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40화 (40/94)

40. Welcome to the 승현 월드!

2018.04.22.

놀라고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너무 유순했던 그녀의 모습에 의심이 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역공을 당할 줄이야!

당혹스러운 마음을 다듬고 빛나가 내민 손을 맞잡은 승현의 눈매가 매서웠다.

하지만 어제와 180도 다른 그녀의 눈빛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약 삼십 센티의 공간을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스파크가 튀었다.

도저히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살벌하게.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팽팽한 기 싸움에 주변 사람만 죽어나갈 판이었다.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유 변호사와 나,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끝이 분명한 승현의 목소리에 제일 먼저 튀어나간 것은 장 부장이다.

그리고 뒤이어 엘리스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회의실을 빠져 나갔다.

그렇게 두 사람만 남게 되었지만 승현은 맞잡은 빛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썹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간다.

“말했을 텐데. 조용히 물러나달라고.”

그토록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그를 안심하게 만들곤, 이렇게 뒤통수를 친 빛나가 괘씸하다는 듯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빛나는 겁을 먹는 대신 악수를 위해 맞잡았던 그의 손을 탈탈 털어내곤 제 자리에 가 앉아버렸다.

열 받아 나가 떨어져야 하는 건 그녀가 아닌 그인데도 찬바람은 빛나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가 미쳤나 보다.

저렇게 찬바람을 일으키는 모습도 새침하고 예뻐 보이다니!

이를 악물고 자리에 앉는데 투명한 테이블 아래로 그녀가 다리를 꼬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 저 여자 스커트는 왜 이렇게 짧은 거야!

평소 그녀답지 않게 유독 짧은 스커트다.

게다가 다리까지 꼬아 앉으니 투명한 테이블 너머로 아찔한 그녀의 각선미가 승현의 시각을 극대화 시켰다.

덕분에 눈을 감아도 매끈한 그 각선미가 투시되는 것 같았다.

결국 그가 폭발했다.

“유빛나, 나 지금 미치는 꼴 보려고 이러는 거지!”

승현이 튕기듯 일어나 슈트 재킷을 벗어 그녀의 다리를 덮어주며 열을 냈다.

그런데 그 분노에 빛나의 매력적인 눈동자는 웃음기가 도는가 싶더니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기가 막힌 그녀의 반응에 승현이 물었다.

“너,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이야기해.”

오늘따라 그녀의 목소리가 유독 섹시하게 들린다면 그만의 착각일까?

“위험하다고, 사건에서 물러나 있으라고 했잖아. 그리고 너도 그러겠다고 했고!”

“그랬지.”

“자존심 때문에 한 입으로 절대 두말 안 하는 네가 도대체 여긴 왜 나타난 거야?”

다소 사납게 몰아치는 승현의 질문에 빛나의 눈동자가 웃음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젠장! 착각이 아니다!

빛나는 작정하고 그를 유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목소리마저 섹시하게 들릴 수밖에!

“어제 술을 마셔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또는 실수였다, 이딴 말 하지 마! 나한텐 안 통하니까!”

강하게 나가자!

그녀를 지금 몰아내지 못하면, 정말 손 맞잡고 지뢰밭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빛나는 혈압 터지기 일보직전인 승현을 뒤로한 채 틀어 올린 다리를 까닥이며 다소 오만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미치겠지? 가슴이 콩닥콩닥하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지?”

“뭐…… 라고?”

“내가 그랬어.”

도대체 이 여자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잠시 후,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랬다고. 너한테 홀려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고.”

“허…….”

“그러니까 그건 무효. 이제부터가 진짜야.”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승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가 제정신인가 싶었다.

물론 미쳤다고 하기엔 빛나의 검은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현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빛나는 가방을 열어 파일을 꺼내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협상안이야.”

“뭐? 그건 이쪽에서 준비했는데?”

“네가 아무리 최고의 협상안을 제시한다고 해도 내가 준비해온 것만큼 이 사람들 입장에서 만족스러운 협상은 없어.”

“조건이 뭔데?”

“직원들 100% 재채용과 동시에 받지 못한 3개월치 월급을 지불하는 조건.”

“뭐?”

승현이 경악에 가까운 외침을 발사하며 그녀가 준비한 서류철을 들춰 보았다.

서류철을 바라보는 그의 동공에 지진이 일고 있었다.

협상안이란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적절한 중간 지점을 찾는 것이다.

헌데 그녀가 내민 협상안은 그런 절충이란 미학을 철저히 무시한 갑을 계약서였다.

당연히 여기서 갑은 다름 아닌 빛나 측이었고.

그뿐만이 아니다.

“어라? 이것 봐라? 재계약 조건이 그전 연봉의 10% 인상해주는 조건이네?”

“어머, 내가 그 말은 안 했구나. 미안.”

전혀 성의 없는 사과였다.

그리고 고의성이 다분해 보이는 의도적인 실수였다.

왜냐하면 연봉의 10% 인상 조건은 굵은 글씨도 모자라 심지어 밑줄까지 쳐놔서 보지 않을래야 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승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엄연히 그가 제시한 조건도 회사 차원에선 거의 인심 쓰다시피 해서 거저 주는 협상안인데, 버젓이 갑과 을이 뒤바뀐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어디서 협상안이라고 제시한단 말인가.

“작년에 비해 요즘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아니? 그리고 아무런 수입 없이 지금까지 기다려준 직원들의 의리를 감안한다면 10% 인상은 당연한 거라고 봐.”

헐, 승현은 그날 처음 알았다.

빛나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안하무인 개빛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정신이야?”

놀란 그가 묻자 빛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응. 맨 정신이야.”

“아니, 취한 것도 아니고 맨 정신에 어떻게 이런 걸 협상안이라고 제시할 수가 있어?”

“왜 안 돼? 회사도 손해를 많이 봤겠지만 이 사람들도 자신의 인생을 걸고 회사에 의리를 지킨 사람들이야. 그리고 이 사람들은 희망퇴직을 한다고 해도 갈 곳이 없어. 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지만 공금 횡령 건으로 폭삭 주저앉은 회사의 직원들을 어디서 채용을 하겠어? 다행히도 회사를 유지하기로 했으니 그전 직원들 재채용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회사를 이 사람들만큼 잘 아는 사람들도 없을 테고.”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다. 직원들 입장에서만 본다면.

하지만 본사 입장에서 보면 그전 직원들의 연봉을 10%나 인상해주면서까지 재채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회사에서도 자금을 모두 회수하지 못한 상태인데, 받지 못한 마지막 3개월치 월급까지 모두 지급하라니.

“그 공금 횡령한 돈의 일부가 회사 직원들 월급이라는 건 알고 있지? 그러니까 회사에선 직원들의 월급을 지급한 상태라는 거, 그런데 중간에서 그 돈을 횡령했어. 회사 차원에선 지급의 의무를 이미 실행한 상태라고.”

입이 바짝 타들어갔다.

빛나가 다시 등장할 거라고, 이렇게 역공을 퍼부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도 못했던 상황이라 더 그러했다.

그런데 이렇게 속이 바짝 타고 심장이 콩닥콩닥하는 승현과는 달리 빛나는 여유 있는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아는데 이런 조건을 협상안이라고 가져와? 회사에선…….”

“만일, 내가 그 돈의 행방을 찾아준다면?”

승현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빛나가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진.

“어제 곰곰이 생각해봤어. KM 본사에서 왜 이 많은 리스크를 감수해가며 한국 지사를 유지하기로 한 걸까. 단순히 마담 M이 한국 출신이기 때문에? 아니, 글로벌 기업이 단 한 사람을 믿고 그 많은 리스크를 감수하기로 했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래서 달리 생각해봤지.”

“…….”

“너랑…… KM 본사 간에 거래가 있었던 거야. 내 말, 맞지? 지사 유지는 그 딜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을 때 이야기고. 한마디로, KMK컴퍼니를 유지한다는 건 눈속임이었던 거야. 진짜 네가 여기 온 의도를 숨기기 위한.”

“그건…….”

“위승현 씨, 너…… KMK컴퍼니 공금 횡령 사건의 진짜 범인을 찾으러 왔지?”

세상에나, 도대체 이 여자 정체가 뭘까.

전율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진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으니.

“횡령 금액 350억 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금액이었어. 그런데 회수 금액 고작 120억 원. 나머지 230억 원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속삭이는 듯한 그녀의 은밀한 목소리가 승현의 심장 끝을 더욱 쫄깃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녀의 목소리에 홀린 후였다.

“내가…… 그 230억 원의 행방, 찾아줄게.”

빛나의 코랄빛 입술이 매력적으로 치켜 올라갔다.

낮지만 섹시한 그녀의 목소리엔 전무후무한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그 때문일까.

승현은 그녀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어야 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찾지 못한 돈이야. 네가 무슨 수로?”

“잊었어? 나 이혼 전문 변호사야. 이 분야에선 나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고. 덕분에 날고 긴다는 이혼 소송 건은 죄다 내 손을 거쳐 갔어. 이혼 소송의 가장 큰 쟁점이 뭐겠어? 바로…… 돈이야. 안주려고 버티는 쪽과 더 받으려고 달려드는 쪽의 법정 싸움이지.”

“…….”

“그 와중에 재산을 국제 범죄자 뺨치게 은닉하는 놈들 많이 봤어. 그걸 찾아내는 게 내 몫이었고. 주로 나는 받아내는 쪽이었거든.”

“그 말은 곧…….”

“돈의 흐름을 쫓는 덴, 나만 한 사냥개가 없다는 뜻이지.”

그녀의 입술 끝이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아, 이 여자 정말 미치겠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벅차게 만들다니.

“돈은 거짓말을 안 해. 형체가 분명한 자산이니만큼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란 불가능하단 말이야.”

말도 어쩜 이리 예쁘게 할까.

그는 넋이 나간 듯 턱을 괴고 끊임없이 속삭이듯 재잘대는 그녀를 몽롱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 돈…… 내가 찾아준다고.”

자신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승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사냥개를 자처하시겠다?”

그러자 빛나가 이에 반응하듯 턱을 괴고 그를 마주보며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대답한다.

“보고 싶지 않아? 맨 정신에, 어떻게 개빛나가 되는지…….”

“술 마신 개빛나보다 훨씬 매력적인가?”

그 은밀한 물음에 섹시한 대답이 돌아왔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지.”

“그럼…… 콜!”

결국 승현은 빛나가 제안한 협상안을 수락해야만 했다.

그랬다.

KMK컴퍼니를 유지를 위해 그에게 떨어진 특명.

첫 번째로는 글로벌 마케팅 매니지먼트인 KM그룹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

두 번째로는 아직 회수하지 못한 230억 원의 행방을 찾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 정부도 찾지 못한 230억 원이라면, 보다 큰 힘이 움직이고 있을 거라는 조심스러운 예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결국 얼마 전 빛나의 신변을 위협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고.

생각보다 위험한 일.

그리고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만큼 회사 기밀로 똘똘 뭉쳐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빛나가 알아냈다.

이 영악한 여자를 오래도록 속여 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그 시기가 빨리 올 줄 몰랐을 뿐.

만일 빛나가 기꺼이 그 돈의 행방을 찾아준다면 승현에겐 이만 한 1석 2조가 없었다.

물론 그녀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그의 생각을 읽었던 것일까.

빛나가 조금 전과는 달리 사슴 같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솔직히 네 옆자리만큼 안전한 자리가 또 어디 있겠어? 이미 한 번 위협 당한 몸이야. 정면에 나서지 않는다고 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지.”

“…….”

“그럴 바엔, 아예 공식적으로 네 옆에 앉아 있을래. 위승현 껌딱지처럼, 딱!”

그녀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빛나를 몰아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의 시야에 두고 함께 일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한 안전 보장은 없었기에.

“결국, 이렇게 딜이 된 건가?”

승현이 허탈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빛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승현에게 다시 한 번 악수를 청한다.

“이제부터 우린…… 적군이 아닌 아군. 잘해보자구.”

그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애초에 그녀를 이 자리에서 몰아내자는 취지는 없어져버린 지 오래다.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모르나 본데, 우린 처음부터 아군이었어.”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싸움이었으니까.

***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이다.

은지와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데 익숙해 보이는 남자가 꽃을 들고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유빛나 변호사님!”

그 헬멧맨이다. 잊을 만하면 등장해서 한 번씩 꽃다발을 품에 안겨주고 가는.

물론 승현에게 다시는 꽃 배달시키기 말라고 으름장을 놓은 후로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꽃 배달 왔습니다!”

여전히 남자는 씩씩한 목소리로 헬멧을 벗지 않은 채 그녀에게 꽃을 내밀었다.

그러자 은지가 곁에서 부러운 듯 궁시렁거린다.

“헐, 좀 전엔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죽일 듯 쏘아보더니.”

아, 정말 말 더럽게 안 듣는다! 위승현!

물론 그땐 그가 변변한 직업도 없는 백수라 생각해서 그랬던 거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꽃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꽃은 언제 봐도 예쁘고 상큼하니.

빛나가 이제 막 그 꽃을 받아 들려던 찰나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승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내일 저녁에 뭐해? 저녁 같이할래? 네 주변에 있는 그 찰거머리들 다 빼고 우리 둘이만.]

“흠, 꽃으로는 모자라나 보네?”

[꽃?]

빛나가 꽃을 받아들자 헬멧맨은 인사를 꾸벅하고 사무실 입구를 서서히 빠져 나갔다.

[꽃, 도착했어?]

“응. 언제나 그랬듯 예쁘네. 고마워.”

[뭘. 그런데 그 사람, 꽃 배달 온 사람, 뭐 입고 왔어?]

“평소랑 똑같이 검은 헬멧에 검은 가죽 재킷. 왜?”

[아냐. 그냥, 궁금해서. 암튼, 알았어! 좀 있다 다시 전화할게!]

“응? 야! 야! 위…….”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빛나는 깜짝이는 액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말해준 인상착의에 의해 순진한 저 헬멧이 지옥행 열차 티켓을 급행으로 예매했다는 것도 모른 채.

***

전화를 끊은 승현은 5층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의아한 표정으로 엘리스가 그를 바라보다.

그들의 사무실은 17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왜…….”

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승현이 내려섰다.

“어디 가십니까?”

물었지만 엘리스는 안다.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그녀 혼자 하는 질문이라는 걸.

결국 돌아보지도 않고 비상구 계단으로 사라지는 승현의 뒤통수를 보며 엘리스는 악에 받힌 듯 소리를 질러보았다.

“아니, 저한테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제가 무슨 죄를 그렇게 크게 졌다고-오!”

물론 이번에도 역시 혼자 외치는 절규였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보이는 엘리스는 오늘따라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벗어나 비상구 계단으로 뛰던 승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한 듯 잇새로 중얼거린다.

“감히, 또 꽃을 날려? 꽃이 무슨 게임 아이템이야?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날리게?”

가뜩이나 요즘 들어 빛나의 눈치를 보고 있는 판국에 그가 아닌 누군가가 보낸 꽃으로 그녀가 설렜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잡고 말리라!

어떤 놈인지 오늘만큼은 그 정체를 밝히고 말리라!

“임자 있는 여자한테 꽃은 날리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오늘 똑똑히 알려주지!”

뛰었다. 긴 다리로 할 수 있을 만큼 빨리.

검은 헬멧에 검은 가죽 재킷!

이 빌딩에선 흔치 않는 옷차림이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층 비상구 문을 통해 뛰어나온 승현은 호흡을 가다듬고 로비를 훑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엘리베이터 문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내려선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확실히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찾았다!”

검은 헬멧에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였다.

남자는 내려서자마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위해 헬멧을 벗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평범한 남자였다.

“예, 접니다! 이번에도 역시 잘 전해드리고 왔습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전화를 걸어 똥꼬 발랄하게 말하는 폼이 순진하기 그지없다.

“그럼요,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우셨습니다!”

게다가 서슴없이 전하는 빛나의 안부까지.

그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분노 게이지를 최고치까지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깨닫지 못한 채.

“에휴, 그럼요. 이번에도 별이 없었…….”

하지만 그러한 환상의 시간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이제 막 무언가와 부딪쳐 발길을 멈춰야 했기 때문이다.

마치 커다란 태산과 부딪친 느낌이었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그 어떤 장애물도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멈춰선 남자의 내리깐 시선에 고급 정장 구두 끝이 보였다.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매끈한 그 구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비싸 보였다.

그리고 서서히 시선을 올리는 남자.

신발에서 스트라이프 슈트 팬츠로,

끝없이 긴 다리를 지나 몸에 꼭 맞는 슈트 핏을 자랑하는 가슴에 머물렀을 땐,

남자가 조금 전 부딪친 게 다름 아닌 사람의 가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지옥은 그 위에 있었으니.

“그게…….”

목을 한참 꺾어 그 정체를 알아차린 남자의 입에 쩍 벌어졌다.

훤칠한 키와 단단한 바디로 미루어 보건데, 다소 험악해 보이는 인상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완벽한 바디의 주인공은 남자가 태어나 처음 보는 지랄 맞은 인상이었다.

작은 얼굴에 끝이 분명한 아몬드 형 눈매, 게다가 살짝 치켜 올라간 입꼬리는 아이 같은 천진함을 담고 있음에도 등골을 서늘하게 얼려왔다.

“…… 제가 방금 별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본능이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위기를 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자는 승현이 긴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핸드폰을 빼앗아가는 장면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만 보아야 했다.

그렇게 남자는 지옥행 열차에 속절없이 올라탔다.

그것도 급행으로.

하지만 이번 여행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남자와 함께 지옥행 열차를 예약한 이가 있었으니.

핸드폰을 빼앗아 든 승현은,

붉은 입꼬리를 살짝 틀어 올리며 사악하게 속삭였다.

“Welcome to the 승현 월드.”

그런데 왜 그 말 한마디가 남자에겐 이렇게 들리는 것일까.

어서 와.

지옥에 온 걸 환영해.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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