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지고는 못 살아!
2018.05.09.
승현은, 그저 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차가운 커피 한 잔이 절실했을 뿐이다.
거기에 빛나를 만나 잠시나마 축척된 피곤을 달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고.
그런데 그렇게 내려온 자리가 이렇게까지 엉망이라니, 가뜩이나 예민한 신경이 더욱 곤두섰다.
“오랜만이야. 그러니까 나는…….”
게다가 저 남자는 겁도 없이 빛나에게 다가선다.
물론 그녀가 어렵게 좁힌 거리를 다시 확보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거리가 아니었다.
원준을 마주한 그녀가 시선조차도 들지 못한 채 뼈마디가 하얗게 변할 만큼 핸드백을 쥐고 있었다.
결국 승현은 분노로 뻐근한 발걸음을 옮겨 원준의 등 뒤로 성큼 다가섰다.
그를 발견하고 놀란 빛나의 눈동자가 빠르게 가라앉았지만 지금 그에겐 거기까지 신경써줄 이성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경고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
“움직여봐.”
가만 안둘 테니까.
굳이 뒷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벌하게 내뱉은 목소리만으로도 마지막 말은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었다.
“승현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마주하지 못한 채 잠시 돌리는 그 시선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알고 있다.
지금 그녀에게 있어 이 숨 막히는 상황이 온전히 원준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도 그녀는 원준과 마주한 그의 모습에 위협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원준의 신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하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빛나에겐 지금 두 남자가 마주선 이 상황이 더 없는 곤욕일 테니까.
그럼에도 승현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
더불어 지금 이 순간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다.
빛나는 그가 속해 있는 ‘세상’이었다.
그렇게 그의 세상이 이 남자 앞에서 움츠러드는 모습이 싫었다.
네가 뭔데, 내 여잘 작게 만들어.
네가 뭔데, 내 여잘 힘들게 해.
왜, 이제 와서…….
내가 어떻게 그녀에게서 네 그림자를 지워냈는데, 감히…… 너 따위가.
승현의 무서운 기세에 빛나는 재빨리 원준을 비켜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원준은 절대 승현을 상대로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원준을 위해서가 아니다.
다름 아닌, 승현을 위해서였다.
“승현아, 아무것도 아니야. 열 낼 필요 없어.”
자칫 잘못하면 승현이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기 때문이다.
“나가자. 나가서 이야기해.”
안 된다. 어떻게든 그가 폭발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래서 빛나는 원준으로부터 그를 떼어내기 위해 승현을 돌려 세웠다.
이쯤 되니, 그도 막무가내로 버틸 수 없어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길을 돌렸다.
물론, 눈앞에 있는 원준은 그에게 한입도 안 되는 먹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뿔도 안 되는 인내심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이유, 마지막 남은 빛나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그렇게 겨우 떨어진 발길이건만, 결국 원준이 그마저도 돌려세우고 말았다.
“빛나야, 내가 할 말이…….”
도대체 이 남자, 뭘 믿고 이러는 것일까.
그것도, 더 없는 순둥이에 마마보이처럼 생겨서는 말이다.
그렇게 돌아선 승현은 이 커피숍에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원준의 온전한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원준을 바라보는 승현의 눈매가 인내심 고갈로 인해 더욱 가늘어졌다.
원준이 들고 있는 꽃다발을 본 것이다.
네놈이구나!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직접 꽃을 들고 나타날 줄이야.
“무슨 할 말. 변호사로서 이 사람이 필요하다면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사무실에서 만나. 여기서 이렇게 개인적으로 찾아와 질척거리지 말고.”
생각보다 신사적인 경고였다.
그러나 원준을 내려다보는 시선만은 경고가 아닌 사형 선고 같았다.
“제발, 승현아.”
불안한 빛나가 다시 끼어들고 나서야 승현은 다시 발길을 옮길 수 있었다.
그도 더 이상 원준의 시야에 그녀가 들어차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원준은 이미 그럴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으므로.
빛나를 데리고 커피숍을 나온 승현은 도로변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다가가 차 문을 열었지만 그녀가 차에 올라타기도 전에 ‘잠깐만’을 외치며 다시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어둡게 가라앉은 빛나의 눈동자가 원준에게 다가서는 승현의 훤칠한 모습을 공포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원준 앞에 선 승현은 거친 행동 대신, 싸가지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시선으로 원준을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거, 우리 빛나 주려고 가져온 꽃인가?”
원준을 바라보는 승현의 입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이왕 가져온 거니, 꽃은 내가 전해주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는 원준의 손에서 꽃다발을 낚아채었다.
그러더니 눈을 내리깔고 꽃다발의 향을 한껏 음미한다.
꽃을 가져온 건 원준인데 애초부터 그에게 속해 있었던 것처럼, 그 모습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꽃을 든 승현의 모습은 남자인 원준이 보아도 혹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상큼한 그의 모습과는 달리 입에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달콤 살벌한 말이 흘러 나왔다.
“미친, 오란다고…… 진짜 와?”
원준을 마주하지도 않고 흘리듯 무심코 던진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잘 들어. 널 얌전히 보내주는 이유는, 네가 이뻐서도…… 그렇다고 내가 너그러워서도 아니야.”
“…….”
“어쨌든 쓰린 과거라도 빛나의 ‘과거’니까. 최소한의 존중을 보여주고 싶은 것뿐이야. 내 여자를 위해.”
“…….”
“하지만 내가 참을성이 워낙 없어서, 두 번째까지 존중해줄 수 있을진 모르겠어.”
이건, 꽃을 든 남자가 아니다.
“담부턴 내 눈에 띄지 마라.”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붉은 입술을 틀어 올린 그는,
“물리면…… 죽는다.”
꽃을 든 악마였다.
그렇게 승현은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린 원준을 뒤로한 채 그곳을 벗어났다.
그가 다가오자 빛나는 기겁하며 꽃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정신에 저 꽃을 다시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 후 빛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승현이 커피숍 앞에 있는 쓰레기통에 그 꽃다발을 보란 듯 쑤셔 넣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지. 천하의 위승현이 저 지랄 맞은 성질머리에 웬일로 꽃을 받아 나오나 했다.
그러곤 꽃을 들 때보다 더 눈부신 모습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빛나야.”
그의 진한 눈매는 방금 전 일로 인해 잔뜩 곤두서 있었으나, 입매는 그녀를 향해 더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원준의 등장으로 인해 철렁했던 심장도 잠시뿐.
다시금 평온을 되찾은 빛나는 망설임 없이 그가 내민 손을 붙들었다.
***
빛나는 노트북을 켜 놓은 승현 앞에 티 한 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에 몰두하며 인상을 찌푸린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섹시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승현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희한하다. 그는 오늘 저녁에 보았던 원준의 존재에 대해 전혀 묻질 않았다.
그의 성격으로 보건데,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그의 모습은 폭풍전야처럼 더욱 불안하게 그녀의 노파심만 부풀렸다.
빛나는 가만히 서서 그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뜨거운 티로 천천히 손을 뻗는 모습을 여과 없이 눈동자에 담아내었다.
물론,
“앗- 뜨거!”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너 때문에 도통 집중이 안 되잖아! 왜 그렇게 쳐다봐?”
승현이 곤두선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빛나를 데리고 바로 집으로 날아온 나머지, 혈압 오른 엘리스가 아예 집으로 쳐들어와 일거리를 산더미처럼 안겨주고 떠나는 바람에 가뜩이나 짜증이 나던 차였다.
그런데 빛나마저도 그의 신경을 긁기 위해 저런 눈빛으로 마냥 쳐다보고만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곤두선 신경이 찌릿한 편두통을 몰고 왔다.
이쯤 되자 빛나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왜…… 안 물어봐?”
“뭘?”
“그 커피숍 남자.”
“내가 물어봐야 할 만큼 중요한 사람인가?”
승현은 뜨거운 티는 보기도 싫다는 듯 저만치 밀어버리며 말했다.
하지만 내심 뜨끔 하는 중이다.
누구보다 원준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 그였기에, 이 이야기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민감한 문제인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가고 싶었다.
그녀에게 더 없는 상처가 될 그런 이야기, 먼저 꺼내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그리고 끝까지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그 상처가 아물어 그녀가 스스럼없이 말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
“그래도, 안 궁금해?”
빛나가 그의 옆에 앉으며 물어왔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한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별로.”
“진짜로?”
“나도 안 주는 꽃을 너한테 들고 온건 좀 괘씸한데, 이제 다시는 안 보내겠지.”
그러고 보니, 그녀가 할 말도 있었다.
“왜, 그때 이야기 안 했어? 너한테 꽃 보내지 말라고 할 때, 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잖아.”
그랬다. 그에게 경고를 날리던 날, 왜 그는 단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자존심 상해서.”
“뭐?”
“나도 내 여자한테 안 보내는 꽃을 딴 놈이 보냈다고 생각하니 자존심 상했어.”
“그래도 말하지. 그럼, 오늘처럼 착각해서 내려가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랬을 것이다.
그때 꽃을 보낸 사람이 승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오늘 본 카드 문구 하나로 당연하다는 듯 그를 떠올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그토록 설레는 가슴으로 한 걸음에 달려가 원준을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승현과 원준이 조우하는 일도.
아쉬움에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승현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듣는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
“그 말은…… 나라고 생각하고 내려왔단 말이지? 그 녀석이 아니라?”
도대체 저 넘치는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일까.
“그게 중요해?”
“당연하지. 넌 어쨌든 그 녀석을 만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단 이야기니까. 됐어. 잊어버릴 거야. 그만한 가치도 없는 놈이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
“나보다 못생겼잖아. 그 남자가 꽃다발이 아닌 꽃집을 가져다 받쳐도 너 안 흔들릴 거잖아. 그치?”
닳지 않는 배터리를 가진 것처럼, 그의 오만과 자신감은 마르지 않는 우물이었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빛나를 끌어당겨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채 물어오자 빛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서로의 뜨거운 입김이 느껴질 만큼 위험한 거리였다.
게다가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눈동자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을 만큼 섹시한 거리기도 했고.
“당연하지.”
어떻게 이런 남자를 두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 오만한 남자를 절대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럼 됐어. 근데 왜 자꾸 물어보는 거야? 꼭 그 사람이 누군지 나한테 말하고 싶어 안달 난 눈빛이야. 혹시…….”
설마, 그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빛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원준이 누구인지, 말을 해야 하는게 당연했지만 지금 당장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 빚쟁이야?”
“으이구, 정말!”
빛나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그의 가슴을 쳤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이렇게 장난치는 승현이 그저 가벼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원준의 뒤에, 태산처럼 서 있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던 탓이다.
빛나는 태어나 그토록 무서운 얼굴을 한 승현은 처음 보았다.
그저 짓궂고 장난기 가득해 마냥 애 같기만 했던, 그녀만의 남자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원준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그 어떤 태산보다도 거대해 보였다.
그가, 그렇게나 컸던가? 잠시 넋이 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그 거대함이 단지 그의 뛰어난 신체조건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웃고 있는 이 얼굴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걱정 마. 나, 생각보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 아니야.
농담처럼 흘려들었던 그 말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빛나는 그가 장난스럽게 흘린 말 한마디라도, 단 한 번도 허투루 흘린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제 사람도 지키지 못하는 놈은, 절대 큰 놈이 될 수 없다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녀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제의 인터뷰는 승현의 목을 내건 현상금 쇼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한 사망선고일지도.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열을 냈어?”
“응? 내가?”
“응. 네가. 눈빛만으로도 잡아먹겠던데?”
“아, 그거? 그거야, 그 녀석이 꽃을 들고 있으니까 누가 또 우리 유빛나한테 되지도 않는 고백을 하나 싶어서 그런 거지.”
그렇게 말하는 승현을 그녀는 의심 가득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잔뜩 가늘어진 그 눈이 너무 사랑스러워 승현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오늘 꾹꾹 눌러 참고 원준으로부터 돌아선 보람이 있는 듯하다.
제 성질 못 이기고 사고를 쳤다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눈빛이었으니까.
참, 유빛나. 이젠 하다하다 못해, 그에게 인내하는 법까지 가르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찾아온 작은 변화가 싫지만은 않았다.
“누워. 재워줄게.”
승현이 소파에 앉아 제 무릎을 탁 치며 그녀에게 말했다.
“뭐?”
놀란 그녀가 동그랗게 눈을 치켜뜨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정말 응큼한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에 재워만 주겠다고.”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일까, 하는 눈치다.
“비싼 무릎이다. 함부로 내주는 무릎 아냐.”
“근데?”
“오늘 피곤해 보이고, 고생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그녀를 제 무릎에 강제로 눕혔다.
그러곤 어린아이를 다독이며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한다.
“유빛나, 그 빚쟁이 또 오면 나한테 보내. 그 빚…… 나한테 받으라고.”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줄 테니까.
승현이 저도 모르게 이를 바드득 갈며 이야기했다.
그가 아무리 그녀의 쓰린 과거까지 끌어안기로 했다지만, 그렇다고 원준까지 사랑하기엔 턱 없이 모자란 인내심이었기 때문이다.
그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은 정신 수양이 더 필요했다.
아니, 어쩌면 그의 본성으로는 절대 그 경지에 이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승현이 오늘을 어떻게 인내했는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빛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오히려 그 말에 웃음이 베어 나왔다.
이상하다. 원준을 본 이후 잠 못 들 것 같은 밤이었는데 승현의 무릎을 베자마자 참았던 졸음이 쏟아져 왔다.
마치 오늘 있었던 만남은 그저 불쾌하기만 한 꿈처럼 아득해졌다.
같은 하늘 아래 살기에, 피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은 없다.
더군다나, 원준의 병원이 멀지 않아 그들의 생활 반경이 겹치는 부분도 있었고.
하지만 빛나가 감수하리라 생각했던 부분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저번 스시 레스토랑에서 우연이 마주쳤을 때와 같은, 그런 우연.
절대로 오늘처럼 철저히 계획된 고의적인 만남은 아니었단 말이다.
우연이 아닌 고의적인 만남에서는 헤어짐을 선언했던 그날처럼, 원준을 태연하게 보내줄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왜냐고?
미련이 남은 건 그녀였기에.
그리고 조금 더 사랑했던 것도 그녀였기에.
적어도 오늘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커피숍 앞에서 승현이 내민 손을 마주잡은 순간,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아직은 남았을 거라 생각했던 미련도, 조금 더 사랑했던 건 그녀였을 거라는 예상도, 깡그리 뒤집혀졌다.
미련이 남은 건, 원준이요.
조금 더 사랑했던 것도, 원준이다.
승현의 손을 마주 잡은 순간, 그것을 깨달았다.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몽롱한 정신에 빛나는 그의 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누우며 옹알이를 하듯 속삭였다.
“고마워, 승현아.”
“뭐? 뭐가 고마운데? 내가 네 빚 대신 청산하겠다고 한 거?”
“으이구, 진짜!”
그의 장난질에 빛나가 살짝 배를 꼬집었다.
그러자 승현은 싱긋 웃으며 또 한 번 농담을 한다.
“조금 전부터 자꾸 그 남자 이야기를 유도하는데, 혹시…… 질투 유발 작전이야?”
“질투 유발 작전?”
“내가 질투 안 해서 서운해?”
“그러게. 웬 남자가 나한테 꽃을 줬는데 질투 안 나?”
그녀의 물음에 승현은 상체를 뒤로 뺀 채 긴 팔을 소파에 두르며 거만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내가 왜? 왜 내가 질투를 해야 해? 질투란 건 말이야, 질투를 할 만한 상대가 나타나야 질투를 하는 거야.”
“그 말은 곧 질투를 할 상대도 안 된다?”
“말하자면 그렇지.”
“잘났어, 정말.”
“근데 말이야, 유빛나…….”
“응?”
“내가 웬만해선 질투는 안 하는데…….”
“응.”
“…… 지고는 못 살아.”
“뭐라고?”
귀가 의심스러워 되물었으나 승현은 대답대신 그녀를 다독이며 협박을 했다.
“독한 맘먹고 재워줄 때 자라. 자꾸 네가 말하면 배가 간질거려, 확 덮쳐버릴지도 몰라.”
그 말에 빛나는 조용해졌다. 절로 눈이 감겼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더없이 깊은 잠을 잤다.
그가 말한 ‘지고는 못 살아’라는 말뜻의 미스터리는 끝까지 풀지 못한 채.
하지만 뒷날 아침, 빛나는 그 말의 참뜻을 온몸으로 경험해야 했다.
아침부터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싶더니,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경악했다.
“아악- 이게 뭐야!”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건, 그녀의 사무실이 아니라 꽃집이다.
세상 온갖 꽃을 다 가져다놓은 것마냥 꽤 넓은 그녀의 사무실은 꽃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누구인지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꽃으로 이정도 똘기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에.
그랬다.
-지고는 못 살아.
그 한마디의 뜻은, 바로 이거였던 것이다.
그제야 빛나는 승현이 던진 그 한마디의 뜻을 깨닫고는 이를 악 문 채 소리를 내질렀다.
“이, 이 또라이…… 위…… 위승-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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