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쥐꼬리만 한 인내심의 결과
2018.04.29.
“그런데, 이 구역 미친개가…… 바로, 나야.”
남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찰랑이는 긴 생머리, 늘씬한 몸매, 자그마한 얼굴에 몽롱한 눈동자는 트레이닝 상의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서 있는 삐딱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분위기를 독보적으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지나가는 미친년이라고 하기엔, 헉 소리가 날 만큼 예뻤단 말이다.
잠시, 복실의 분위기에 홀려 넋을 잃은 남자는 그녀가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다 획 틀어 까닥까닥하는 모습을 보곤 번뜩 정신을 차렸다.
“빨리 끝내자. 5분 안에. 라면 불어터진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인 건 덕분에 남자가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
남자는 주먹을 꼭 틀어쥐었다.
살인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절대 증인을 남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저 미친년이 제아무리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청순 미인이라도 그의 남은 인생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4분 42초 남았다.”
복실의 그 한마디에 남자가 작정을 한 듯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녀가 한 발 빨랐다.
우악스런 손이 그녀의 목을 가로채기도 전에 안쪽으로 파고든 그녀의 팔꿈치가 남자의 안면을 정확히 강타했다.
퍽!
“으아악!”
정신이 번쩍 드는 고통이었다. 코뼈가 내려앉지 않았나 걱정이 될 만큼.
충격적인 고통에 남자가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굽히자 얼굴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제야 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지금까지 사람 죽이는 것 빼곤, 웬만한 건 다 해본 남자가 아닌가.
여기서 무릎 꿇는 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것도 이토록 말랑말랑한 여자한테!
그래서 남자는 이를 악물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추세우며 일어났다.
“너, 너…… 운 좋았다!”
정확히 들어온 공격을 그녀의 운으로 돌렸다.
그따위 천운, 다시는 따라주지 않을 거라고. 그래야만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되니까.
하지만 극도로 흥분한 남자와 달리, 그를 바라보는 복실의 눈동자는 무료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저 여유는 어디서 흘러나온 것일까. 도무지 정상적인 멘탈을 가진 여자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믿기 힘든 사실은, 군살 하나 없는 여리여리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빈틈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큰 태산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견고했다.
“이년! 잡히기만 하면…….”
그랬다. 저 가녀린 목을 움켜잡기만 하면 게임 끝이다.
그때부턴 어느 모로 보나 남자의 우월한 힘으로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남자는 제 힘만 믿고 그녀에게 주먹을 뻗었더랬다.
그리고 그것이 실수였다는 걸 깨달았을 땐, 자세를 낮추며 치고 들어오는 복실에게 이미 목젖을 내어준 후였다.
“쿠억! 켁!”
급소를 맞은 남자는 순식간에 앞으로 꼬꾸라졌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통증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더불어 호흡 곤란도 오는 듯하다.
“후억. 퉤!”
입안에 절로 고인 침을 뱉어낸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땅에 주저앉아 몸부림을 쳤다.
그런 남자에게 복실이 소리 소문 없이 다가섰다.
아파트 옆 외진 곳이라 작은 돌에 바스락거리는 마른 풀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발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귀신같은 걸음걸이였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남자와 눈높이를 마주하자 싸늘한 바람이 어둡게 내려앉은 공기를 섬뜩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달빛에 반사된 그녀의 긴 생머리가 그 바람결을 타고 스산하게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넌, 아직도 이게…….”
“…….”
“운으로 보이니?”
그렇게 남자를 내려다보며 내뱉은 그녀의 말투는 2배속을 찍어야 보통 스피드로 올라올 만큼 더디었다.
그제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예뻐 보이기만 한 그녀의 외모에서 진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컥, 너…… 도대체 누구야!”
그래, 너 누구냐! 혹시 간첩이냐?
이 일을 의뢰받을 당시, 이런 미친년을 상대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때문에 복실의 존재는 남자에게 충격 그 자체다.
“흡, 컥! 정체가…… 뭐냐고!”
조금 전 급소를 얻어맞은 덕분에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다시 물었더랬다.
그리고 그 물음에 조금 전과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말했잖아. 나, 이 구역 미친개라고…….”
세상에나, 이런 미친년은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단 한마디도 말이 되어 나오질 못했다.
이유인 즉, 복실이 그에게 희고 고운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으아악! 컥! 저리 가! 저리 가!”
남자가 발버둥을 치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기도 전에 복실에게 뒷덜미를 붙들리고 말았다.
“저리 가라고-오!”
다 잠긴 목소리로 반항하자, 귓가를 서늘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걱정 마. 너 오늘 운빨 아주 죽이니까.”
좋은 말인가, 나쁜 말인가.
구분이 되질 않았다.
문자 그대로 의미만 두고 보자면 그에겐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서늘한 얼굴은 그와 정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미를 장식하는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섬뜩하게 와 닿았다.
“다른 구역 미친개가, 너…… 숨만 붙여놓으래.”
숨만, 붙여놓으란다. 숨만…….
남자의 흔들리는 동공이 기절해 있는 이정의 얼굴을 보며 급격히 어두워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그녀가 이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정신줄이라도 놓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말짱한 정신은 더욱 또렷해져 극도의 공포심에 이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남자는 자폭을 하고 만다.
“사람 살려! 사라-암-사-알-려어-!”
그가 저지른 범행을 보자면 절대 해서는 안 될 구조 요청이었다.
살려달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지만 제 입에서 나올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터라 그저 낯선 한마디였다.
하지만 남자는 절절하게 외쳤다.
보는 복실이 다 안타까울 만큼 아주 절절하게.
그리고 드디어 그 부름에 누군가가 응답했다!
할렐루야!
“뭐야? 어머, 어머! 빛나야! 저기, 저기…… 꺄아-악!”
복실이 나간 후 걱정이 되어 곧바로 옷을 꿰어 입고 따라 나온 빛나와 은지였다.
은지는 어두운 아파트 옆 나무들 사이에서 남자가 기어 나오자 기겁을 해 소리를 지른 것이다.
남자는 그녀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살았다!
목격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되니, 제아무리 이 구역 미친개도 어쩔 수 없으리라!
“신고 좀 해줘요! 신고! 경찰에 신고 좀! 제발, 컥!”
그래. 해주라!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경찰서 행이었으나, 그래도 저승길보단 경찰서 가는 길이 더 평탄할 것 같으니!
그러나 그런 안도의 한숨도 잠시, 남자의 구세주일 거라 생각했던 그녀들의 거친 반격이 시작되었다.
“어머! 복실아! 우리 복실이! 저런, 미친 새끼가 우리 복실이를! 너 오늘 죽었어!”
어디서 그런 오해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죽을 둥 살 둥 발버둥을 치며 살려달라 구조 요청을 한 건 남자요, 그의 멱살을 살벌하게 움켜쥐고 있는 건 복실이었다.
그런데 이성을 잃은 빛나가 겁을 상실한 채 달려들어 쥐어뜯은 건 다름 아닌 남자다.
“으아악!”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으니.
“내가 아니라…… 이 여자…… 아악!”
“뭐야, 이 자식아? 죽고 싶어? 이거 못 놔? 놓으란 말이야!”
그도 놓고 싶었다.
복실의 갈고리 같은 손이 자신의 목을 놔주면 말이다.
하지만 이 손을 놓는 순간 이 저승사자 같은 여자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그를 끌고 갈 것 같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발단이었다.
“그래도 이 미친 자식이!”
눈에 뵈는 것 없는 빛나가 멀쩡한 정신에 개빛나로 변해버린 건.
복실의 팔을 끈질기게 붙들고 안 놓는 남자의 팔을,
“으아-악!”
빛나는 거침없이 물어버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남자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단 한 가지 생각!
어떻게든 여길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때마침, 저쪽에서 쓰러져 있는 이정을 발견한 은지의 비명 소리가 잠깐의 틈을 내주었다.
“어머, 어머! 이정씨! 이정씨, 왜 이래요! 눈 좀 떠 봐!”
“뭐라고? 이정이도 있어?”
놀란 빛나가 남자에게서 눈을 돌린 사이, 혹시나 정신을 차린 남자가 빛나에게 주먹이라도 휘두를까 싶어 복실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사이, 남자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솟은 것인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후들거려 제 구실을 하지 못했던 다리가 절박함으로 인해 단단하게 곧추섰으니 말이다.
그 모습에 복실이 외쳤다.
“너, 이 자식! 거기 안 서!”
그러나 남자는 뛰었다.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렇게 그곳을 죽기 살기로 벗어난 남자는 주변 어두운 곳으로 몸을 숨겼다.
복실이 뒤쫓아 왔지만 남겨진 그녀들이 걱정되어 남자를 끝까지 추적할 순 없었다.
돌아선 복실의 뒷모습을 보며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찰나, 따뜻한 무언가가 입술을 타고 턱밑으로 흘러 내렸다.
“흐악, 피!”
저도 모르게 작은 비명이 튀어 나왔다.
태어나 단 한 번도 흘려본 적 없는 코피가 얼굴을 따고 후드득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쌍코피!
이것도 억울해 죽을 판인데, 그보다 더 큰 쪽팔림이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코피를 닦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다 찌릿한 고통에 내려다보니 팔에도 피가 맺혀 있었다.
“허억! 여기도…….”
조금 전 빛나에게 물렸던 자리가 붉게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천하의 유빛나 사전에 얼렁뚱땅이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 복실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아련하게 헤집어놓는다.
-미친개한테 물리면 약도 없대.
그제야 남자는 아득한 정신에 깨닫기 시작했다.
이 구역 미친개는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임을.
하지만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은 치유할 길이 없었으니.
***
새벽 세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복실과 이야기를 나누는 승현의 눈썹이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래서, 놓쳤다고?”
“응. 멀리 쫓아갈 수가 없었어. 언니들이 있었거든.”
남자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 놓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복실에겐 범인을 쫓는 것보다 그녀들의 안전이 먼저였으므로 추적한답시고 그 자리에서 멀리 떨어질 수가 없었던 탓이 컸다.
“내일, 경찰서로 가 몽타주 작성하기로 했어. 내가 그놈 얼굴 확실히 봤거든.”
“그 자식…… 어떻게 생겼어?”
“그냥, 동네 양아치지 뭐. 아마추어야.”
“아마추어라고?”
“응. 반격하는 폼도 엉성하고, 기술도 없는 놈이야.”
그 말에 창밖을 내려다보는 승현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마추어라…….
“그렇다면, 그놈은 아니군.”
그는 확신했다. 그의 앞에 나타났던 놈은 프로 근성에 강단까지 있는 ‘진짜’였으니까.
그 말은 곧, 놈은 아직도 저 어둠 어딘가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
복실이 물어왔다. 하지만 승현은 그 물음에 정확한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남자에 대해 아는 거라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두 눈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흐려지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두려웠다.
그러다 그의 기억이 뒤틀려 그 눈을 잊어버릴까 봐.
그래서 영영 찾지 못하게 될까 봐.
“그렇겐…… 안 되지.”
피가 바짝 바짝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정체 모를 적에 대한 허기가 더 컸다.
타고난 위씨 집안의 피가 본능적으로 어둠을 갈구했다.
더 이상 손 놓고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늘은 사건에서 빛나는 다행히 무사했다지만 오늘 같은 행운이 계속되리란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무슨 수를 써야 한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복실이 돌아가고 나서도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그가 움직여야 할 때다.
그것이 날을 꼬박 지새우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승현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만큼이나 잠을 못 이룬 상대는 신호 두 번만에 전화를 받아 들었다.
“이정 씨, 내가 부탁할게 하나 있는데요…….”
***
해외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마치고 복귀하는 차안에서 승현은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자 룸미러로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스가 인상을 굳히며 묻는다.
“조금 전부터 시계를 계속 보시던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왜?”
“불안해서요.”
“불안하긴, 내가 뭐 시한폭탄인가?”
헐, 정말 몰라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엘리스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능청스럽게 잘생긴 그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자꾸 시계를 확인하는 승현의 모습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꼭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단 말이다.
“무슨 일을 저지르실 거면, 미리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왜?”
“마음의 준비 좀 하게요!”
“안 돼. 예측불허, 이게 바로 내 매력이거든.”
흐악, 퉤!
진짜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하지만 그 순간에도 손목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승현의 태도에 결국 엘리스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또 그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하시면, 저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 무슨 생각?”
“본사에 전학시켜달라 요청할 겁니다!”
웬만하면 언성을 높이지 않기로 유명한 엘리스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승현은 엘리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운전을 하던 김 기사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차 좀 세우지.”
그를 태운 고급스러운 세단이 조용히 멈춰 섰다.
이곳은 바로 회사가 위치한 빌딩 앞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로 지하주차장과 간부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이동하는 관계로 여기에 차를 세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여긴 도대체 왜…….”
의아함에 입을 열던 엘리스의 눈동자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오가는 사람들 중에도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분명한 기자였다.
그제야 엘리스는 승현이 차를 세우라고 한 이유를 알겠다는 듯 깨달음의 표정을 지었다.
저 기자들은 지금, 두 번째 협상의 공식 발표를 하기 위해 나올 빛나와 은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승현은 그런 빛나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차를 세운 것일 테고.
연애 안하는 사람은 서러워 살겠나!
이런 순간까지 꼭 그렇게 티를 내니 말이다!
드디어 빌딩 회전문이 열리며 빛나가 걸어 나오자 순식간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와중에도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빛나의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엘리스는 잠시 넋을 잃었다.
게다가 기자들의 몰아치는 공습 질문에 흔들림 없이 대처하는 모습은 소름이 돋도록 당당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엘리스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뒷좌석에서 승현의 조용한 목소리가 귓전을 분명하게 파고든다.
“엘리스, 좀 전에 그거 말이야.”
“네? 뭐요?”
“전학이 아니라 전출이라고 하는 거야. 또는 간단하게 부서 이동이라고 하던가.”
무슨 말인가 싶어 엘리스는 의문을 가진 채 뒤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그러다 엘리스는 기겁을 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
“으-아악! 본부장님-임!”
말도 안 된다!
그가 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이미 그 기다란 기럭지의 반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서버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엘리스는 승현의 의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어제 큰일을 당한 사람치곤 너무도 단호하고 결연한 얼굴로 이정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는.
“KMK에 새로 부임한 아시아 본부장으로서 이번 협상 건에 대해서 달리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맙소사!
엘리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주워 삼켜야만 했다.
그리고 드디어 차 문이 닫히며 승현이 넘어서는 안 될 저 세계로 완전히 넘어가버렸을 때, 그녀는 외쳤다.
“아악- 더 이상은 못 참아! 나, 전학 갈 거야-아!”
***
“아직까진 완전히 협상이 끝난 게 아니라 정확한 답변은 드릴 수 없지만 양쪽 모두 긍정적인 방향으로 완만한 협상을…….”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다.
때문에 빛나는 기자들의 매서운 질문에도 차분하게 응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평온함도 잠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잘 못 본 것이라 믿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승현의 타고난 비주얼은 절대로 잘 못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블랙 슈트 단추를 잠그며 세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그녀 앞에 몰린 수많은 기자 행렬을 이탈해 승현 앞으로 다가간 이정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빛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KMK에 새로 부임한 아시아 본부장으로서 이번 협상 건에 대해서 달리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그 순간, 그녀에게 몰렸던 모든 이의 시선이 순식간에 승현에게로 돌아갔다.
“뭐라고? KMK 본부장? 그럼 저 사람이 바로 마담M이란 말이야?”
“말도 안 돼. 마담M이 남자였어?”
“세상에…….”
하지만 이쯤은 그다음에 이어진 승현의 기행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이번 협상은 다소 지연될 것입니다. 회사 측에선 아직 이 불미스러운 건에 대한 의심을 완벽하게 거둬들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하지만 이 사건이 말끔히 해결되면, 그땐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최상의 협상이 이뤄질 것입니다.”
KMK 공금 횡령 건은 이미 마무리가 된 사건이라 또 다른 의심이 있다는 부분은 실로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빛나와 은지도 놀라긴 마찬가지다.
왜냐고?
그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철저히 감춰진 채 세상에 공개되지 않아야 하는 일급 기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가 뒤에서 적의 목덜미를 물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승현이 결국 카메라 앞에 서고 말았다.
넋을 잃은 빛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소리 없이 감겼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수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하지만 승현은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빛나는 자신을 향했던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돌아가는 모습을 공포스러운 눈동자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나을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즉, 저번 KMK 건을 다시 조사하신단 말씀이세요?”
그랬다.
그는 빛나가 자금의 행방을 찾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적 또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
덕분에 그나마 쥐꼬리만큼 있던 인내심마저도 바닥난 그가 선택한 최후의 방법.
그것은 제 스스로가 미끼가 되어 덫을 놓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그가 찾을 수 없다면,
“그게…… 바로 제가 온 이유니까요.”
적이 찾아오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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