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51화 (51/94)

51. 탐이 나는 여자

2018.05.30.

“저 여자, 내 여자. 이게…… 그렇게 어렵냐고.”

그때도 그랬지만, 마주한 승현의 얼굴은 그 생김과는 전혀 상관없이 위협적이었다.

석훈도 체격이라면 밀리지 않았지만 승현은 단연 특출 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겨오는 이 기운은 훤칠한 신체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날 파티에선 자신이 술에 취한 덕에 밀린 기 싸움이라 생각했지만, 맨정신에 승현을 마주한 석훈은 그에게서 풍기는 이 으슬으슬한 기운이 타고난 것임을 깨달았다.

두 사람의 눈썹이 곤두섰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석훈이 승현에게 밀리고 있단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끝이 분명한 아몬드형 눈매는 서릿발처럼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잘생긴 그의 입매는 웃고 있었다.

이런 순간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승현과 석훈의 차이였다.

“이봐, 진정하라고. 난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야. 봉사 활동을 하러 온 거지.”

일단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날의 악몽은 진한 교훈으로 남아 석훈에게 인내심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석훈은 이제 승현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때는 도대체 이 놈이 어떤 놈이길래 제 아버지나 외삼촌인 김병훈 검사조차도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몰아세우나 궁금했었지만, 이젠 아니란 말이다.

이놈은, 현재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마담 M이 아닌가.

언론을 움직일 수 있는 힘.

그것만큼 무서운 건 없었다.

때문에 석훈은 숨을 죽인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언젠가는 이놈을 기어이 밟아버리리라 결심하며.

“그래? 봉사 활동 하러 온 거면 열심히 빨래 좀 밟아주다 조용히 돌아가면 되지, 왜 내 여자랑 애들한텐 손대고 지랄이야?”

“내 역할은 애들을 돌봐주는 거지, 빨래하는 게 아니거든.”

“웃기네. 너 같은 새끼한테 애들 못 내줘.”

“…….”

“그러니, 빨래할 거 아님 조용히 돌아가. 쳐 맞기 전에.”

어쩜 저토록 살벌한 말을, 저렇게 웃으며 하는 것일까.

웃으며 사람을 협박하는 것.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승현에게 질 수 없었다.

태어나 한 번도 지고 산 적 없고, 설사 졌다 하더라도 꼭 만회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석훈에게 오늘은 기회였다.

“후회…… 할 텐데…….”

드디어 석훈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 모습에 승현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이 녀석은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 것일까.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휴, 오셨어요!”

빛나와 함께 세탁실에 있던 이정숙 수녀였다.

그녀는 세 사람 사이에 도는 긴장감을 포착하고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일단 안으로 들어오셔서 이야기하시죠.”

난처한 듯 이정숙 수녀가 승현과 석훈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제야 승현은 꼭 틀어쥐고 있던 석훈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이정숙 수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석훈은 그에게 잡혔던 손목이 아프다는 듯 제 손목을 한번 더듬으며 입가에 거만한 미소를 흘렸다.

그 모습에 승현은 주먹을 꼭 틀어쥔 채 중얼거렸다.

“아! 저거, 저거. 다시 봐도 내 과네. 골치 좀 아프겠는데.”

그 말에 빛나가 물었다.

“네 과라고? 네 과가 뭔데?”

그러자 승현은 짜증이 난다는 듯 미간을 모으며 대답했다.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어 처먹는 청개구릿과.”

***

“뭐라구요?”

이정숙 수녀의 말을 들은 빛나는 너무 놀라 의자에서 튕겨 일어났다.

곁에 있던 승현은 말없이 입만 꾹 다문 채다.

그 자리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승현의 마이너스 기운에 밀려 조금 멀리 자리 잡은 석훈뿐이었다.

“지금 저 사람이…… 그러니까 저 사람이…….”

너무 기가 막혀 빛나는 말을 차마 마무리하지도 못했다.

이에 이정숙 수녀는 미안한 눈동자로 석훈을 바라보며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읊어냈다.

“그래. 맞아. 지방 자치 단체에서 후원하는 프로그램 심사 대상에 추천해주신 분이 바로 저분이셔. 원래는 우리가 그 조건에 해당이 안 되는데, 저분이 힘을 써주셔서…….”

그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 빛나는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한낱 범죄자가 그녀의 아이들에게 키다리 아저씨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무슨 일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오해가 있다면…….”

“아닙니다, 수녀님. 오해가 아니라 과거에 제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그러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개과천선했으니 이분들도 저한테 기회를 주시겠지요.”

터진 주둥아리라고 말은 잘한다.

누가 보면 엄청난 대인배인 줄 알겠다.

하지만 승현은 석훈의 말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무반응이었다.

여기서 유일하게 산 사람처럼 팔짝팔짝 뛰는 건 빛나뿐이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보곤, 이정숙 수녀는 재빨리 자리에 일어났다.

“빛나야, 우리 가서 차나 한잔 마시자. 응?”

두 사람이 빠지고 나니 사무실에 싸늘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제야 석훈은 자신이 승현과 둘이 남겨졌단 사실을 깨닫고는 본능적으로 의자에서 튕겨 일어났다.

“흠, 그럼 난 이만 나가봐야…….”

겁을 먹어서 도망 가는 게 아니다!

오늘의 갑은 승현이 아닌 석훈이니까!

그렇게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승현의 목소리가 조용히 그의 뒷덜미를 파고들었다.

“개과천선이라…….”

느릿하지만 참으로 섬뜩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딴 거 안 믿으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애들한텐 떨어져 있어라. 너랑 애들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이 있는 거 내 눈에 보이면…… 그땐…….”

“…….”

“너 죽고, 나 산다.”

그 와중에도 본인은 살겠단다.

참으로 그다운 협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협박이 왜 이렇게 와 닿는 것인지, 석훈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꼭 틀어쥔 채 사무실을 나서야 했다.

하지만 석훈의 시련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채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복실을 마주해야 했으니.

“응, 너 잘 걸렸다! 안 그래도 일손이 하나 모자랐는데…… 아주 딱이네!”

***

빛나는 영유아실에 앉아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정숙 수녀가 했던 말이 자꾸 머릿속에 되새김질되고 있었다.

-우리한텐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야. 과거에 무슨 잘못이 있건, 이번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줬으면 좋겠다.

-원장수녀님 기대가 많이 크셔. 후원만 받으면…… 늘 돈에 조바심 안 내도 되니까.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이 절로 꼭 틀어쥐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그런데 그때 문소리가 들리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전혀 위화감이 없는 그 움직임에 빛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 인간은?”

그러자 승현은 한쪽 구석을 손가락질하며 석훈의 존재를 알려준다.

“응. 복실이가 밀착 마크하고 있지. 애들한텐 절대 접근 못 할 거야.”

그가 가리킨 곳으로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기어이 이 추운 날 꽁꽁 언 땅을 뒤엎어 화단을 정리하겠다는, 의지의 한국인 강복실을 볼 수 있었다.

더불어 그 불굴의 의지를 아낌없이 불사르며 점점 더 높아지는 복실의 언성에, 어깨를 움찔움찔하며 열심히 삽질을 하고 있는 석훈의 뒷모습도.

빛나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승현은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때까지도 빛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저런 인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를 가는데, 따스한 손길이 그녀의 발에 와 닿았다.

본능적으로 발을 움츠린 빛나가 승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좀 전에 보니까, 너 맨발로 뛰어나왔더라.”

“아…….”

“피가 나더라고.”

상황이 너무 급해 그녀는 자신이 맨발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발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는데도 아픈지 몰랐다.

그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픈지도 몰랐을 발이었다.

마치 제 몸이 아닌 것처럼, 그 통증도 느낄 수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주인도 느끼지 못하는 그 통증을 온전히 느끼고 온전히 바라보는 이가 있다니.

승현은 그녀의 양말을 벗겨내고 따뜻한 스팀 타월로 피를 닦아 내었다.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알고 나니 유난히 쓰려왔다.

마치, 지금 그녀가 처한 이 어이없는 상황처럼.

“신경 쓰지 마. 네가 신경 써야 할 건, 지금까지 그래왔듯 우리가 하는 일이 전부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

“하지만…… 애들을 지키는 건 내 몫이야.”

“지금까지는.”

“…….”

“이제부턴 그것도 내 몫이야. 저런 새끼한테 애들 안 내줘.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알아볼 테니 넌 신경 쓰지 마.”

“승현아…….”

“너도 내가 지키고, 애들도 내가 지켜.”

그 말이 끝났을 때 빛나는 자신의 상처에 덧붙여진 유아용 밴드를 바라볼 수 있었다.

눈물이 났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승현이 말을 마친 순간 정말 아무것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얹힌 듯 가슴을 막고 있던 그 무엇이 시원하게 내려간 느낌.

빛나는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곱슬거리는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곤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눈높이를 맞추었다.

“고마워.”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진심에 승현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말려 올라갔다.

“그럼 나…… 키스해도 돼?”

아, 이럴 땐 마냥 애 같은 이 남자……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언제부터 허락받고 했다고?”

“허락받고 한 건 아니지만, 이 분위기에선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이런 말을 할 땐, 매력적인 그의 눈꼬리가 살짝 쳐진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빛나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근심 걱정이 없어진 그녀의 말간 모습은 여지없이 그의 이성을 흔들었다.

화장기 하나 없이 수수한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다.

결국 인내하지 못한 승현은 그녀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조심스레 입술을 겹쳐왔다.

그리고 그 뜨거운 열기는 순식간에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빛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에 묻은 손을 움직여 그를 더욱 끌어당겼다.

그리고 거침없이 자신을 열어주었다.

가슴 한쪽이 물기를 머금은 듯 뭉클해졌다.

누군가에겐 공포의 대상이고, 누군가에겐 그저 까칠하기만 한 이 남자가, 그녀에게만은 온전히 따스했다.

그리고 그런 남자가 이젠 그녀의 아이들까지 지키겠다 나섰다.

빛나는 그 말 한마디를 의심의 여지 없이 믿어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을 헤집어놓던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물론 후끈 달아오른 방 안의 열기와는 달리, 싸늘한 창밖에선 복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째지게 울려왔지만 말이다.

“뭐야, 남자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삽질 똑바로 못 해-햇!”

***

오늘은 그가 최고의 갑인 날인데, 삽질만 더럽게 했다.

이게 모두 저 악마 같은 여자 때문이다.

석훈은 저만치에서 이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과 뛰어노는 복실을 치가 떨린다는 듯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따지고 보자면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처음부터 무료한 석훈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던 그 여자, 유빛나.

석훈은 재킷을 걸쳐 입고 나오며 앞치마를 입고 식당을 왔다 갔다 하는 빛나를 무심한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시선이 마약 같은 것이었다.

그녀에게 고정된 시선은 떠날 줄을 몰랐으니.

파티에서 봤을 때완 달리 화장기 하나 없는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뗄 수가 없는 여자였다.

매력 있는 몸매가 그러했고, 고급스러운 생김새가 그러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석훈의 흥미를 끌었던 건, 자신을 바라보던 그 맹렬한 눈빛이다.

마치 독을 품은 장미처럼, 아이를 감싸 안은 채 그를 바라보던 빛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마디로 탐이 났다.

보면 볼수록, 더 욕심이 났다.

어떻게 하면 저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그런 눈으로 내 여자 보지 말랬다. 확, 후벼 파버리기 전에.”

아, 잠시 잊었다.

유빛나를 손에 넣기 위해 넘어야 할 최대의 난관.

석훈은 적이긴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승현의 매력적인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시는 안 봤음 좋겠다. 다음에 봤을 땐 내가 널 죽일지 살릴지, 나조차도 장담할 수 없거든.”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할 수 있을까.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승현을 바라보며 석훈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더 이상 무시당할 수 없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느껴본 적 없던 석훈은 승현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한 계단 위에 서 있는 승현은 그렇지 않아도 큰 키라 석훈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아야 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지만, 이 오묘한 위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곳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이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렇게 까불어?”

그래, 묻고 싶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보복이 가능한 위치에 있다는 걸, 그는 알까?

비록 제 힘이 아닌 아버지의 힘이었지만 늘 그래왔듯 제 편에 서 있는 힘이었다.

그런데 그 물음에 단 한 번의 망설임도 느낄 수 없는 대답이 재깍 흘러나왔다.

그것도 굉장히 무심한 듯, 툭.

“강민식의 아들 강석훈.”

순간 석훈은 움찔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어?

처음엔 기분이 나빴다.

석훈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 불쾌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승현에게 자존심이 상했단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난날 그 상황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왜 석훈이 승현에게 그렇게 질 수밖에 없었는지.

언론을 움직이는 놈이다.

석훈이 제아무리 망나니라지만 언론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이놈은, 그 언론으로 협박을 했을 터였다.

그랬다. 경찰서에 그 말 많은 기자도 같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까지 그보다 더한 짓을 해도 경찰서를 유유히 걸어 나올 수 있었던 석훈이 이렇게까지 강력 처벌을 받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래. 궁금했어. 이상하게도 그땐 그 어떤 상황도 내 편을 안 들어주더란 말이지. 날고 긴다는 최고 변호사들을 데려다 놓아도 속수무책이더라고.”

“그런 걸 정의 구현이라고 하는 거야.”

“그딴 소리 집어치워. 넌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거야. 그걸 빌미로…….”

“널 협박했다? 너 지금 소설 쓰냐?”

석훈이 시작한 말을 승현이 마무리 지으며 피식 웃었다.

정말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석훈이 가진 조건은 그에게 가장 강력한 힘이었지만 때론 독이 될 때가 있었다. 바로 지난날처럼.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상대방의 신분을 알고 있으니, 어디를 물어야 치명적일지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저번엔 석훈이 물렸지만 이번엔 그가 승현을 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생각에 석훈의 입에선 비릿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궁금했지. 네가 누굴까.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을 소리소문없이 움직이나. 날고 긴다는 내 사람들을 바보 찐따로 만들면서 말이지.”

“그래서, 알아낸 게 있어?”

“있다마다. 마담 M.”

석훈은 뭔가 대단한걸 알기라도 한 것마냥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넌 내가 누군지 알고, 난 네가 누군지 몰랐어. 하지만 이젠 달라. 마담 M. 나도 이젠 네가 누군지 정확히 알거든. 그러니…… 동등한 위치에서 이제부터 시작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제대로, 역전된 상황이라고.

이제야 자신과 승현이 눈높이를 마주하게 된 것이라고.

하지만 승현의 다음 말은 그러한 석훈의 오만에 찬물을 끼얹었다.

“마담 M이라…… 고작 생각하는 게 그거냐? 그래, 나 마담 M이다. 헌데,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네가 나에 대해 아는 게 그게 전부라면 넌 절대 날 이길 수 없어.”

그랬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은 ‘절대 무기’가 될 수 없는 법.

석훈은 아직 멀었다.

그래서 승현은 착각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 불쌍한 어린 양에게 그들이 선 위치를 정확히 설명해주었다.

“그 한줌도 안 되는 권력으로, 함부로 덤비지 말란 말이다.”

“뭐…… 라고?”

“처음부터 넌 나랑 동등한 위치일 수가 없으니. 절대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승현이 팔짱을 풀며 돌아서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비쳐졌다.

“너, 이 자식…….”

억울하고 분했다.

할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그 어느 것도 단어가 되어 흘러나오질 못했다.

도대체 왜 저놈 앞에만 서면 이토록 작아지는지 모르겠다.

심지어는 제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 그를 돌려세우지도 못했다.

더불어 그가 사라진 후에도 석훈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감히, 제까짓 게 뭐라고 석훈이 가진 힘을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이라 부른단 말인가!

두고 보자.

기필코, 저놈의 잘생긴 얼굴을 밟고 일어설 것이다.

더불어 탐이 나는 그의 여자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이리라!

석훈은 두 주먹을 불끈 거머쥐며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 한 번 빛나의 예쁜 모습이 그의 시선에 콕 들어와 박혔다.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에서 석훈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

하긴, 그녀가 석훈을 보며 저런 미소를 보일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너무 환하고 너무 예뻐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석훈은 제 턱 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착각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도 익숙한 미소였다.

도대체 어디서 봤을까.

도도하고 매력적인, 게다가 요즘 한창 잘나가는 여변호사.

오늘 듣자하니, 그녀는 이 보육원 출신이다.

정말 새로운 사실.

그리고 이 흔치 않은 두 가지 조합은 언젠가 본 적 있는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집결되었다.

순간, 석훈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설마…….”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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