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유빛나 봉인해제
2018.06.06.
“정치 자금이야.”
볼링을 친 다음 날, 빛나는 6번째 진행되는 KMK컴퍼니와의 공식적인 회의석상에서 전날 했던 중얼거림을 다시 한 번 읊어냈다.
하지만 이번엔 혼잣말이 아니다.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인 이가 세 명이나 되었으니.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야. 네 말대로라면 넌 지금 230억 원을 꿀꺽한 거물을 상대하고 있는 거니까.”
정치 이야기가 나오자 다소 진지해진 승현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빛나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의사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많이 생각해봤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돈을 빼돌렸기에 내가 못 찾는 것일까. 다양한 경우의 수에 무리수까지 둬도 도저히 못 찾겠더라고. 일반인이 돈세탁 전문 범죄 조직을 동원하지 않고서야 230억 원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순 없거든. 근데…… 그게 실수였던 거야.”
“뭐?”
“일반인이 아니었던 거지. 정치인이야.”
빛나는 다시 한 번 확신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치 자금이라야, 이 모든 게 설명이 돼.”
“그럼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람이 정치인 중 한 사람이란 말입니까?”
엘리스가 사뭇 진지하게 물어왔다.
한국에선 정치인과 엮여 좋을 게 하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물음에 빛나가 아닌 승현의 대답이 돌아왔다.
“일리 있는 말이야. 정치 자금이야말로, 제아무리 큰돈도 감쪽같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자금세탁이거든. 10억을 뇌물로 갖다 바치면, 100억 원의 사업을 추진할 수 있지. 그리고 100억 원을 들여 사업을 추진하면, 1000억 원의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게 정치니까.”
누구보다도 그 세계 심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승현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데 거기에 은지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고 많은 정치인 중에 누구냐는 거지.”
그랬다. 대한민국 정치인이 한두 명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떻게 범인을 색출할 수 있을까.
하지만 빛나는 은지의 말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어. 우린 두 가지 방법으로 움직일 거야.”
“어떻게요?”
“저번에 쓴 그 방법을 다시 적용할 거예요. 돈이 사라진 시점과 각종 일련의 사건들을 연결시켜봐야죠. 예를 들어, 선거 시점이라든지…… 아니면, 주요 사업이 추진된 시점이라든지. 돈을 따라 역추적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저번에 안 됐잖아요.”
엘리스의 물음에 빛나가 대답했다.
“저번엔 다른 곳에 그 공식을 적용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된 곳에 써먹을 생각이에요.”
“그럴듯하네. 좀 광범위하긴 하지만.”
빛나의 말에 승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빛나가 말한 대로라면 그런 역추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을 추려 범인의 범위를 좁혀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르다. 진짜 범인 색출 작전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으니.
“그리고 또 하나, 범인이 제 발로 찾아 올 수 있도록 우린 미끼를 던질 겁니다.”
“미끼?”
“네. 미끼.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장 부장님을 만나봤어요. 그래도 어떤 미끼가 가장 먹음직스럽게 생겼는지는 알아봐야 하니깐.”
그랬다. 빛나는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장 부장과 면담을 했다.
그래도 공금 횡령으로 줄줄이 엮여 들어간 간부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느낀 사람이기에 그의 의견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빛나는 미끼를 골라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팔팔하고 싱싱한 놈으로.
“박충식 이사. 우린…… 그 사람 흔들 거야.”
“흔든다고?”
은지가 반문했지만, 그 한마디에 승현은 모든 걸 이해한 듯 웃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내 여자지.
“그들이 침묵하는 이유, 뭐겠어요. 몇 년 만 살고 나오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철저히 입을 닫고, 철저히 계획한 거죠. 하지만 그렇게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한 번 간 균열은 다시는 복구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 견고함에…… 작은 균열을 일으킬 거예요.”
“그건, 내가 하지.”
승현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처했다.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한 사람은 나야. 그러니, 그것도 내가 하는 게 맞아.”
그가 가장 적합한 후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이번 일에는 상당한 리스크가 있다는 점에서 빛나의 미간이 모아졌다.
***
두 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난 후, 승현은 피곤한 듯 뒷목을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며 잠시 후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 갔어?”
그의 사무실로 들어선 누군가를 본 승현의 미간이 부드럽게 풀렸다.
“응. 할 말이 있어서…….”
빛나였다. 회의가 끝난 후 내려간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온 모양이다.
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서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그러자 오랜만에 플랫 슈즈를 신은 그녀와 얼추 눈높이가 맞아 떨어졌다.
“해. 들을 준비 되어 있어.”
하지만 빛나는 선뜻 이야기하지 못하고 붉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내가 하지 말라는 짓 하고 싶은가 보네.”
“음…… 어떻게 알았지?”
“너 그럴 때면 꼭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시선 떨구고 우물쭈물하는 거 알아?”
“흠…….”
“이번엔 뭔데?”
어제 강복실표 딱밤 때문에 미처 올리지 못한 머리가 그의 이마 위로 부드럽게 흩어져 있었다.
덕분에 멋스러운 슈트 차림과는 달리 한층 장난기 넘치는 그의 얼굴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 사무실을 떠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기세다.
“나, 이번 일 엄청 중요한 거 알고 있는데…… 다른 것도 좀 하고 싶어서.”
“뭐?”
“강석훈, 그 자식…….”
“…….”
“내 손으로 잡을래.”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와는 달리, 빛나의 목소리는 단호히 마무리되었다.
이쯤 되자 무슨 이야기인지 대번에 눈치챈 승현의 눈동자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날 이후 그 더러운 인간말종과 빛나가 엮이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물론, 조심할게. 내가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데, 못 참겠어. 그 자식이 애들 옆에 있는 것만 상상해도…… 소름이 돋아.”
승현을 설득시키려는 듯 빛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런 노파심이 무색하리만치 그는 눈웃음과 함께 픽, 새는 웃음소리를 흘린다.
“그럼 그렇지. 오래 참는다, 했다.”
“뭐야,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이거 가지고 몇 날 며칠을 고민했는데?”
“이리 와봐, 유빛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미는 그의 모습에 빛나의 심장이 쿵했다.
매일 보는 모습인데도, 왜 매번 이렇게 새로운지 모르겠다.
그녀가 다가가자 승현은 빛나의 허리를 부드럽게 휘어감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피곤한 듯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그들은 아무런 말없이 한동안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가만히 있었다.
이 넓은 세상에 마치 두 사람만 존재하는 듯 고요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잠이 든 듯 조용했던 승현이 낮은 목소리를 흘려냈다.
“우리……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자.”
“정…… 말?”
“대신, 상처 받지 말기.”
“상처? 그런 인간말종 잡아넣는데, 웬 상처?”
그녀의 말에 승현이 부스스 얼굴을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머리를 느슨하게 틀어 올려 귀 밑으로 슬쩍 비어져 나온 머리카락이 그녀의 길다란 목 근처를 간질이고 있었다.
승현은 그런 머리카락을 그녀의 귓가에 걸어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냥, 혹시나 하고. 유빛나, 생각보다 맘 약해서 툭하면 우는 거 내가 잘 아니까.”
“내가 언제 울었는데?”
“울진 않았지. 대신 울고 싶어지면 술을 마시잖아. 그러곤 네 발로 기어 우리 집으로 들어오고.”
“흠, 그건 좀 잊어줄래? 딱 한 번이었다고!”
“왜? 네가 그날 밤 얼마나 예뻤는데?”
그날을 떠올리는 듯 승현의 입가에 웃음이 걸리자 빛나는 치, 하는 소리를 냈다.
거짓말 말라는 소리다.
그날 네 발로 기어들어가 그가 얼마나 식겁했는지는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뒷날 아침, 얼마나 곤욕이었던가.
하지만 승현은 달랐다.
물론 그날 심장 끝이 저릴 만큼 화들짝 놀란 건 사실이었으나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녀가 얼마나 예쁜지 새삼 깨닫게 된 날도, 바로 그날이었으니까.
“진짜…… 예뻤다, 유빛나.”
“…….”
“그 모습이 너무 이뻐서, 나 그날 밤새 잠 못 잤다.”
“무서워서 못 잔 건 아니고?”
“아냐. 너무 이뻤어. 그거 아나? 유빛나, 술 마시면 네 발로 기는 거 말고 술버릇 또 하나 있던데.”
“그…… 으-래?”
전혀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승현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불안하다.
다른 이들의 입에서, 기억하지도 못할 술버릇이 흘러나올 때면 늘 최악으로 끝이 났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번엔 뭘까.
남들이 눈치채지 못한 또 하나의 술버릇,
바로 그건.
“다 벗더라. 훌훌…… 속옷만 남기고 전부 다.”
“헛…….”
그랬다. 그녀는 침대에 들어가기 직전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인 움직임으로 서서히 옷을 벗었더랬다.
그날 밤, 어슴푸레한 달빛에 비친 그녀의 벌거벗은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승현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그때, 생각했지. 이 여자…… 딴 놈 앞에서 술 마시면 절대 안 되겠구나, 하고.”
“내가 아무 때나 벗는 건 아니고…….”
“그리고 또 알았지. 이 답답한 블라우스 안에 숨겨진 가슴이 얼마나 예쁜지…….”
꿈길을 걷는 듯 몽롱하게 중얼거린 그가 블라우스에 가려진 그녀의 가슴으로 곧장 입술을 내렸다.
겨울 블라우스라 꽤 도톰한 두께감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뜨거운 입술은 마치 벌거벗은 가슴에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뜨거운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날 밤 빛나가 보여준 건, 탐스러운 가슴이 전부가 아니었으니.
“늘 적당한 길이감에 가려져 있던 이 다리도…….”
꽉 잠긴 목소리로 말을 끝내기 무섭게 승현은 빛나의 스커트를 허벅지 중간까지 끌어 올리며 얇은 스타킹에 가려져 있는 다리를 부드럽게 더듬어 올라왔다.
어느 순간보다 뜨겁게 달아오른 그로 인해 품안에 안긴 그녀의 피부가 다 녹아 없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쯤에서 그에게 현실을 인지 시켜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빛나는 승현의 곱슬거리는 머리에 입을 맞추며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 사무실이야.”
“알아. 안다고…… 젠장!”
그의 입에서 밉지 않은 욕설이 튀어나오자 빛나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낮은 울림에 승현은 초인적인 자제력으로 그녀의 가슴에 머물렀던 입술을 떼어 그녀의 목덜미로 가져갔다.
그러곤 잔뜩 달아오른 제 몸을 대변하듯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숨결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어쨌든 유빛나, 내 말의 요지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거야.”
“정말 그래도 돼?”
“당연하지. 그날 밤 답답한 네 옷 훌훌 벗어던지는 모습 보고 생각했어.”
“…….”
“많이 참고 살았구나. 저 답답한 옷 속에 네가 가진 욕심…… 꽁꽁 감추며 살았구나. 내가…… 해방시켜줘야겠구나.”
그 말에 빛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단 한 번도 옷 속에 감춰진 그녀의 몸을 보고 이렇듯 애틋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어느 누구도 빛나에게 감춰진 또 다른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보육원 출신의 잘나가는 이혼 전문 변호사.
누가 봐도 성공한 삶이 아니었던가.
부러움을 샀을지언정, 정형화된 틀 속에 갇힌 그녀를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승현이 그녀를 제대로 보았다.
답답한 블라우스 속에, 적당한 길이감의 스커트 속에 감춰진 그녀의 탄탄한 욕망을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감동 그 자체인데 승현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유빛나…… 봉인해제.”
“봉인해제?”
“그 자식 잡으라고. 이제부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고…….”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세상이 단 한 번만이라도 온전히 그녀의 편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언제나 타협의 연속이었고, 그 타협은 그녀의 희생이 뒤따랐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녀에게 다른 세상을 선물하고자 한다.
온전히 그녀가 주인인 세상.
헛된 꿈이라도 좋다.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한마디에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믿어보기로 했다.
***
다음 날.
승현은 교도소에 들려 면회 절차를 밟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앉아 있는 동안에도 훤칠한 그의 모습은 교도소 간수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문이 덜컹 열리며 누군가 죄수복을 입은 채 걸어 나왔다.
KMK컴퍼니의 전 박충식 이사.
현재 5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면회가 있다는 이야기에 일단 나오기는 했으나, 의외로 전혀 알지 못하는 승현의 모습에 박충식은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던가?”
한 번 보면 절대 잊기 힘든 얼굴, 그래서 박충식은 확신했다.
눈앞에 있는 이 훤칠한 남자와 자신은 초면이라는 사실을.
“아는 얼굴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알아가야 할 사이일지도 모르죠.”
“…….”
“좋은 쪽으로 말고, 나쁜 쪽으로.”
묘하게 날이 선 말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도 혹할 만큼 매력적인 승현의 얼굴에 박충식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것이 실수였다.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안녕하세요. 저는 KM 미국 본사에서 파견 나온 위승현입니다.”
“아, 그 마담 M이라던…….”
“제 소문이 벌써…… 교도소까지 퍼진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승현의 모습에 박충식은 알게 모르게 전율했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풍기는 기운이 여간 만만치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KM 본사에서 공금 횡령 건에 대한 진위여부를 다시 한 번 조사하고자 파견했다더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여기까지 찾아온걸 보면.
박충식은 이쯤에서 승현에게 기가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는데 이 어린 놈 때문에 모든 게 틀어지면 그동안 공들여 쌓은 탑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셈이니까.
“무슨 소리를 듣고자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검찰에 다 이야기했고, 지금 충분히 죗값을 치르고 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소이다.”
차분하지만 강경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러한 박충식의 완강함에 승현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한국 검찰도 무너트릴 수 없을 만큼 견고했던 그들이 아니던가.
이런 오리발쯤이야 당연한 일이다.
“지금 ‘충분히’라고 하셨습니까?”
“뭐?”
“미회수 금액 230억 원.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지요. 그 일로 인해 회사가 철수를 선언하며 고통받은 직원들의 나머지 인생. 그건…… 누가 책임져야 할까요.”
“억울하면 법에 항의해.”
“억울하다뇨, 저는 그냥 다만…… 열 받아서요.”
승현은 테이블 위에 있는 길다란 손가락을 마치 카운트다운을 하듯 까닥이며 박충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앳된 얼굴에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자칫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타고난 기운이 무게중심을 제대로 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생긴 것과는 달리, 커다란 태산과 마주한 기분이란 말이다.
박충식은 저도 모르게 잠시 승현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순간, 승현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한다.
걸렸다!
빛나가 왜 박충식을 미끼로 선택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천성이 모질지 못해, 쉽게 무너지는 타입이다.
뿐만 아니라 5명의 관련 인물 중 유일하게 가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지킬 게 많은 사람은 그만큼 두려움도 큰 법.
만일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가차 없이 움직이리라.
그리고 그러한 빛나의 계산은 여지없이 들어 맞아가고 있었다.
“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 압니다.”
“누가…… 그래? 뒤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다 알고 왔으니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다만 확인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뭘 확인해?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래야…… 더 억울할 테니…….”
웃음기가 사라진 승현의 눈매가 파랗게 곤두섰다.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주어, 목적어 없이 아주 개판이다.
하지만 승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가뜩이나 손발이 저릿한 박충식에게 서서히 상체를 기울였다.
매력적인 그의 얼굴을 투명한 유리 너머로 바라본다는 것.
더불어 그 검은 눈동자에 맺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
생각 이상으로 섬뜩하여 소름이 바짝 돋았다.
그렇게 박충식과의 거리를 좁힌 승현이 서서히 그 입술을 열었다.
“과연…… 그분도 이런 충성도를 알아주실까요?”
“뭐?”
너무도 은밀하여,
“정치하시는…… 그분…… 말입니다.”
단 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임.
하지만 그 순간 박충식은 두근대던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 나온 줄 알았다.
그가, 알고 왔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이 여유로움이,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자신감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무릎에 놓인 손을 꼭 틀어쥐었다.
그리고 애써 표정을 가다듬어 보려 했지만 승현의 예리한 눈은 그러한 박충식의 변화를 단번에 잡아챘다.
불안한 시선 처리가, 바짝 메마른 입술이, 모든 진실을 대변하고 있었다.
분명, 정치인이라는 한마디에…… 박충식은 반응했다.
빛나가 제대로 짚었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자 승현은 만족스럽다는 듯 슈트 단추를 잠그며 느린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을 때조차도 넓은 어깨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일어선 승현을 눈앞에서 마주한 박충식의 눈에 충격이 스쳤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확인해주셔서.”
“뭘…… 확인해? 나는 아무 말 안 했는데?”
절박했다.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 후 박충식은 승현의 진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거 아십니까? 당신은 다섯 사람 중 제가 유일하게 면회를 온 사람입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이 어린 놈은 단순히 키만 큰 놈이 아니라는 걸.
가까스로 마무리 지은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들어 올리며, 떠들썩하게 등장한 놈이라고 했다.
때문에 마담 M이란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순간, 그들에게 경고 아닌 경고가 들어왔었다.
묵언수행.
절대 흔들리지 말 것.
그러나 눈앞에 직접 마주한 승현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만큼, 잔잔했던 박충식의 마음에도 거침없는 돌팔매질을 하고 있었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결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의 계획에,
“진짜 죗값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자그마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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