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내겐 너무 치명적인 그대
2018.05.23.
“나…… 이혼하려고…….”
빛나는 자신의 귀를 위심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원준은 처음과 다름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잘못 들게 아니다.
잘못 들은 척하고 싶을 뿐.
그녀는 열었던 문을 닫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곤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이혼 변호해달라고 온 거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원준의 눈동자가 미안한 듯 그녀를 마주 보지 못했다.
“아니면, 여긴 왜 온 건데.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나한테 왜 하는 건데.”
“모르겠어. 나도…… 내 마음을…….”
결국 그는 괴로운 듯 작은 한숨과 함께 힘겹게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으로 지금 심정을 대신했다.
“절대 너한테 변호 맡아달라는 거 아냐. 어떻게 내가 그러니. 다름 아닌 너한테…….”
“아님, 설마…… 내가 흔들릴 줄 알았어?”
“솔직히 이야기할게. 처음엔…… 언감생심 그런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며칠 전에 확실히 알았어. 나 아니면 못 살 것 같던 네가…… 그 남자 품에 안겨 나가던 그날.”
“…….”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남자 손을 잡고 돌아서던 그날…….”
“…….”
“확실히 알았어. 우리 빛나…… 멀리 날아가 버렸구나, 하고.”
원준의 선한 눈동자가 금세라도 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빛나의 눈동자엔 조금 전 볼 수 있었던 미세한 떨림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평온한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마냥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이상하다, 오빠. 나 버리고 그렇게 돌아선 남자…… 이쯤이면 고소하고 속이 시원하다 실컷 웃어줘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겠네.”
“빛나야…….”
“미련 남아서 그러는 거 아냐. 미워하는 것도 애정이 있어야 하는 거거든.”
그녀는 원준을 바라보며 기계처럼 그러한 말들을 읊어냈다.
마치 꿈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으니까.
“내 충고를 바라고 온 거라면 한마디 해줄게. 그 이혼, 하지 마. 애정 없는 결혼이라도 오빠가 선택한 결혼이야. 그리고 오빠…… 그렇게 모진 사람 못 된다는 거 내가 잘 알아. 무슨 일로 이혼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혼하면 오빤 더 괴로워할 사람이야.”
“사랑이 없는데도, 너라면…… 견딜 수 있어?”
“아니. 나는 오빠랑 다른 사람이야. 사랑 없이는 결혼도 못 해. 하지만 오빤 했잖아. 오빠가 한 선택인데 왜 오빠 와이프가 그 값을 치러야 해? 오빠 몫이야.”
잔인한 말이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견디라니, 그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원준이라면 가능하리라.
저 착하디착한 남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서 살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마. 사랑했지만 오빤 과거고, 그 사람은 내 현재야. 그 사람 상처…… 아니, 자극하고 싶지 않아.”
빛나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돌이 부근을 짚으며 말했다.
이런 순간에도 상처가 아닌 ‘자극’이란 말로 승현을 표현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단 한번, 바람처럼 스쳤던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떠한 부작용을 낳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후유증을 지금까지 앓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것은 진심 어린 충고였다.
만일 원준의 정체를 제대로 알고 그가 사무실까지 찾아왔다는 걸 승현이 알게 된다면, 그 이후부턴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이리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미안. 내 욕심이었나 봐. 나,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봐.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 그리고 이제…… 확인했으니 됐다.”
원준이 코트를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아련하고 어두웠다.
그렇게 그는 빛나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망설이다 등을 돌렸다.
사무실을 나서는 원준을 보며 빛나는 노파심에 경고를 날렸다.
“오빠,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가다가 그 사람 보게 되면…….”
“…….”
“그냥 도망가!”
농담이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한 말투였다.
그래서 웃을 수도 없었다.
원준은 그렇게 빛나의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생각할 게 많아졌다.
원래는 이런 의도로 온 게 아니었는데.
“말도…… 못 꺼내봤네.”
그랬다.
그가 빛나에게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단지 그 이유를 꺼내기가 힘들어 그의 이혼 이야기로 대신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빛나에게 남은 미련으로 이혼을 결심한 건 아니었다.
빛나가 제대로 봤다.
원준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여리고 착한 현재 아내라면 그럭저럭 살아낼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혼을 결심한 이유.
그 말 못 할 이유 때문에 원준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빛나의 회사를 벗어나 엘리베이터에 내려서는 그 순간까지도 원준은 몇 번이고 빛나에게 달려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다잡아야 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이기만 하는 자신이 한심해, 한숨이 절로 나는 순간이었다.
“아, 진짜! 왜 여기 와서 자랑질이야! 사람 염장 지르냐, 지금?”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시건방 터지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원준은 차에 타려다말고 멈칫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누가 염장 질러? 넌 안 좋아? 딸조카가 생겼는데?”
“누가 그게 싫대? 도대체 저건 왜 사가지고 와서 나한테 자랑질인데?”
승현이었다. 목소리만큼이나 잊혀지지 않는 비주얼이 원준의 시선을 가득 메웠다.
그러다 문득 너무 진지해서 웃을 수도 없었던 빛나의 경고가 머릿속을 울려왔다.
-그냥 도망가!
순간 원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린 채 재빨리 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그러곤 잠금장치까지 단단히 걸어둔 채 검게 선탠이 된 창문 너머로 넌지시 승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누군가에게 열이 받은 듯 까칠하게 굴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인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미친 거 아냐? 승희가 가만있겠어?”
“와이프인데 내가 그걸 모를까. 근데 내가 흥분이 돼서 그래. 흥분이 돼서. 이거 봐라? 완전 귀엽지? 야, 역시 딸내미건 달라. 예준이건 이렇게 예쁜 게 없었거든. 봐봐. 레이스, 완전 귀엽지!”
원준이 있는 자리에선 주차장 기둥이 오묘하게 가리고 있어 승현이 누구에게 열을 내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로 미루어 보건데 그의 매제가 분명했다.
“귀엽긴 귀엽네. 그런데 많아도 진짜 너무 많다. 샵, 털었어?
“많긴 뭐가 많아. 샵을 통째로 가져오고 싶은 거 참았구만.”
“야, 내가 그거 해봤는데…… 안 먹히더라. 하지 마.”
“해봤다고? 언제? 너…… 숨겨둔 애 있어?”
“아니. 이런 걸로 말고. 나는 꽃으로.”
“꽃?”
“성에 안 차서 꽃집 하나 털었더니, 돌아온 건 금욕 생활이다.”
“헐, 조만간 우리 형님 몸에서 사리 한 다스는 나오겠는데? 누구야, 널 이렇게 애 먹이는 여자가?”
“나중에. 예민한 여자야. 내가 소개시켜줄 때까지 딱 참고 있어. 빌어먹을 호기심 못 견뎌 사고치지 말고.”
“아, 신나! 흥분 돼. 언제 소개시켜줄 건데?”
“나중이라고 했잖아. 아, 빨리 가! 안 그래도 나 언론에 얼굴 팔려서 피곤해. 너까지 가세하면 그땐 정말 수습 불가야. 찾아오지 마! 전화로 하라고, 전화로! 제발!”
“야! 전화로 자랑을 어떻게 해! 자고로 자랑이란 건 말이야, 이렇게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적당히 약 오른 표정도 봐야 제 맛이라고!”
“장난하나! 약 오른 표정이라니! 하나도 안 부럽거든? 아, 빨리 가라고. 좀!”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상대방을 억지로 차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그때 원준은 보았다.
승현에게 밀려 어쩔 수 없이 차에 오르는 남자의 모습을.
“세…… 상에…….”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말은 지금 이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승현에게 밀려 차에 오르는 남자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재계 1순위, 한성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김우빈이었던 것이다!
한성그룹이 누구와 사돈을 맺었는지는 이 역시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
그렇다면, 뼈 속까지 스며 있는 오만함으로 자칭 ‘미친개’라며 협박을 했던 저 남자의 정체는…….
“위……태준.”
가장 지지율이 높은 차기 대선 후보 위태준의 아들이다!
승현의 정체를 알아차린 원준은 운전석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손에 스며든 땀을 닦아내며 여전히 실랑이 중인 두 사람을 넋 나간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소름이 돋았다.
이제야 승현에게서 느껴졌던 오만이, 사실은 오만이 아닌 타고난 자신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원준의 머릿속을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어쩌면…….”
굳이 그가 나서지 않아도 빛나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더 나아가 그가 예상했던 검은 손은 빛나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눈앞에 있는 빛나의 남자가 바로 위태준의 아들이 맞다면 말이다.
권력은 권력이 잡을 수 있는 법.
승현의 지랄 맞은 성격으로 보건데, 감히 그 권력은 빛도 보지 못하리라.
원준은 서둘러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오면서도 백미러를 통해 승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태어나, 가장 오싹했던 순간이었다.
***
“아, 숨 막혀. 왜 이러지?”
원준이 나간 후 빛나는 도통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료 분석해야 할 것도 많고 훑어봐야 할 판례도 많은데 머릿속에 산소 공급이 중단된 것처럼 모든 것이 아련해진다.
-나…… 이혼하려고…….
“그래서, 어쩌라고.”
저도 모르게 그 말이 흘러 나왔다.
원준의 이혼 이야기에 흔들린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을 들은 후,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김원준이란 남자에겐 눈곱만큼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은 듯.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너무 평온해진 나머지 심장이 멈춰버린 듯 제대로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에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답답증 때문에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빛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아타며 얹힌 듯 꽉 막힌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승현이 보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그렇게 KMK컴퍼니까지 찾아갔지만 엘리스는 업무용 안경을 치켜 올리며 다음과 같은 답을 흘렸다.
“본부장님, 지금 누구 만나러 나가셨는데요?”
낭패다.
빛나는 답답한 가슴을 내리치며 그곳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 더 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만해라. 분명 말했다. 그거 욕심만 가지고 되는 일 아니라고. 그냥 샵 하나 턴 걸로 만족해.”
그 목소리에 빛나는 엘리베이터 한 대를 그냥 놓쳤다.
“타고난 사업가 감각으로 하는 이야기 아님 그냥 접어둬. 잘나가는 네 이력에 빨간 줄 하나 추가하지 말고.”
승현이었다. 잔뜩 날이 선 그 말투만으로도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욕심만으로 그 일 벌이는 거면, 나는 빼주라. 괜히 불똥 튀면 피곤하니까. 나는 그 사업 구상에 대해 전혀 몰랐던 걸로.”
그의 목소리에 빛나의 몸이 절로 반응했다.
그녀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이제 막 내려서 사무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기 할 거면 그냥 좀 끊어! 제발!”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 순간 빛나는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보았다.
그래서 빛나는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그 뒤를 바람처럼 따라 들어갔다.
“승현아…….”
전화를 끊은 승현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여긴…….”
그의 얼굴을 보자 가슴을 꽉 막고 있던 체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제야 살겠다.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할 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승현을 보는게 최고의 솔루션인 모양이다.
“보고 싶어서.”
딸각.
순간 빛나의 등 뒤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열에 들 뜬 검은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술.
게다가 그녀에 의해 철저히 차단 된 밀폐된 공간.
이 모든 상황이 승현에겐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늘 그의 예상을 빗나가기만 하던 빛나였기에 승현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아, 음…… 내가 좀 치명적이긴 한데, 그래도 좀 당황스럽네. 좀 전까지만 해도…… 읍!”
순식간이었다.
그 상황에서도 제 잘난 척을 하는 그에게 빛나가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부딪친 건.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인 그녀가 거침없이 그의 입술을 점령했다.
그리고 승현은 이 앙큼한 정복자에게 기꺼이 짓밟혀 주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그의 인내심에 보상이라도 하듯 그녀의 수줍은 숨결이 그의 입안으로 사르르 밀려들어왔다.
그 말랑한 감촉이 너무 달콤해 이성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빛나는 그에게 더 깊이 파고 들기 위해 목에 팔을 두르며 감겨 왔고, 승현은 그런 그녀의 허리를 더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뜨겁게 맞닿은 입술만큼이나 두 사람 사이엔 단 1미리의 공간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한 그녀의 향이 그의 코끝을 마비시켰다.
참아왔던 만큼 미쳐버릴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빛나는 제 자신이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호흡이 목 끝까지 가빠지고 나서야 그에게서 입술을 뗄 수 있었으니까.
“휴…… 이제야 살겠네.”
그녀의 입에서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잔뜩 닳아 오른 몸으로 인해 목소리마저 잠겨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때 빛나는 느꼈다.
단순히 가슴을 억누르던 답답증만 해소된 게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멈췄다 느꼈던 심장이 다시 뛰고 있었다.
그것도 펄떡이는 그것이 가슴에 있는지 뇌에 있는지 모를 만큼 격정적으로.
그녀는 제 왼쪽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승현아, 내 심장이…… 다시 뛴다?”
“당연하지. 내 것도 이렇게 뛰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남은 그녀의 손을 끌어다 제 가슴에 올려주었다.
쿵쾅거리는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심장박동들은 그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같이했다.
정말 마치, 처음부터 한 사람의 심장이었던 것처럼.
“아직도, 내가 집에서 나가길 원해?”
그의 심장에 머물러 있던 손을 올려 그의 목을 끌어당기며 빛나가 물어왔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 앙큼한 눈동자가 너무 예뻐 승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내가? 내가 그랬어?”
“그랬잖아. 복실이가 나를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아, 그렇다면 그 말은 도로 주워 담는 걸로.”
“말은 한번 내뱉으면 절대 주워 담을 수가 없는데?”
“그럼, 유빛나 상사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내가 잠시 헛소리한 걸로.”
“좋아, 그건 인정.”
“근데 작은 방 침대 진짜로 딱딱해.”
“당연하지! 돌침대니까! 으이구, 그러니까 그 무거운 건 왜 샀대? 이사 갈 땐 어떻게 들고 가려고?”
“아, 그러게. 그게 그렇게 좋대서 샀는데 나랑 안 맞을 줄 누가 알았나. 그런 의미에서 나도 큰 방으로 이사 가는 걸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합방 계획까지 짜고 있는 승현이다.
하지만 빛나는 응큼함으로 중무장한 이 시커먼 늑대에게 져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인내심 또한 바닥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좋아. 위승현 반성의 시간 끝! 오늘부로 봉인 해제!”
물론, 그 한마디가 추후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승현이 웃었다.
“아싸! 드디어! 그 말 무르기 없다?”
“음,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무르고 싶어지는데?”
“안 돼.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고.”
“내가 그랬던가?”
“그럼 너도 미친 척하던가. 나처럼.”
“…….”
“유빛나 자존심에 그러진 못하겠지?”
최고의 응용력을 자랑하는 이 남자,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보기 좋은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모습에 빛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버렸다.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떤 순간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도대체, 언제부터 이 원수 같은 남자는 그녀 인생이 전부가 되어버린 것일까.
-사랑했지만 오빤 과거고, 그 사람은 내 현재야.
조금 전 원준에게 흘렸던 그 말이 생각났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말을 뱉어냈다.
“과거는 절대 현재를…… 이길 수 없는 법.”
그랬다. 그녀의 과거는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러기엔 이 못된 악동 같은 남자는, 그녀에게 너무나 치명적이었으므로.
“가봐야겠다. 좀 있다 저녁에 봐.”
빛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돌아섰다.
선정에게 자신의 행선지도 밝히지 않은 채 뛰어나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문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긴 팔이 열리려는 문도 봉쇄해버린다.
잠시 후, 그녀의 손등에 야릇하게 머물러 있던 그의 손가락이 가까스로 열었던 그 문을 다시 잠갔다.
딸깍.
제가 할 땐 몰랐는데 승현에 의해 문이 잠기자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무슨 소리, 가긴 어딜 가.”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꽉 잠긴 만큼 메마름이 가득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가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승현의 모습은 조금 전 봉인 해제 되었다 좋아하던 비글미 넘치는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난 피드백이 확실한 남자야.”
“응?”
“이제부턴 내 차례.”
“승현아…….”
“알지? 나 한 번 시작하면…… 잘 못 멈추는 거.”
그랬다.
그녀가 봉인 해제로 풀어놓은 것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늑대였다.
조금 전 키스로 인해 잔뜩 붉어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시선을 유혹했다.
그녀의 시선이 제 입술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승현은 목선에 머물러 있던 손을 옮겨 그녀의 턱 끝을 치켜 올렸다.
“이…… 치명적인 자식.”
“흥. 이제 알았나. 나 치명적인 거.”
승현은 짓궂은 웃음을 보이며 망설임 없이 입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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