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50화 (50/94)

50. 저 여자, 내 여자

2018.05.27.

일요일 아침.

모처럼 자신의 집으로 온 빛나는 이른 아침부터 부산히 움직였다.

은지는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지만 이정과 복실은 빛나만큼이나 일찍 일어나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야, 오랜만에 가네.”

“넌 프랑스에서 온 이후 처음이지?”

빛나의 물음에 복실은 간단하게 묶은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진짜 오랜만이지. 간만에 몸 좀 풀겠어. 그치?”

“근데 승현 씨한텐 이야기했어?”

“응. 말했지. 오늘은 우리 세 사람이 따로 갈 곳이 있으니 집에서 모처럼 푹 쉬라고. 요즘 너무 붙어 있었더니 따로 떨어져 있을 시간이 없었잖아. 승현이도 좀 쉬어야지.”

“야휴…… 언니. 걔, 옛날부터 지 형한테 더럽게 많이 맞고 자라서 맷집도 좋지만 체력 장난 아냐. 딴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내가 인정하지. 가서 머슴처럼 실컷 부려 먹어도 될 텐데. 나랑 그 녀석 둘이면, 화단 하나쯤은 갈아엎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복실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안 될 말이라는 듯 빛나가 눈을 부라렸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일이 많아 매일 야근해. 안쓰러워 죽겠다고. 어제도 새벽 세 시 넘어서 잤을걸. 오늘은 좀 쉬게 내버려두고 싶어. 우리 셋만으로도 충분하잖아?”

“그래. 승현 씨는 빼고 가자. 어제 보니까 얼굴도 핼쑥하더라. 살 빠졌나?”

이정이 걱정스러운 듯 말하며 두 사람을 따라 집을 나섰다. 그러자 빛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되물었다.

“그래? 우리 승현이 살 빠졌어?”

“아냐? 얼굴 안 좋아 보이던데?”

이정의 말에 빛나의 눈썹이 중앙으로 모아졌다.

요즘 들어 치명적인 승현의 매력에 푹 빠져 사느라 그의 체중 변화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렇게 세 사람이 편안한 복장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하지만 주차장에 이제 막 도착한 그들은 단 한 걸음도 더 가지 못한 채 넋을 놓아야 했다.

시동을 켠 SUV 앞에 화보의 한 장면처럼 멋스럽게 기대에 선 승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승현의 모습에 복실이 이정에게 물었다.

“어디가…… 핼쑥하다고요?”

그러자 이정은 더듬더듬 대답한다.

“미안. 내가…… 망언했다.”

어제 새벽 세시에 잠이 들어 안쓰럽다는 인간 치곤 너무나 건강하고 너무나 혈색이 좋았다.

어디 그뿐인가. 세련된 재킷에 선글라스는, 넘치는 그의 허우대를 트리플 A급 연예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 그가, 놀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세 사람에게 다가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입을 연다.

“나, 어제 통화 내용 다 들었다. 흥. 나 빼놓고 좋은데 놀러가려고? 어림없는 소리.”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빛나는 잠깐 어제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이런 오해가 시작 되었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어리둥절해 있는 그녀에게 승현은 친절한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핑계 댈 생각하지 마. 어제 그랬잖아. 간만에 힐링 좀 하자고.”

아, 그 말.

간만에 힐링 좀 하자는 복실을 말을 따라 했을 뿐, 별다른 의미는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설명해줄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승현은 빛나의 가방을 확 낚아채어 자신의 차에 실었다.

그러곤 타협의 의지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한마디 한다.

“유빛나 가면, 나도 간다.”

그런데 그 말에 복실이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너 어디 가는 줄 알고 이렇게 빼 입었냐?”

“좋은 데. 좋은 데 간다며!”

“후회할 텐데.”

“안가고 후회하느니, 가보고 후회하는 게 나아.”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물론 빛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보호 본능이 99프로였지만 말이다.

“저기 승현아, 그게 아니라…….”

빛나가 사실을 말하려 했지만 복실이 막아섰다.

그러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좋아. 가자. 우리 승현이도 몸 풀어야지. 암! 풀어야지! 힐링 해야지! 가자, 자- 가자, 위승현!”

복실은 그렇게 말하며 승현을 운전석에 밀어 넣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구겨 넣었다.

따라 나선 건 그지만, 일단 이렇게 밀려 올라타고 보니 불현듯 싸한 느낌이 뒤통수를 훑고 지나갔다.

불안하다, 개복실.

승현이 검게 선탠이 된 유리 너머로 복실을 노려보았지만 정체 모를 불안감에 대한 원인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곁에 올라탄 빛나를 보니 가기 전부터 벌써 힐링 되는 느낌이기도 했고.

평소와 달리 편안한 캐주얼 차림의 빛나는 한참 어려 보이는 것도 모자라 이젠 예쁘단 말이 지겨울 만큼 사랑스러웠다.

아마도 저놈의 당고 머리 때문이리라.

선글라스 속 그의 눈매가 만족스럽게 빛났다.

감히, 나를 떼버리고 셋이서만 좋은데 가려고 했겠다?

이런, 안 될 말씀!

바늘 가는 데 실 가고, 유빛나 가는 데 위승현 가는 건 당연지사!

그는 상쾌한 마음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약 45분 후, 자신이 어디에 서 있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한 승현은 잠시 넋을 놓았다.

힐링 할 수 있는 좋은 곳이라 하여, 온천이 있는 고급 리조트쯤이나 되는 줄 알았다.

요즘 과한 업무로 지친 빛나가 괜히 생고생하는 이정과 복실을 데리고 요양이나 즐기려 한 줄 알았단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승현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빛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내려서자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이 동시에 몰려 들었다.

“와아- 누나 왔따-아!”

그랬다. 그들이 모처럼 힐링을 하기 위해 방문한 곳은 다름 아닌 빛나가 있었던 그 보육원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조카인 예준을 몇 번 봐주기는 했지만 체질적으로 아이들과 맞지 않는 승현으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쩐지, 힐링하러 가는 사람들 치곤 옷차림이 몹시도 소박하다 생각했다.

게다가 복실이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그를 데리고 올 생각을 할 때부터,

뒤통수를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에 몸이 떨릴 때부터,

미리 알아 봤어야 했단 말이다!

그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하는 건데!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한숨을 내쉬고 있는 승현에게 복실이 다가와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야, 백만 불짜리 주둥아리…… 안 내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

아오, 젠장!

역시나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어딜 가나 치명적인 그는 이번에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대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승현은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 그를 가운데 두고 아이들은 온갖 추측을 난사한다.

“아저씨, 연예인이에요?”

“아냐. 연예인. TV에서 이런 얼굴 못 봤어.”

“유명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

찌지직!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그의 자존심에 실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나는 뭐가 됐든 톱A급 아니면 안 해.”

덕분에 유치하게 아이들을 상대로 반격도 불사하는 중이다.

물론 씨알도 안 먹히는 반격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연예인이라고요?”

“아니. 아니라고. 연예인,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연예인에 비해 꿀릴 게 없다는 말이지!”

“그럼 옷차림이 왜 이래요?”

아, 이래서 애들과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

물론, 보육원을 방문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라는 건 누구보다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격탄을 날리는 아이들의 호기심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근데 아저씨, 우리 빛나 누나랑은 무슨 사이예요?”

게다가 따박따박 아저씨 타령이다.

심히, 기분 나쁘다.

“야, 네가 몰라서 그러나 본데…… 나 아직 어리거든? 이제 서른한 살이야. 근데 왜 빛나는 누나고, 나는 아저씨냐?”

아직은 아이들이라는 걸 안다.

많이 먹어봐야 겨우 열 살 남짓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전부였으니.

그런데 아이들이 하는 말에 더 열 받는 건 왜 일까.

그건 아무래도 이 아이들은 얍삽한 성인들과는 달리 거짓 없이 진실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리라.

그의 앞에 모여 한참이나 큰 그를 적대적으로 올려다 보이는 이 아이들은, 그야말로 아이들이 아니라 작은 악마 같았다.

“그래서…… 빛나 누나랑은 무슨 사이라고요?”

아니다. 악마 같은 게 아니라 악마 그 자체다!

승현은 그중에서도 그를 노려보다시피 올려다보는 당돌한 꼬마 아이 하나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곱슬거리는 머리에 큰 눈을 가진 남자 아이다. 하지만 유려하게 모아진 그 큰 눈의 끝이 이상하게 친숙한 아이였다.

“내가 빛나랑 무슨 사이면 뭐 할 건데?”

“남자친구 아니죠?”

“맞다면?”

“거짓말.”

요놈의 자식 봐라?

당돌하다 못해 오만해 보이는 아이의 태도에 승현은 눈썹을 곤두세우며 팔짱을 낀 채 이야기 했다.

“거짓말 아닌데.”

그러자 아이도 이에 맞서겠다는 듯 팔짱을 끼며 그의 말투를 흉내 낸다.

“거짓말 같은데.”

아이들은 천사라던데, 도대체 천사 같은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승현은 이 작은 악마로 인해 자신의 혈압이 터지기 일보직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참자. 참자. 애를 상대로 화를 낼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이를 악 물며 빛나를 찾아 돌아서려는데, 그의 등 뒤로 꽂히는 다음 한마디에 돌아서던 발길이 뚝 멈추어버렸다.

“빛나 누나 스타일 아닌데…… 아저씨, 혼자 누나 좋아하는 거죠?”

이런, 발칙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악마 같으니!

“너 이름이 뭐냐?”

갑자기 아이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유승헌이요. 왜요?”

“그냥, 너 쫌 잘생긴 것 같아서.”

툭 던지듯 무심코 한 말이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튀는 외모가 진심으로 그러하기도 했고.

하지만 팔짱을 끼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모습에서 승현은 소름끼치도록 친숙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알아요. 제가 좀 치명적이긴 하죠.”

이런, 젠장!

***

“음, 의외로 승현이가 애들이랑 잘 노네.”

빛나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승현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물론 실상은 스무 살 이상 차이 나는 아이들과 알량한 자존심 대결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어라? 언니, 쟤…… 승현이랑 닮았다! 어렸을 때 승현이랑 이미지가 비슷한데?”

복실이 승현의 앞에 있는 사내아이를 가리키며 신기하다는 듯 킥킥 웃었다.

빛나는 복실의 손끝이 향한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우리 승헌이? 쟤가 인물이 좀 훤칠하긴 하지.”

“이름도 승헌이야? 승현, 승헌…… 비슷하기도 하여라.”

“에휴, 우리 승현이는 어딜 가나 인기야. 애들이 사람 왔다고 저렇게 몰려서 쫓아다니진 않는데.”

“좋아서 쫓아다니는 게 아닐 수도 있어.”

복실이 돌아서며 현실을 인지시켜줬지만 이미 콩깍지가 제대로 씐 빛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제 할 말만 중얼거렸다.

“아무튼…… 어딜 가나 치명적이야, 우리 승현이는.”

“그나저나, 저거 화단 오늘 갈아엎어야 하는데. 저 자식 입을 옷 없나? 저 깔끔쟁이 옷에 흙 튀면 지랄일 텐데.”

“야, 오늘 땅 꽁꽁 얼어서 삽질 힘들어. 그리고 넌 여잔데 왜 그걸 하려고 하니? 내가 날씨 좀 따뜻해지면 사람 불러다 시킬 거야. 그러니까 넌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언니, 뭐하러 그런데 돈을 써? 이렇게 튼튼한 일꾼이 둘씩이나 있는데?”

복실이 그렇게 말하며 세탁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승현에게 다가가는 복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발을 동동 굴리는 것으로 보아 복실의 제의는 역시나 씨알도 안 먹혔음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의 입가에선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사실, 까칠한 승현이 아이들과 이렇게 어울리는 모습은 의외였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은 진심 없으면 절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괜히 걱정했네.”

그랬다. 승현을 그녀의 일부인 보육원에 데려오는 건 정말로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언제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은 그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괜한 노파심이었나 보다.

빛나는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승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탈탈 털어 건조대에 널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건넨다.

“그렇게 좋아?”

돌아보니 이정숙 수녀였다.

“어머, 수녀님. 이건 제가 할게요.”

“아니야. 같이해.”

“근데 원장 수녀님은 언제 오세요? 멀리 나가신 거예요?”

“아냐. 잠깐 시청 들어가셨어. 이번 지방 자치 단체 후원 건 때문에.”

“무슨 후원이요?”

“응. 이번에 지방자체 단체에서 몇몇 기관을 상대로 후원을 할 건가 봐. 근데 거기에 우리가 후보로 올라가 있거든.”

“어머, 정말요?”

“거기서 후원을 받으면, 아무래도 개인한테 받는 것 보다는 좀 더 지속적인 거잖아. 언제 끊길 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좋은 기회지.”

“그렇네요.”

“그럼 빛나 돈 안 받아도 될지 몰라.”

“아휴, 그런 거 걱정하지 마세요. 후원 받더라도 전 그거랑은 별개니까요.”

“아냐. 원장님이 얼마나 걱정 많이 하시는데. 이젠 빛나도 살길 찾아야지. 우리 때문에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괜한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빛나는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창문 너머로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오는 날렵한 스포츠카 한 대를 보게 된다.

“응? 오늘 누가 방문하기로 했나요?”

“글쎄. 그런 연락 못 받았는데…….”

빛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차가 건물 한쪽에 주차가 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로 봉사 활동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탈만한 차량이 아니었기에 더욱 의아했다.

차량은 한쪽에 주차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그 주변으로 몰리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그녀의 눈에 비쳐졌다.

빛나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폭풍전야.

차량의 등장은 이상하리만치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왜…….

잠시 후 빛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차량의 문이 열린 순간,

그리고 그곳에서 한 남자가 내려선 순간,

빛나는 두근대던 심장이 저 발치까치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말도……안 돼.”

더 이상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놀란 그녀는 빨래를 널다 말고 세탁실을 쏜살같이 빠져 나왔다.

“빛나야!”

등 뒤에서 이정숙 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든 저 남자와 아이들을 떼어놓아야 한다!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맨발로 뛰쳐나온 빛나는 순식간에 남자 앞으로 다가가 아이들을 낚아채었다.

그러곤 제 몸으로 최대한 아이들을 가리며 남자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우리 애들한테…… 손대지 마!”

그 어느 때보다 적대적인 눈빛이었다.

자신을 향한 강한 적대심에 다소 놀란 남자는 불쾌한 듯 아이들에게 뻗었던 손길을 서서히 거둬들였다.

잠시 후 남자는 그녀를 알아보곤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인다.

“어라? 여기서…… 만나네.”

빛나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이길 바랐다.

차라리 지독한 악몽이라면, 시원하게 찬물 샤워를 하고 털어내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와 닿았다.

절대 악몽으로는 끝날 수 없는 진짜 현실이란 이야기다.

“감히…… 어떻게 네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남자는 이곳에서 그녀를 마주했단 사실이 재미있다는 듯 연신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였다.

“나를…… 알아보는군.”

어떻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겠는가!

어쩌다 꿈에서 스치듯 본다 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오고 싶어 온 거 아니라고. 저번 그 일로 벌금에 사회봉사 처분을 받아서 말이야.”

그랬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이 얼굴의 소유자, 다름 아닌 강석훈이다.

싱긋 웃는 석훈의 웃음에 빛나는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저런 인간이 이 보육원에 발을 들일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파르르 떨며 아이를 안고 웅크린 그녀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석훈이 입을 열었다.

“저번엔 내가 그대를 좀 무시해서 미안해. 알다시피 내 상태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대도 비주얼이 그쪽 계통은 아니었잖아? 하지만 이젠 알겠어.”

“…….”

“유, 빛, 나…… 변호사님.”

입꼬리에 걸린 석훈의 웃음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린 빛나는 그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며 경고했다.

“당장, 여기서 떠나!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발 디딜 생각 따윈 하지 마!”

“이런. 이런. 너무 그러지 마. 사실 나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능글맞게 속삭이며 석훈은 그녀에게 서서히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손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그보다 더 강한 힘에 의해 갈 길을 잃고 허공을 방황해야만 했다.

“말했을 텐데. 내 여자한테 손대지 말라고.”

승현이었다.

그때도 그랬듯, 이번에도 석훈은 그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승현에게 단단히 붙들려버린 것이다.

석훈 인생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웠던 그날.

그날의 악몽이 되풀이 되는 것 같았다.

“니 거, 내거, 그렇게 구분이 안 되나?”

“너 이 자식…….”

“저 여자, 내 여자. 이게…… 그렇게 어렵냐고.”

마치, 깨어날 수 없는 꿈처럼.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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