폰을 끊은 한참 후에도 유독 길게 남았다.
전화를 끊고 기분이 너무 좋아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아-앗! 좋아라!”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더니, 그녀가 딱 그런 상황이다.
변호사의 일이 서로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일이다 보니, 거의 웃을 일 없는 상황인데도 요즘 들어 빛나는 자주 웃는 편이었다.
오늘처럼 기분이 나쁘다가도 승현의 목소리 한 번에 이렇게 연체동물처럼 온몸이 말랑해지니 말이다.
덕분에 근래에는 그녀에게 송곳 마녀라 부르는 이들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물론 왔다갔다 하는 그녀의 기분에 ‘까탈스럽다’는 새로운 수식어가 붙기는 했지만.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선정이 들어와 입을 열었다.
“변호사님, 전화가 왔는데요…… 연결할까요?”
“누군데?”
“저기 그게, 바쁘시다고 나중에 하시라고 했는데도 자꾸 전화를 하시는 바람에…….”
선정의 머뭇거림에 빛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정이랑 약속시간 아직 좀 남았는데?”
전화 연결이 안 되자 이정이 사무실로 전화를 했으려니 했다.
때마침 오늘 점심은 이번 일에 대해 상의도 할 겸, 이정과 함께 하기로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정은 몹시 곤란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중얼거린다.
“그 기자분은 아니구요. 지금 받기 불편하시면 제가 나중에 다시 하시라고 할까요?”
“아냐. 연결해. 아직 이정이 오기까진 30분 정도 시간 있어. 통화해보지 뭐.”
선정이 나가고 전화가 연결되자 빛나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J&J로펌 유빛나 변호사입니다.”
[나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뒤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신이 헛소리를 들은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증명해준다.
[우리, 좀 만나야겠구나. 지금 시간 되니?]
잘 지냈냐, 지난날 미안했다, 라는 형식적인 인사 따윈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듯 그녀는 우아하고 권위적인 목소리로 빛나를 내리눌렀다.
“죄송합니다. 제가 점심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 그럼 내가 사무실에서 기다리마.]
빛나는 입술을 꼭 깨물어야만 했다.
예전에는 어쩔 수 없이 휘둘렸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뇨.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회사 옆 커피숍 말고, 사거리 커피숍에 계세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알았다. 빨리 오렴.]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빛나는 몇 번의 심호흡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회사와는 거리가 조금 되는 사거리 커피숍까지 갔다.
회사 옆 커피숍은 회사 사람들이 자주 가는 관계로 이왕이면 인적이 드문 커피숍을 택했던 것이다.
빛나가 자그마한 커피숍에 들어서자 창가 쪽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고운 모습으로 우아하게 앉아 있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렇게 빛나는 몇 개월 만에 원준의 어머니인 송말례 여사와 마주 앉았다.
***
낮은 선율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차 안에서 이정은 졸린 눈을 가까스로 밀어 올린 채 신호대기 중이었다.
뒤에서 빵,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자신이 멍 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이정은 화들짝 놀라 액셀을 밟으며 궁시렁거린다.
“아, 젠장! 나도 유빛나처럼 고상한 클래식 취향 한번 가져보려 했는데……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네!”
도대체 클래식만 들으면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 것일까.
“뱁새가 황새 쫓아다니려다 가랑이 찢어지지. 이래서 사람은 생긴 대로 살라는 옛 조상 말이 있는 것이야! 암, 그렇고말고! 조상님 말씀은 다 옳아!”
그렇게 자신의 분수를 겸허히 받아들인 이정은 곧바로 음악을 돌려 즐거운 비트의 힙합으로 바꿔버린다.
그제야 잠이 확 달아나며 운전할 맛이 생겼다.
하지만 서울의 교통 체증이란 늘 그렇듯 열심히 가는데도 제자리걸음이었다.
결국 이제 막 액셀 밟는 발에 힘을 주려던 찰나, 이정은 다음 신호를 대기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아오! 이 좁아터진 나라에 뭔 놈의 차가 이렇게 많아? 물론 나도 그놈 중 한 놈이지만…… 에이, 빨리 나오길 잘했지. 자칫 잘못하면 약속 늦어서 빛나한테 또 시달릴 뻔했네.”
막히는 교통 체증까지 예상하고 일찍 나온 덕에 이정은 이제 신호를 받아 한 블록만 가면 빛나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즐거운 비트에 몸을 맡기고 고개를 까닥 손가락을 까닥하며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이정은 이제 막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빛나를 보았다.
“어라? 저거 유빛나 아냐? 어허…… 저 기집애가, 이쁘긴 이쁘네. 심지어 횡단보도도 사뿐사뿐 날아가냐. 근데 나랑 약속 잡아두고 이 시간에 어딜 가는지?”
그렇게 이정은 빛나의 모습을 뿌듯한 표정으로 뒤좇았다.
그러다 그녀는 보고 말았다.
빛나가 들어선 커피숍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여자의 모습을 말이다.
순간 이정의 눈이 커졌다.
눈을 다시 비비고 보아도 분명 원준의 어머니 송 여사다.
고상한 척, 우아한 척하지만 누구보다 사악한 그녀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대로였다.
뒤에서 다시 한 번 빵, 소리가 들렸지만 이정은 신호를 받아 직진할 수가 없었다.
사악한 송마녀에게 또 한 번 빛나가 당하는 꼴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보겠단 말이다.
그래서 이정은 뒤 운전자의 화를 무릎 쓰고 우회전을 해서 커피숍 근처에 차를 세웠다.
“미쳤나 봐. 미쳤어! 아니, 저 사악한 마녀를 도대체 왜 만나? 이제 무슨 관계라고?”
그렇다. 예전이야 원준의 어머니였기에 빛나가 가만히 당하고 있었지만 이젠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아닌가!
하지만 빛나의 성격상 웃어른에게 함부로 못 할 것이니, 이쯤에서 정의의 사도처럼 이정이 나서주는 게 맞았다.
“젠장, 가만 안 둬! 우리 빛나 또 울리면…… 지 눈에선 피눈물 나게 만들어줄 거야!”
이를 갈며 차를 세우고 성난 걸음으로 커피숍까지 갔다.
얼마나 발을 세게 내 딛었는지 발바닥이 다 아플 지경이다.
그런데, 그렇게 커피숍 앞까지 간 이정은 그 유리문을 열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아니, 아니지…….”
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지금 당장 이정이 쳐들어가 빛나를 데리고 나올 수는 있지만, 그 후폭풍을 피해갈 길은 없었다.
물론 송마녀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그렇다면, 송마녀의 인질로 잡혀 있는 빛나를 가장 극적으로 탈출시킬 수 있는 이가 그녀 자신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있지. 있다마다…….”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린 이정은 씨익 웃으며 재빨리 그 커피숍에서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물론, 이번 일에 어느 정도 리스크는 있다.
그가 개입하는 순간, 송마녀의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고 더불어 빛나의 과거도 따라 나올 것이다.
빛나의 아픈 과거를 들춰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이정의 생각은 위험스러울 만큼 Bad idea였다.
그러나.
“위승현 말고, 송마녀를 한 방에 날려버릴 사람이 또 있어?”
시원한 사이다를 바란다면, 이것은 단연 신이 주신 기회이자 Good idea다.
게다가 이정이 지금까지 지켜봐온 승현의 성질머리라면, 그동안 빛나가 당한 것까지 기꺼이 갚아 주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정의 입가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어차피 Good idea와 Bad idea는 한 끝 차이…… 일단 저지르고 보자!”
그렇게 이정은 벌써부터 십 년 묵은 체증이 한 방에 내려가는 짜릿함을 느끼며 핸드폰을 들었다.
“아, 승현 씨 안녕하세요. 저기, 제가 말이죠…….”
***
무거운 정적을 깨고 빛나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래. 물어봐줘서 고맙구나. 하지만 우리 이젠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는 사이잖니?”
그녀는 무릎 위에 있는 손을 지긋이 거머쥐었다.
예전에야, 원준 때문에 참았다지만 이젠 그와 미련 하나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눈앞에 있는 송 여사를 참아 낼 수 있을까.
그것은 빛나에게도 위험천만한 도전이었다.
“그렇죠.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구요.”
“그래. 너도 알고 있지? 우리 원준이…… 이혼 생각하고 있는 거.”
그녀는 송 여사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말을 해도 지금 송 여사에겐 들리지 않을 테니까.
오늘도 이 여자는 제 할 말을 하기 위해 왔다.
제 아들과 헤어지길 종용했던 그때처럼.
“알고 있구나. 그럴 줄 알았다.”
“오해가 있으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원준 오빠가 이혼을 결심한 데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책임이 없다고? 감히…… 네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 그럼 우리 원준이가 딴 여자가 생겨 조강지처를 버린다는 말이니? 원준이 성격 몰라?”
“부부 사이 일은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원준이 만났니?”
순간 빛나는 할 말을 잃었다.
원준을 만났냐고? 물론 만났다.
하지만 그것은 원준에 의해 이루어진 일방적인 만남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결혼한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만나져?”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게 아닙니다. 원준 오빠가 찾아왔어요. 이혼하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평정심을 유지하던 송 여사가 옆에 있는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는구나. 깔끔하게 갈라섰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뭐니? 원준이가 왔어도 네가 안 만났어야지!”
“…….”
“이제 원준인 가정이 있는 남자다. 이거, 불륜이야!”
“지금 저 때문에 원준 오빠가 이혼을 결심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아냐? 너 아니면 원준인 그런 생각을 할 애가 아니다. 꼭 그랬다. 그 착한 것이 네 일이라면 꼭 그렇게 어긋났어! 그러더니…… 기어이는…….”
“절 찾아오신 이유가 원준 오빠의 이혼이라면 번지수 잘 못 찾으셨습니다. 늘 그랬듯, 원준 오빠를 다독이셔야죠.”
“내가 그 방법 안 써봤겠니? 제아무리 달래도 그 결심을 돌릴 수가 없더구나. 자, 말해보렴. 이혼하겠다고 찾아온 원준이한테 뭐라고 한 거니?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이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뭐…… 라고?”
예상치 못했던 빛나의 대답에 송 여사는 다소 당황한 듯싶었다.
그리고 빛나의 인내심은 결국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혼해도 오빠가 돌아올 곳은 없다고! 그러니 이혼하지 말라고요!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이런 상황…… 그렇게까지 원준 오빠 몰아세운 거, 바로 다름 아닌 어머님이세요!”
“이게 지금 내 탓이라는 말이니? 그 말은 곧, 너랑 결혼시켰어야 했단 말로 들리는구나.”
“네. 그러셨어야죠. 그랬다면 적어도 원준 오빠 입에서 이혼이란 말은 안 나왔을 테니.”
“감히,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물 컵을 쥔 송여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빛나는 평온을 되찾은 느낌이다.
마치 모든 세상이 멀어진 것마냥 주변이 진공 상태가 되었다.
“그거 아세요? 어머님은 제게, 감히…… 라는 말을 참 자주 쓰셨어요. 그땐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천애 고아니까. 부모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건…….”
“근데 말이죠! 이젠…… 더 이상 못 듣겠습니다.”
“뭐…… 라고?”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 아파할 사람이 생겨서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빛나는 승현을 떠올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하지만 송 여사는 그런 빛나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본다.
“지금…… 누가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니?”
“네. 저…… 사랑하는 사람 있습니다. 당연히 원준 오빠는 아니구요. 그러니 어머님 소원대로 그 이혼 말리세요. 이혼해도 오빤 돌아올 곳이 없으니까.”
“참, 어이없구나. 누가 돌아가! 우리 원준인 이혼해도 너한테는 안 간다!”
과거 유빛나라면 이쯤이면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송 여사가 무서워 숙이는게 아니다.
사랑한 남자를 낳아준 어머니니까, 그 존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숙였던 고개였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눈앞에 있는 이 가식덩어리 여자에게 고개를 숙여야 할 이유가 없어졌단 말이다.
원준을 배려해 그렇게 하기엔, 이미 승현의 존재가 너무 커져버렸던 탓이다.
그래서 빛나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딜 가!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다!”
“전 끝났습니다. 다시는 제 사무실로 찾아오시겠단 협박 같은 거 하지 마세요. 저도 더 이상 가만있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떠나야 했다.
하지만 송 여사는 빛나가 이 자리를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았다.
돌아서는 빛나의 팔을 움켜잡아 돌려 세운 것이다.
“천애 고아 주제에…… 어떻게…… 어떻게 너 따위가 감히…….”
분명 경고했건만, 송여사는 여전히 빛나에게 ‘감히’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 화를 못 이긴 송 여사는 테이블 위에 있는 물 컵을 집어 들고 그녀의 눈앞에 뿌리려 했다.
그 순간, 빛나는 눈을 감았다.
미처 자신이 피하지 못할 물세례라는 것을 예감한 것이다.
그러나 얼굴에 뒤집어 쓸 것으로 예상했던 찬물의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힐 만큼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빛나가 눈을 떴을 땐, 미처 흩뿌리지 못한 물 잔을 든 채 놀라움에 바들바들 떠는 송 여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겼나 알아채기도 전에 송 여사를 한 번에 기죽이는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무 귀해서…… 저는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
“그러니, 이런 거 뿌리실 땐 제 허락을…… 받으셔야지요.”
그녀에겐 이상하리만치 달콤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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