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꽃을 든 남자
2018.05.06.
“…… 우리, 같이 살까?”
그 말랑한 한마디에 빛나의 머릿속은 격정의 멜로디가 무한 반복되었다.
그녀의 커다란 동공 또한 놀란 심장으로 인해 격하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전히 그의 눈에선 엑기스 가득한 꿀이 뚝뚝 흐르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왜 아무 말이 없어?”
“어, 그게…… 그러니까, 결혼도 하기 전에 그러는 건 아니다 싶어서. 내가, 생각보다 좀 구식이라…….”
더듬더듬.
제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는 절로 바이브레이션이 되었다.
너무 훅 치고 들어온 달달한 멘트에, 사고할 수 있는 뇌의 90%가 심쿵 해버린 심장과 그 운명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싫은가 보네?”
싫은 게 아니다.
단지 어떤 대답이 적절한지 확신이 서지 않을 뿐.
“어차피 벽 하나 두고 같이 사는 거잖아. 너 701호, 나 702호.”
“그렇지. 하지만 염연히 ‘같이’ 사는 건 아니지. 네가 말하는 건 그냥 같이 사는 게 아니라 ‘동거’잖아. 말의 의미는 정확히 해두자고.”
잘한다, 유빛나!
어느 정도 호흡을 가다듬고 뇌에 산소가 공급되니 변호사답게 말이 술술 나온다.
“그래, 좋아. 동거…… 그거 우리도 해보자고.”
정말 이 대한민국에서 여자에게 ‘동거’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것이 남자와 여자의 뇌 구조 차이인 모양이다.
“여기 대한민국이야, 아직은.”
“21세기야. 조선시대 살아?”
“나야 허락 받을 부모님이 안계시지만 넌 아버지가 계시잖아.”
“내 나이 서른에 그것도 허락 받아야 돼?”
“그래도 아버지니까. 널 낳아주신 부모님이니까…….”
빛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도 조금 전과는 달리 흔들림이 없다.
“나랑 같이 사는 게…… 싫어?”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승현이 그녀로부터 몸을 일으키며 물어왔다.
빛나도 당연히 그와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던 터라 그녀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싫은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생활을 하기엔 너랑 나, 모르는 게 너무 많단 이야기야.”
“다 알고 시작하는 커플이 어딨어? 결혼도 서로 모르고 하는 판에.”
“그게 아니라…… 넌, 쉽지? 난 형제도 없고 부모님도 없으니까. 넌 나 하나만 감당해도 되니까. 하지만 난 아니야. 넌 형제도 있고, 아버지도 계시니까…….”
그 말에 승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빛나의 이야기를 듣자니 충분히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모란 존재로 인해 파혼의 경험까지 있는 그녀였기에 이런 일에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다시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인지도 모르겠다.
“미안.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난 그냥…….”
“알아. 네 마음. 그리고 그 마음, 나도 같은 마음이야. 하지만 나한텐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네 가족을 알아야 할 시간.”
그 말에 승현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그의 가족을 알아야 할 시간이라…….
갑자기 머릿속에 아버지인 위태준부터 큰형, 작은형 그리고 막내 승희의 모습까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더불어 이젠 매제인지 형제인지 모를 우빈까지.
자연 친화는 당연히 생각도 할 수 없는 독보적인 그 존재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거였다.
“우리 가족들이 좀…… 벅차긴 하지.”
작은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빛나는 아차,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가족이란 존재가 아킬레스건이듯 승현에게도 그러리라 생각한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가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은 덕분에 고등학교 때 들은 흉흉한 소문이 다였으니 어쩌면 빛나의 그러한 생각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중인격, 분노조절장애, 집중력결핍장애를 앓고 있는 형제들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 나는 말이지…… 네 가족들이라면 언제든지 감사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그분들이 날 받아주신다면. 다만, 거기에 서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야.”
진심이었다.
그녀에겐 없는 가족이 아닌가.
때문에 그녀에게 승현의 가족은 그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였다. 절대 무시하고 넘어갈 수가 없는.
빛나의 망설이는 듯한 그 말에 승현이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어 보인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매력적인 웃음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일까.
“분명 말했다? 언제든지, 감사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응? 응…… 그렇지…….”
“그 말 무르기 없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은 했으나 왜 이렇게 뒤가 찜찜한지 모르겠다.
“그냥…… 불안하니까. 널 내 눈에 가두고 싶은 욕심이 컸어. 내가 신분을 드러냈다고, 그래서 놈의 주의를 좀 끌었다고 해서, 네가 그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난 건 아니니까.”
그랬다.
그래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제 시야에 두려 했던 것이다.
복실로는 성에 차지 않았으니까.
그보다 더한 안전장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뭐, 단 한 번도 유빛나가 쉬웠던 적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나 상처 받았어. 그런 의미에서…… 키스해줘.”
투정에 가까운 그 흑심에 빛나의 웃음꽃이 폭발했다.
그렇게 그녀가 조심스레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올리려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분노한 엘리스가 들어왔다.
“제 인내심 테스트 하십니까-아! 도대체 왜 전화를 안 받으십니까!”
역시나 놀란 빛나가 황급히 그로부터 멀어졌다.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랑한 감촉을 기다리고 있던 승현에겐 그야말로 아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그만 내려 가봐야 할 것 같아.”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진 빛나가 돌아서자 엘리스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같이 계시는 줄 모르고…….”
“아니에요. 이제 막 내려가려던 참이었어요.”
빛나가 웃으며 돌아섰다. 그러곤 그의 사무실 문을 나서며 엘리스 몰래 가벼운 손키스를 날렸다.
그 달달한 제스처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제가, 좋은 시간을 방해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헐크처럼 쳐들어온 엘리스만 아니었더라면 그보다 더 뜨거운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그 생각을 하니 그 좋은 시간을 방해하고도 저토록 태연한 엘리스가 오늘따라 얄미웠다.
“뭐야, 노크 몰라? 그거 좀 캔슬했다고,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 건가?”
말 속에 뾰족뾰족한 가시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엘리스가 좋은 시간을 방해해도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이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반대로 승현은 생각하면 할수록 그 타이밍이 아까워 성질을 부렸다.
“에잇! 그렇게 원하면 다시 가든가!”
그 말에 엘리스는 속이 시원한 듯 웃으며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저 결심했어요! 본부장님 곁에 남아 그놈…… 꼭 잡고 말겠습니다!”
결코, 반갑지 않은 결심이었다.
***
회사로 내려온 빛나는 그녀의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은지와 만났다.
“와 있었네?”
“응.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뭐, 뭐가?”
헐, 티나?
뺨에 살짝 열기가 느껴지는 듯 했지만 은지가 알아볼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빛나가 다소 당황하며 물었다.
“또 올라가서 승현 씨 쥐 잡듯이 잡았겠구만. 어지간히 해라. 승현 씨도 생각이 있으니 그랬겠지.”
다행히도 은지는 달아오른 뺨이 그를 향한 분노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말이다.
“웬일이야?”
“응. 네가 원하던 거. 그거 끝냈거든.”
“뭐?”
“김병훈 검사 인맥지도.”
순간 빛나의 눈에 빛이 반짝했다.
죽도록 궁금하던 그것을 드디어 은지가 끝을 낸 것이다.
은지는 그녀 곁으로 다가와 노트북에 USB를 꽂고 입을 열었다.
“김병훈 검사,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렇다고 주변에 크게 된 인물은 없었던 것 같아. 친가 쪽은 딱히 주목할 만한 사람이 없더라고.”
인맥지도를 보는 빛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조했다.
“그러네. 별거 없네.”
“응. 그래서 다소 어린 나이에 사법고시에 패스해 일찍 공직에 올랐지만 딱히 빛을 보진 못했던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그 세계도…… 왜, 알잖아. 줄타기인 거.”
알지. 알다마다.
어디를 가나, 그 인맥 줄타기 때문에 그녀 또한 번번이 미끄러져야 했으니까.
“그런데 김 검사가 와이프랑 결혼을 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어. 그 와이프 오빠가 성공한 사업가였거든.”
여기까지는 별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명예를 움켜쥔 검사가 부(富)를 만나 권력을 낳는 조합은 흔하디흔한 케이스였으니까.
그러나,
“근데, 그 와이프의 오빠가 건실한 사업가에서 정치인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게 되는 거지.”
“정치?”
“너, 얼마 전에 강석훈이 만났다며? 그 강석훈이 뉘집 자식이라 생각해?”
잠시 잊었던 그 불쾌한 사건이 다시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지. 그 인간 말종이 김병훈 검사가 아끼는 조카였다고 했지.
“아무리 김병훈 검사라도 그런 똘기작렬 조카 뒷바라지는 조금 벅차지. 그 녀석, 아버지가 뒤에 버티고 있지 않는 한.”
은지 말 틀린 게 하나 없다. 김병훈 검사보다 좀 더 든든한 백그라운드 없인 절대 그런 일이 불가능할 테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굴까.
“강민식 서울 시장이야.”
“뭐라고?”
“김병훈 검사의 형님이자 강석훈의 아버지가 바로 강민식 시장이라고.”
순간 빛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로 그럴 것이, 현재 서울 시장직에 있는 강민식은 혁신적인 서민 정책으로 벌써 중임 이야기가 나돌 만큼 서울 시민들의 지지를 대폭적으로 받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 아버지 밑에…… 이런 망나니가 나와?”
“어디, 자식 일이 내 맘대로 되나. 아버지에 대한 부담감과 반항심 때문에 삐뚤어졌을 수도 있지.”
“아, 정말 세상에 다 가진 자는 없구나.”
“어쨌든, 그래도 강민식 시장은 김병훈 검사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아. 그때부터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크고 굵직한 사건들만 맡았더라고. 물론, 그렇다고 그 권력을 제멋대로 남용한 것 같진 않고. 줄이 있다 보니, 윗선 눈치 안 보고 해결한 정도.”
“결국, 우린…… 다시 제자리걸음이란 이야기네.”
그랬다.
김병훈 검사의 주변에 의심이 될 만한 인물 따윈 없었다.
“내 말이. 일단 김병훈 검사 주변 인물들은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지만 계속 지켜보기는 할게. 아무래도 검찰청 드나들기는 너보단 내가 쉬우니까.”
“그래. 계속 지켜봐줘. 혹시 모르니까.”
그 어떠한 경우의 수라도 예외로 둘 순 없었다.
이젠, 단순히 KMK 공금 횡령 사건을 뛰어 넘어 살인마를 찾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다름 아닌 승현의 목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선정이 들어와 카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누가 변호사님 앞으로 주고 가던데요?”
“누가?”
“음, 그냥 헬멧 쓴 사람이.”
“어머, 헬멧 쓴 사람이면 항상 너한테 꽃 배달했던 그 사람 아냐?”
은지가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하자 선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이번엔 그 사람 아니었어요.”
“그래? 까짓 거, 배달 누가 하면 어때? 그 안에 내용물이 중요한 거지.”
선정이 나가자 은지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어서 카드를 열어보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받은 건 빛나인데 얼굴이 붉어진 건 은지였다.
“어머, 승현 씨도 참 센스 있다. 너 화 풀라고 이런 걸 보내는 거 보니. 어때? 뭐라고 쓰였어? 응? 궁금해!”
“퇴근하고 요 밑에 커피숍에서 얼굴 좀 보자네.”
“뭐야, 그게 다야?”
실망한 은지가 카드를 빼앗아 읽었지만 정말 빛나가 말한 내용이 전부다.
물론 그 밑에 ‘꽃을 든 남자’라는 문구가 인상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머, 꽃을 든 남자래! 이번엔 직접 주려나 보다. 아, 승현 씨 얼굴 팔려서 되게 창피할 텐데…… 음, 완전 로맨틱해!”
언제부터 은지가 이렇게 승현의 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빛나도 은근 설레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꽃을 든 승현이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 끝이 쫄깃해질 만큼 달콤했다.
어서 퇴근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
***
퇴근시간.
하지만 승현은 오늘도 밤샘 각이다.
그의 유명세로 인해 KMK컴퍼니는 최고 주가를 때렸다.
국내는 물론 해외로부터 수많은 러브콜을 받은 것이다.
때문에 진행 중이던 기획안을 재빨리 마무리하고 다른 기획을 추진해야 하는 관계로 앞당겨진 일정을 이번 주 안에 모두 소화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어젯밤도 꼬박 지새운 터라 졸음이 쏟아져 죽겠다는 것.
정말, 돌겠다.
감긴 눈꺼풀은 그저 괴롭기만 하니.
“지금, 조시는 겁니까?”
“아니. 아니. 안 잤어.”
“근데 왜 눈을 똑바로 못 뜨십니까?”
“똑바로 뜨고 있는 거야.”
“눈 크기가 평소와 달리 작은데요?”
“이런, 엘리스가 날 너무 과대평가했군. 내가 원래 눈이 좀 작아.”
젠장, 이럴 때만 겸손해지지!
이대로 가다간, 밤샘은커녕 사망각이다.
저대로 턱을 괸 채 그대로 잠이 들것만 같았단 말이다.
안 된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대로 승현이 정신줄을 놓게 할 순 없었다.
엘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가 확인하고 사인해야 할 서류 한 뭉치를 건넸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오늘 밤 이 일을 위해 조금 전에 집에서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나오셨잖아요. 진하게 커피 한 잔 내려 오겠습니다. 그동안 이거 보고 계세요.”
하지만 더 이상 이 자리를 참을 수 없었던 승현은 결국 일어나고 만다.
“아니, 엘리스. 내가 찬 공기가 좀 필요한 것 같아. 커피…… 내가 사 올게.”
“밖에 기자들 있을 수도 있어요.”
“걱정 마. 잘 피해서 갔다 올 테니. 조금 가면, 테이크아웃 전문점 있더라고. 사람이 적어서 눈에 안 띄게 잘 갔다 올 수 있어.”
“그러지 말고, 사람 시키는 게…….”
“갔다 올게.”
이상하다. 이렇듯 쉽게 커피 사러 나갈 사람이 아닌데.
불안한 눈으로 그를 좇는 엘리스를 뒤로 하고 승현이 돌아섰다.
사무실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엘리스의 의심스러운 목소리가 날아든다.
“이대로 쭉- 집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사무실로 복귀하셔야 해요!”
“알았어. 알았다니까! 나 몰라? 나 위승현이야.”
그렇게 승현이 사라졌다. 사무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엘리스는 중얼거린다.
“그래. 네가 위승현이라 더 불안한 거 아니냐, 내가.”
***
사무실을 나온 승현은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커피숍은 건물 바로 옆에도 있었지만 엘리스의 말대로 기자들이 상주할 수 있으니 얼른 차를 타고 나가 인적 드문 테이크아웃 전문점으로 갈 생각이었다.
“음, 우리 빛나는 퇴근했나?”
사실, 빛나를 잠시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커피 심부름을 자처했다.
이렇게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선 날엔 그녀보다 더한 피로 회복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 유빛나 끌어안고 딱 두 시간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삼박 사일 날을 새도 끄떡없을 것 같은데.
전화를 걸었다. 안고 잘 수 없다면, 목소리라도 듣고자 하는 마음에.
아직 회사에 있어 얼굴이라도 잠시 볼 수 있으면 더 좋고.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운전 중인가?”
전화를 끊고 차에 올라탔다. 찬바람을 좀 쐬고 정신을 차린 후 다시 전화 통화를 시도해볼 생각에서였다.
그의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오자,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제야 졸음으로부터 해방된 기분이다.
하지만 며칠 동안 축척된 피곤은 가시질 않았다.
“에이, 유빛나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몇 시간 전에 봤는데, 또 보고 싶다.
“진짜로…… 보고 싶네.”
이대로 집으로 가?
신호대기 상태에서 잠시 심각하게 고민했더랬다.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엘리스야 혈압이 터지겠지만, 정말 이대로 집에 들어가 그녀를 품고 잠 들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에 누군가 콕 들어와 박혔다.
사람의 소망이 너무 간절하면, 간혹 헛것이 보이기도 한다 했던가? 마치 신기루처럼.
그가 지금 그랬다.
그녀를 보고픈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 앞에 선 낯익은 남자를 보기 전까지는.
***
퇴근시간이 되자 빛나는 부리나케 움직여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자 은지가 윙크를 날리며 유독 진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게 건물을 나와 커피숍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까지도 빛나는 설레는 심장을 멈출 길이 없었다.
정말 승현이 꽃을 들고 서 있을까?
꽃을 들고 있는 승현의 모습은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커피숍 안은 늦은 시간이라 한가한 편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코트 단추를 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승현이 있다면 굳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를 찾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디에도 그만한 비주얼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낸 빛나는 그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응? 무슨 일이지? 조금 늦어지나?”
그렇게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빛나는 들었다.
“빛나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절대로 여기 있어서는 안 될 한 남자의 애타는 음성을.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었지만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빛나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명한 유리에 반사된,
꽃을 든 한 남자의 모습을.
“어떻게…… 오빠가…….”
원준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조심스레 떨렸다.
그러다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이 돌아섰지만 쉽사리 시선을 들어 원준을 마주할 순 없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그의 구두 끝이 보였다.
“오랜만이야. 그러니까 나는…….”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며 다가서자 그녀는 한 발자국 물러서며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3년 동안 사랑해 마지않았던 남자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기 위해.
그러나 그 경고, 굳이 그녀가 할 필요가 없었다.
원준 한 사람의 모습을 기대하며 든 시선에 다른 이가 더 가득 들어찼으니.
꽃을 든 원준의 등 뒤로 음산하게 서 있는 거대한 그림자.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여봐.”
제대로 빡 친 승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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