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47화 (47/94)

47. 그녀와의 동거생활

2018.05.16.

째깍 째깍 째깍.

오늘 따라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잠을 자기 위한 최적의 공간과 무드.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현은 몇 시간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오늘 오전에 본 그 사진과 정체불명의 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거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승현은 이미 알고 있다.

다름 아닌, 유빛나가 원인이라는 걸.

빛나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방에, 그것도 그의 침실에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꽤 자극적이었다.

덕분에 그의 오감이 곤두섰다.

벽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부터 방음이 철저히 된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잡다한 소음이 다 들려오는 것 같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단 말이다!

“아오, 젠장!”

결국 그는 이불킥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따지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예민한 상황에 굳이 너까지 이렇게 나와야겠냐고!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예민한 상황’에 대한 부연 설명 없이는 결코 이 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하리란 것도 알고 있다.

결국, 참는 건 그의 몫이라는 이야기.

“에라, 물이라도 마셔야겠다.”

갈증이 났다. 이것이 진짜 목마름인지 욕구 불만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목마름이라 간주하고 싶었다.

방에서 나와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만 의존해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습관처럼 불도 켜지 않은 채 시원한 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 모를 갈증은 그의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심히, 억울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말한 ‘같이 살자’는 이게 아니었단 말이다!

그는 한 잔으로는 삭일 수 없는 열기 때문에 연달아 세 잔의 물을 더 마시고 나서야 컵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탁.

테이블 유리와 잔이 부딪치는 마찰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하지만 머릿속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던 그 냉기가 가시자 다시금 단전을 타고 오르는 열기가 그를 괴롭힐 조짐이 보인다.

세상에, 몸이 미쳐도 완전히 미쳤다.

마치 발정난 개마냥, 천하의 위승현이 이게 무슨 망신이냔 말이다!

열 받은 그는 꾹 닫힌 침실 문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독한 것…… 내가 이 정돈데 넌 멀쩡할 것 같아?”

악담을 했다. 대답을 전혀 기대하지 않은 악담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주방을 벗어나려던 승현은 달빛을 받아 음산하게 빛나는 하얀 물체와 부딪치곤 소스라치게 놀라야만 했다.

“으아-악!”

정말 오늘은 그의 심장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너, 방금 그거 나보고 한 소리니?”

진짜 간 떨어질 뻔했다. 심장은 이미 피부를 뚫고 튀어 나올 만큼 제어불가였다.

언제 왔는지 그녀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승현이 놀랐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뭐, 뭐야! 그 얼굴은!”

“뭐긴, 팩 하는 거잖아. 팩! 몰라? 해가 바뀌어, 내 나이 벌써 서른둘이야. 여자는 피부가 생명이라고. 근데 내가 요새 철없는 남자친구 때문에 하루에 하나씩 잔주름이 늘어서 말이야.”

그랬다. 인기척도 없는 그녀가 눈앞에 있었던 것도 놀라운데, 얼굴에 하얀 팩까지 붙이고 있으니 그의 심장이 멀쩡하겠는가!

순간적으로 귀신인줄 알았단 말이다!

“근데, 넌 뭐 이런걸 가지고 놀래? 팩하는 여자 첨 봐?”

“팩하는 여자를 처음 보는 게 아니라, 이 시간에 팩하는 여자를 처음 보는 거지!”

“잠자리가 바뀌니까 잠이 잘 안 오네. 내 침실이 아니라 어색하기도 하고. 그래서 팩 하면서 소파에 누워 있었어.”

빛나는 팩이 올라간 하얀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더니 아직도 놀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는 승현의 곁으로 가 그가 내려놓은 컵에 물을 따랐다.

“아, 나도 목말라.”

물을 한 잔 마신 빛나는 다시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돌아섰다.

하지만 종종걸음으로 침실로 들어가던 그녀는 뭔가 생가 난 듯 잠시 멈칫 발길을 돌리더니 승현에게 경건한 충고를 한다.

“화장실 갔다 와서 자.”

“무슨 상관?”

그가 날카롭게 되받아치자 빛나는 여전히 팩이 붙은 희멀건 얼굴로 건방지게 짝다리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물, 네 잔이나 마셨잖아. 그러니까 화장실 갔다 와서 자라고. 침대에 오줌 싸지 말고.”

맙소사!

내가 애야? 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너무 기가 막혀 감히 말이 되어 나오진 않았다.

그렇게 승현이 넋을 놓은 사이, 빛나는 다시 종종 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침실 문이 굳게 닫히고 나서야 승현은 제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호언장담한 지 불과 4시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와의 예측 불허 동거 생활 중 1할도 안 되는 소소한 부분이었으니.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던 동거 생활이 흙빛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위승현, 앞으로 갈 길이 까마득하다.

***

상쾌한 월요일 아침.

하지만 평소와 달리 승현은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빛나가 준 자료들을 훑어보았다.

간혹 머리를 긁적이는 폼이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집중력도 끝을 보나보다.

반대로, 승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빛나는 평소보다 말간 얼굴로 열심히 설명을 한다.

“이상하지?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내가 사돈에 팔촌까지 그 재산 내역을 다 뽑아봤는데도 그게 전부야.”

“이상할 게 뭐 있어? 그러니까 회수 금액이 그것밖에 안 되었던 거겠지.”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오가고 있었다.

평소엔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곁에 있는 엘리스마저 살짝 긴장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빛나는 승현의 그러한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친절한 설명을 곁들인다.

“아니지. 내가 조사한 자료는 검찰 자료와 달라. 그런데, 자세히 봐봐. 그들이 순순히 공금 횡령을 인정했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니?”

그 말에 승현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자료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뭔가에 집중하려 할 때마다 머릿속이 윙윙 울려 짧은 두통을 불러 일으켰다.

“아…….”

돌겠다.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쯤 되자 엘리스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이 중요한 시간에 승현이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녀 또한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좌불안석이었다.

결국 엘리스는 조심히 물음을 던졌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일이야.”

그래. 개인적인 일이다.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지극적인 개인적인 일.

승현은 튀어나오려는 하소연을 집어 삼킨 채 요 며칠 사이의 일을 떠올리며 눈앞에 있는 빛나를 바라보았다.

유빛나, 태어나 그렇게 발칙하고 매력적인 여자는 처음이다.

게다가 끈질기고 독하기까지 하다.

비단, 그가 첫날 그녀에게 놀란 건 놀란 축에도 못 들었다.

그 후로도 그녀와 승현의 밀당은 계속되었다.

-내 남잔 내가 지켜!

-그래도 하나보단 둘이 안전하지!

-길거리 걸어 다닐 땐, 가리자! 최대한 가리자! 내 옆으로 붙어!

그녀는 1분 1초도 그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화장실 밖도 지키고 앉아 있는 열의를 선보였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미치겠는 건, 그렇게 찰떡처럼 들러붙어 있는 빛나를 감히 안아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어쩌다 그녀의 허리, 엉덩이로 손이 가려 하면 귀신같이 알고 손등을 찰싹 때렸다.

반항도 해보았다. 항의도 해보았다.

하지만 빛나는 시종일관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니 가뜩이나 욕구불만으로 터질 것 같은 그의 몸이 쌓일 대로 쌓여 어제저녁에는 시름시름 앓는 수준까지 되었다.

그렇게 삼 일 밤을 꼬박 잠 한숨 못 자고 출근했으니 안색이 정상일 수가 없다.

함께 사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빛나와의 동거 생활이 지옥으로 변했다.

반면, 그녀는 평소보다 더 뽀얀 얼굴로 이 자리에 나타났다.

‘피곤’이란 건 전혀 알지 못하는 말간 얼굴이다.

하긴, 1일 1팩을 외치며 매일 밤 꼬박 팩을 붙이고 귀신마냥 왔다 갔다 했으니 저 말간 피부가 하얗다 못해 빛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가장 매력적인 여우 같으니!

승현은 빛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자꾸 초점이 흐려지는 눈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때, 유혹적인 상큼한 향이 코끝을 맴돌더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긴 손가락이 서류의 일부를 콕 짚어 가리켰다.

“이래도 모르겠어?”

빛나였다. 도통 집중 못 하는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문제점을 콕 짚어주는 친절함(?)을 베푼 것이다.

하지만 그 친절함이 그에겐 더한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정녕 모르는 것일까.

늘어진 정신이 확 깨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덕분에 그의 몸에도 열기가 확 피어올랐다.

“여기, 이 부분 말이야.”

“좀, 떨어져. 내가 알아서 볼 테니까.”

결국 그는 얼마 안 되는 집중력이 날아가기 전에 쥐꼬리만 한 인내심으로 그것을 붙들었다.

빛나가 상체를 들고 나서야 그는 빛나가 가리켰던 부분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그러다, 알았다.

“재산이…… 늘지 않았네.”

승현의 늘어지는 목소리에 빛나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재산이 이동은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거의 늘지 않았어. 아, 딱 한 명 있긴 한데 그 사람은 부동산 투기로 이익을 좀 본 정도야.”

그제야 엘리스는 그녀가 준 자료를 쭉쭉 넘겨 문제가 되는 그 부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러다 엘리스는 빛나의 분석력에 입을 떡 벌리고 만다.

그녀는 개인의 재산 내역을 일일이 분석하여, 재산이 불어난 원인까지 규명해놓았다.

사람 손으로 이렇게 디테일하게 정리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또한 그들은 이러한 분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깨달음을 느낀 빛나가 부연 설명으로 진지하게 마무리했다.

“돈은, 절대적인 흔적을 남겨. 형태가 분명한 자산이니만큼 연기처럼 사라질 수 없단 말이야. 그런데 그 많은 돈을 횡령한 사람들의 재산 내역이 그대로다? 이게 말이 돼?”

“그 말은 곧…… 진짜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네요.”

엘리스의 말에 빛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애초부터 그들은 예고된 희생양이었을 거예요. 생각보다 가벼운 형량도 그렇고.”

“그럼, 담당 검사 쪽도 연관이 있다 이 말씀이세요?”

엘리스의 물음에 빛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건 확실하지 않아요. 그쪽 인맥지도를 봤는데 크게 이상할 건 없었거든요. 하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질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승현을 바라보자 그는 서류철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 뒤에 있다는 건, 이미 짐작했던 사실이라 놀랍지도 않아. 문제는…… 그놈을 어떻게 잡느냐는 거지.”

“잡을 거야.”

그의 의문에 빛나가 분명히 대답했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그의 피곤한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또박 또박 입을 연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

그녀의 상큼한 체향이 그렇지 않아도 혼미한 그의 머릿속을 아찔하게 어지럽혀놓았다.

게다가 당당하고 힘 있어 보이는 그녀는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우게 한 요물임에도 불구하고 더 없이 매력적이다.

“돈의 흐름을 좇을 거야. 없어진 돈이 이들 계좌로 흘러 들어가지 않았다면, 분명 다른 어딘가로 흘러 들어갔을 테니까. 그걸 찾아야지. 그래서 말인데…….”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몽롱한 정신에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더 없이 치명적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빛나는 제 자리를 벗어나 의자를 바짝 당겨 그의 곁으로 앉았다.

이 여자, 아예 작정을 했나 보다.

시커멓게 타버린 심장, 그마저도 형체 없는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기로.

하지만 그렇게 치명적인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다음 말은,

“KMK 컴퍼니 자금 내역이 필요해. 언제, 얼마의 돈이, 어떻게 없어졌는지.”

지극히 사무적인 것이었다, 젠장!

“거기까진 분명히 알 수 있는 흔적이니까. 문제는 그다음부터지. 내가 돈이 없어진 시기와 규모를 역추적해 주변 상황과 매치시켜볼 생각이야. 그리고 가상계좌 쪽도 알아보려고. 요즘은 그런 식으로 돈 세탁도 많이들 한다고 들어서. 물론 그러기엔 횡령 규모가 너무 크긴 하지만 돈의 흐름만 좇을 수 있다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승현은 이쯤에서 빛나의 말을 끊어야만 했다.

“그만!”

그의 외침에 놀란 빛나와 엘리스가 동시에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당혹스러움은 승현이 겪고 있는 고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일단, 그가 먼저 살고 봐야 했다.

이렇게 정신없는 상황에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내가 머리가 좀 아파서 말이야. 자금 내역은 엘리스가 맞춰서 줄 거야. 그것도 최대한 빨리.”

“하지만…….”

때마침 그때 빛나도 은지로부터 호출이 왔기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승현은 빛나가 사무실을 나서는 모습을 몽롱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뻣뻣하게 긴장해 있던 근육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스가 이상하다는 듯 물어온다.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십니다. 두 분, 싸우셨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승현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그래, 차라리 싸웠음 좋겠다.

그랬다면 화해를 핑계로 그녀를 품어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건 싸운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무모하게 언론 앞에 나선 그를 벌하고자 벌인 일이라면 빛나는 승현이 아는 사람 중 현존하는 최고의 지능형 고문관이었다.

대답 없이 서류만 들척이는 그의 행동에 엘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혼 없는 움직임에 마음 한구석이 짠해져왔던 탓이다.

며칠 전 친 사고를 생각하면 오늘 이 상황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막상 빛이 나던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은 것을 보니 여자로서 모성 본능이 되살아났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승현을 보면 훤칠하고 딱 벌어진 환상적인 바디에도 불구하고 한번쯤 품에 꼬옥 안아 등을 다독여 보고픈 쓸데없는 충동이 일곤 했기 때문이다.

“고집 부리지 말고 먼저 화해하세요.”

“안 싸웠어.”

“한국 속담에 부부 싸움은 나이프로 물 베기란 말도 있다면서요?”

“안 싸웠다니까.”

“저 같아도 그런 사고 친 남자친구 가만 안 뒀을 거예요.”

“엘리스. 내 말 듣고는 있나?”

안 싸웠다니까! 안 싸웠다고!

소리라도 빽 지르고 싶었지만 부족한 잠으로 인해 뇌가 윙윙 울려왔다.

“그러지 말고 오늘 선물이라도 좀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선물?”

“네. 선물. 원래 여자는 선물에 약하잖아요.”

“엘리스. 유빛나를 모르네. 저번에 꽃 선물 잊었어? 가뜩이나 친 사고 때문에 예민해져 있는데 그거까지 겹쳐 내가 지금 이 지경인 거라고. 선물 잘못 해줬다간, 오히려 당해.”

“그러는 본부장님이야 말로 정말 유 변호사님을 모르시네요. 그런 지적인 존재는 양보다는 질입니다. 소박한 거 하나에 감동을 먹지요.”

“예를 들면?”

“남자친구가 직접 요리를 해준다던가…….”

“내가 할 줄 아는 건, 달걀 프라이밖에 없는데 그것도 감동 먹을까?”

“요리가 안 된다면, 몸으로 때우시던가.”

그 말에 지금껏 듣는 둥 마는 둥 무료해 보이던 그의 눈동자에 간만에 빛이 번쩍했다.

“몸으로? 나, 그런 거 완전 잘하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승현이 의자에서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엘리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 ‘몸으로 때우기’ 말고요!”

젠장, 그거 아냐?

결국 엘리스의 조언도 현재 처한 그들이 관계에 대해 명확한 해결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승현은 다시 복받치는 짜증에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며 화제를 바꾸었다.

“다음 미팅 건으로 넘어가자고. 이게 기획안이야?”

그는 이 메일로 온 기획안을 훑어보며 물었다.

하지만 엘리스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고작, 이건가? 그 많은 머리 맞대고 쥐어짜낸 아이디어가 겨우 이거?”

“그 브랜드는…….”

“유혹하는 여자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이런 진부한 콘셉트에 그 많은 광고비를 투자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그렇게 투덜대던 그의 말투가 갑자기 느려지며 고개가 한쪽으로 지긋이 기울어졌다.

순간 머릿속을 번뜩 스치는 생각에 작은 중얼거림을 토해냈다.

“그래. 여자만 유혹할 수 있다는 진부한 콘셉트는 버리자고…….”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남자도…… 유혹할 수 있잖아?”

그랬다. 빛나와 대치중인 이 상황의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그녀가 안겨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서…… 안기지 뭐.”

그가 찾아가면 그만이니까.

그제야 머리가 맑아진 승현은 당황한 엘리스를 앞에 두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

한편, 그 시각.

어둡고 캄캄한 룸에 들어온 한 남자가 불을 켰다.

하지만 그 불마저도 옅은 조명이라 여전히 방 안은 어두운 편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창가에 있는 암막 커튼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그때, 남자의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진척 사항은 있나?]

상대방은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하지만 남자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알아보고는 있습니다만, 전혀 흔적을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회사에 등록된 인사 서류에도 혈혈단신으로 나와요. 그나마 이름도 진짜인지, 이젠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사람이야. 어떻게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살 수가 있나.]

“유령 같은 놈입니다. 아니면…….”

[아니면?]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인물일 수도…….”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손을 움직여 노트북 모니터에 사진을 띄웠다.

그러더니 단 한 번의 동작으로 그 사진들을 의미 없이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상대방은 여전히 입을 열고 있었다.

[그동안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세상 밖으로 나온 놈이야. 그렇게 나온 이상,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 수가 없지. 더군다나, 그렇게 생긴 놈은 더더욱.]

“…….”

[더 알아봐. 분명 나올 거야. 뭐든, 놈의 약점을 잡아야 해. 분명, 놈을 움직일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 거야. 가족이 없다면…… 연인이라도!]

“알겠습니다.”

전화는 끊겼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 한 채 몸을 의자 깊숙이 묻었다.

다시 봐도 잘생긴 자식!

노트북 화면엔, 승현과 빛나의 모습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것도 얼마 전 승현에게 배달된 그 이미지 그대로.

징그럽게 잘 어울리는 커플 같으니.

남자는 선인지 악인지 모를 눈매를 들어 시선을 옮긴 후 조용히 중얼거렸다.

“물러나, 위승현. 내가…… 언제까지 막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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