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나만 믿어
2018.04.11.
“그럼 정말 이상이 없다, 이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자네가 왜 그렇게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게 다 괜찮아. 당장 오늘 퇴원해도 무리가 아니란 말일세.”
이튿날, 승현은 하늘 병원으로 빛나를 옮겨 다시 검사를 했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한 그는 몇 번이고 빛나의 상태를 확인 후 원장실을 걸어 나왔다.
협박이란 자고로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달해야 그 효과가 있는 게 아니던가.
하지만 범인은 그녀에게 그 어떤 상해도 위협도 가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단지 집에 불법침입을 해 입을 틀어막은 정도.
빛나가 의식을 잃은 것도 공포심에 질려 그랬을 뿐, 범인은 그 어떤 약품을 써 그녀를 무력화시킨 것도 아니었고 상해를 가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렇다면, 범인의 자신의 목적인 빛나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왜 그냥 돌아간 것일까.
답답했다. 누군가가 그의 숨통을 바로 코앞에서 조이고 있는데 그는 상대방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기분.
“참…… 더럽네.”
상상도 못 했던 기분이라 더 그러했다.
그런데 그때 엘리스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어제 이후 승현이 빛나의 곁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엘리스는 아침부터 회사와 병원을 오가며 그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유 변호사 상태는요?”
“괜찮대. 그런데 이상하지? 괜찮다는 말에, 이렇게 불안할 수가 있다는 게…….”
승현이 눈썹 끝을 구기며 중얼거리자 엘리스가 조용히 대꾸했다.
“그거야 유 변호사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젠 걱정 안 하셔도 되요. 병실 앞에 그 분야 최고들로만 뽑아 배치했습니다. 이젠 집에 가서 눈 좀 붙이시는 게…….”
“좀 이따가.”
그가 돌아서자 엘리스는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따라 붙었다.
“유 변호사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제가 유 변호사 신변은 확실히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본부장님 걱정 좀 하시는 게 어떠세요?”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였지만 그 속엔 그녀의 진심이 묻어 있었다.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야. 한 번도 쉬울 거란 생각은 한 적 없어.”
그랬다.
마담M이란 캐릭터로 수많은 제의가 들어왔음에도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그였다.
익명으로 활동하며 천하태평 한량 같은 역할도 나름 싫지 않았고.
하지만 그의 나이 이제 서른이다.
아버지 위태준은 정치 인생의 절정을 맞이했고, 곧 그 끝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더 이상 천상천하 유아독존 캐릭터로만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방황하던 그에게 KM 본사는 아주 달콤한 제안을 했더랬다.
그의 전문 분야에서 프로성을 살릴 수 있으면서도, 음지에 존재하는 어두운 욕구까지 동시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제안이었다.
KMK컴퍼니 아시아 지부 공금 횡령 사건의 진짜 범인을 잡아라!
전율을 느꼈다.
흔치 않는 제안이라 덥석 물었더랬다.
물론 그때는 이렇게 빛나가 중간에 끼어들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그래도 유빛나는 아니지.”
용서할 수 없었다.
각오하고 덤벼든 일이라지만, 그가 한 각오 중에 빛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열외다.
어떤 놈인지 잡고야 말리라.
엘리스에게서 벗어난 승현은 병원 매점에서 담배 한 갑을 샀다.
승희의 등살에 못이겨 끊은 담배지만 지금은 안 피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딱 한 개비만 피우잔 생각에 샀건만, 끊은 지 9년이라 담배만 사고 라이터를 챙기지 못한 것이다.
마른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승현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그에게 라이터 불을 내밀었다. 이 간절한 순간에 극적으로 등장한 구원의 손길처럼.
“후, 감사합니다.”
승현은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시곤 상대방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남자도 그에게 고개를 까딱하곤 돌아선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승현은 그 눈이 참 익숙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선인지 악인지 구분도 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스쳐 지나간 남자는 검은 비니에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 기억 하나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설마…….”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다!
물론 모자에서 비니로 바뀌긴 했지만 순간 스쳤던 그 익숙한 눈동자는 바로 그 눈이었다!
승현은 유난히도 사람 얼굴을 잘 기억했다.
그래서 한번 생긴 확신은 더 이상의 의구심도 없이 사실이 되었다.
그는 재빨리 남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남자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새끼, 감히…….”
어제 우연히 보았던 남자와 여기서 다시 마주쳤다?
물론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예리한 감이 그 우연을 부정했다.
그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담당 형사인 강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 형사님? 접니다. 예, 제가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한 시간 후 갈 테니, 저희 아파트 엘리베이터 CCTV 좀 확인해주시겠습니까? 네, 제가 들어간 그 시간대 말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그 범인과 스친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승현은 본능적으로 빛나의 병실로 뛰었다.
만일 그 남자가 범인이 맞다면 그가 여기 온 이유는 단 하나,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끝내기 위함일 테니까.
심장이 곧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것이 뜀박질 때문인지, 불안감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병실로 통하는 복도에 도착한 승현은 제일 먼저 엘리스를 보았다.
“아니, 무슨 일이세요? 무슨…….”
엘리스는 황당한 얼굴로 그의 뒤를 쫓았다.
병실 앞에 도착한 승현은 건장한 경호원 셋을 제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연 순간, 안도감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야?”
빛나가 그를 돌아보며 물어온 것이다.
상기된 그의 얼굴에, 그리고 갑작스럽게 열어젖혀진 문소리에 놀라 그렇지 않아도 큰 그녀의 눈이 더 동그래져 있었다.
“문 닫아줘! 옷 갈아입는 거 안 보여?”
블라우스 단추를 잠그다 놀란 그녀가 앞섬을 목숨 줄처럼 잡으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승현이 문을 닫고 들어오자 빛나는 뒤로 돌아서 서둘러 블라우스 단추를 마저 잠그고 돌아섰다.
“무슨 일이야? 왜, 그러는데?”
“물어볼 게 있어서.”
“물어볼 거? 다 물어본 거 아니었어?”
“아니. 일단, 앉아봐.”
불안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잡아 앉혔다.
그러자 빛나는 승현의 손아귀에 쥐어진 제 손을 말없이 빼낸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이 들던 그녀였는데, 단 하루 사이 굉장히 멀어져버린 느낌이었다.
“자꾸 이런 거 물어봐서 미안한데, 혹시 범인이 무슨 말 안 했어?”
“무슨 말? 어떤…….”
“아무거나.”
“왜, 내 몸에 이상 있대? 좀 전에 의사가 아무런 이상 없어서 퇴원해도 된다고…….”
“아니. 아니야. 네 몸에는 이상이 없어. 그런데, 이상하잖아. 범인이 왜 널 두고 그냥 돌아갔는지. 심지어 그 집엔 너밖에 없는 상황, 범인한테는 최적의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너무 정신이 없어 그 정도까진 세세하게 생각할 수가 없는 빛나였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지옥에 들어선 느낌이었으니.
빛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괜스레 손을 만지작거렸다.
가슴속 깊이 내제된 불안함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승현은 그런 빛나의 손을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잡아주었다.
따스한 온기가 그녀의 불안함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었다.
때문인지, 빛나는 이번엔 그의 손을 뿌리치는 대신 그의 검지손가락을 살포시 붙들었다.
마치 떠나는 엄마의 손을 붙드는 어린아이처럼.
그러곤 이어지는 그녀의 충격적인 고백.
“내…… 이름을 불렀어.”
“뭐…… 라고?”
“내…… 흡, 흑. 이름을 불렀다고! 그 자식이…… 내 이름을…… 빛나…… 라고. 흐흐흑!”
소름 돋는 그녀의 말에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승현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제부터 꾹꾹 눌러 참고 있던 그녀의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흐흐흑, 분명이 빛나라고…… 했다고…… 으아앙!”
자신을 해치려는 범인의 입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오는 걸 듣는 것만큼 공포스러운 순간이 또 있을까.
결국 빛나는 멀어지려 했던 마음과는 달리 극심한 공포감이 밀려오자 승현의 품을 거침없이 찾아 들었다.
그렇게 안겨오는 빛나를 품으며 그는 심장 끝이 푹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흐흐흑, 또 뭐라고 했는데. 내 이름을 부르고 뭐라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나. 전혀…… 기억이…… 흐흑.”
“그래. 기억하지 마. 더 이상 안 물을 테니, 미안. 미안…….”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머리와 등을 다정하게 다독이며 사과를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승현은 후회를 해본다.
차라리 제 신분을 밝히고 처음부터 빛나가 이 사건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옳았을지 모른다는.
마치, 이 지옥으로 빛나를 끌어들인 게 다름 아닌 자신인 것 같아 마음이 더 아팠다.
예상외로 위험한 이 게임을 빨리 끝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최고라지만 밖에 있는 경호원들로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믿음이 가는 사람이 빛나의 곁을 지켰으면 싶었다.
고민 중인 승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딱 한 사람.
그는 퇴원하겠다는 빛나를 억지로 재우고 난 후 밖으로 나와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전화를 한 곳은,
“나야. 지금 어디야?”
[나? 일본에 있는데?]
바로, 강복실이었다.
“일이 생겼어. 지금 당장 한국으로 들어와.”
[야, 내가 무슨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는 도깨비쯤 되는 줄 알아? 나는 공유가 아니라 강복실이라고!]
사랑에 몇 번 외면을 당하더니, 강복실이 반항을 다 한다.
그러나 그렇게 거칠게 반항하던 복실은 승현의 다음 말에 그 태도를 달리했다.
“빛나가 좀 위험해.”
[내일 2시 도착. 집으로 갈게.]
그렇게 승현은 개복실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 * *
승현의 고집에 못 이겨 빛나는 결국 하루 더 병원에 머물기로 했다.
복실이 오기 전까진 사람이 많아 흔적이 남을 수 있는 병원이 집보다 안전할 것 같다는 판단에 의해서다.
그리고 형사도 왔다 갔다. 하지만 형사도 승현이 아는 정보 이상의 것을 얻어가진 못했다.
마치 술을 마시고 끊겨버린 필름처럼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빛나가 기억을 더듬는 것 자체도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진짜 기억이 안 나.”
“알아. 그럴 수 있어. 그러니까 애써 더듬지 말고 이거나 좀 먹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배 안 고파.”
“내가 싫어 시위하는 건 아니고?”
그 물음에 빛나는 멈칫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아직 끝내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승현이 싫어 시위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없으면 불안해 눈도 못 감을 것 같은 상황이니까.
“그래. 우리, 미루지 말고 그 이야기부터 끝내자.”
승현은 그녀에게 내밀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끝을 내야만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고의로 너한테 이야기 안 한 건 아니었어. 내가 마담M이란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건, 회사와의 계약 사항이었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넌 알고 있었잖아. 내가 직원들 변호인으로 나타날 거라는 거. 우리 두 사람 관계가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 그 어떤 상황에도 예외란 있어. 이번엔 내가 그 예외에 해당되어야 했다고.”
빛나가 속이 상한 듯 그의 말을 받아쳤다.
속으로 끙끙 앓았을 그가 안쓰러운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간과하기엔 그들의 관계가 앞으로의 협상안에 미칠 영향이 너무 막대했다.
지금쯤이면 회사도 뒤집혔을 것이다.
어쩌면 빛나가 KMK 직원들의 변호직을 사임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알아. 하지만 내가 마담M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네가 그 자리에서 물러났을 테니까.”
“당연히 그랬겠지. 애초부터 그 일…… 안 맡았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랬어.”
“뭐?”
“난, 이 일에 네가 꼭 필요했거든.”
“무슨…….”
“나는, 그 사람들을 내치려고 온 게 아냐. 이왕이면, 함께 가고 싶어. 그러기 위해 회사를 설득 중이고. 그런 상황에서 네가 그 사람들 변호인으로 나선다면 오히려 내게 유리한 입장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
“…….”
“너라면…… 나를 설득시킬 수 있을 테니까.”
“…….”
“그 설득력이면, 나도 회사를 이해시킬 수 있으니까. 꼭…… 너여야만 했어.”
그는 흘러 내려온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달콤해 귓가를 맴도는 자장가 같았다.
게다가 오늘 따라 축 쳐진 그 눈매는 왜 이렇게 처량 맞은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지.
도무지 내칠래야 내칠 수가 없다.
“직원들이 서명 운동을 하고 있다길래 우연히 들른 그곳에서 널 봤어. 장 부장에게 우산과 커피를 건네주던 너를…….”
그날을 떠올리는 승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얼마나 예쁘던지……. 그때 알았지. 우리 유빛나, 굳이 날 그렇게 만나지 않아도 언젠가는 우리…… 만날 운명이었구나.”
그랬다.
그들에게 지난 10년의 과거가 없었더라도 승현과 빛나는 그렇게 만났을 것이다.
마담M과 변호인으로.
“그리고 나는 이런 네게…… 또 반했겠지.”
제아무리 돌고 돌아 벗어나려 해도 그들은 결국 같은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곧 죽어도 이번 생은 그녀와 함께일 테니까.
“그래도 넌 얘길 했었야 했어. 내가 사건에서 물러나는 게 너랑 내가 등을 진 적이 되는 것 보단 나으니까.”
하지만 빛나는 여전히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운이 좋아 KMK 변호인을 사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와 협상안을 놓고 아옹다옹해야 하는 이 상황이 기가 질리도록 싫었던 것이다.
10년을 돌아온 사랑이다.
그와 1분 1초도 서로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았다.
사랑만 해도 부족할 시간에 그와 신경전을 벌일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그런데, 그렇게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승현은 뜻밖의 말을 한다.
“누가 그래. 우리가 적이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
빛나의 까만 눈동자가 그에게 머물렀다.
“그럼, 아냐? 너랑 나, 종이 한 장 놓고 얼굴 붉혀야 하는 상황이라고.”
“아니, 이젠 상황이 달라졌어. 어제 이정 씨가 이야기했잖아. 협박당하고 있다고.”
“그거야, 네가 마담M인 줄 모르고 헛소리를…….”
“아니. 그거 헛소리 아니야.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확실하진 않았어. 하지만 이젠 확실해졌네.”
그 말에 순간 빛나는 번개를 얻어맞은 듯 눈앞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승현이 했던 말을 그녀가 넋이 나간 듯 마무리 지었다.
“누군가는…… 이 사건이 다시 파헤쳐지는 게 싫은 거야…….”
왜,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까.
충격에 빠진 빛나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승현을 마주했다.
지금까지 마담M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던 이 사건에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적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사람의 목숨을 너무도 손쉽게 끝낼 수 있는 인간이니까.
순간, 그녀는 전율했다.
하지만 그 전율이 두려움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 와중에도 승현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앞으로도 너한테 말 못 해줄 사항이 많이 있을 거야. 회사 기밀이라. 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해야 해.”
“…….”
“나만, 믿어.”
빛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승현은 그렇지 않아도 살짝 치켜 올라간 입꼬리를 더욱 말아 올리며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그것도 조금 전과는 달리 그 매력적인 눈동자를 사악하게 빛내며.
“이로써 우린…… 공동의 적이 생긴 거야.”
***
사방에 껌껌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물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진한 어둠이었다.
그곳에서 빛나는 발을 헛딛지 않기 위해 발끝에 힘을 주어 조심히 발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그때, 어둠속에서 검은 손이 불쑥 나와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살 떨리는 공포가 전신을 뒤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얼굴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섰다.
“윽!”
숨이 막혀 온다.
그리고 온몸의 피가 수증기처럼 증발하는 것 같았다.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이 생생히 느껴질 만큼.
“살려……주…….”
세요…….
말을 마무리할 수도 없었다.
온몸에 기운이 쫙 빠져 나가며 간신히 붙들고 있던 영혼도 유체 이탈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도 빛나는 분명히 들었다.
-빛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이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 누나.
***
“아아악!”
놀란 빛나가 흐느낌과 함께 비명을 내지르며 일어났다.
태어나 이런 악몽은 처음이다.
그 살 떨리는 공포가 이젠 꿈으로까지 찾아오다니.
“빛나야! 괜찮아?”
곁에서 자고 있던 승현이 놀라 그녀를 끌어안았다.
밤새 잠들지 못하는 그녀를 달래고 어르다 겨우 눈을 붙인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곁으로는 당차고 의연해 보이지만 그 같은 일을 당하고도 멀쩡하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결국 승현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빛나야, 그거 꿈이야. 꿈이라고…….”
그는 빛나에게 현실을 인지시켜주기 위해 그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승현의 품에 안겨서도 빛나는 꿈이 주는 그 생생한 느낌에 몸을 오돌오돌 떨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적의 존재를 알고 난 후, 그 악몽에서 벗어난 줄 알았다.
그래서 투지도 불태웠다.
그러나 어두운 밤은, 그렇게 당찼던 빛나도 작고 왜소하게 만들어버렸다.
“잊어버려. 괜찮아.”
그가 애틋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 악몽, 정말 잊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빛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방금 전 일어난 일처럼 현실감 있는 그 목소리가 그녀의 뇌를 좀먹어 들어왔다.
“이제…… 알겠어. 그 자식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뭐……라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승현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검은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빛나는 떨고 있는 몸과는 달리 흔들림 없는 분명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나보고 그랬어.”
“…….”
“……누……나, 라고.”
그랬다.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 범인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중얼거린 다음 말.
죽어도 생각나지 않았던 그 말은 다름 아닌, ‘누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번 생각나버린 그 끔찍한 단어는 환청처럼 자꾸 그녀의 귓가에 리플레이되었다.
-빛나……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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