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설레게하는 그대-38화 (38/94)

38. 개복실의 귀환

2018.04.15.

“경호원들은 몇 명이나 세웠어?”

“다섯이요. 더 세울까요?”

사무실로 들어서는 승현을 쫓으며 엘리스가 물어왔다. 그러자 그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승현을 보며 엘리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 인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무척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고, 사물이나 사람을 보는 눈도 남달랐다.

때문에 변덕도 죽 끓듯 했지만 이번처럼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엘리스를 당혹스럽게 하긴 또 처음이었다.

“근데 제가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경호원 다섯 명도 불안해서 자꾸 눈썹을 구기면서 어떻게 개 한 마리로 유변호사를 지키시겠단 거예요?”

그랬다. 조금 전부터 너무 궁금했던 사항이다.

빛나는 지금 이정과 함께 퇴원을 했고, 불안해하는 승현을 위해 엘리스는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경호원을 배치해두었다.

그런데 그런 경호원들도 오늘 2시 이후면 퇴장시키란다.

들리는 말로는 개복실이가 온다나, 어쩐다나.

사실 엘리스는 한국 이름에 대한 뉘앙스는 모른다.

그런데 복실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한 경호원이 기분 상한 듯 ‘우리가 개 한 마리한테 밀린 거야?’라고 불만을 터트렸더랬다.

“누가 그래? 개라고?”

승현이 묻자 엘리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사람들이요. 그거 개 이름이라고.”

복실이 순식간에 진짜 개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훗, 걱정 마. 그 개…… 보통 개가 아니니까.”

승현은 굳이 엘리스가 가지고 있는 잘못 된 정보를 수정해주지 않았다.

그녀의 철두철미한 성격상, 복실이 ‘개’가 아닌 ‘여자 사람’이라는 걸 안다면 더 많은 질문을 쏟아낼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픈 상황에 귀찮은 건 되도록 피해가고 싶은 승현이었다.

“뭐요. 보통 개가 아니면, 어디서 스페셜 한 훈련을 받고 돌아온 유학파라도 된대요?”

“어. 일본에서 들어온대. 그리고 얼마 전에 프랑스도 갔다 왔어. 사실은 진짜 프랑스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개인지,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한국말이 딱 들어맞네요. 근데 CCTV 확인하신 건은 어떻게 됐어요? 직접 보셨잖아요.”

“봤지. 봤는데…….”

그는 날렵한 턱 선을 손으로 받치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오전 경찰서로 들어가 강 형사와 함께 본 CCTV 속 그 남자는 분명 어제 병원 앞에서 본 남자가 확실했다.

“머리가 좋아. 7층에서 탄 게 아니라 3층에서 탔어. 그렇다고, 존재를 자체를 아예 감춘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랬을까…….”

녹화 화면을 본 승현의 머릿속엔 더 많은 의구심이 들어찼다.

그랬다. 남자는 비상계단으로 내려와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라면 지하 주차장까지 비상계단을 이용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마음을 바꿔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것도 CCTV가 있다는 걸 알면서?

“잡을 테면 잡아봐, 뭐…… 이런 뜻인가?”

물론 승현이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CCTV 속 남자는 그저 지나가는 행인1에 불과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기어이 병원 앞까지 와 그에게 불을 건네며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나.

분명, 놈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근데 그 사람이 범인인 건 어떻게 확신하세요?”

“그놈이 범인이라고 대놓고 홍보하고 다니니까.”

“함정일 수 있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나가 봐.”

엘리스는 순순히 물러났다.

예민해져 있는 그를 건드려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걸 평소 경험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가고도 승현은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보고 그랬어. 누……나, 라고…….

빛나의 말이 잊혀지지 않아서다.

분명 협박을 하기 위해 침입을 했다면 그녀의 이름을 알고 직접 불렀다는 건 크게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상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협박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때문에 그 부분에서 승현은 분명 빛나가 남자의 목적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어떤 변수가 작용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뿐.

그런데,

“누나…… 라고 했단 말이지.”

그랬다. 누나라는 호칭은 범인이 단순히 빛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진다.

“면식범…… 이야.”

결론은 그렇게밖에 나오질 않았다.

범인은 빛나 주변에 있었다. 그것도 빛나를 누나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에.

처음부터 빛나의 주변인이 그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시기에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그가 잡고자 하는 그의 적이, 빛나의 주변 깊숙이 그 손을 뻗었다는 의미다.

그 소름 돋는 사실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승현은 분노 때문에 뻐근한 주먹을 불끈 틀어쥐어야 했다.

그를 향한 칼날은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싸움에서는 져본 적이 없는 그니까.

그러나 그 칼날이 빛나의 목을 향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단 1%의 위험도 감수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유빛나, 이번 일에서 빠져줘야겠어.”

빛나를 이번 일에서 제외시키기로.

일단,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안전이 먼저였으니까.

* * *

“아오, 걱정 말라니깐. 이 강복실이 죽으나 사나, 언니 곁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24시간이 아니라 25시간 감시할 테니!”

역시 복실은 오자마자 그 존재감이 확실했다.

어디를 가도 시끄럽다.

도착하자마자 5분도 되지 않아 경호원들을 몰아내더니 승현과 통화를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지를 불태운다.

헌데 그런 복실의 결의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정이 불안한 듯 빛나에게 속삭였다.

“승현 씨가 지금…… 쟤한테 우리 목숨을 맡긴 거니?”

그러자 빛나도 망연자실하게 대답한다.

“아마도…….”

“헐, 승현 씨는 우리가 고양이처럼 목숨이 아홉 개라도 되는 줄 아나 봐.”

“내 말이.”

그때 누군가 현관 벨을 눌렀다.

경호원들도 사라지고 올 사람도 없었던 터라 소름이 쫙 돋는 순간이었다.

빛나는 느린 걸음으로 현관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모니터에 뜬 그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황소가 허리를 들이받은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저 멀리 나가 떨어졌다.

“아악!”

“뭐야! 누구야! 이 시간에!”

복실이었다.

두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너무 활활 타오른 나머지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그저 인터폰을 확인한다는 게 곁에 있는 빛나를 몸으로 받아 밀어버린 것이다.

그 엄청난 힘에 이정이 입을 떡 벌리며 중얼거렸다.

“헐, 범인 손에 죽기 전에 쟤 손에 먼저 가는 거 아냐?”

하지만 이정이 그러거나 말거나, 복실은 모니터에 보이는 반듯한 여자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뭐야? 짜장면 배달시켰어?”

“아이고, 허리야.”

빛나가 허리를 움켜쥐고 일어나는 사이 복실은 다시 한 번 날을 세웠다.

“암호 대!”

“암호는 무슨…… 딱 보면 모르겠어? 회사 동료야.”

그랬다. 짜장면 배달부로 오해를 했던 그 얼굴은 바로 박은지 변호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빛나는 그렇게 오버하는 복실을 탓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 모습에 이정은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들이받혔음에도 빛나의 행동이 저토록 자연스럽다는 건, 평소 자주 있는 일이라는 거니까.

그 말은 곧 이정 자신도 조만간 겪게 될 일이라는 무언의 예시 같은 거니까.

열린 문 사이로 날이 선 은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나보고 짜장면 배달 왔냐고? 지금 이거, 장난하는 거지?”

복실만큼이나 날이 선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빛나가 며칠째 병가를 내자, 내심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걱정되어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천하의 박은지에게 짜장면 배달 왔냐고 했으니 그 알량한 자존심에 오죽 화가 날까.

“미안, 아는 동생이야.”

“그건 그렇고. 안에 있으면서 문은 왜 이렇게 늦게 열어? 그리고 무슨 암호를 대래? 너네 집에, 그런 것도 있어?”

“아니, 동생이 장난 친 거야. 너무 화내지 마.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무슨 일 있나 하고 온 거지.”

“나 몸이 좀 안 좋아서 병가 처리했는데, 몰랐어?”

“흥. 그 말을 나보고 믿으란 이야기냐? 네가 누군데! 적어도 내가 아는 유빛나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몸이 아플 만큼 허술한 인간이 아니거든. 아파도 아프다고 할 인간이 아니거든. 그러니 속일 생각 마. 무슨 일이야?”

은지는 신발을 벗지도 않았다.

그렇게 현관문에 서서 숨이 넘어갈 만큼 빠르고 정확한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줄줄이 읊어냈다.

다소 공격적이었지만 정직했고, 비꼬는 듯했지만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이에 빛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며 길을 터주었다.

“일단 들어와.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렇게 소파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

앙숙인지 친구인지 모를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나돌자 이정과 복실은 슬며시 빠져주었다.

잠시 후, 빛나는 테이블에 놓인 물 한잔을 들이키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은지야. 나는 네가 이번 일에서 빠져줬음 좋겠다.”

빛나의 목소리에 은지의 눈썹이 곤두섰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눈동자가 며칠 사이 호되게 앓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핼쑥해진 빛나의 몰골을 훑었다.

하지만 은지는 안다.

그녀가 아파서 저 낯빛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처음과는 달리 두 번째 던지는 그 물음에 떨림과 망설임이 묻어났다.

그러나 빛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줄 수가 없었다.

이왕이면 은지는 모든 상황을 모른 채 뒤로 물러났으면 했다.

그편이 은지의 안전을 위해서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어차피 넌 내가 억지로 끼워 넣은 퍼즐이잖아. 처음부터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고.”

하지만 은지도 만만치 않다. 물러나라고 하니, 청개구리처럼 더 버티고 싶어졌다.

“그랬지. 근데 넌 이미 날 억지로 끼워 넣었잖아. 이젠, 아버지 딸이 아닌 박은지로 살라며.”

“그냥 혼자 하고 싶어졌어.”

“웃기고 있네. 너랑 승현 씨 관계 때문에 지금 대표님은 네 사임을 생각 중이야. 그런 상황을 내가 붙들고 있는데 날 내치겠다고? 내가 없으면, 너도 없어. 그러니 내가 물러나길 바란다면 사실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빠지길 바라는 진짜 이유 말이야.”

어설픈 이유로 은지를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빛나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했다. 어떻게든 은지를 물러나게 해야 했으니까.

“이 일…… 생각보다 위험해.”

“그게…… 네가 병가를 낸 이유야? 위협…… 당했어?”

빛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은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긍정으로 연결되었다.

그러자 은지의 검은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는 네 남자친구잖아. 지금 승현 씨가 널 위협했다 말하고 있는 거니?”

“아니,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어. 상대는 승현이가 아니야. 마담M이 아닌 다른 인물이…… 뒤에 버티고 있어. 그러니 너라도 빠져 나갈 수 있을 때 빠져 나가.”

“그럼, 넌?”

“난…….”

빛나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한 번 장 부장의 젖은 어깨를 떠올렸다.

양복이 다 해질 정도로 입으며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왔던 그 사람들을.

백번을 생각했지만 그 사람들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너지면, 그들의 희망도 같이 무너지는 거니까.

그 희망마저 없으면 그들의 지키려는 정의도 없는 거니까.

그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나마저 도망가버리면…… 그 사람들 편은 누가 들어주니? 나는 그 사람들 버리고 못 가. 그리고 이번 일 막지 못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거야. 여기서, 내 손으로…… 끝내야 해.”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은지가 흔들리는 동공과는 달리 확실하고 정직한 말투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킬 거면서…… 나한테는 도망가라?”

“은지야.”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 박변이라고 불러!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박변이라고!”

그럼 나도 빛나야, 하고 부르고 싶어지니까!

지는 느낌이라 마지막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대신 독하디독한 말들로 그 자리를 메웠다.

“너, 이기적이야.”

“알아.”

“근데 이기적인 거보다 더 나쁜 게 뭔 줄 알아? 바로, 겁쟁이가 되는 거야.”

“…….”

“넌, 나한테 그런 겁쟁이가 되라고 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 나한테 아버지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살라고? 모순이야.”

“위험하다고 했잖아. 처음 기사를 쓴 내 친구는 협박 메시지와 함께 차가 돌진했어! 그리고 나는 이 집에서 누군가한테 위협을 당했고! 솔직히 그 느낌, 그 공포, 아직도 생생해서 이 일이 끝난 후에도 이 집에 나 혼자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지금 빠진다면 너는…… 이런 느낌 몰라도 되잖아.”

“평생을 비겁하게 살았어. 그게 너보다 더 나은 조건에 더 나은 환경에서도, 너한테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야.”

“…….”

“몰라서 진 게 아니야. 용기가 없어서 그랬던 거야.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비겁하게 안 살래. 그 용기…… 내볼 거야.”

“그건 내가 용납 못 해. 널 이 자리에 끌어 들인 건 나야.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어떻게 사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항상 한 발 물러서서 살았어. 한 번쯤은 나도, 남보다 앞서고 싶어. 그리고 너도 내가 정말 절실히 필요할걸? 이게 뭔 줄 알아?”

은지는 빛나의 눈앞에 자신이 가져온 노란 서류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이거, KMK컴퍼니 건 검찰 자료야.”

순간 빛나의 눈동자가 매섭게 곤두섰다.

몇 달간 노력해도 얻을 수 없었던 자료가 불과 며칠 만에 은지의 손으로 넘어왔다.

애초부터 그런 은지의 인맥을 노리고 그녀를 끼워 넣은 빛나였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이마저도 반갑지 않았다.

“네가 날 이 일에 끼워주지 않는다면, 이 자료는 그대로 폐기시킬 거야. 난, 성격이 옹졸하고 이기적이어서 남 좋은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하거든. 잘 생각해. 내 손을 잡을 것인지, 혼자 갈 것인지. 문제는 네가 혼자 가는 걸 택한다면 퍽이나 험난한 길이 될 거라는 거야.”

“위험 부담이 너무 커. 이 사건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럼 애초부터 날 왜 끌어들인 거야?”

“그거야, 내가 못하는 일을 네가 할 수 있고 네가 못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그땐 우리가 서로 윈윈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지금도 그래. 상황, 달라지는 거 하나도 없어.”

은지의 눈동자에선 조금 전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견고함에 빛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은지도 고집이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다 같이 그 나쁜 놈 잡는 거야. 나도…… 우리 아빠 딸이 아닌 박은지로 좀 살아보자. 응?”

결국 빛나는 은지를 몰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빛나의 침묵을 은지는 허락의 뜻으로 받아 들였다.

“자,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검찰 자료는 내가 먼저 훑어볼게. 큰 사건이니만큼 자료가 장난 아니더라고. 아직도 내 트렁크에 한가득이야.”

은지는 상큼한 단발머리를 야무지게 귀 끝에 걸고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복실을 제외한 세 사람은 식탁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과 서류를 통해 각자 할 일에 집중했다.

그러다 은지는 갑자기 생각 난 듯 빛나의 팔을 툭 찌르며 넌지시 제안한다.

“이건 갑자기 생각 난 건데. 나도 사건이 해결되는 동안 이 집에서 머물러야 할까 봐.”

“뭐라고?”

“왜, 그렇잖아. 두 사람도 한 번씩 당했다며. 이젠 내 차례 아냐? 말만 안 했을 뿐 TV 화면에 나란히 찍혔는데 나라고 예외겠어?”

은지가 불안한 눈동자로 빛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다.

또한 이번 일에 함께 하는 이상 은지를 혼자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불안하고.

“나는 상관없는데, 이정이도 우리 집에 있어야 하고 쟤도 있는데 괜찮겠어?”

“어머, 위험할수록 사람 많으면 좋지 뭘 그래. 안 그래요, 이정 씨?”

“하하. 그렇긴 하죠.”

그렇게 허락은 떨어졌다. 하지만 허락이 떨어지자 은지는 의구심이 솟구쳤다.

빛나를 비롯해 이 식탁에 앉은 세 사람은 모두 KMK 건으로 연결되어 목숨을 위협당하는 같은 처지라 치자.

그렇다면 소파에 낙지처럼 눌러 붙어 팝콘이나 축내는 저 인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가뜩이나 자신을 짜장면 배달부로 몰아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다.

“근데 쟨 도대체 뭐하는 애니? 생긴 거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급스럽게 생겨서는…… 하는 짓은 막 자란 애 같아. 교양머리 없게스리!”

속삭이는 은지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엔 여지없이 복실이 존재했다.

TV를 보며 팝콘을 먹는 폼이 태초에 없는 한량 백조다.

안타깝지만 이쯤에서 빛나는 복실의 존재를 확실히 해야겠다 생각했다.

“음, 은지야, 저 모습에 익숙해져야 할 거야. 쟤가 바로…… 그 위협으로부터 우리 목숨을 지킬, 일종의 안전장치 같은 거거든.”

“헐…….”

은지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정이 한마디 더 거들었던 것이다.

“각오하셔야 할 거에요. 범인 손에 죽기 전에 쟤 땜에 혈압 올라 먼저 죽을지도 모르니까.”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팝콘을 던져 입으로 받아먹던 복실이 갑자기 목을 움켜쥐고 앞으로 쓰러졌다.

“컥컥!”

던져 먹던 팝콘이 목에 걸린 것이다.

세상에나, 팝콘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는 그녀에게 제 목숨을 맡겨야 한다니!

은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나…… 아무래도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 봐…….”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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