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43화 (43/94)

43. 우리, 같이 살까?

2018.05.02.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던 남자는 두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결국 이렇게 됐군. 처리하라는 변호사도 팔팔하게 살아 돌아다니고, 기자년 주둥아리도 막지 못했어.”

화면에 고정된 시선은 날카롭고 잔인했으나 얄팍한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음성은 더 없이 차분하고 냉정했다.

그 목소리에 눈앞에 있던 박 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엔 이쪽 사람을 보내서 조금 더 확실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양아치 놈 입은?”

“네. 그저 동네 양아치라 누가 시킨 일인지도 모르고 한 일입니다. 경찰에 붙들려도 아는 게 없어 실토할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는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자네도 놈과 그 운명을 같이해야 할 테니까.”

남자는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며 자신이 바라보던 노트북을 돌려 박 실장에게 보여주었다.

“이놈, 뭐하는 놈인지 알아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남자의 말에 박 실장은 고개를 끔뻑 숙이며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제 자리로 돌린 노트북엔 어제 오늘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 남자가 화면을 가득 장식하고 있었다.

1분도 안 되는 인터넷 뉴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하지만 그 1분도 안 되는 짤막한 뉴스가 수백 개의 기사들을 양산해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1위는 물론, 어제 오늘 가장 핫한 이슈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보통 놈이 아니었다.

마담M에 대해 수많은 소문이 나돌았지만 그중 어느 것 하나도 들어맞은 게 없었다.

심지어 여자일 거라는 상식 자체를 뒤집어버린 놈이 아닌가.

언론 플레이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놈이었다.

-그게…… 바로 제가 온 이유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철저히 숨어만 있던 놈이, 왜 이제야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게다가 제 목적까지 정확히 어필하면서 말이다.

“마담M이라…….”

남자는 슬그머니 치솟는 화를 달래기 위해 또다시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그러곤 첫 모금을 폐 깊숙한 곳까지 빨아들인다.

마치, 그 담배 한 모금이 자신이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진정제인 것마냥.

그렇게 빨아들인 한모금은 매캐한 연기가 되어 시야를 뿌옇게 흐려놓았다.

허, 그런데 이상하다.

저놈이 잘생기긴 잘생긴 모양이다.

그렇게 희뿌연 시야에서도 유독 놈의 얼굴만 선명하게 보이는 것을 보니.

결국 남자는 피우던 담배를 무자비하게 비벼 끄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변호사하고 그 기자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네놈이…… 진짜였구나.”

***

한편, 그 1분도 안 되는 영상에 혈압 오른 이가 여기 또 한 명 있었으니.

“이, 이…… 나쁜 자식…… 위승혀-언!”

바로, 빛나였다.

영상을 돌려 보고, 또 돌려보아도 어제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이 영상을 수십 번 돌려봤더랬다.

그리고 그때마다 느끼는 건, 한결 같았다.

“아, 젠장! 그 와중에 화면발은 또 기가 막혀요! 이 웬수!”

예상대로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훤칠한 그의 기럭지와 인물은 단연 화제가 되었다.

게다가 마담M의 화려한 국제 경력까지 한몫을 하고 있으니, KMK 공금횡령 건 재조사라는 팩트와 함께 모든 언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제 그가 한 인터뷰는 그야말로 ‘나 좀 죽여주쇼’와 다를 바 없는 현상금 쇼가 되어버렸다.

이제, 보이지 않는 적은 자신의 적이 빛나가 아닌 승현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을 테니.

때문에 빛나의 속은 훨훨 타다 못해, 새까만 잿더미가 되어가는 중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힌 것도 모자라, 하해와 같은 넓은 아량을 가졌다고 해도 도저히 이해를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승현은 이렇게 큰 사고를 치고도 감감무소식이다.

심지어 그녀가 하는 전화도 받지 않고, 어젯밤에는 외박도 했다.

물론 엘리스를 통해 이 큰 사고를 수습하느라 본사와 긴급 회의 중이란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 걸론 성에 차지 않았다.

승현이 마담M이란 사실은 로펌 내에서도 은지를 비롯해 황 대표와 김 이사 정도만 알고 있는 기밀 사항이었다.

결국 어제 터진 이 대형 사건은 승현뿐 아니라 그녀에게도 타격이 컸다.

모든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대박, 그러게 내가 보통 인물은 아닐 거랬잖아. 그 키에, 그 몸매에, 그 인물에.”

“아, 유 변호사님 부럽다…….”

덕분에 이제 그들은 승현의 신분에 이어, 두 사람의 관계까지 입단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마저도 보장할 수가 없다.

이미 승현과의 공개 연애는 회사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비밀이란 단속하기 힘든 법이니까.

사무실로 들어온 빛나는 책상에 앉아 다시 승현에게 전화를 시도했다.

그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아쭈! 안 받아?”

역시나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정도면, 그녀와의 만남을 피하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고 나를 영원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흥, 어림없는 일이다.

빛나는 제 성질에 못 이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그녀를 피한다면,

“감히, 위승현…….”

그녀가 찾아가면 그만이니까.

“……부숴버릴 거야!”

***

“그렇게 곁눈질하지 마. 그러다 눈 찢어져.”

하루 종일 승현을 곁눈질하다 가자미눈이 되어버린 엘리스에게 그는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이 되돌아온다.

“유 변호사님 전화, 왜 피하십니까? 아직 대화를 못 하셨습니까?”

“남이사.”

“빠른 시일 내에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여자란, 남자와 달라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쁜 기억은 더욱더 선명해지거든요. 따라서, 분노도 더 커집니다. 본부장님 신용카드 마일리지처럼.”

순간 승현의 매서운 눈길이 엘리스에게로 향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엘리베이터 앞만 주시한 채 꿈쩍도 하질 않았다.

“뭐야, 내 신용카드 마일리지까지 체크하나?”

“뭐, 그런 걸 꼭 체크해야 압니까? 본부장님 씀씀이만 봐도 알 수 있지. 그 마일리지 쌓아 곧 집도 한 채 장만할 수 있겠던데요.”

그 말에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던 승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게 왜 감당하지 못할 사고를 치십니까.”

“몇 번을 말해. 사고 아니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된 거였어!”

그래. 몇 번을 말해. 나 정말 계획적인 남자라고!

하지만 엘리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큰 건을 왜 혼자 계획하시냔 말입니다. 저 빼고.”

“말했다면, 엘리스가 동의했겠나?”

“당연히 아니죠.”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엘리스가 고개를 가로젓자 승현이 ‘거 봐.’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일을 벌이셨으니 책임은 지셔야 합니다. 본사 측에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공개된 이상, 신상 정보 털리기까지는 얼마 안 걸릴 테니까. 그 말은 곧, 저희한테 그만큼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니까.”

“알고 있어. 그래도 최대한 막고 있으라고 해. 내가 마담M이란 사실은 이미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불변의 진리지만, 우리 아버지 아들이라는 건 되도록 숨겨야 하거든. 진짜 큰 싸움이 될 수 있어. 그러기 전에 해결해야 하는 게 내 몫이고.”

“회사 측에서 새어 나갈 염려는 없습니다. 본부장님의 신분은 회사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니까. 그나마 한국에 있는 사람은 저뿐 아닙니까? 주변인 관리 잘하세요. 뭐…… 고약한 성격으로 보건데, 관리할 주변인도 많이 없을 것 같지만.”

“뭐야?”

승현이 눈썹을 곤두세웠지만 엘리스는 오늘따라 모든 것을 통달한 보살마냥 차분했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가 어제 친 사고를 생각하면, 지금쯤 엘리스는 혈압으로 어디 한쪽은 터졌어야 하는데 말이다.

“오늘따라 뭐가 달라 보이는데, 혹시 연애하나?”

“아뇨.”

“그럼, 신경 안정제…… 이런 거 복용하나? 그런 거 함부로 먹으면 안 돼. 큰일 나.”

의외로 화를 내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승현이 반응하자 엘리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 진작 이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릴 것을!

이 짓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세상에 없을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런 거, 안 먹습니다. 17층입니다. 얼른 내리십시오. 저는 한 층 더 올라가야 합니다. 인사과에 볼일이 좀 있어서.”

“혹시, 죽을 때가 되었나? 한국에선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들 해서.”

“아뇨, 저 아주 건강합니다.”

완벽주의에 모든 일을 팍팍하게 처리하는 엘리스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그에겐 더 없는 제어 시스템이었다.

적당한 때 제대로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때문에 그는 이렇게 매사 OK를 외치는 돌부처 엘리스보다 땍땍거리며 혈압 올리는 그녀가 더 필요했다.

이쯤에서, 그녀의 환상을 깨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승현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온화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무심한 듯 말을 흘렸다.

“아참, 엘리스. 본사로 돌아간다고 전출 신청했던데.”

지금껏 평온하던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랬다.

엘리스가 지금까지 승현의 만행에 이토록 태연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곧 있으면 이 악마와도 안녕이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마저도 몰래 한 것인데!

“그거, 내가 캔슬했다?”

순간 닫혀버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엘리스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아니, 실제로 들렸다.

하지만 승현은 그제야 속이 편한 듯 씨익 웃으며 돌아섰다.

아, 이 말을 어찌 꺼내야 할지 하루 종일 고민했었다.

오랜만에 찾은 그녀의 평온을 너무 빨리 산산조각 낼 수 없었으니까.

“하루 더 기다렸다 말할걸 그랬나?”

그깟 착각에 불과한 마음의 평온,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하루 더 봐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엘리스 걱정을 하며 돌아서던 찰나, 승현은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쪽 엘리베이터에서 이제 막 내려서는 빛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절로 발걸음이 돌아섰지만 히스테릭한 빛나의 외침에 승현은 그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어딜 가! 당장 이리 왓!”

단 하루에 불과했던 그의 마음의 평온도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의 심리 상태가 얼마나 살벌한지 알 수 있었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도.

그래서 승현은 얌전히 그녀 앞에 섰다.

말로는 사고친 게 아니라지만, 그녀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껴야만 했다.

대역죄인처럼 절로 두 손이 공손하게 모아지는 순간이었다.

“감히, 내 전화를 피해? 그리고 외박을 했어?”

그녀가 그의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살벌하게 입을 열었다.

이에 승현은 조심히 시선을 들어 최대한 온순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쌍꺼풀 없이 날렵하게 잘 빠진 제 눈이 간혹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는데, 승현은 그 순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눈으로 본다고 어제 일을 만회할 순 없으니, 눈 똑바로 뜨시지?”

물론, 상대가 유빛나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멍뭉미 넘치는 그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냉담하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의 필살기 눈빛 애교도 안 먹힐 듯싶다.

“그게, 바로 제가 온 이유니까요…… 이거하고! 공개적으로, 나 좀 죽여주쇼…… 이거하고, 뭐가 달라? 아니, 도대체 뭐가 다르냐고-오!”

그녀의 분노가 토네이도처럼 승현을 덮쳐왔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그래서 되도록 미루고 싶은 순간이었지만 엘리스의 말처럼 쌓이고 쌓인 분노는 그의 신용카드 마일리지만큼이나 어마어마했다.

“말해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야?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조용히 잘 숨어 있으랬더니, 도대체 왜 이런 거냐고! 이거 보면서 뭐 느끼는 거 없니?”

빛나는 노트북을 열고 어제 뉴스를 재생하며 그에게 다그쳤다.

그러자 승현은 뻔뻔하도록 순진무구한 얼굴로 슬쩍 뉴스를 보는 척 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여전히 정자세로 서서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음, 잘 나왔네. 근데 난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잘생겼는데 왜 이쪽에서 찍었대? 이정 씨한테 그렇게 부탁했는데. 화면은 왼쪽에서 잡아달라고.”

능청스러운 그 한마디에 그렇지 않아도 치켜 올라간 그녀의 눈매가 곧 있으면 하늘로 승천하게 생겼다.

이 화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성질 같아선 더 잘생겼다는 그 왼쪽을 제대로 긁어 오른쪽과 밸런스를 맞춰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빛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꼭 틀어쥐고 소리를 빽 질렀다.

“뭐얏! 지금 네 얼굴이 잘 나왔는지 못 나왔는지가 중요해? 이것 봐! 검색어 1위부터 3위까지, 전부 너야! 전부 너!”

“하, 큰일이네. 우리 집 사람들은 검색어 따위에 오르면 안 되는데…….”

“야-아! 너 지금 나 약 오르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니?”

그 좋은 머리로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어제의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계획이라는 이야기다.

그가 이런 위험한 계획을 할 때까지,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분하고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화가나 미치겠는데, 왜 안구에 습기가 차오르는 건지.

“너, 지금 이게 웃을 일이니? 사람 목숨 파리처럼 여기는 놈이야. 이제…… 네 목숨도 파리 목숨이 되어버렸다고!”

그 모습에 그제야 승현의 눈동자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불안해서 그랬어. 네가 위험한 것보단 내가 위험한 게 나으니까. 내가…… 뭐라도 해야 했다고.”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네 목숨 내놓는 일이라고. 이틀 전 일, 이젠 이정이 아니라 너한테 찾아올 거야. 알아들어?”

“그래, 그 일. 운이 좋아 이정 씨가 무사했던 그 사고…… 이정 씨가 아니라, 너였을 수도 있어.”

장난기가 사라진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랬다. 그 사실이 그를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그녀들에게 향한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보다 더 좋은 미끼가 없었다.

때문에 어제 일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 한 것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절박했으니까.

하지만 그 진지함에 빛나는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흐흑,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둘 중 하나라도 자유로워야 할 거 아냐. 둘 중 하나라도 안전해야 할 거 아냐! 내 얼굴은 이미 팔렸으니 너라도 무사해야지!”

“둘 중 하나만 자유로워야 한다면 그건 너고, 둘 중 하나만 안전해야 한다 해도 그건 너야. 내가 아니라…….”

그 부분에 있어선 더 이상의 타협이 없다는 듯, 승현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시큰해진 눈으로 승현을 노려보았다.

결국 그녀를 위해 그가 위험을 자처한 샘이다.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아버린 게 자신인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럼에도 이 일을 놓을 수가 없다.

그녀만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들의 희망을, 자신이 추구했던 정의를, 포기할 순 없었으니까.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유빛나? 내가…… 녀석한테 당할까 봐?”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온 승현이 등을 토닥이며 다정하게 물어왔다.

이 녀석, 정말 몰라 묻는 것일까.

애가 타는 그녀의 심정과는 달리, 제 안전이 달린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태연한 그에게 화가 났다.

“걱정 마. 나, 생각보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 아니야. 그 자식…… 사람 잘못 건드렸다고.”

“…….”

“적어도…… 넌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다. 적어도 그녀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는 사실이, 위씨 집안의 타고난 싸움꾼 기질을 끌어내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이 상황에도 그녀의 안전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빛나는 더 속이 상했다.

“지금 내 걱정 할 때니? 저 현상금 쇼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버럭하는 빛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승현이 슬쩍 웃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 이왕이면, 큰 사람이 되라고.”

“…….”

“근데 또, 이런 말씀도 하시더라.”

“…….”

“제 사람도 지키지 못하는 놈은, 절대 큰 놈이 될 수 없다고.”

그 말에 꾹꾹 참아왔던 설움이 빵 터져버렸다.

“흐흐흑! 아, 진짜! 미워할 수가 없어!”

그의 가슴을 내리치며 울다 웃다 하는 그녀 때문에 승현도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결국 그녀의 웃음도, 눈물도, 분노도, 모두 그 때문이라는 거니까.

따라서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웃게 만들 사람도 다름 아닌 그라는 이야기다.

“나, 키스해도 돼?”

그 물음에 빛나는 곱게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물어보고 했다고. 그냥 해!”

그렇게 승현은 하루 종일 쌓아왔던 그녀의 분노 마일리지를 결국 사랑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차곡차곡 많이도 쌓아왔던 만큼 그 열기도 뜨거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섹시한 숨결이 그녀의 입안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뜨거운 그의 손이 그녀의 스커트 안쪽을 파고들었다.

엉덩이에 그의 책상이 주는 딱딱한 감촉이 그대로 와 닿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뜨거운 열기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달콤하게 파고드는 그 입술에 빛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그녀의 입에서 절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음…….”

제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야하고 섹시한 소리였다.

“여기, 네…… 사무실이야.”

조금 자제를 해야 했다.

누가 들어와 보기라도 하면, 이 민망한 상황에 빛나는 17층에서 뛰어 내려야 할 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한마디로 달아오른 승현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이 아슬아슬한 상황이 그에겐 더욱더 자극적이었다.

“볼 테면 보라고 해. 신경 안 써.”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그녀의 입술에서 제 입술을 떼어내어 그 뜨거운 열기를 그녀의 우아한 목선으로 옮겼다.

빛나는 그 짜릿한 감각에 눈을 감으며 더욱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후끈 달아오른 공기가 그 넓은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두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때, 그의 책상에 있던 사무실 전화가 울려왔다.

물론 승현이 받지 않을 생각으로 그 전화를 확 밀어 떨어트렸지만, 덕분에 빛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제야 블라우스 단추가 두 개나 풀려 훤히 드러난 가슴골에 차디찬 공기가 와 닿았다.

“하, 승현아. 이제…… 우리 그만…….”

그녀의 목소리에 승현도 정신을 차렸지만 달아올라 버린 몸은 손쉽게 그 열기가 식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한참 동안을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은 채로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마주했을 때 빛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도대체 어떤 남자가 그녀를 이런 눈빛으로 바라봐 줄 수 있을까.

그의 까만 동공에 온전히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이 새삼 감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는 오늘 아주 작정을 한 듯,

“그러지 말고 오늘부터…….”

가차 없는 심장 어택을 시도했다.

“…… 우리, 같이 살까?”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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