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46화 (46/94)

46.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2018.05.13.

주차장 지정석에 고급스러운 SUV 한 대가 매끄럽게 주차되었다.

뒤이어 시동이 꺼지자 조용해진 차 안에서 빛나는 자신의 핸드백을 챙겨 들었다.

“오늘 너 스케줄 빡빡하지? 나는 은지랑 들어갈 테니 걱정 마.”

“복실이 오라고 해.”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은지랑 함께잖아.”

“불안해.”

“잊었어? 이제 진짜로 위험해진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머리 좋은 여자 같으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상기시키는 그녀 때문에 승현은 제가 처한 상황을 다시 한 번 인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하긴, 저쪽도 머리가 있는 놈이라면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쭈욱 숨어 있던 그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궁금할 테니.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나 데리고 살면 되겠네.”

“으이구, 또 그 이야기야? 그 이야긴 끝난 거 아냐?”

이 상황에도 또 한 번 꺼내는 ‘같이 살자’에 결국 빛나는 안전벨트를 풀며 곱게 눈을 흘겼다.

“나 먼저 내릴게.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야, 잠깐!”

“왜?”

“진짜, 그냥 가게?”

그녀는 눈꼬리가 불쌍하게 쳐지는 그의 눈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섹시한 거리, 하지만 그 섹시함이 무색하게 빛나는 그의 입술이 아닌 뺨에 키스하는 걸로 끝을 냈다.

쪽.

사랑스럽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소리가 귓가를 울려왔다.

그러자 줄 곧 쳐져 있던 승현의 눈꼬리가 단숨에 치켜 올라갔다.

“장난해?”

“안 돼. 아직 반성의 시간이 안 끝났잖아.”

“아, 진짜! 여자 친구한테 꽃 주고도 반성의 시간을 가지는 남자는 대한민국에서 나밖에 없을걸?”

“안 그래도 감탄하는 중이야. 그 보기 좋은 꽃으로 어떻게 그런 똘기를 부릴 수 있는지. 아마 대한민국에 너밖에 없을걸?”

“이제 그만하자. 나 정말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고. 자꾸 이렇게 만지지도 못하게 하면, 나 미친다?”

“그래도 안 돼. 내가 그 꽃 처분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회사 직원들한테 원 없이 나눠주고도 사무실 한쪽이 전부 꽃이라고. 도대체 돈이 얼마야? 그 돈이면 우리 애들 예쁜 옷에 맛있는 것 잔뜩 사줬겠네.”

돈 이야기가 나오자 승현은 잠시 꼬리를 내렸다.

보육원에서 자란 그녀를 생각하면 마냥 기분 좋게 꽃을 받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좋고 맛있는 걸 보면 아이들을 먼저 떠올리는 그녀였으니까.

그래서 그는 순순히 인정한 채 물었다.

“도대체 그 반성의 시간은 언제까지?”

“응. 네가 나한테 보낸 그 꽃이 말라죽을 때까지.”

“뭐야? 보낸 지가 언젠데 걔네들 아직도 살아 있어?”

“당연하지. 매일 물 갈아주고 아주 정성스럽게 관리하고 있지. 못해도 10일은 거뜬할걸?”

“아니, 뿌리 없는 꽃이 어떻게 10일씩이나…….”

기가 막히다는 듯 승현이 중얼거리자 빛나는 그의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대답했다.

“관리의 힘이지.”

그러곤 미련 없이 차에서 내려버렸다.

유리창 너머로 빛나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그는 운전대에 체념한 듯 고개를 처박았다.

“아, 유빛나, 너 때문에 내가 정말 피가 마른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마자 엘리스가 승현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저조한 컨디션에 그녀는 잠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연다.

“유 변호사님, 화…… 아직도 안 풀리셨습니까?”

“그걸 엘리스가 어떻게 알아?”

“유 변호사님 컨디션이, 바로 본부장님 컨디션이니까요.”

틀린 말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빛나의 화는 풀린 지 오래였으나, 그를 벌주기 위해 일부러 앙탈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그는 요즘 돌부처가 되기 위한 반 강제 정신 수양에 들어갔다.

“나 정말, 이런 소리 안 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어떻게 꽃을 선물한 사람한테 이런 고문을 할 수가 있는 거지?”

그랬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꽃을 선물하기 위해 화원 하나를 털었을 뿐인데 그것이 화가 되어 돌아왔다.

그것도 금욕 생활로!

어디 이게 가능할 법한 이야기인가!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고문이었다.

하지만 엘리스 또한 그런 승현을 이해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대중의 마음을 읽는 데는 귀신같은 분이, 왜 유 변호사님 마음 하나 읽지 못하고 그렇게 쩔쩔매세요?”

“뭐라고?”

“꽃집 하나를 털어 배달시키는 것보다 꽃 한 다발을 직접 들고 나타나는 걸 선호한단 이야기죠.”

“들고 가나, 배달을 하나!”

“참으로 신기한 재주입니다. 어떻게 꽃으로 사람의 분노를 살 수 있는지.”

얄미운 엘리스를 향해 눈을 한 번 흘겨주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엘리스 뒤로 김 비서가 따라 들어와 그가 책상에 앉기도 전에 노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본부장님 3시에 G사와 브랜드 미팅이 있구요, 이건 본부장님 앞으로 온 겁니다. 그럼 전 이만.”

승현은 책상에 놓인 노란 봉투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이리저리 돌려보며 김 비서에게 묻는다.

“이거, 보내는 사람이 없는데? 받는 사람도 없고.”

“아, 그런데 퀵 서비스에서 온 남자가 본부장님 거라고…….”

그 말에 엘리스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김 비서, 앞으로는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우편물은 받지 마세요. 그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본부장님께 올라가는 모든 건, 제 손을 거쳐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아, 네. 죄송합니다. 앞으론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김 비서는 멋쩍은 듯 안경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잠시 후 승현은 엘리스에게 그동안 마무리된 계약 건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시선이 자꾸 책상 위에 놓인 노란 봉투로 돌아갔다.

집중을 하지 못하는 그를 본 엘리스가 조용히 타박을 했다.

“노려본다고 봉투가 절로 말을 합니까? 그렇게 궁금하면 뜯어보세요.”

“기분 나빠서 그래. 기분 나빠서.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없는 우편물이라…….”

“결국 뜯어보실 거잖아요.”

“그렇지.”

“그럼 지금 뜯어보세요. 그래야 제 말에 집중하실 수 있을 테니까.”

“싫어.”

“왜요?”

“지는 느낌이야.”

놈에게.

아니, 이걸 보낸 이에게.

승현은 턱을 괸 채 여전히 봉투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고집이 다시 발동한 거라 생각한 엘리스가 결국 손을 뻗어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렇다면, 제가 뜯어보겠습니다. 그럼 지는 느낌 안 들죠? 져도 제가 지는 거니까.”

“아니.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오늘 안에 안 뜯을 거란 말이야! 적어도 하루는 버텨줘야…….”

“죄송하지만 제가 그 하루를 못 버틸 것 같아서요.”

그랬다. 중요한 미팅도 잡혀 있고 할 일도 밀려 있어 승현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줘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봉투 하나가 그의 집중력을 방해하고 있다니, 말이 안 된다.

기꺼이 해결해주리라!

엘리스는 승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봉투를 쫙 찢었다.

하지만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을 손에 쥐었을 때 그녀는 얼어붙어버렸다.

“뭐야? 뭔데 그래?”

승현이 물었다. 그럼에도 엘리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떨리는 그녀의 손에서 내용물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승현이 눈썹을 곤두세우며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책상을 벗어나 그녀 앞에 섰다.

“도대체 뭐길래…….”

바닥에 떨어진 그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워 돌려보았다.

하지만 사진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충격으로 인해 그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발길을 옮겨 사무실을 나와 김 비서를 다그쳤다.

“김 비서! 저 봉투 전해준 놈 기억 나나?”

그 사나운 기세에 김 비서는 안경을 한번 치켜 올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니…… 요. 그냥 평범한 퀵서비스 남자라…….”

“지금 당장, 어디 퀵 서비스인지 찾아. 이 건물 CCTV 전부 뒤져서라도 당장 그놈 찾아내라고!”

놀란 김 비서가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런 김 비서에서 시선을 돌린 승현은 제 손에 들린 그 사진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단 한 장의 사진.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승현을 비롯해 엘리스의 넋까지 앗아간 그 사진엔, 다름 아닌 그와 빛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것도 바로 어제, 원준으로부터 벗어나 차에 오르기 바로 직전의 그 모습 그대로!

“이 새끼…….”

심장이 쿵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

은지와 함께 퇴근한 빛나는 샤워를 하고 나와 냉장고에서 시원한 냉수 한 잔을 꺼내 원샷을 했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물에 어느 정도 정신이 맑아지자 오늘 하루 종일 승현이 전화 한 통화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불안하다는 핑계로 귀찮을 정도로 카톡에 전화를 날렸던 그를 생각하면 오늘은 정말 이례적인 하루였다.

“무슨 일 있나?”

“뭐가?”

복실이 물어오자 왠지 모를 불안감에 빛나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승현이가 하루 종일 전화가 없어서.”

“정말 바쁜가 보지.”

“근데 난 왜 이렇게 불안하니?”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그리고 그 자식, 성격이 지랄이라 지고는 못 살아. 적어도 뭔 일이 생기면 지는 쪽은 아닐 거야.”

그녀는 이토록 불안한데 복실은 어디서 저런 믿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물론 얼마 전 본 승현의 모습은 지금 복실의 말에 설득력을 실어주기도 하지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같이 살자’를 또 한 번 반복하는 승현의 짓궂은 모습은 여전히 불안함으로 남았다.

그냥 복실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녀가 승현을 잘 아는 만큼, 복실도 그를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복실의 말에 은지가 의외라는 듯 노트북을 두드리다 묻는다.

“어머, 승현 씨가 의외로 강단 있나 보네?”

“말도 마세요. 승현이가 자기 형한테 많이 맞고 자라서 맷집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거든요. 웬만한 놈들은 때리다 지쳐 항복할걸요?”

“헐!”

그 말에 듣고 있던 빛나도 은지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복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턱을 괴며 옛날 일을 떠올리듯 아련한 눈빛으로 중얼거린다.

“근데 쪼금 걱정되는 건 그 방정맞은 주둥아리란 말이죠.”

“주둥아리?”

“네. 예전부터 걘, 한 대 맞을 수 있는 것도 주둥아리 잘못 놀려 두 대를 맞더라고요.”

“세상에…….”

“지랄 맞은 성깔도 한 몫을 해요. 다른 데는 잘 맞으면서 제 얼굴만 건드리면 미친개처럼 달려들거든요.”

“대박!”

“얼굴은 건드리지 말래. 자기는 얼굴이 생명이라나, 어쩐다나. 어쨌든 바락바락 대들다가 주먹으로 맞을 거 발길질을 당하는 것도 간혹 봤어요.”

“우와, 정말 의외다. 솔직히 승현 씨 생긴 건, 완전 부잣집에서 귀염 많이 받고 자란 외동아들처럼 생겼잖아?”

“오, NO! NO! 걘요, 매를 버는 스타일이라 귀하게 자란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 덕에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얻었으니 웬만한 놈들이 작정하고 덤비지 않는 이상 승현이가 쓰러질 일은…… 음…… 언니?”

복실은 말을 하다말고 싸한 분위기에 고개를 들어 주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있어야 할 빛나가 없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복실의 말을 듣다 백번 공감한 빛나는 그새 마음을 고쳐먹고 안방으로 들어가 허겁지겁 가방을 쌌다.

급한 마음에 곱게 개어 넣을 생각도 못한 속옷과 간단한 옷들이 여행 가방 안에 마구잡이로 구겨 넣어졌다.

“아이고, 우리 승현이. 주둥아리로 깨방정 떨다 저세상 가는 꼴은 또 못 보지. 내가.”

그랬다.

운이 좋아 그녀와 이정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지만 백만 불짜리 주둥아리를 가진 승현에게 그런 천운이 따라줄 리 없다.

그렇게, 승현의 온갖 투정에도 끄떡없던 빛나의 마음은 복실의 몇 마디에 결국 무너져버렸다.

그녀의 남잔, 그녀가 지켜야 했으므로.

***

주차를 하고 피곤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오른 승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잠이 오질 않을 것 같았다.

머릿속이 온통 낮에 본 사진으로 가득 찼던 탓이다.

다행히도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CCTV를 통해 퀵서비스 회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덕분에 승현은 미팅 이후 직접 남자를 만났더랬다.

하지만 남자가 회사를 통해서가 아닌 현금 10만 원에 개인적으로 의뢰받은 건이라 우편물을 보낸 이에 대해선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의뢰인의 인상착의도 알 수가 없었다.

우편물은 어느 사물함에 돈과 함께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의뢰를 위해 걸려온 번호도 추적이 불가능했고.

결국, 제자리다. 적은 이제 승현의 약점을 제대로 쥐며 협박을 하는데 그는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었다.

그 사실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지만 그는 쉽사리 제 집으로 들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사진 때문에 너무 정신없었던 탓에 빛나에게 전화 한번 하지 못했다.

이토록 지치고 힘든 날엔, 빛나만 한 보약이 없는데 말이다.

“자고…… 있겠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돌아섰다.

그렇게 어둡고 싸늘한 집 안으로 들어선 승현은 긴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슬리퍼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음산하게 들려왔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거실 불을 켤 수가 없었다.

“아, 피곤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곧장 침실로 돌아서는데 거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그림자를 보았다.

너무 놀란 승현은 본능적으로 한발자국 물러서며 작은 비명을 토해냈다.

“하악! 깜짝이야!”

물론, 얼마가지 않아 그 정체에 대해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놀란 심장은 진정이 되질 않았다.

가뜩이나 오늘 아침, 그런 사진도 받은 상황에 그야말로 섬뜩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진짜! 놀랐잖아!”

“아니, 왜 놀라고 그러나.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같이 살자고 할 땐 언제고? 그거 다 빈말이었나?”

“누가 빈말이래? 내 말은 왜 불도 안 켜고 있냐, 이 말이지!”

“생각할 게 많아서. 난 밝으면, 머리가 안 돌아가거든.”

그렇게 말하며 빛나가 태연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승현은 아직도 벌렁이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거실 불을 켰다.

“그런데, 저건…… 뭐야?”

불을 켜자 소파 옆에 있는 커다란 캐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 가게?”

그 물음에 빛나는 그의 앞에서 비장미 넘치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다.

그런데 그러한 그녀의 표정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 불안함은 뭘까.

“내가 정말 많이 생각해봤는데, 너 그 방정맞은 주둥아리 잘못 놀리다 저세상 가는 꼴 못 봐.”

“뭐…… 라고?”

도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승현이 내려다보며 반문하자 빛나는 그의 심장을 정확히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나라도, 널 지켜야겠어.”

그의 심장 끝에 닿은 그녀의 손가락이 피부를 뚫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물러서려는 그를 빛나는 갈고리 같은 손으로 확 움켜잡았다.

졸지에 멱살도 아니고 심장 부근을 붙들린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빛나를 내려다본다.

맞닿은 그녀의 시선은 더없이 비장했다.

“내 건, 내가 지키겠다고.”

“…….”

“그러니, 같이 살자고…… 당분간.”

세상에, 그가 지금 잘못 들은 것일까?

아니다. 그녀의 진지한 눈동자엔 제 남잔 제가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결코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얼씨구나 좋다 춤을 추기엔 아직 일렀다.

천하의 유빛나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승현이 원하는 그것을 덥석 그의 손에 쥐여줄 그녀가 아니었다.

빛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작게 중얼 거렸다.

“대신, 조건이 있어.”

“…….”

“우리, 지금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야. 그리고 너의 반성의 시간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나친 애정 행각으로 인해 우리 몸과 마음이 해이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Don’t touch me! 각방 쓸 거야. 잠자리, 키스, 포옹…… 절대 안 돼.”

승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농담…… 이지?”

“아닌데? 진담인데?”

그러자 승현이 짙은 눈썹 끝을 구기며 펄쩍 뛰었다.

“제정신이야? 아니, 어떻게 눈앞에 있는데 잠자리도 안 된다, 키스도 안 된다, 심지어 안지도 말래? 그리고 같이 살자며 각방은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성인군자야? 부처라도 돼?”

그랬다. 빛나는 쥐꼬리만 한 인내심으로 결국 사고를 친 그에게 엄청난 인내심 테스트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큰 사고를 쳐놓고 날로 먹으려 했어?”

기가 막힌 승현이 머리를 쓸어 올리는데도 빛나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따박따박 입을 열었다.

“그래도 손은 잡을 수 있게 해줄게. 그것도 못 하면 너 미칠 것 같으니까.”

겁나, 인심 쓰는 척이다. 더 열받게스리!

“아니, 내가 무슨 초딩이냐? 손만 잡게? 손잡으면 안고 싶고, 안으면 키스하고 싶고, 키스하면 더 하고 싶은 게 남자인거 몰라? 그리고 네가 세상 물정 너무 몰라서 그러나 본데, 요즘 초딩도 손만 잡고 연애하진 않아!”

“싫음 말고.”

그녀는 냉큼 고개를 돌려버리며 자신이 가지고 온 캐리어를 끌고 나가려 했다.

그러자 승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그 사진으로 인해 가뜩이나 불안한 상황인데,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빛나가 제 발로 기어 들어온 상황이 아닌가!

“야, 야.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싫다는 게 아니잖아. 넌 어떻게 애가 그렇게 인정머리 없이 사람 말을 툭툭 끊냐?”

“그럼, 콜?”

“아니, 그래도 연인인데 키스까지는…….”

잔머리꾼 승현의 1차 협상 시도.

“안 돼. 넌 일단 키스하고 들어오면 못 참더라고.”

역시나 씨알도 안 먹혔다, 젠장!

“야, 내가 말한 같이 살자는 이런 게 아니었다고, 자고로 동거란 말이야…….”

“어머, 누가 동거하재?”

“같이 살자며!”

“그래. 말 그대로 같이 살자고. 동거가 아니라…… 룸메이트!”

승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말장난으로는 절대 그녀를 이길 수 없음을.

“못 하겠으면, 이번 건은 없었던 걸로.”

빛나는 다시 자신의 캐리어에 손을 뻗는다.

“젠장! 좋아! 콜!”

결국 승현은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자 빛나는 경쾌한 걸음걸이로 당연하다는 듯 승현의 침실로 향하며 한마디 한다.

“침실은 내가 쓸게. 넌 다른 방 써.”

승현은 그녀가 닫고 들어가 버린 방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적어도 집에 있는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를 지키겠다 들어온 맹랑한 여자가 아닌가.

어찌 안 예쁠 수 있을까.

가만히 있어도 사랑스러움 그 자체인 것을.

감히, 이 위승현을 상대로 Don’t touch를 선언했겠다?

그는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닫힌 방문이 빛나라도 되는 것마냥 의미심장하게 노려보았다.

“어떻게…… 나를 눈앞에 두고 참을 생각을 해?”

그랬다.

참는 건 비단 그뿐이 아닐 것이다.

평소 빛나의 적극적인 성격으로 보건데 분명 그녀에게도 이 공간은 곤욕일 터, 승현은 그 점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두고 보자고, 누가 더 잘 참나.”

인내력 결핍 장애, 위승현.

그렇게 승현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또 한 번 되지도 않은 게임을 시작하고 만다.

“유빛나…… 이 집에 들어온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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