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39화 (39/94)

39. 감히, 나를 홀렸겠다?

2018.04.18.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다.

처음으로 이정이 먼저 나가 떨어졌고, 다음으로는 복실 때문에 혈압 오른 은지가 뒤통수가 당긴다며 들어갔다.

물론 복실은 언제 들어갔는지 인기척조차 듣지 못했고.

그렇게 홀로 남은 빛나는 불을 켜놓고 잔뜩 쌓인 서류들을 들춰보며 피곤한 눈을 비볐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검찰 자료지만 은지와 몇 시간을 검토했는데도 아직까지 특별한 뭔가를 찾지 못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서류만 붙들고 있었던 지난 몇 시간이 억울했던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눈을 감으면 어둠속에서 검은 손이 불쑥 튀어나와 다시 한 번 그녀의 목을 움켜잡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졸음을 몰아내기 위해 커피를 독하게 한 잔 내려 마시고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

평소 머리가 아파 쓰지 않았던 안경까지 쓰고 다시 한 번 서류를 훑어보던 빛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이상하네. 이것만 보면, 사건은 깔끔하게 마무리가 된 것 같은데.”

그랬다. 검찰 자료만으로 따지자면 거액의 공금 횡령에 관련된 사람들은 모조리 죗값을 치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 KMK컴퍼니 공금 횡령 사건에 대해 이렇듯 민감하게 반응한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빛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KMK 공금 횡령 피해 금액은 350억 원가량, 대한민국 사상 최고 금액이었다.

물론 이중 계약으로 부당하게 취득한 광고금액부터 회사 직원들의 석 달 월급에 퇴직금까지 꿀꺽했으니 가능한 액수였겠지만 빛나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이 부분이 아니었다.

“회수 금액 120억 원. 그럼 나머지 금액은 어디에 있는 거지? 1, 2억도 아니고 230억이 공중분해 되었다는 건 이해가 안 되는데?”

큰 금액이다. 따라서 순식간에 그 돈이 무(無)로 돌아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렇다면 답은 딱 하나.

“어디로, 빼돌렸을까…….”

빛나의 눈동자에 빛이 번쩍했다.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돈의 흐름을 잡으면, 범인도 잡을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빛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철을 뒤적였다.

“재산 내역이 어디 있더라…….”

그런데 그때 전화벨이 울려왔다. 승현이었다.

그녀가 잠들지 못하는 밤이니만큼, 그 또한 잠들지 못한 모양이다.

[아직 안 잤어?]

“응. 근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아, 그냥. 오늘은 아무 일 없었나 싶어서.]

“아무 일 없었지. 두 시까지는 경호원 아저씨들이 철벽 방어했고, 그다음부터는 말 안 해도 알지? 복실이 때문에 정신없었어. 넌…… 어땠어?”

말을 하는 빛나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웠다.

지금 생각해도 그가 마담M이라는 사실은 괘씸하게 그지없었으나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그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일이 이쯤 되고 나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승현은, 그녀의 전부다.

때문에 그를 부정하는 것은 그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 나도 정신없는 하루였어. 그래서…… 네가 더 보고 싶어.]

그 말에 빛나의 몸이 절로 움직였다.

식탁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현관문을 소리 없이 열었을 때, 거짓말처럼 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언제…… 부터?”

놀란 빛나가 핸드폰을 내리며 묻자 그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한…… 십 분 됐나? 자고 있을 것 같아서.”

그는 슈트에 외투를 입은 채였다.

새벽에 퇴근해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그녀의 문 밖을 서성인 것이다.

들고 있는 핸드폰이 그가 얼마나 망설이다 전화를 했을지 짐작케 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냥 전화하지.”

“안아봐도 돼?”

조심스레 물어오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뒤로 넘긴 머리 때문에 훤히 들어난 그의 아몬드형 눈매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지쳐 보였다.

그래서 빛나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그녀 안에 있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가 먼저 승현의 품을 찾아들었다.

그의 몸에 꼭 맞춘 듯한 그녀의 몸이 품속으로 쏘옥 들어왔다.

이걸 어쩌나.

이대로 안아 들고 자신의 침대로 가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긴장감으로 인해 뻣뻣했던 근육들이 노곤하게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승현은 빛나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다독이는 것으로 자신의 욕심을 대신했다.

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빛나.”

“응?”

“유빛나…….”

“듣고 있어.”

마치 최면을 걸 듯 장난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독한 커피 한 잔에 싹 달아났던 잠이 다시 몰려오는 듯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유빛나, 지금부터 잘 들어.”

듣고 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놓칠 수 없는 목소리였기에.

“나는…… 후회 같은 거 모르고 사는 인생이었어. 설령,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금세 만회하는 스타일이었거든. 그런데, 꼭 너한테만은…… 그 후회란 걸 하게 돼.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지친 듯 노곤한 그의 목소리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듣고만 있어도 그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다.

“네 말이 맞아. 후회했어. 처음부터 널 이 사건에서 제외시켰다면, 네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는.”

제 품에서 축 늘어졌던 빛나를 떠올리는 승현의 눈동자가 검게 일렁였다.

그날은 빛나뿐 아니라 승현에게도 또 다른 지옥이었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그래서…… 결정했어. 널, 이 일에서 철저히 제외시키기로.”

“무슨…….”

“또, 후회할지 몰라. 그런데 지금 당장은 이게 최선인 것 같아. 네가 버티려 해도 저쪽에서 변호인을 바꿀 거야. 넌…… 그냥 그대로 물러서기만 하면 돼.”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 뜻을 깨달은 빛나가 순식간에 품에서 벗어나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발…… 그냥, 물러나줘.”

화를 내야 옳았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고, 이런 식으로 그녀를 제외시킬 순 없다고 길길이 날뛰어야 옳았단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빛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축 쳐진 그의 눈꼬리가 그녀의 모든 의지를 앗아가 버린 듯했다.

“내가 잡을게, 그 자식. 그때까지만 죽은 듯이 숨어 있어. 부탁이야.”

“하지만 내가 빠지면 직원들은…….”

“그건 최대한 그 사람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내가 협상해줄게. 쉽진 않겠지만, 그 사람들…… 내가 안고 간다고.”

그가 결정을 한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적과 홀로 싸우기로.

그런데 빛나는 거기서 함께하겠다고 우길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딱히 그녀가 쥔 열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녀가 고집을 부린다면, 가뜩이나 불리한 그에게 또 다른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줄 수 있지?”

마음 같아선 도리질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승현의 간절한 눈을 보고 있자니 그럴 수가 없어 결국 빛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이에 승현은 한층 안심이 된 듯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 한동안은 복실이랑 붙어 다녀. 퇴근할 때도 내가 같이 못 나올 땐, 복실이가 데리러 갈 거야.”

“복실이도 바쁠 텐데.”

“안 바빠. 걔, 요즘 쉬고 있는 중이라. 참, 그리고 또 하나.”

“또, 있어?”

“나도 밖에선 웬만하면 너랑은 거리를 두려고. 내가 공식 석상에 나서게 되면, 그놈의 시선이 내게 쏠릴 거야. 그 앵글에…… 네가 없었으면 해.”

그녀를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겠단 이야기다.

변호사로서도, 연인으로서도.

“잠깐 동안만이야. 최대한 빨리 마무리할게. 길어지면…… 내가 못 참겠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빛나를 끌어당겨 이마에, 코에, 뺨에, 입술에 정신없이 키스를 했다.

짧게 왔다간 입술이었지만 빛나에게 제 영역표시를 하기엔 확실한 시간이었다.

머릿속을 맴돌던 그 검은 그림자에 대한 공포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가 남긴 뜨거운 체온만 웃돌고 있었으니.

“자, 우리는 여기서 그만. 이대로 같이 들어가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내일 출근 못 할 것 같으니까.”

승현이 이별을 고했다.

그래봐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이라지만 일 년에 한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만큼이나 헤어짐이 아쉬운 건 왜일까.

“먼저 들어가.”

그 말에 빛나는 사슴 같은 눈을 하곤, 뒷걸음질로 집에 들어가며 한마디 했다.

“너도 몸조심해야 돼. 알았지?”

그녀는 걱정이 가득했다.

마지못해 그가 하라는 대로 하긴 했지만 내키지 않는 눈치다.

빛나가 들어가고 난 뒤, 그는 굳게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진짜 이 새끼. 빨리 잡든가 해야지. 피가 말라서 못 살겠네.”

대놓고 연애해도 모라란 판국에 숨어서 하는 연애라.

그의 취향이 아니다.

가뜩이나 얼굴도 모르는 자식이 꽃도 보내는 상황에!

어쨌든, 오나가나 그녀 걱정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승현이었다.

그렇게 승현은 빛나가 사라진 다음에도 한참을 서 있다가 집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오늘 한 그의 행동이 일으킬 엄청난 파장을.

***

한편, 집으로 다시 들어온 빛나는 축 쳐진 승현의 눈꼬리가 눈앞에 아른거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도대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평소엔 똥꼬 발랄하던 그 눈꼬리가 저토록 쳐지냔 말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고 짠해져왔다.

적어도, 자다가 물 한잔을 마시러 나와 빛나가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놓은 서류를 바라보며 한마디 흘리는 복실을 보기 전까지는.

“350억? 이런,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더럽게 많이도 해쳐먹었네.”

심지어 복실은 아직 잠에 취해 한쪽 눈을 찡긋 감은 채였다.

덕분에 가뜩이나 허스키한 보이스가 더욱 잠겨 걸걸하다 못해 걸쭉하다.

그 목소리를 듣자니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아니, 애초부터 잠 따위는 오지 않았었다.

승현에게 홀려 잠시 판단 능력이 흐려진 것일 뿐.

“헛,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들의 만행은, 잠이 덜 깬 복실이 한쪽 눈을 감고도 볼 수 있을 만큼 확실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방금 전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끄덕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세상에…… 나 지금, 미인계도 아니고 미남계에 넘어간 거니?”

“으엉? 미남계? 우리 오빠 왔다 갔어? 응?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나도 볼래! 나도 볼래!”

미남계라는 말에 다시는 떠지지 않을 것 같던 나머지 한쪽 눈을 번쩍 뜬 복실이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종종 걸음으로 현관까지 다가갔다.

그러더니 맨발에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스치자 발을 동동 구르며 현관에 난 구멍으로 바깥 동정을 살핀다.

“나도, 나도, 나도 볼래! 우리 오빠. 어디야, 어디!”

추운 날씨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안에서 바깥 동정을 살피는 복실의 뒷모습은 영락없이 주인을 기다리며 현관문을 떠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강아지 같았다.

하지만 복실이 그러거나 말거나, 꼬리 아홉 달린 승현의 미남계에서 깨어난 빛나는 눈을 번쩍이며 다시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적에게 노출된 그를 허허 벌판에 총알받이처럼 혼자 서 있게 할 순 없었다.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손을 놓지 않으리라.

-너라면…… 나를 설득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 설득력이면, 나도 회사를 이해시킬 수 있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그녀에게 힘이 필요했다.

바로, 누군가를 설득시킬 수 있는 힘이.

***

KM본사와 그럴듯한 협상안을 끌어내기 위해 거의 꼬박 밤을 새운 승현은 독한 커피를 네 잔째 들이켜며 아침을 버텼다.

빛나에게 그 사람들을 책임져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어차피 그가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조건이 뒤따랐다.

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고.

문제는 그에게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는 것.

빛나가 물러나게 하기 위해선 지금 당장 그녀가 만족할 만한 협상안을 제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밤새 치열했겠는데요?”

엘리스가 다섯 번째 커피를 내밀며 물어왔다.

“뭘 당연한 걸 물어. 애초부터 본사에선 여길 밀어버릴 심산이었어. 남아 있는 직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고. 나머진 처음부터 내 몫이었어.”

“그러니까요. 보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조건은 만족시키신 것 같던데.”

물론 그가 생각한 것만큼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수용이 가능한 협상안이 완성되었다.

이 정도면 저쪽 변호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승현이 회의실로 들어가 협상 테이블에 앉는데 엘리스가 다시 한 번 조용히 물었다.

“그걸 위해…… 뭘 내주셨어요?”

영악한 여자 같으니.

하지만 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재촉한다.

“저쪽 상황이나 보고해봐.”

화제를 돌리는 그의 의도에 엘리스는 눈썹을 살풋 구기면서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없어 J&J로펌과 그대로 가기로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 변호사가 아닌 다른 변호사가 그 자리를 대신 했으니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그랬을 거다. 빛나가 제 입으로 그러겠다, 했으니.

하지만 승현은 지금도 미심쩍은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런데 유 변호사는 어떻게 설득하셨어요?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게 궁금해.”

사실, 엘리스가 궁금해 하는 그것의 답을 그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성깔 있는 빛나가 순순히 물러날 거란 생각은 단 1%도 해보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 그녀가 제 성질을 못 이기고 귀싸대기라도 한 방 날린다면 시원하게 맞아주리라 결심했었단 말이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라고 했단 말이지.”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다시 생각해도 의아한 그 순간을 떠올리는 승현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오자 엘리스가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술을…… 마셨나?”

마치 뭔가에 홀린 듯한 그녀의 몽롱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이 그에게 홀린 눈동자라는 사실을 꿈에도 못하는 승현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근데, 그 시간에?”

그렇다. 이런 중요한 건을 두고 그 시간에 술을 마신다면 유빛나가 아니다.

그녀는 일이 끝나고 기분이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해서 술을 마시는 경우는 있어도 오늘이 바로 재협상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시간에 음주를 하진 않았으리라.

“그럼, 왜지? 허…… 이거 너무 좋게 나가도 불안해서 살겠나.”

그 순간만 떠올리면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유빛나답지 않은 유빛나의 모습이 그에게 묘한 두려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자꾸 혼잣말을 하는 승현의 모습은 그 누군가에게도 은근한 두려움으로 다가섰다.

결국 엘리스의 인내심이 바닥을 치고 말았으니.

“자꾸 그렇게 실성한 사람처럼 혼잣말하시면, 신고할 겁니다!”

“알았어. 알았어. 엘리스가 하는 이야기 다 들었어. 근데 정말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빛나가 왜 그렇게 순순히 물러났는지.”

“정말 유 변호사님한테는 아무 말씀 안 하신 거예요?”

“무슨 말?”

“왜, 그렇잖아요. 그렇게 열정적인 사람이 물러났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혹시나 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어서.”

“말했잖아. 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이라고.”

승현이 날카롭게 대답했다.

그 말은 곧, 빛나는 이 일에 대해 승현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단 이야기다.

어떻게 KM 본사가 아시아 지부의 철수를 철회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승현이 무엇을 약속했는지.

마지막으로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엘리스는 평소 진지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승현에게서 참으로 큰 그림자를 보았다.

막중한 책임감에 끝없는 의무가 따라오는 자리였다.

모두 거절했던 저 자리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오늘따라 곁에 선 이 남자가 참으로 거대하다 느꼈다.

때문에 엘리스는 가벼워 보이는 이 남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얼굴이 참 안되어 보이십니다.”

“그래도 평균 이상이지?”

물론, 이럴 때만 빼면.

이 상황에서도 장난을 치는 그가 얄미워 엘리스는 눈을 흘겼다.

저런 패기와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그때 문이 열리며 변호인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내를 받아 먼저 들어온 장 부장은 승현의 얼굴을 보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 모습에 승현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그러곤 슈트 단추를 단추며 여유 있게 반쯤 일어나다, 들어온 사람을 보곤 나머지 반은 거의 튕기듯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뭐야! 어떻게…….”

너무 놀라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질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들어서고 말았으니, 놀라긴 엘리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사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유유히 걸어 들어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다시 소개하죠. J&J로펌의 유빛나 변호사입니다.”

그랬다.

세상 모든 변호사들은 다 되도, 절대 이 자리에 서면 안 되는 단 한 사람.

그 단 한 사람이 바로 승현의 눈앞에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있는 것이다.

“하…….”

어쩐지, 너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라니.

그 유순한 모습에 소름이 돋더라니.

결국 이렇게 되려고 그랬나 보다.

빛나가 내민 손을 맞잡은 승현의 눈썹 끝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그런 승현의 반응을 예상이나 했던 듯, 빛나는 상큼한 코랄빛 입술을 매끈하게 틀어 올리며 속삭였다.

“감히, 나를 홀렸겠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아, 정말.

진심으로 이 여잔, 존재 자체가 그에게 함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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