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유혹하는 남자
2018.05.20.
여자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존재다.
평소엔 그렇게 적극적이던 유빛나가 그를 앞에 두고 이토록 기도 안 차는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다니.
‘네가 감히?’라는 승현의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그 결과, 그는 그녀가 관리하고 있는 헬하우스에서 가장 지독한 고문을 당하는 중이다.
억울함에 밤을 꼬박 지새우다시피 한 승현은 모처럼 휴일이라 늦잠을 잘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자처럼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샤워를 했는데도 머릿속이 멍했다.
벌려놓은 사고 수습하느라 늘 야근하는 것도 모자라 요즘은 빛나 때문에 그나마도 잠을 자지 못했으니 자글자글하던 그의 뇌 잔주름이 쫙 펴져버린 것 같았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멍한 느낌.
도저히 이렇게 살 순 없다!
이건 집이 아니고 생지옥이다!
굳은 결심을 한 승현은 소파에 앉아 비장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내 기필코, 이 헬하우스에서 탈출하고 말리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첫 번째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날카로운 빛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디 가?”
그랬다.
안지 말라, 키스하지 말라, 앙탈을 떠는 것과는 반대로 그녀는 승현이 제 곁에서 1미터도 떨어지는 꼴을 보지 못했다.
“어디 안 가.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 못 해 폭발 직전이거든. 스스로 해결하려고.”
“어머, 그래?”
대답하는 그녀의 볼이 빨개졌다.
그 모습에 승현이 버럭했다.
“무슨 불순한 상상이야? 운동하려고, 운동!”
“누가 뭐래?”
뭐라 하진 않았지만 표정으로 이야기했잖아!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그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제 불순한 상상을 그대로 덮어버리는 그녀를 보며 승현은 뒤통수가 뻐근하게 당기는 걸 느꼈다.
정말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승현은 잠시 기거하고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와 숨을 씩씩거렸다.
“유빛나, 네가 자처한 일이다. 후회하기 없기!”
그렇게 말하며 그는 운동복을 꺼내 입었다.
일단, 그녀를 자극하려면 무조건 섹시해야 했다.
그러므로 상의는 벗고, 아래는 그의 늘씬한 기럭지가 돋보이는 블랙 팬츠로!
그러곤 자아도취에 빠진 승현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운동할 땐 쪼매 섹시하지. 어디, 유빛나 얼마나 버티나 보자!”
자, 이제 그녀를 유혹할 차례다.
승현은 방을 나와 러닝머신 앞에 섰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리던 반응을 재깍 보여주었다.
“진짜, 운동하게?”
그 물음에 승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심한 듯 다정하게 대답했다.
“응. 요즘 운동을 너무 안 했더니 몸이 풀어진 것 같아서.”
등 뒤로 그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이 거실의 분위기가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렇게 승현은 자신의 긴 기럭지를 잘 활용해 느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러닝머신에 올랐다.
머신이 거실에 있는 탁 트인 베란다를 향해 있었기에, 그는 통유리를 통해 빛나의 움직임을 어렴풋이 볼 수가 있었다.
아직까지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상태다.
거울이 아니기에 그녀의 표정까지 세세하게 볼 순 없었지만 그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작전이 먹혀들고 있다는 좋은 징조다!
승현은 폼 잡고 뛸 수 있는 적당한 속도로 러닝머신을 작동 시킨 후 천천히 발길을 떼었다.
하지만 곧장 반응이 올 거란 그의 예상과는 달리 뒤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포착되질 않았다.
뭐야, 운동을 조금 더 격하게 해야 하나?
승현은 너무 폼에만 집중을 했나 싶어 러닝머신의 속도를 올렸다.
그렇게 속도를 올리는 사이, 침실 문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빛나는 사라지고 없다.
“그럼 그렇지. 내가 이렇게 지척에서 홀딱 벗고 있는데 저라고 편하겠어?”
아마도 지금쯤 그녀는 도도한 자존심과 끌어 오르는 본능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그녀의 모습의 선했다.
더불어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모습도.
그러게, 왜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던지나.
감히, 위승현을 상대로 Don’t touch를 선언하는 위험한 발상을 하다니!
다시는 그 발칙한 발상을 할 수 없도록 이번 기회에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리라!
그의 깔끔한 성격상 땀에 젖는 운동은 질색이다. 몸을 그렇게 혹사시키는 것도 그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승주에게 많이도 맞았더랬다.
목숨 걸고 격하게 운동하는 승주를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물론, 주로 입을 잘못 놀려 더 얻어터지긴 했지만.
기꺼이 해주리라.
이까짓 운동, 내가 체력이 안 되서 안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몸이 젖는 불쾌함이 싫었을 뿐이다.
승현은 기꺼이 빛나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싫은 땀범벅도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큰맘을 먹고 러닝머신의 속도를 과하게 올렸다.
그 결과, 숨이 차 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아직 빛나가 방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방을 나오는 순간 승현은 게임 오버라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뛰었다. 러닝머신은 그의 체질이 아니었지만 죽기 살기로 뛰었단 말이다.
드디어 방문이 열리며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런데 이거, 도통 그녀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었다.
런닝 머신이 위치한 왼쪽을 제외한 오른쪽 유리창엔 블라인드가 있어 반사된 그녀의 움직임을 좇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부스럭 부스럭.
분명 옆에 있는 건 확실한데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도 한 5분을 더 뛰었던 것 같다. 물론 그에겐 그 5분이 5년처럼 길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러닝머신을 격하게 뛰어 호흡 곤란이 오기도 전에 궁금함에 뇌사가 먼저 진행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시선을 돌렸더랬다.
유빛나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너무 궁금했으므로.
그렇게 돌린 시선 한번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야! 너, 뭐하는 거야-악!”
그녀를 시선에 담은 승현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빛나에게 물었다.
이에 빛나는 너무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한다. 심지어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나? 나도 운동하는데? 요가.”
그랬다. 그녀는 승현이 운동한다는 이야기에 저도 운동을 한 지 꽤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래서 곧장 방으로 들어가 밤에 잠시 스트레칭을 위해 깔아 놓았던 요가 매트를 옮겨 승현의 옆에 단단히 자리 매김을 하고 요가를 시작했다.
문제는 승현의 심리 상태.
잠을 자지 못한 상태라 어설픈 유혹에도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지쳐 있는 상태라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짐승이 될 수 있었다.
그나마 마지막 남은 승현의 알량한 자존심이 변태 짐승만은 허락할 수 없다 절규했다.
절대지지 않겠다! 나는 성인이다! 나는 참을 수 있다!
그녀가 안아 달라 두 팔 벌려 달려들 때까지 꾸-욱 참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빛나가 고양이 자세에서 소 자세로 넘어가며 탄력 있는 애플힙을 바로 그의 눈앞에서 치켜 올렸을 때 그는 일을 내고 말았다.
“으아-악!”
풀려버린 팔 다리가 러닝머신의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고 만 것이다.
우당탕!
그렇게 러닝머신에서 밀려난 승현은 넘치는 기럭지만큼이나 보기 흉하게 넘어졌다.
“어머, 승현아!”
놀라 다가온 빛나가 그를 일으켜 세웠지만 쪽팔림에 승현은 그대로 증발해버리고픈 심정이었다.
“그러게, 너무 과하게 뛴다 싶었지. 무슨 러닝머신을 초등학교 100미터 달리기 하듯 그렇게 뛰나.”
“뭐야? 네 눈엔 내가 초등학생으로 보이냐? 이렇게 섹시하고 잘생긴 초등학생 봤어?”
억울했다. 그의 매력이 단 1할도 먹혀들지 않은 이 상황에서도 요가복 차림의 빛나에게 이토록 흔들리는 자신이 너무 억울했단 말이다!
사랑을 할 땐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아프다더니,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아팠다. 넘어지면서 부딪친 허리가.
그러나,
그보다 더한 쪽팔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으아-악! 코피!”
그렇게 천하의 유빛나 유혹하기 작전은,
“내가 대학 입시 때도 안 흘려본 코피인데!”
피비린내 나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
“이거는, 말도 안 돼.”
승현은 다시 소파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불을 끄고 사색에 잠기면 머리가 더 잘 돌아간다 하여, 빛나가 은지와 일 이야기 때문에 저쪽 집에 건너간 틈을 타 어두운 곳에서 상황을 더듬는 중이다.
뭐, 결국은 자기반성의 시간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나는 코피까지 터졌는데 저는 멀쩡하다? 심지어 나 코피 난 걸 보고도…… 요가를 1시간이나 더 계속했단 말이지.”
인정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적이 그의 숨통을 조여 오는 상황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냉철하게 일을 처리하던 그였지만 빛나와의 관계에 있었던 늘 조바심이 났다.
결혼을 하고 죽기 살기로 싸워도 각방은 쓰지 말라던데, 그들은 결혼도 전에 각방을 쓰고 있지 않은가.
물론 결혼 전이라 당연한 일이겠지만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집에 살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엄연히 그의 집에 함께 살면서 벌써 각방이라니.
어쨌든, 저 지하 감옥보다 더한 독방 신세를 면해야 일에 집중할 수 있을 듯싶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젠장…… 불 끄면, 머리 잘 돌아간다며…….”
그런데 왜 난 눈이 자꾸 감겨.
머리가 돌아가긴커녕, 그나마 숨 쉬는 것도 멈추려 하고 있었다.
심각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들어 집에 들어와도 편하게 잠들 날이 없던 탓에 그 피곤이 쌓여 빛나가 없는 지금 몸이 노곤하게 풀려버린 것이다.
이 일을 어쩌면 좋나.
졸면 안 되는데.
절대…… 자면 안…… 되는데…….
음…….
빛나가 집에 들어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으나, 결국 승현은 소파에 있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옆으로 쓰러져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몸이 긴장을 했으나, 낯선 이라고 하기엔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또한 구름 위를 걷듯 가볍기도 했고.
본능적으로 여자의 움직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승현의 머릿속엔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알거 다 알고, 서로 좋아 죽는 이 상황에도 이런 유치한 밀당을 하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지만 애가 타는 건 그이니 반응해줄 수밖에.
며칠 전 결심하지 않았나.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 그녀가 아닌 그가 유혹하는 걸로.
물론 1차 유혹 실패!
하지만 실패 한 번에 무너질 위승현이 아니다!
자존심?
그게 뭔데? 먹는 거야?
됐어, 나 배 안 고파!
그 까짓 거, 개나 주라지?
적어도 세 번까지는 시도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는 짐짓 잠이 든 척 눈을 뜨지 않았다. 빛나의 움직임을 소리로 추적 중이었다.
안방에서 나온 그녀의 가뿐한 발걸음 소리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아무래도 그에게 기회가 온 것 같다.
내 이번에는 기필코 성공하고 말리라!
그녀가 다가와 잠이 든 그에게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승현은 이때다 싶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붙들어 순식간에 자세를 역전시켰다.
그렇게 손을 붙든 채 그녀를 끌어안고 소파에 눕힌 그는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은 채 작게 중얼 거렸다.
“너, 진짜 나 미치는 꼴 보려고 이러지?”
어라? 그런데 평소와 느낌이 다르다.
물론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그녀가 단단히 경직된 것이라 그랬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다.
이건 경직된 수준을 떠나 무릎을 들어 올려 그의 복부에 대고 공간을 벌리는 폼이 거의 프로 운동선수 수준이었다.
마치, 들러붙은 치한을 떨쳐내는 호신술의 일종을 실현하려는 듯.
야릇한 불안감에 고개를 든 승현은 제대로 기겁했다.
“흡!”
너무 놀라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가 다시 목구멍 뒤로 넘어갔을 정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는 공중으로 몸이 약 30센티미터 가량 떴다. 공중 부양 다음으로는 보지 않아도 뻔한 드라마.
쿵!
바닥으로 제대로 패대기쳐진 승현은 사무실 문을 뚫고 들어온 엘리스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서 있는 복실을 마주해야 했다.
태어나, 복실이 이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너 미치는 꼴 보고 싶냐고?”
“…….”
“그러는 너는……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 이러니?”
그렇게 말하며 복실은 느린 동작으로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섬뜩하여 이번엔 비명 소리조차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복실아, 오해야…… 오해. 착하지 우리 복실? 정말 오해라고…….”
하늘이시여,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이건 그야말로 대형 사고였다. 자칫 인명피해가 생길 수도 있는.
그리고 그의 조심스러운 예상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넌 위승현이고, 나는 앞으로 네 형수가 될 사람이야! 이 개만도 못한 자식아-!”
어디서 이런 오해가 비롯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복실을 말로 설득시킬 수 없다는 건 이미 오랜 경험으로 인해 터득한 교훈이다.
따라서,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충격 요법!
그래서 승현은 제 간을 배 밖으로 꺼낸 채 감히 감당도 할 수 없는 말을 꺼내고 만다.
“야! 누가 내 형수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너 혼자 김칫국이냐?”
순간 되는대로 주먹질을 해대던 복실이 멈칫했다.
드디어 그의 충격 요법이 제대로 먹힌 것인가?
잠시 후 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씹장생이!”
“복…….”
“뒈지고 싶나!”
“잘못…….”
“내가 오늘 그 백만 불짜리 주둥아리를 기필코 꿰매버리고 말겠어!”
퍽! 퍽!
“으아악!”
검증되지 않은 사이비 충격 요법은 때때로 부작용을 낳는다.
그 사실을 승현은 오늘 목숨을 담보로 알찬 깨달음을 얻어가는 중이다.
그렇게 결국, 빛나가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승현의 방정맞은 주둥아리는 죽음의 사자를 불러 들였다.
물론 그것이 예상치 못하게 복실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그 매를 번다는 백만 불짜리 주둥아리는 빛나의 기대감을 져버리지 않고 처참한 최후를 가져왔다.
***
뒷날 아침, 은지와 아침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향하는 빛나의 발걸음이 다소 무거웠다.
엘리스로부터 KMK컴퍼니의 자금 내역을 받았지만 특별한 패턴은 찾지 못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현으로부터 온 메시지 때문에 그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보니까 복실이나 널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오늘부터는 너네 집에서 잘래?
-작은 방 침대가 너무 딱딱해. 등이 아파.
등등. 온갖 핑계거리가 난무하지만 결국은 너네 집으로 돌아가! 였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 흥흥흥, 이다!
어제 복실에게 얻어터진 사건으로 인해 그의 주둥아리가 불러일으킬 참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네가 날 지키는 게 아니라 내가 널 지키는 거야. 어디서 나가라 말라, 명령질이야!
메시지를 보내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사무실 문손잡이를 붙들었다.
그런데 그때 선정이 그녀를 불러 세운다.
“저기, 변호사님!”
“응?”
“안에…… 손님이 와 계시는데요.”
그러면서 선정은 이상하리만치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응? 그럴 리가…… 나, 고객과 약속 있었어?”
“그게, 고객은 고객인데…….”
선정이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리는 틈을 타 빛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선정에게 머문 채였다.
참, 별일이다. 선정이 저렇게 난처한 표정을 짓다니.
그리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기 전까지는.
“빛나야…….”
“오빠가 어떻게…….”
김원준.
그가 슈트 단추를 잠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빛나는 선정의 난처했던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잠깐, 시간 될까?”
“안 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네. 안 그럼 또 찾아올 테니까.”
온순한 성격과는 달리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그의 끈기를 떠올리며 빛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마주한 원준의 모습은 몇 달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훤칠하다.
사람 혼을 쏙 빼놓는 선하디선한 저 눈동자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번엔 속지 않으리라.
그러기엔 뜨거워도 너무 뜨거운 맛을 보지 않았던가.
“하나도…… 안 변했구나.”
“할 말 있으면 얼른 하고 가.”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에 저릿한 감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긴장감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모르겠다.
“저번에 봤던 그 남자…… 애인인가? 뉴스에 나왔던 그 남자, 맞지? 마담 M이라는…….”
“뭐가 알고 싶은 건데?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오빠한테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질질 짜고 있는지?”
“난 네가 우는 걸 바란 적, 한 번도 없어.”
“…….”
“항상…… 행복했으면 해. 나 없이도.”
빛나는 꿈틀대던 손을 꼭 틀어쥐었다.
본능적으로 원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를 모르겠다.
“그런 말 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닐 텐데.”
“사과하려고…….”
“사과는 그때 이미 충분히 했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니…… 긴장이 되서 잘 안 나온다. 미안, 사람들이 내 얼굴 알아본다는 거 알면서도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어. 알다시피, 다른 곳에서 만나려고 했던 내 시도는 저번에 실패했거든.”
카드를 보냈던 그 날을 말하는 모양이다.
원준이 계획했던 낭만적인 재회는 분노한 승현으로 인해 깡그리 날아가 버렸으니 말이다.
그날을 떠올리니 승현이 더 보고 싶다.
지금 이 순간 그만 있었다면 이렇게 원준의 앞에서 떨고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원준이 무슨 말을 하던지 절대 흔들리지 않았을 테니까.
눈앞에 원준의 모습을 마주하고 나서야 승현의 존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요 며칠 그녀가 인색하게 군 게 미안할 만큼.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했다.
미련 따위가 남아서 떠는 게 아니다.
그냥 눈앞에 있는 원준을 보고 있노라면, 파혼을 선언하던 그때 그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아무리 과거라지만, 아무리 잊었다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 인생에 있어 가장의 최악이었기에.
“내 결혼식…… 왔었다며. 들었어.”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이 한계를 알려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빛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 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이만 나가줬음 좋겠어. 우리 과거를 생각하면 이런 만남…… 바람직하지 않거든. 오빤 기혼이고 나는 남자친구가 있으니, 그 사람들한테도 이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빛나야…….”
“사과하고 싶어 온 거라면 그 사과 받아들일게. 그리고 내가 잘 사는지 보고 싶어 온 거라면, 아주 잘 살고 있으니 그런 걱정 하지 마.”
“그게 아니라.…….”
“불편해. 그리고 꽃도 더 이상 보내지 마.”
“…….”
“제발…… 제발 부탁인데, 이제 그만 나 좀 놔줘…….”
그래줬음 좋겠다.
김원준이란 남자, 한때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으로 그렇게 과거의 향기로 남아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원준은 그 자리에 똑바로 서서 여전히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듯한 선한 눈동자로 조용히 입을 연다.
“나…… 이혼하려고…… .”
그 순간, 튀어나올 듯 요동치던 그녀의 심장이 뚝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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