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52화 (52/94)

52. 실마리를 잡다!

2018.06.03.

원준은 안내를 받아 온 클럽 VVIP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인상을 찌푸렸다.

취향 한번 참 저질이다.

술을 마셔도 고급스럽고 교양 있게 마실 수 있는 자리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이런 자리란 말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서 나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그는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두 명의 여자들이 온갖 교태를 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원준의 손위 처남이자 서울 시장인 강민식의 장남 강석훈이 앉아 있었다.

“왔어?”

거만하고 경박하기 그지없는 인간 말종.

원준은 석훈과 섞이기도 싫다는 듯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자리를 고집했다.

그러자 석훈은 곁에 있던 여자들을 다 내보내버린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원준의 선한 눈동자가 검게 일렁였다.

“조용하고 좋은 자리 놔두고, 왜 여기까지 불러내십니까?”

“조용하고 좋은 자리? 그런 게 어떤 자린데? 클래식 음악 흘러나오고 정복 입은 사람들이 서비스하는 그런 자리? 벽에도 귀가 있다고 했어. 귀한 말 나누는데 여기만큼 기밀 유지 확실한 곳은 없다고.”

그렇게 말하며 석훈은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는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조금 달라 보였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할 예정인 모양이다.

그리고 원준은 그 이야기의 주제를 미리 짐작해볼 수 있었다.

“이혼 생각하고 있다면서?”

석훈은 술 한 잔을 따라 원준에게 내밀며 물어왔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주제라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네.”

“왜?”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합니까.”

그래.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나.

너 같은 새끼와 한 집안 식구라는 게 치욕스러워 이 지긋지긋한 게임을 이제 그만 끝내려 한다고.

원준은 석훈이 내민 언더락 잔을 손에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알잖아. 희진인 나랑 달라. 우리 아버지랑도 다르고. 걘, 꼭 우리 집 식구가 아닌 것처럼 착해 빠졌더란 말이지. 그래서 어렸을 땐 주워 온 동생 아닌가 의심도 했었어. 툭하면 울고, 뭐 하면 상처받고. 처음엔 좀 짜증났는데 나중엔 그게 예뻐 보이더라고. 나랑은 달라서.”

석훈의 말에는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원준의 아내 강희진은 기존 강씨 집안사람이 아닌 것처럼 착해 빠졌더랬다.

그래서 사랑 없는 결혼이라도 이 여자라면 할 만하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결혼이란, 결코 두 사람만의 인생이 아니었으니.

숨이 막혔다.

원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인간말종도 한몫을 했지만, 무엇보다 우연치 않게 마주친 박 실장의 손에서 흘러내린 빛나의 사진 한 장을 본 순간 머릿속이 암전되었더랬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박 실장이 그녀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박 실장은 간혹 처의 본가에서 어쩌다 한 번씩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원준이 아는 바로 박 실장은 공무원도 아니다. 그렇다고 회사 소속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간혹 그의 장인인 강민식이 그를 ‘박 실장’이라고 부른다는 것.

때문에 오다가다 한 번씩 마주치면 그 섬뜩한 기운에 더욱 기분이 나빴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의 손에서 빛나의 사진이 나왔으니 원준은 쉬이 지나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의 과거를 장인이 캐냈나 하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귀한 딸, 얼마 알지도 못하는 사위에게 시집보내니 그 정도 뒷조사는 했을 거라고.

하지만 언젠가 저녁 식사 후 티를 마시는 자리에서 TV에 나오는 빛나의 모습을 보며 강민식이 지었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사위의 과거 여자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분노다.

세상 인자한 모습에 정직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장인이지만 원준은 그를 마주한 순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중성이 대단한 사람이다.

간혹 보이는 잔인한 살기에 선한 원준의 기운이 맥을 못 출 만큼.

그때였다.

그가 이혼을 결심한 건.

“이혼, 하지 마. 아버지 귀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안 걸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 나니까 이렇게 좋은 말로 타이르는 거야. 알지? 아버지 아시면…… 너, 다시는 이 자리에 발도 못 붙여. 병원? 그것도 끝이야. 그냥 이 바닥에선 생매장이라고.”

“저희, 부부 문제입니다.”

“여자 생겼어?”

“아뇨.”

“그럼, 과거…… 찐하게 사귀었다던 그 여자 때문인가?”

순간, 원준은 멈칫했다.

그의 당혹스러움을 귀신같이 눈치 챈 석훈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뭘 그런걸 가지고 놀라고 그래? 무슨 비밀이라고. 우리가 그 정도도 모르고 희진이 시집 보냈을까 봐? 뭐, 아버지 손까지 올라가진 않았지만 우리 어머닌 알고 있지. 어머니 알고 있으니 내가 아는 건 당연한 거고.”

원준의 순해 빠진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석훈은 히죽거렸다.

그러더니 그는 담배 한모금을 깊이 빨아들이며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곤 중얼거리듯 말을 흘렸다.

“내가 요새 관심이 가는 여자가 생겼어. 잊고 있다가 얼마 전에 만났는데 처음 만날 때보다 두 번째 만나니까 더 탐이 나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내가 그 여자를 어디서 본 것 같더란 말이지.”

“그걸 왜 저한테…….”

“보육원 출신에, 성공한 이혼 전문 변호사…….”

순간 원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석훈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과거 여자에 대해?

아니면 석훈이 최근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그 여자에 대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냐?”

의미심장하게 웃는 석훈의 모습이 귀신처럼 오싹했다.

그리고 잠시 후 원준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유빛나. 알고 봤더니 이 여자가 그 여자더라고. 우리 어머니가 가진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후덜덜하던걸? 사진은 실물 반도 못 따라가. 후훗. 인생…… 참 재밌지?”

그의 과거와 석훈의 현재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소름이 돋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언더락을 쥔 원준의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온몸의 혈관이 거미줄처럼 그의 몸을 조여왔다.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지 뭐야? 그냥 한번 본 사진에는 웃는 모습이 전부였거든. 날 봤다 하면 파르르 곤두세우니, 웃고 있는 그 사진과 같은 여자라곤 생각지도 못했지.”

그랬다. 얼마 전 석훈은 처음 본 빛나의 웃는 모습에서 원준의 과거를 찾은 것이다.

“그 여자가 너 살린 거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가 직접 탐을 내보니…… 네 심정이 이해가 돼서, 그래서 지금 이렇게 널 불러다 좋게 타이르는 거라고.”

이래서 사람들이 살인을 하는구나.

원준은 태어나 처음으로 살인 충동을 느껴보았다.

하지만 그런 원준의 반응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석훈은 무자비한 성품답게 반이나 남은 담배를 잔인하게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희진이 버리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포기해.”

“…….”

“그 여자…… 내가 가질 거니까.”

그런데 그 순간, 희한하게도 분노로 인해 바들바들 떨렸던 원준의 손이 빠른 속도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검게 가라 앉아 있던 그의 눈동자도 점차 제 빛을 찾아갔다.

이상하다.

왜일까.

잠시 후 원준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달콤살벌한 승현의 모습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승현의 모습이 분노가 극에 달하는 이 상황을 무섭게 안정시켰다.

과연, 석훈이 빛나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승현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아니다.

두말하면 잔소리, 절대 아닐 것이다.

그래, 덤벼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렇게 설쳐라.

네가 설칠수록 그 미친개는 더 악착같이 물고 놓아주지 않을 테니.

원준은 좀 전에 석훈이 내민 언더락 잔을 지긋이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형님, 그거 아십니까? 빛나가…… 요즘 개를 한 마리 키우더군요.”

“뭐?”

“그것도 아주 잘생긴 투견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원준은 승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느꼈던 위압감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투견? 거 참, 취향 한번 살벌하네. 근데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란 말이지.”

석훈은 투견을 키운단 말에 빛나의 우아한 외모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원준은 흔들던 언더락 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오늘따라 씁쓸한 알콜이 목울대를 싸하게 긁으며 지나갔다.

그런데도 자꾸 헛웃음이 났다.

만일 승현이 제대로 물고자 한다면, 석훈 따윈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원준이 장담컨대, 머리 좋은 승현은 단연 장인인 강민식의 주리부터 틀어쥘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는 원준 자신도 피해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늘 이 순간 그는 결심했다.

“형님, 걱정 마십시오. 저…… 이혼 안 합니다.”

“그래? 꽉 막힌 줄 알았더니, 이제야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네.”

석훈은 비릿한 웃음을 내보이며 잔을 치켜 들었다.

그러자 원준도 제 잔을 치켜들며 씁쓸하게 웃었다.

만일 그들이 빛나를 건드린다면 착한 아내와 그녀 사이에서 원준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빛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굳이 그가 나서지 않아도 될 만큼 지랄 맞은 투견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이혼에 대한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대신 그는 착한 아내의 곁을 지킬 것이다.

물론, 그 여파로 인해 그 또한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겠지만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당연하죠. 이젠 저도…… 어쩔 수 없는 강씨 집안 패밀리인 것을요.”

그렇게 착하기만 하던 원준은 세상사는 법을 배워갔다.

빛나를 버린 죗값, 기꺼이 달게 치를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가 보고 싶었다.

***

그 시각, 만인의 여인 유빛나는.

“우우…… 웃!”

입술을 쭈욱 내밀며 긴장감 넘치는 신음소리를 발사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복실의 외침을 끝으로 그녀는 절망하고 만다.

“스-뚜-라이크!”

“대박!”

“이럴 수가!”

“말도 안 돼-에!”

빛나는 제 머리칼을 틀어쥐며 은지와 함께 얼싸 안고 춤을 추는 복실을 노려보았다.

복실이 운동을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젠 하다하다 못해 볼링까지 잘 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젠장, 졌다!

그것도 볼링 170 친다는 승현과 편먹고, 오늘 처음이라는 왕초짜 복실을 상대로!

“에헤라 디야- 이겼따! 이겼따!”

“아이고, 우리 복실이! 세상에, 못하는게 없어. 어쩜 이리 이쁠꼬.”

이정의 괴한 습격 사건 이후, 급격하게 복실과 친해진 은지는 오늘을 기점으로 복실당을 창설해도 될 만큼 개복실 추종자가 되어버렸다.

그저 복실을 바라볼 뿐인데도, 은지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진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기가 막히다는 듯 바라보며 승현이 투덜댔다.

“진짜, 말도 안 돼! 아니, 어떻게 저런 희한한 자세로 스트라이크가 나올 수 있어? 빛나야, 이게 말이 돼?”

하지만 진자는 말이 없으니.

그야말로 게임이라면 죽어도 이겨야 하는 빛나의 맨탈은 패자의 충격으로 인해 유체 이탈을 시도 중이다.

“어떻게 공이 그렇게 휘어? 너, 거짓말 아냐? 이거 처음 아니지?”

“아니, 나 처음인데?”

“거짓말! 그런데 어떻게 공이 오른쪽으로 던져도 중앙으로 휘고, 왼쪽으로 던져도 중앙으로 휘어 들어가냐? 그거, 고난이도 기술이잖아!”

곤두선 승현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결과를 뒤집진 못했다.

복실은 패자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손가락을 호호 불었다.

아주 딱밤으로 살인이라도 할 기세다.

“언니…… 대라. 그러게 나랑 살자고 했지. 남자는 믿을 게 못 된다고.”

처음 게임을 위해 편을 나눌 때, 복실은 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당연히 빛나와 짝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빛나는 당연하다는 듯 승현을 택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그것이 복실이 이 게임에 목숨을 건 이유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복실아, 잠깐만…… 내가 말이지.”

빛나가 더듬더듬 말하며 뒤로 물러섰으나 복실은 양보할 기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사이를 검은 그림자가 위엄 있게 파고들었다.

“잠깐!”

승현이었다.

누구보다 복실의 위력을 제대로 알고 있는 그로서는 빛나의 이마를 절대 내어줄 수가 없었다.

복실이 때리는 딱밤의 위력은 고작 딱밤 정도가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맨입으로 복실의 딱밤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조건은,

“우리 돈으로 하자. 자…… 얼마면 되겠니?”

“헛, 돈은 너한테 부질없다는 것 다 안다. 나는 딱밤으로 할련다!”

씨알도 안 먹히는 것이었다.

“대라, 언니! 딱 두 대만 때릴게. 응?”

“아아-악!”

“잠깐! 잠깐! 잠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복실은 그 사이를 죽기 살기로 막아선 승현 때문에 잠시 멈칫해야만 했다.

복실이 빛나에게서 조금 떨어지고 나서야 승현은 벌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빛나 이마는 안 된다! 그래도 얘, 변호산데!”

“뭐, 인물로 변호사 해먹고 살아? 마빡 좀 까인다고 변호사 하는 데 전혀 지장 없거든?”

“어허! 그래도 안 된다! 안 된다!”

“게임은 게임이야! 넌, 비켜! 언니 먼저 까고, 다음이 네 차례니까!”

복실이 다시 무섭게 달려들려 하자 다급해진 승현이 급기야는 초강수를 두고 만다.

“내가 대신 맞을게!”

“뭐라고?”

“내가, 내가…… 빛나 몫까지 다 맞겠다고.”

승현은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며 이야기 했지만 복실의 위력을 아는 그의 음성이 절로 떨렸다.

“좋다. 그럼 총 열 대.”

“아니, 왜 열 대야? 빛나 두 대, 내 것 두 대! 총 네 대지!”

“이자 붙었다. 그래서 열 대! 싫음 말고.”

엄지와 중지손가락에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위협적으로 바라보는 복실 앞에서 승현은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그래도 빛나를 복실의 딱밤 희생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복실이 손, 되게 매워.”

“알아. 너보단 내가 더 잘 알지. 내가 어디 쟤 손에 한두 번 맞나.”

“힝…… 이럴 줄 알았다면 딱밤 내기 안 했는데.”

빛나는 승현의 이마를 매만져주며 안타까워했다.

이 잘생긴 이마에 보란 듯 혹 내지는 멍이 들리라.

어쩌면 이마가 뚫릴 수도.

“가서 시원한 맥주 한잔하고 있어라. 여긴 내가 해결할게. 설마…… 어렸을 때부터 친군데, 죽이기야 하겠어?”

걱정 말라는 듯 말은 그렇게 했지만, 씩씩한 그 말투와는 달리 승현의 까만 동공은 불안감으로 인해 검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손을 잡고 차마 떨어지지 못하는 빛나를 은지가 살짝 끌어내 카페테리아로 발길을 옮겼다.

“야, 진짜 우리 복실이…… 못 하는 게 없네.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야. 그치?”

은지가 물었지만 빛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페테리아로 향하면서도 남겨진 승현을 걱정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야, 좀 살살 때려라.”

“그런게 어딨어? 엄연히 내긴데!”

“이마 뚫릴까 봐 그래! 뚫릴까 봐!”

“설마 뚫리기야 하겠어? 평평한 이마가 좀 가라앉긴 하겠지만.”

“헉! 야, 안 돼! 안 돼! 흔적이 남으면 안 된다고! 나 요새 머리 올리고 다니는 거 알잖아!”

“그럼, 다시 내려라. 나는 양보 못 하니.”

“아악! 진짜 기집애가! 야, 너 이러니까 평생 짝사랑만 하는 거야! 여자가 좀 여자답게 조신해야지!”

“이…… 이 빌어먹을 씹장생이! 이마, 폭파당하고 싶나!”

아, 저 빌어먹을 주둥아리!

이번에도 그의 백만 불짜리 주둥아리는 역시나 매를 벌었다.

보나마나 서로 밀고 당기며 멱살잡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빛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누구보다 두 사람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말린다고 말려질 인간들이 아니다.

시간이 해결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맥주 두 잔이요. 시원하게.”

목이 탔는지 은지가 먼저 빛나 것까지 주문을 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빛나는 우연히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찾다 한쪽에 틀어진 TV 모니터를 보게 되었다.

맞춰진 채널은 뉴스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밑에 나오는 자막이 대충 어떤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늘 그렇듯 우리 주변엔 훈훈한 이야기보다는 인상을 찌푸릴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이, 나쁜 새끼들. 우리 같은 서민은 어쩌라고 잘사는 놈들이 저러는지 원…….”

맥주 두 잔을 내밀며 카페테리아 주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빛나는 그 맥주를 입가로 가져가며 다시 시선을 TV로 돌렸지만 남자의 말에 여전히 귀가 곤두섰다.

“정치하는 놈들은 죄다 도둑놈들이야. 한두 푼 해 처먹은 게 아니라니깐…….”

나라가 어지러운 만큼 세상에 대한 푸념과 원망이 가득 들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빛나는 번뜩 스치는 생각에 들고 있던 맥주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만다.

놀란 은지가 동그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한동안 빛나의 눈은 온갖 상념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딱 0.5초의 순간이 지나자 그녀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치…… 자금…….”

“뭐라고?”

빛나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은지가 되물었다.

하지만 그 되물음에 대답대신 또렷한 혼잣말이 들려온다.

“정치 자금…… 이었어.”

이상하다 생각했다.

은닉한 재산 찾는 데 거의 신의 경지에 가까운 그녀의 눈을 피해 그 큰돈을 숨기다니.

전문적인 돈세탁을 위해 커다란 범죄 조직이 관련되었을 거란 억측까지 해보았다.

그 정도 화이트칼라 범죄라면 이혼 전문가인 그녀의 손을 떠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야 알겠다.

전문적인 범죄 조직이 아니라, 누구보다 정직해야 할 정치인이 그 범인이라는 것을!

그제야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희뿌연 연기가 깔끔하게 걷히는 것 같았다.

은지가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빛나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드디어…… 잡았다.”

그렇게 빛나는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시각.

약 15미터 떨어진 곳에서 승현은,

“아악! 딱밤을 주먹으로 때리는 법이 어딨어!”

고작 딱밤 한 방에 장렬하게 전사 중이었다.

#dar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