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이 구역, 미친개는 바로 나!
2018.04.25.
“허락 없이 내 구역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질문에 대답이나 해.”
[…….]
“너, 뭐하는 놈이야?”
망설임 없이 던지는 승현의 질문에 오히려 안색이 파랗게 변한 사람은 바로 헬멧맨이었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생겼을까.
분명, 의심의 여지없이 훤칠한 생김새인데도 불구하고 등골이 서늘한 저 지랄 맞은 분위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잠시 넋을 잃고 있던 헬멧맨은 대답 없는 상대방에게 짜증난 승현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흠칫 놀라며 다시 헬멧을 뒤집어썼다.
승현과 자신의 시선 사이에 있는 그 헬멧이 마치 그의 목숨 줄이나 되는 듯 아주 간절하게.
그 와중에도 승현은 여지없이 독보적인 소유욕을 폭발시키며 제 영역표시를 한다.
“내가 소유욕 쩌는 찐따라, 다른 새끼가 내 여자한테 집적대는 꼴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봐서 말이지.”
[몰랐네. 빛나한테 남자가 있는 줄은.]
처음으로 듣는 상대방의 목소리는 더 없이 차분하고 온순했다.
그러나 승현은 그런 상대방의 반응에 기가 막히다는 듯 한층 날을 세운다.
“몰랐…… 다고?”
누가 보면, 죽었다 깨어나도 변치 않을 불변의 진리에 반기를 든 줄 알겠다.
“아니.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그렇게 대놓고 연애를 했는데?”
그렇다.
그렇게 대놓고 침 바르고, 대놓고 공개연애까지 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이가 있단 말인가!
기가 막힌 현실에 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신경질적으로 관자돌이 근처를 긁적이며 왔다 갔다 하는 폼이, 흡사 제 맘대로 되지 않아 안절부절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전광판에 광고라도 넣어야 하나? 아님, CF라도 찍어 쫙 깔아버릴까?”
그 모습에 헬멧맨은 오소소 소름이 돋는 팔을 슬쩍 쓸어 내려야만 했다.
정상이 아니다. 정상인 사람이 할 소리가 절대 아니란 말이다.
멀쩡하다 못해 빛나는 허우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지랄 맞은 분위기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의 성깔이다. 대체 불가능한 그의 성질머리가 그 잘난 외모에서 은연중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인간 시한폭탄이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아, 이런 생지옥이 또 있을까.
헬멧맨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지옥행 열차에서 어서 뛰어내리고픈 심정이다.
하지만 그 중얼거림에 소름이 돋은 건 헬멧맨뿐이었던 모양이다.
직접 두 눈으로 본 게 아니니 어쩌면 통화를 하던 상대방이 의문을 갖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그럴 수나…… 있겠어?]
하지만 그 당연한 의문에 승현의 짙은 눈썹 끝이 사납게 구겨졌다.
그 한마디가 가뜩이나 날카로운 그의 신경을 제대로 긁은 것이다.
그 결과, 승현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하게 다시는 반박 못 할 한마디를 날리고 말았다.
“필요하다면.”
짧은 한마디였지만,
평범하다 못해 주어 목적어 모두 생략된 한마디였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배짱 한번 두둑하군.]
상대방이 그를 확실히 높이 샀으니 말이다.
그러나,
“네 눈엔 이게…… 배짱으로 보이냐?”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되묻는 그의 질문은 더 없이 서늘했다.
그 냉랭한 마이너스 기운에 죄 없는 헬멧맨만 두 주먹을 꼭 쥐며 소리 없는 절규를 했다.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그 남자에겐 이 순간이 정말 생지옥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전화를 받는 상대방도 예외일 순 없었다.
장난인 듯 장난 아닌 한마디가 온몸의 털을 쭈뼛 곤두서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배짱이 아니라 똘기야.”
감히 어느 누가 제 스스로를 배짱이 아닌 똘기로 표현할 수 있을까.
미쳤다고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농담이나 거짓이 아닌 진실처럼 들리니 더 큰일이다.
“미친개한테 물리면 약도 없다는데,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으면…… 한 번 더 꽃을 보내보던가.”
[…….]
“그게 싫음, 여기서 멈추던가.”
[…….]
“참고로, 나 한 번 물면 안 놓는다.”
마지막 경고였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을 거라는.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승현은 가뜩이나 붉은 입술을 더욱 살벌하게 틀어 올리며 그 특유의 비아냥거림을 토해냈다.
“그래도 꽃을 보내고 싶다면, 다음엔 직접 와야 할 거야. 여기 이분은…… 다시는 여길 오지 않을 것 같거든.”
그 말에 헬멧맨은 동조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알고 보니, 어제 협상 결렬됐다며?”
어제 빛나의 상태로 봐선 협상 결과에 대해 감히 예측해볼 수 없었지만, 하루가 지난 지금 그 결과는 분명히 나타났다.
“아, 이러다 우리한테까지 불똥 튀는 거 아냐?”
“그러니까 오늘은 눈치껏 하자구. 솔직히 유 변호사님이 평소엔 천사인데 한번 수틀리면…… 아오, 생각도 하기 싫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 듯 팔을 쓸어 올리는 여직원의 목소리에 모두들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KMK 두 번째 협상이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첫날, 이유는 모르지만 협상 카드를 내놓기도 전에 무산되는 바람에 소문만 무성했던 협상이라 두 번째 협상인 어제는 언론은 물론 로펌의 관심사가 모두 그곳에 쏠린 터였다.
그런데도 오늘도 이렇다 할 협상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 그 무성했던 소문이 이젠 무성하다 못해 울창한 숲을 이룰 지경이었다.
언론으로부터 인터뷰 전화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당분간 이 사건에 대한 그 어떠한 인터뷰나 정보 노출도 사절이라 전화 받는 직원들만 똥줄이 탔더랬다.
그러다 보니 오늘 빛나의 컨디션은 사무실 분위기를 좌우하는 가장 큰 포인트가 되었다.
그때 경쾌한 엘리베이터 알림 음과 함께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재깍 제자리로 흩어져 일에 열중인 척 열연을 했다.
문이 열리며 드디어 빛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좋은 아침.”
예상과는 달리 경쾌한 빛나의 목소리가 사무실 입구를 환하게 밝힌다.
그리고 뒤이어 은지의 목소리도 함께.
“좋은 아침입니다!”
깔끔한 정장 팬츠에 심플한 플랫, 그리고 블라우스와 코트를 적절히 믹스매치 한 빛나는 오늘따라 눈부신 외모를 발사하며 다른 사람들도 설레게 만들었다.
그리고 평소 새침하기로 소문난 은지 또한 오늘따라 웃는 인상이다.
거기에 더욱 이상한 건, 두 사람이 다정하게 빛나의 사무실로 함께 들어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기이한 광경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에도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로펌에서 소문난 라이벌이자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헐, 폭풍 전야가 따로 없네.”
덕분에 그들의 흔치 않는 어울림은 더 큰 후폭풍의 불길한 조짐으로 여겨졌다.
***
밖에선 안절부절 그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빛나는 코트를 옷걸이에 걸로 자신의 회전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그러자 은지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입을 연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넌 김병훈 검사의 주변 인맥에 대해서 좀 알아봐줘.”
“김 검사를 의심하고 있는 거구나?”
“의심하는 건 아니고 확실히 하려는 거지. 350억 원이야. 회수 금액 120억 원. 근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마무리되었단 말이지.”
“한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사건이니까. 대한민국의 명예가 걸린 일인데 대폭적인 지지를 받아 일이 빨리 처리됐겠지. 위에서 압력도 장난 아니었을 테고.”
“그럼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만약…….”
“만약?”
“사건을…… 은폐한 거라면?”
속삭이는 듯한 빛나의 음성에 웃고 있던 은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그 웃음을 잃었다.
그러곤 굳은 입매로 조심히 입을 연다.
“우리가, 찾아야지. 진실을…….”
“내 말이. 확실히 하자구. 내 능력으론 김 검사 인맥까지 조사하는 건 무리야. 그건 너한테 맡길게.”
“좋아. 그럼 너는?”
“난, 지금 김 검사를 비롯해 지금 콩밥 먹고 있는 그 인간들 재산 내역을 다시 조사하려고.”
“하지만 검찰 자료엔…….”
“그 자료 안 믿어. 은폐하려고 했다면 그 자료조차도 거짓이니까. 내 방법대로 할 거야.”
“회사에서?”
“아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돈 좀 얹어주면 그거 귀신처럼 하는 사람 하나 있어. 그 사람한테 부탁해보려고.”
“개인 수사원을 쓰시겠다?”
“해야 한다면.”
빛나가 윙크를 날리며 매력적으로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기분이 좋으면 나오는 그녀만의 습관이다.
그 모습에 은지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참, 그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야?”
“말도 마. 돈만 주면 감방에서 그들이 쓰다 버린 똥 닦은 휴지도 들고 올 사람이니까.”
“으흐…….”
적나라한 비유에 은지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결국 마무리는 웃음이었다.
사실 제 목숨줄이 아직까지도 왔다 갔다 하는 건 사실이었으나, 더군다나 개인지 사람인지 모를 그 복실에게 제 안전이 달려 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으나, 남들이 모르는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짜릿함이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내 일도 걱정 마. 사돈에 팔촌, 김 검사의 거대한 인맥지도를 만들어 올 테니.”
“그럼 이제 내 몫은 돈을 찾는 거네.”
“자신 있어?”
은지의 물음에 빛나는 은밀한 웃음을 내보이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당연하지. 남은 230억 원, 갈가리 찢어 수만 계좌를 계설해 은닉했다 해도, 10원짜리 하나까지 다 찾아낼 거야.”
그러자 은지가 당연하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그래야 유빛나지.”
***
[그래서, 오늘 늦는다고?]
아쉬움을 숨기지 않는 빛나의 솔직한 음성에 승현은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응. 내가 어제부터 열 받는 일이 좀 있어서 이틀 동안 일 안 하고 빈둥거리다 엘리스한테 잡혔어.”
그는 곁에서 기숙사 B사감 같은 얼굴로 단호하게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엘리스를 바라보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하루 종일 성질만 부리다 본사 일정에 못 맞춘 게 누군데 저녁 약속 취소한 걸 그녀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
억울한 엘리스는 얄미운 승현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이다.
불과 빛나와 통화하기 1분 전까지만 해도 마법에 걸린 여자보다 더 예민하게 굴더니 말이다.
“많이 늦을 것 같아. 어떻게 해? 나 때문에 저녁도 못 먹었을 텐데?”
나도 너 때문에 점심 저녁 거른 사람이다!
엘리스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냐. 괜찮아. 근데 무슨 일로 그렇게 열을 냈대? 기자들한테 들킨 건 아니지? 네 정체를 아는 이정이도 가만히 있는데, 설마…….]
“아냐. 기자들로부터는 잘 숨어 다니고 있어. 걱정 마.”
[그래. 숨길 수 없는 비밀이긴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만큼 숨어 다녀. 괜히 얼굴 팔려 너까지 위험해질 필요 없으니까.]
“너나 걱정해. 밤에는 복실이랑 꼭 붙어 자고.”
[응. 그건 걱정 마. 여기 있는 사람, 어느 누구도 복실이랑 안 자려고 해서 그러고 싶지 않아도 내가 꼬-옥 붙어 자야 해.]
“아, 강복실. 걔, 혹시 코 골아?”
[아니. 그건 아닌데, 잠버릇이 좀 고약해. 알잖아. 잠을 자도 어찌 그리 삐딱하게 자는지, 꼭 대각선으로 누워서 자리 다 차지하고 자는 거.]
“지지 말고 밀어내. 난 내 여자가 어디 가서 지는 꼴 못 보니까.”
그 말에 기분 좋은 빛나의 웃음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그의 귓전을 울려왔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웃음소리였다.
[후훗, 누가 할 소릴. 너야말로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다녀. 위승현답지 않아.]
“언젠 거만에 오만해서 싫다더니?”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아. 네 그런 모습이 좋아. 거만에 오만, 얼마든지 떨어. 내가 다 받아줄 테니까.]
“후훗.”
이번엔 승현의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했다.
어찌나 기분 좋은 웃음인지 보는 엘리스가 다 설렐 정도였다.
[왜 웃어?]
“그냥,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깡그리 날려먹은 보람이 있다 싶어서.”
[뭐?]
빛나가 물었지만 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번 말해도 모를 것이다.
그가 어제 얼마나 유치한 짓까지 마다하지 않았는지.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고 했던가.
어제 그가 딱 그러했다.
엘리스가 그의 본분을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혼미백산에서 도망간 헬멧맨을 기어이 추적해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승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곁에 있는 엘리스가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그의 고약한 성질머리를 받아내느라 애를 먹긴 했지만 스스로 잘 참았다 위로하는 중이다.
“내일은 꼭 얼굴 보자.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 낼게.”
[알았어. 내일 봐.]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빛나의 목소리가 왔다간 흔적은 그 무엇보다 행복한 여운을 남겼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웃고 있으니 말이다.
미친개에게 물리면 약도 없다던데, 영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적어도 승현이란 미친개에겐 빛나가 신통방통한 묘약임이 틀림없었다.
그 늦은 깨달음에 엘리스는 자신의 머리를 치며 안타까워했다.
***
전화를 끊은 빛나는 부산히 주방을 왔다 갔다 하는 복실을 바라보며 은지에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이정이가 제대로 터트렸던데, 기사 읽어봤어?”
그 말에 은지는 노트북으로 오늘 올라온 이정의 기사를 읽으며 긴장했다.
그때 복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들고 두 사람들 곁에 앉자 은지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또 먹어요?”
“오늘 라면은 처음인데요?”
그 말이 아니잖아!
“좀 전에 피자 한판 다 먹고, 콜라 1.5리터짜리 원샷에 커피에 쿠기도 한 접시 했잖아요.”
은지는 태어나 이렇게 많이 먹는 여자는 처음 봤다.
그런데도 살이 안 찌는 여자는 정말 처음이다.
물만 먹어도 살이 쪄서 늘 체중 조절을 해야 하는 은지에게 복실은 더더욱 충격적인 캐릭터였다.
“괜찮아요. 저는 원래 배가 불러야 잠이 잘 오는 스타일이라.”
“라면이…… 안 익었는데?”
“아. 저는 뜨거운 거 잘 못 먹어서 이렇게 면발을 덜 익혀야 적당히 식었을 때 즈음엔 면발이 쫄깃해져요. 제가 이래봬도 미식가라 팅팅 불어터진 면발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거든요.”
미식가가 아니라, 대식가겠지.
참으로 설득력 없는 한마디였다.
도대체 이런 식충이가 이 집에 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불가다.
“그나저나, 오늘 이정의 기사가 좀 자극적이지?”
“문체가 워낙 그런 스타일이더라고.”
다행히 빛나가 적당한때 끊어줘서 은지는 라면을 식히는 복실에게서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몸 좀 사리라니까. 진짜.”
빛나가 걱정스러운 듯 이야기하자 은지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괜찮을 거야. 뭐, 기사 한 번에 무슨 일이 있기야 하겠어?”
“그래도. 근데 얜 도대체 왜 안 들어오는 거야? 걱정되게?”
시계를 확인하며 핸드폰을 바라보는데 때마침 벨 소리가 울려왔다.
이정이었다. 빛나는 조금 예민해진 말투로 전화를 받아 들었다.
“너 어디야? 지금 몇 신 줄 알아?”
걱정이 가득 담긴 질문이었다.
복실은 그런 빛나를 곁눈질하며 면발을 돌돌 말아 이제 막 입에 넣으려다 다음 한마디에 멈칫한다.
“요 앞 편의점이라고? 알았어. 빨리 들어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사회부 기자라지만 목숨이 위협당하는 이 시국에 12시가 넘어 귀가를 하다니.
게다가 편의점까지 들렀다 오는 여유까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빛나는 눈앞의 자리가 휑한 것을 느꼈다.
“응? 복실이 어디 갔어?”
라면을 후후 불고 있어야 할 복실이 없는 것이다.
어느새 현관 앞으로 순간이동을 한 복실에게 빛나가 물었다.
“어디 가?”
그러자 복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한다.
“5분 안에 올게. 내 거 라면 먹으면 안 돼!”
***
이정은 요즘 들어 속이 좋지 않았다.
신경 쓸 일도 많고 KMK컴퍼니 건으로 곤두서 있던 상황이라 소화가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소화제 하나를 사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다 나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싸늘한 밤바람이 그녀의 뺨을 사납게 스치고 지나갔다.
“으, 더럽게 춥네.”
코트를 여미고 또 여며보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더 으슬으슬 추운 것 같았다.
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종종 걸음으로 아파트 입구를 향해 달리는데 무언가와 부딪쳤다.
그 충격에 이정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야 했다.
또렷해진 그녀의 눈동자에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운동화가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왜 이리도 서늘하게 소름이 돋는지.
날씨가 추운 건 분명했으나 온몸에 돋은 소름은 날씨와 무관한 것이었다.
감히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본능이었다.
이정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뛰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건,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몇 발자국 가지 못해 억센 힘에 의해 붙들리고 말았으니.
“흡!”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발버둥 치는 그녀를 남자는 거침없이 아파트 옆 외진 곳으로 끌고 갔다.
남자는 거칠게 반항하는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추운 날씨에 어두운 밤, 그녀가 알기론 목격자도 없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는 아파트 전경이 그녀가 생기 있는 눈동자로 담은 마지막 풍경이었으니 말이다.
갑자기 조금 전 빛나의 음성이 귓전을 메아리쳤다.
-너 어디야? 지금 몇 신 줄 알아?
그 말에 그녀가 뭐라고 대답했던가.
아니, 대답은 했던가?
불과 몇 분 전 일인데도 마치 오래전 일처럼 가물가물했다.
반항을 하다 부딪친 뒷머리에서 알싸한 통증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나가며 발버둥을 치던 그녀의 손이 모든 기력을 잃고 차가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죽음 직전 수많은 인연이 스쳐 지나간다 했던가.
후회했던 순간도, 행복했던 순간도, 매 순간이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그러게, 경고했잖아. 이 사건에서 손 떼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정에겐 그런 파노라마의 순간이 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이 순간,
“어허…… 이거 5분 안에 복귀 못 하게 생겼네. 아, 내 라면.”
정말 기묘하게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복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으니.
“너, 뭐야!”
“들어는 봤나, 미친개라고…….”
여리여리한 몸매에 달빛을 등진 복실은 미친개라고 하기엔 너무 눈이 부셨다.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떠야 할 만큼.
“미친개한테 물리면 약도 없대.”
그런 눈부신 허우대로 자꾸 헛소리를 해대니 이거 미칠 노릇이다.
그렇게 남자가 부딪친 희대의 캐릭터는, 불어터진 라면 생각에 곤두설 대로 곤두선 개복실이었다.
“그런데, 이 구역 미친개가…… 바로,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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